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길의 지배력을 알며,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에게는 그저 쭉 펼쳐져 있는 평야에 불과한 지형들로부터 마치 병사들을 전선에 배치하는 지휘관의 호령처럼 원경들, 전망대, 숲 속의 공터, 굽이굽이 길목마다 펼쳐진 멋진 조망을 불러낼 수 있다.
ㅡ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 중 <중국 도자기 공예품> 에서 인용
진실이 더 이상 진실일 수 없고, 거짓이 더 이상 거짓일 수 없는 세상에서 신뢰의 씨앗은 싹을 틔울 수 없다. 번성하는 것은 진실과 거짓의 교접이 만들어낸 음모의 외피가 던져주는 권력적 타락이며, 왜곡과 선동으로 점철된 비이성과 비정상의 광기이다. 이 모든 불신지옥의 책임은 당연히 통치자와 그 주변의 저급한 욕망과 탐욕의 발산에 있다. 거짓된 것의 번성이다.
이런 극도의 타락과 혼란 속에서, 마침내 깨어나기 시작한 국민들은 빠른 속도로 진실과 정의에 다가가고 있지만, 1987년의 6.10항쟁 이후 수평적인 연대의 힘과 꿈꾸는 자의 열망에 대해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들은 극한 경쟁과 탐욕의 폭주에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그 속도가 주는 위압감에 갇혀 주어진 공간에서만 서성거리며 꿈을 옥죄는 절망을 먹고 산다.
자유는 사방이 막힌 벽이라,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다람쥐 체바퀴 도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행동하지 않는 한 그 너머의 세상이란 상상 속에서조차 끔직한 지옥일 뿐이다. 갇힌 자들은 언제나 그곳에서 한 줌의 자유마저 박탈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짓눌려 자발적 복종의 노예로써 살아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악은 그렇게 번성하고 진실과 정의의 시체더미 위에 거짓과 탐욕은 그들만의 천년 왕국을 건설한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그 흐릿한 잔상의 떨림 속에서 딱 한 발만 움직이면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이 아득한 거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길들여진 자의 불행이자 끈질긴 속성이다.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거리도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 변화는 늘 그렇게 시작된다. 두려움이란 실체가 없는 허상의 시공간이며, 변화를 거부하게 만드는 원천이자 새로운 출발을 가로막는 스스로의 장벽이다. 길은 내가 걷고 있으면 길인 것이고, 너와 내가, 그래서 우리가 함께 걸으면 모든 길이 역사가 된다. 길의 끝에 천길 만길의 벼랑이 있다 해도 끝까지 가봐야 그것이 세상이 끝인지, 벼랑 너머에 또 다른 길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고정관념이, 벼랑 너머의 세상에 도달하려면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만든다. 지레짐작해 발을 내딛는 용기를 내지 못하면 우리는 과거의 악몽과 실패의 연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이 어제의 복사판이라면 내일이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시공간의 연장에 불과하다.
우리는 오늘을 살지만, 그것이 내일로 연결될 것을 믿는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모든 변화가 변하는 중에는 아직 변한 것이 아나라 해도, 그래서 변화가 끝나야 비로소 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해도, 변화를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길에 들어서지 않으면 어떤 길도 길이 아니며, 끝에 이르지 않으면 다른 길이 있음도 알 수 없다.
시작이 반이라 하는 것도 시작을 해야 반인 것이지, 시작도 하기 전에 시작이 반이라고 위안을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든 변화는 첫 번째 걸음이 있어야 시작된다. 때로는 계산하지 않고 부딪쳐야 한다. 돌다리도 두들겨야 하지만, 두드리다 돌다리가 무너지면 영원히 쳇바퀴를 돌듯이 같은 공간에 갇혀 있어야 하며, 한 줌의 자유에 평생을 바쳐야 한다.
영화 빠삐용의 한 장면
나는 자살만 생각하던 시절에 다시 출발했다. 아무런 계획도 없었고, 그저 알고나 죽자는 마음 뿐이었다. 그것이 오늘까지 이르렀고, 이제는 수많은 책에서 얻은 지혜와 성찰이 아우성을 치고 있다. 순간순간마다 내 낡은 두뇌의 한편에서 푸른빛이 새롭게 일어나 자유롭게 떠돌며 모든 곳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고 있다. 그 퍼득거림이란!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듯이, 첫 걸음을 떼야 그 다음 걸음이 가능하다. 행동하기 전에는 어떤 결과도 주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것과 도전에 열려 있는 마음과 용기만 있다면 누구든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으며, 그 과정의 올바름에서 멀어지지 않으면 어떤 결과라도 창출할 수 있다.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세상이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하며, 한 줌의 자유라도 지키라 하지만, 한 걸음만 움직이면 다른 세상이 있고, 그곳에 이른 내가 지옥이라 여겼던 타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연대와 신뢰는 그렇게 시작된다. 모든 인간적인 관계의 출발과 진실한 우정도 그러하다. 우리는 우리 안에 거울 신경을 가지고 있어서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고, 나를 통해 타인을 해석한다.
그러는 중에 우리는 다름으로써 평등해지고, 평등함으로써 자유의 폭을 늘릴 수 있다. 인류라는 공존과 상생의 장이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고, 어제와 다른 오늘이 내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내가 닫힌 공간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며 한 줌의 자유에 집착할 때 타인이 지옥인 것이며, 내가 열린 공간으로 나설 때 타인은 내가 되어 영원한 동반자로 함께 할 수 있다.
불확실성이 커진 세상에서 시작은 늘 어렵기만 하지만, 변화를 두려워하면 영원히 닫힌 세상에서 열린 세상으로 나갈 수 없다. 승리가 보장된 전투에서 명예란 존재하지 않듯이, 변화의 불확실성에 승리의 배당부터 계산하면 두려움의 몫은 더욱 커진다. 누구든 변화를 두려워하면 어떤 출발도 불가능해진다. 시작이 반인 것이 이 때문인데, 일단 저질러놓고 보는 것이 때로는 훌륭한 시작이 되기도 한다.
두려움을 떨치는 것, 두려움에 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시작이며 모든 변화는 그렇게 역사가 된다. 길은 내가 걷고 있어서 길인 것이지, 누가 먼저 걸어갔고, 다음에 누가 걸어올 것이기 때문에 길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마음으로 촛불을 들었고, 거악을 상대로 진실과 정의를 되살리고 있으며, 그렇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있다. 우리는 끝내 승리할 것이며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성지는 그 끝에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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