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이 글을 저의 독자분이자 연령을 초월한 친구인 조민기씨가 쓴 글입니다. 캐나다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후 오피니언리더로 활동하고 있는 조민기씨는 우리나라에는 알려지지 않은 우크라이나의 소식에 정통합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의 역사와 비슷한 길을 걸어온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공 이후 잠시 주류언론의 조명을 받았지만, 지금은 세계의 관심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조민기씨의 글은 그렇게 주류언론이 다루지 않는 동안 우크라이나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함께 보다 상세한 소식을 전해줄 것입니다. 이명박근혜 8년과 비교해서 보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늘 정의의 편만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신냉전의 화약고로 변한 작금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럼에도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지, 우크라이나 사태는 반면교사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언론이 정부에 통제당하는 한국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소식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민주화 운동과 외세의 침략 맞선 투쟁에 대한 외국의 소식들은 현직 대통령과 한국인의 관심사 밖일 것이다. 물론 필자가 글을 쓰는 이 와중에도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세계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글은 지난 2013년 11월에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시작된 민주화 운동을 일컫는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일어난 비참한 일들에 대한 것으로 민주화투쟁에 성공한 한국인들에게 우크라이나의 실상을 알리려는 목적에서 쓴 글이다. 



우크라이나도 한반도처럼 지정학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나라다. 13세기에는 몽골의 침략으로 온 국토가 잿더미가 됐으며, 오랜 세월 유럽의 강국이었던 폴란드의 세력권 밑에 있었고, 흑해 남쪽에 위치한 터키의

전신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도 감내해야 했다. 9세기경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주변에 설립된 키예프 루시의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국 러시아의 수탈과 침략에 오랜 세월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강제 노동도 모자라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흙까지 훔쳐가며 우크라이나인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자원이 풍부하며 비옥한 영토를 자랑한다.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 수많은 문화유산이 있으며,  국민들은 높은 교육 수준을 지녔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는 1991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후 국가 산업체들을 온갖 수단을 동원해 사유화한 재벌들의 횡포를 비롯해 사회 전체가 만성적인 부정부패에 시달리고 있다. 



이로 인해 2014년 우크라이나의 부패인식지수는 175개국중 142등에 드는  국제적 망신을 당했으며, 몇 년째 병상에 있는 한국의 S모그룹 회장님 보다도  많은 재산을 가진 갑부가 사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2015년 기준으로 GDP 국민당 8천달러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불행한 나라는 현재 한민족에게 크나 큰 

시련이였던 일제의 침략과 한국전쟁의 동족상잔과 너무나도 흡사한  가지 비극을 동시에 겪고 있다. 



우선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소개한다.  사람은 한국의 전직 대통령 L모씨와 같이 화려한 전과를 자랑하며 2004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온갖 비겁한 수를 써서 대통령이 되려하다 실패한 경력이 있다. 하지만 친재벌, 친러시아 성향이 강한 우크라이나 남동부 돈바스 지역 출신인 그는 친재벌, 친노인, 친러계 세력을 규합함과 동시에 - 지역감정을 조장하며 결국 2010 대선에서 승리했다



2013, 야누코비치는 우크라이나가 유럽 연합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국민들의 염원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유럽연합과의 협력 조약을 채결한다는 공약을 철회한 뒤, 결국 러시아가 주도하는 경제적 공동체 유라시야 연합에 

가입하려다가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는 유럽연합이 요구하는 부정부패 근절 등의 계혁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염원과 반대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에 반발해 평화적으로 시작된 시위는  경찰의 도를 넘은 강경진압에 짓밟혔다. 평화시위에 참여해 우크라이나 국가를 합창하던 시민들은 경찰의 쇠뭉둥이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다. 사태는 나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여기자가 경찰에게 납치당한  빈사상태로 발견되는가 하면, 유로마이단 혁명 극초반에 트위터로 평화시위를 주도했던 또 다른 기자는 실탄과 고무탄을 번갈아 사용하며 시위대를 공격하던 경찰에 의해 결국 목숨을 잃었다. 



사태 말기에는 저격수를 동원한 경찰에 의해  며칠동안 백여명이 사망하는  비극도 있었다. 우크라이나 인들의 수십년간 계속된 부정부패에 되한 분노, 인간적인 삶은 강구하는 절박함, 그리고 그들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투지에 질려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느낀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야반도주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 되는  보였다.



그러나 야누코비치의 도주는  비극의 서막을 여는 전주곡에 불과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명찰, 계급장, 부대 마크가 달리지 않은 전투복을 착용한 러시아 공수부대가 크림 반도에 위치한 우크라이나 정부  군의 주요 시설을 포위함과 동시에 뒷배경이 베일에 가려진 친러계 인사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나며, 우크라이나에서 독립하여 러시아의 영토로 귀속되자는 분리투표가 거행됐다. 



