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데 말입니다, 이쯤 되면 뭔가 불길한 내용들이 나와 줘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모든 얘기들이 그렇듯이 위기가 없으면 그거야 동화라고 해도 밋밋해서 재미도 없고, 팔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라고 한들 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찌를 듯한 자신감이 충만한 때, 위기는 언제나 안개나 유령처럼 스며들어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곳에 조용히 머물러 있으며, 때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위기들의 한꺼번에 튀어나와 사업을 나락으로 끌어내립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돌다리도 두들긴 다음에 건너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숨겨진 위험이 실체적 모습을 드러낼 쯤에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L전자가 ‘루팡’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대규모 납품계약을 맺어줄 테니, 공동사업을 하자고 찾아왔던 것이죠. 말이 공동사업이지 L전자의 OEM업체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접근해왔기 때문에 저는 물론, L통신사 담당자들도 같은 그룹 계열사라는 것을 넘어, 시장 확대 면에서 자신들에게도 유리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거들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L전자, L통신사 그리고 창업한 지 8개월밖에 안된 신생기업 ‘루팡’까지 해서 3사가 공동사업계약과 대규모 납품계약을 맺기에 이른 겁니다. 막상 계약을 맺긴 했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창업한지 8개월밖에 안 된 신생기업이 국내 굴지의 두 개의 기업과 공동사업을 하게 됐다니 이는 구글이 유투브를 인수했던 11개월보다 빠른 것입니다. 정말 저는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여기까지는 일사천리였습니다. 3사 간의 계약 내용이 전자신문과 일부 방송을 통해서도 알려질 정도였으니 이젠 탄탄한 성공이 눈앞에 아른 거렸고 벤처신화는 당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때부터 월급이 밀리기 시작한 직원들도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사업에 뛰어든 진짜 목적이었던 장애인을 위한 사업도 머지않아 할 수 있겠구나 했습니다.
사실 제가 사업에 뛰어든 이유는, 잠시 동안이었지만 장애인신문사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을 때 너무나 많은 장애인 단체와 공무원들의 비리를 목격했고, 장애인을 고용하니 거액의 벌금을 내는 대기업들을 보면서 사회구조적 모순들도 숱하게 경험했습니다. 처음으로 장애인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 알게 됐고, 그래서 그런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고 싶다는 생각에 신문사를 때려 치고 나와 사업거리를 찾았던 것입니다. 제가 직접 돈을 벌어 장애인 대상으로 사업을 하고 그들을 직원으로 채용해 자활을 돕는다면 좋은 성공모델이 되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달성하기 위해 사업에 뛰어든 것이었습니다. 제가 저 자신을 돌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말입니다.
아무튼 그런 허황된 꿈들이 실제로 이뤄질 것 같았습니다. 헌데 대량납품을 담고 있는 바로 그 계약 때문에 제가 쫄딱 망할 줄이야 어찌 알기나 했겠습니까? L전자에서 사업의 투자비용 대비 이익이 너무 적다며, OEM계약을 몇 번 수정을 요구하더니, 몇 개월 뒤에는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문제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아예 해당 사업부를 없애버린 것이었지요. L전자의 담당직원도 부서도 사라졌으니,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모든 게 연기처럼 ‘뿅’하고 사라져버렸습니다, 숱한 문제거리를 남겨둔 채.
L전자에 단 한 대의 전송장비도 납품하지 못한 채 L전자에 1차 물량으로 납품하기 위해 대출받은 전송장비 생산비용이 빚이 됐고, 처치 곤란의 재고는 공장에서 생산비가 완불될 때까지 내주지 않아 팔 수도 없었습니다. L전자를 상대로 소송을 하려면 공탁금만 10억 원이 필요한데, 이미 아파트는 은행 대출건으로 날려버린 상태였습니다. 동생과 친구들도 더 이상 도와줄 수 없을 만큼 적자의 크기가 하루하루 늘어났습니다.
수천 대에 이르는 재고장비의 판매가격은 L전자와의 대규모 납품계약 때문에 가격을 왕창 낮춘 상태라 이익이 나지 않는 구조가 됐고, 그렇게 판매를 해도 이익이 되지 않자 그 많던 대리점들도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루팡’의 영업력을 보고 총판권을 넘긴 다른 벤처기업들도 앞 다투어 계약을 해지했고요. 제가 파기된 계약 때문에 회사 자체를 운영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개인투자자와 기술신용기금에서는 대출금을 돌려달라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하루가 비참하고 피 말리는 순간들로 점철되기 시작했습니다. 24시간 내내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아 할 수 있는 일이란 뭐든지 했습니다. 재고는 처리할 방법이 없고 직원 월급은 계속해서 밀리고, 변호사 친구 놈들은 굴지의 대기업인 L전자와는 재판을 할 수 없다고 몸을 사렸습니다.
