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4일 전의 글에서 야당이 외통수에 걸렸다고 말했던 것은, 박근혜와 환관들이 정의화를 시켜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한 시기에 맞춰 선거구획정 최종안이 국회에 부의되도록 시간을 끌었기 때문입니다. 현행 국회법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은 필리버스터로 테러방지법의 국회통과를 3월10일까지 끌고갈 수 있지만 통과 자체를 막을 수도 없고, 그것 때문에 총선이 연기될 경우 20대국회가 사라지는 사상 초유의 비상사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김종인 위원장과 비대위원들이 두려워했던 역풍의 실체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필리버스터에 대한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가 총선까지 이어질 보장도 없고, 총선 연기로 국회가 실종되면 박근혜의 독재도 막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공포로 확장되면서 필리버스터 중단을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총선 승리가 절대과제인 김종인과 비대위원들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외통수에서 벗어나 총선의제를 안보에서 경제로 바꾸는 것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의 근저에는 불변의 상수와 하나의 변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해왔던 조중동이라는 무적의 족벌수구언론과 이명박의 방송장악과 무더기 종편 허용으로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방송생태계의 친새누리적 편향성을 말합니다. 후자는 사상 최고의 선거운동 효과를 창출하고 있는 필리버스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의원과 후보들이 받게 될 불공정과 불이익입니다.
이중에서 후자는 총선 승리라는 거시적 관점과 개개인의 당선이라는 미시적 관점의 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필리버스터로 인지도를 엄청나게 높였지만 공천에서 탈락할 경우에 탈당을 비롯해 여러 가지의 후폭풍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필리버스터에 나서지 못한 현역의원과 영입인사들이 받을 불이익을 선당후사의 정신으로 봉합할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공천권을 활용한 김종인의 권한은 강화될 뿐, 그런 정치적 미담이 실전에서의 승리로 이어질 것이란 보장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전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종인 비대위의 결정이 잘못됐다는 필자의 주장이 정당성을 내세울 수 있는 것도 전자에 몰려있습니다. 필리버스터 중단을 결정한 김종인 비대위의 주장이 정당성과 현실성을 가지려면, 총선의제를 새누리당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안보프레임에서 더불어민주당에게 유리(?)한 경제프레임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총선 승리를 담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선거의 신'인 조중동과 방송생태계(지상파3사, 2.5개의 종편과 2개의 보도채널)가 친새누리와 노골적인 새누리에서 탈피해 기계적 중립이라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선거의 승패를 가를 선거의제를,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총선까지 지속시킬 가능성이 100%인 안보프레임에서 김종인(과 정운찬)표 경제민주화(와 공정·동반성장론) 프레임으로 바꾸도록 만들 수 있다는 전제나, 바꿔줄 것이라는 선의가 보장돼야 합니다.
한국현대사 70년의 적폐를 모조리 뒤엎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래서 나라를 팔아먹어도 기본빵으로 나오는 박근혜의 지지율을 30%대 밑으로 끌어내리는데 성공했던 세월호참사 정국에서도 조중동과 방송생태계는 야당의 편에서 서지 않았는데, 김종인 비대위가 친새누리 편향성을 무슨 수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일까요? 더구나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자발적 선의를 바란다는 것이란!
러시아가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며칠 정도 늦추고 있는 사상 최강의 대북제재안이 UN안보리를 통과하면, 그것에서 분출될 보도의 양이란 총선까지도 지속되고 남을 것입니다. 트럼프의 승리가 조기결정되면 미국의 보수언론들이 대북제재의 실효성 문제를 거론하는 보도도 늘어날 가능성도 높습니다. 개성공단에서 쫓겨난 기업들의 정부 배상과 관련된 보도와 사드미사일의 한반도 배치를 둘러싼 보도까지 고려하면 총선의제가 바뀔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총선의제가 안보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란 결정적 증거는 공식적인 선거운동 기간과 겹치는 사상 최대규모로 진행될 한미(일)합동군사훈련입니다. 최고통수권자의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북한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을 규모로 펼쳐질 한미(일)합동군사훈련에 북한의 반발이 극단에 이를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이에 맞서 중국의 무력시위도 늘어난다면 총선의제가 안보프레임에서 경제프레임으로 넘어갈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이에 비해 필리버스터는 야권의 선거연합에 총선까지 활용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소재들을 제공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보고라는 점에서 가장 유력한 총선의제라 할 수 있습니다. 김종인 비대위가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역풍은 박근혜와 환관들이 쳐놓은 외통수에서 벗어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총선 승패를 결정할 야권 지지층의 투표율 저하라는 더 큰 역풍일지도 모릅니다.
찻잔 속의 바람에서 제2의 노풍으로 자랄 조짐이 보이는 기세등등함이란 손에 쥔 확실함을 버리고, 그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경제프레임으로의 의제 전환이라는 불확실성을 선택한 김종인 비대위의 결정에 동의할 수 없음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필리버스터의 마지막 주자로 나설 이종걸 원내대표가 필자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무엇을 제시할 수 없다면 더불어민주당 지지를 거둬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을 행동하는 사람으로만 살 수 있었던 T.E.로렌스는 《지혜의 일곱기둥》에서 '한 가지 목표를 너무나 오랫동안 바라보면 결코 원하지 않는 우상에게조차 신성(神性)을 씌우게 된다'고 했습니다. 평생을 경제민주화만 바라본 김종인은 자신이 그러하지 않은 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글이 야권의 선거연대 승리를 위한 마지막 글이 되지 않도록 '오늘은 사형대에 선 죄수가 내일은 월계수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묘책이 준비돼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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