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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대한 치명적인 착각



필자는 '나는 노무현을 통해 미래의 지도자를 봤다'에서 밝혔듯이, 노무현의 위대함은 통치의 수월성을 위해서 제왕적 권력을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에 있다고 했습니다. 같은 글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제왕적 권력을 사용해 4대개혁입법을 통과시켰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헬조선에 이르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는 것임에도 이명박근혜 8년의 역주행을 멈추고 싶은 열망이 작용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관점을 가진 분들이 빠지기 쉬운 치명적인 착각에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김종인의 출구전략(실현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야당 통합만이 새누리당과 1대 1 구도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을 옹호하는 논리 중 하나인 제왕적 권력을 사용하지 않은 노통과 참여정부의 원죄론입니다. 이들은 노통과 참여정부가 제왕적 권력을 썼다면 4대개혁입법도 통과시켰을 것이고, 과거사청산도 상당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이것에 대해 한 마디로 답하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솔직히 길게 얘기할 것도 없습니다. 국가경영전략연구원(필자의 삼촌도 창립멤버였다)처럼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때 부총리와 장관들을 지낸 분들과 비슷한 지위에 올랐던 분들은 공통적으로 노통과 참여정부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던 것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제왕적 권력을 사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초법적 행태도 서슴지 않는 상대와의 세력싸움에서 밀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노통이 퇴임한 이후에 썼던 책들과, 문재인과 유시민 등처럼 참여정부 핵심인사들이 출판한 책들을 보면 노통과 참여정부가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대통령과 정부의 권한을 사용함에 있어, 민주적 절차와 통치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 사용하지 않았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노통과 참여정부도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합법적으로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사용했지만, 특권화된 기득권의 벽을 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 그들의 고백이었습니다(참여정부가 조선일보를 상대로 싸웠던 것이 대표적).

 




참여정부 인사들이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했던 것도 친일수구세력이 주축인 특권화된 기득권과의 세력싸움에서 졌기 때문이지, 그들이 비겁하거나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3김시대'를 풍미했던 김대중의 동교동계와는 달리 바보 노무현은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정치적 세력화에 실패(특히 열린우리당의 흥망성쇄가 대표적)했기 때문에 노무현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고, 폐족의 단계까지 내몰렸던 것입니다. 



문재인 전 대표가 끝없이 추락하던 제1야당을 반등할 수 있도록 만들고도 백의종군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똑같은 과정의 데자뷰입니다. 경선을 통해 대표에 올랐어도 분당과 탈당을 떠드는 자들과 친새누리 매체들 때문에 자신의 측근을 주요 당직에 임명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다른 계파에 속하는 사람을 임명해도 '친문'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씌워버렸으니, 사퇴를 전제해야만 대표로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야당을 통합하면 그런 자들이 모조리 돌아옵니다. 그 다음을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분명히 말하지만, 대한민국의 또 다른 이름이 헬조선이 된 것은 법과 제도 등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통치와 정치를 해야 할 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노통과 참여정부처럼 헌법과 법률에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면 대한민국, 아니 세계의 모든 나라가 '젖과 꿀이 흐르는' 유토피아에 이르러, 모든 국민이 능력 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는 '자유의 왕국'을 만끽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케인즈는 기득권보다 사상이 더 문제라고 했지만, 그것은 오류투성이의 고전파 경제학에서나 유효하지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라는 두 개의 축이 정립된 정치의 세계에서는 (권력의 논리에 사로잡힌) 사람들 때문에 유효하지 않습니다. 선택이 필요한 모든 국면마다 '정치는 생물'이라며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일관하는 자들이 정치가 아닌 권력의 논리에 따랐기 때문에 반칙과 특권의 카르텔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마국텔 흥행돌풍'을 일으켰던 필리버스터가 다수당의 횡포를 막기 위한 소수당의 무기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이 합법적으로 보장된 의사진행방해연설이었기 때문입니다. 김종인의 출구전략을 신의 한수로 보는 분들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해도, 그 논리적 근거나 시대적 정당성을 노통과 참여정부의 새누리당스럽지 못했던 통치에 돌리는 것은 하나의 파시즘으로 다른 파시즘을 대체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현대의 정치가 갈수록 퇴행하는 것은 수없이 많은 조상들의 경험과 성찰, 정치철학이 녹아있는 헌법과 법률을 지키지 않는 초법적 권력행사에 있습니다. 김종인표 경제민주화도 20세기 중반의 정치학자였던 로버트 달의 《경제적 민주주의에 관하여》에서도 다루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그 정도의 경제민주화로는 거대자본과 초국적기업, 거대언론의 카르텔에 약간의 흠집은 낼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누리려면 정치인만이 아니라 국민도 변해야 합니다. 상위 1%에게만 돌아가는 국익과 민생을 내세워 헌법과 법률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통치와 짝퉁정치가 넘쳐나는 한 하위 99%가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란 실현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얼마동안 속일 수 있어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을 수 없는 까닭은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근거들이 제시돼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