온갖 조작과 비열한 수단을 동원한 투표는 러시아로 귀속하자는 쪽이 당연히 이겼으며 러시아는 투표 다음날인 2014 3 19, 크림반도가 러시아 영토임을  세계에 선언했다나치의 주데튼란트 강탈에 필적할 이 사건에 전세계가 경악한 와중에도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머지않아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는 친러시아 시위대가 관공서들을 기습 점거하며 우크라이나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법과질서가 무너진  지역은 결국 친러세력이 괴뢰정부를 구성하며 한반도 북쪽에 자리잡은 나라를 연상시키는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 "루간스크 인민 공화국" 이라는 괴상한 이름의 나라들이 건국했다. 현재   미승인국으로 이루어진 연방은  러시아 라는 뜻의 노보로시야 불리고 있다. 군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부재인 우크라이나 정부의 초반 대처는 미흡할  밖에 없었다. 



 내부에 팽배한 부패와 군인 복지는 안중에도 없이 국방예산을 대대적으로 감축한  국민을 상대로  경찰에만 예산을 집중한 야누코비치의 선견지명(?) 덕분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략의 초반에는 사태를 종결시킬 만한 군사억제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명령체계가 확고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선 지휘관들은 불필요한 희생을 피하기 위해 투항, 혹은 장비를 모두 남겨둔 우크라이나 본토로 철수했다. 





몇몇 뜻있는 지휘관과 병사들은 끝까지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지키고자 했다. 크림반도가 강탈당하기 ,  우크라이나  부대장은 본인이 직접 소련시절 군기를 들고 비무장한부대원들과 함께 러시아군에 점거당한 우크라이나  시설까지 행진한  주둔하던 러시아 군과 함께 평화적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했었다. 



불행히도 러시아 군과 러시아 지도층은 상대방이 내민 올리브 가지를 보고 가련함을 느낄 위인들이 아니였다.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려던 우크라이나측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고, 결국 2016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의 7%이상이 러시아가 직접 지원하는 친러세력에 점령당한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동부지역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친러계 반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인해 9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국가존멸의 위기를 맞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무참히 짓밟은 러시아는 적반화장으로 공정한 선거를 통해 당성된 페트로 포로센코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정부를 나치 비하하며 우크라이나인 들을 2차대전 당시 소련을 침략해 러시아인들을 말살하려던 파시스트로 묘사한다. 러시아 정부의 언론 국유화 이후 정권의 나팔수가  러시아 언론들은 자국 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침략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프로파간다를 쉴새없이 생산하고 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이 언론들은 미국에서 입지가 좁아진 노 촘스키 같은 진 지식인들을 자주 초빙하는 프로그램들을 통해 반미를 표방하는 진보언론으로 성공적으로 둔갑한 이후에는, 서방세계에서 친러시아 정서를 조성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정서를 유발하는 각종 프로그램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많이 다르다. 일단 러시아계, 혹은 러시아어를 1언어로 구사하는 이들이 우크라이나에서 독립 이후  핍박 받아왔다는 것은 지나치게 과장된 사실이다. 



물론 우크라이나어 보존 정책으로 관공서의 업무는 모두 우크라이나어로 이루어지니 러시아어가  익숙한 이들은 우크라이나어가 러시아어와 많이 흡사하다고 하나 일상 생활에 약간의 불편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구소련 시절의 영향으로 우크라이나에는 적지않은 러시아계 거주민들이 있으며 키예프 같이 대도시에선 수많은 우크라이나 인들도 일상에서 러시아어를 구사한다. 



크림반도를 비롯해  미승인국들이 자리잡은 지역에 세워진 노보로시야에 대해 러시아는 원래 노보로시야 라는 명칭이 18세기 당시 예카테리나 대제의 확장정책에 이후 러시아로 귀속된 영토를 알리는 명칭이며,  지역이 러시아계의 터전임을 주장한다러시아는 동부 우크라이나에 있는 도시들은 원래 러시아 인들이 설립했으며 

 지역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인구가 러시아계라는 거짓 주장도 하고 있다. 그들은 러시아에 강탈당한 크림 반도와 동부 우크라이나는 상당수의 거주 인구가 타타르나 우크라이나인 이고 이 지역들은 대대손손 그들의 터전이였건만 러시아 정부는 침략을 정당화 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들을 부정하고 있다. 



외세의 침략과 수탈로 항상 시련을 겪은 한반도와 너무나도 흡사한 운명의 우크라이나! 사방이 강국으로 둘려쌓인 한반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최근 3년간 일어난 일들은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것이다. 어쩌면,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근미래에 한반도에 일어날  있는 최악에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경고일지도 모른다.



조민기, 캐나다 서스캐치원 대학교 (정치학 전공)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