L전자가 투자한 이후에 추가로 투자를 하겠다고 약속했던 은행과 벤처투자사들도 모두 철수했습니다. 루팡이 그렇게 크게 흔들리자 후발주자들이 속속 등장해 시장을 잠식했고, 그중에서 ‘루팡’을 대신해서 L통신사와 공동사업을 계약한 기업도 나왔습니다. 우리가 납품할 장비를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직원 일부가 알아서 빠져나가고, 일부는 상황을 주시하며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말입니다, 마침내 폼페이 최후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재고를 해결하기 위해 밀린 월급 대신 ‘루팡’직원과 컴퓨터, 전화 팩스 복사기 등의 일체의 사무기기, 책상과 의자, 커피포트에서 액자까지, 심지어는 내가 학원을 운영할 때 가르쳤던 학생들 중에서 저의 회사에 취직했던 제자까지 저를 떠나는 날이 오고야 만 것입니다. 제자들까지 루팡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미치도록 저를 짓눌렀습니다. 그들도 가슴 아파하며 괴로워했지만, 먹고 살려면 그 방법밖에는 선택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루팡’을 폐업시키고 다른 회사를 만들면 그쪽으로 신규오더를 내겠다고 L통신사 놈들이 제가 스트레스로 잠시 입원한 틈을 타 직원들을 꼬득인 것이었습니다. 물론 ‘루팡’을 담당하는 L통신사 담당자가 교체되지 않았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월급을 주지 못하는 사장은 사장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있기에 제가 있을 수 있는, 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 저에게 직원들은 일종의 '구성적 타자'였습니다. 저는 월급을 줘야 하는 주체로서 구성적 타자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것입니다.
아무튼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직원들이 모든 것을 다 가겨간, 휑하고 쓰레기만 남아있는 사무실에 패잔병처럼 혼자 남아 폐허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기분이란, 허허. 깊은 정적만이 낮게 가라앉은 휑한 사무실에서 멍하니 한참 동안 서있었는데도 오히려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더라고요. 극한의 괴로움은 감각마저 마비시키는 것인지, 바람 한 점 없는 폐허의 공간에서 저는 한참 동안을 서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빛과 어둠의 경계에 갇혀 옴짝달싹 못했습니다. 숨이 턱 막히며 감정이 극도로 고양됐습니다.
하지만 그냥 극한의 절망 속에서 당장이라도 창문으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을 뿐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몇 시간을 절대의 고독 속에 갇혀 괴로움을 곱씹고 또 곱씹어야 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모든 걸 잃어버린 철저히 파멸한 사업자로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게 됐습니다. 언듯언듯 살아서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생각들이 눈에 어른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웃기지 말라고 하십시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달려, 더욱 가속될 뿐입니다. 니체마저도 그렇게 두려워했던 ‘하강’의 순간처럼 말입니다. 어제의 화려함도, 지난 10개월 간의 성공도 단 하루만에 돌이킬 수 없는 정말의 구렁텅이로 변해버렸습니다. 정말 제 주변에는 어머님과 동생 외에는 아무 것도, 어떤 친구와 지인들도 남지 않았고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10여년을 함께 했던 제자에게도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친구들과는 지금도 만나고 있습니다. 둘 다 결혼을 했습니다. 저의 보물 같은 제자입니다)에 수도 없이 채이면서 뒤늦게 회사에 합류했던 성당 후배들에게도 피해만 준 채 완벽해도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저를 믿고 투자를 한 개인투자자들에게 미안해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사용했던 사무실을 반납(형의 친구가 건물 주인이어서 사무실 월세도 받지 않았습니다. 저의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그때 받겠다면서요)을 하고 작은 사무실로 자리를 옮긴 후에 어떻게든 살아나기 위해 피눈물 나는 몸부림 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칠수록 더 빠르게 빠져들더라고요. 개인투자자들의 압력은 끝없이 가중되고, 후발업체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L전자와 통신사 담당자들은 저를 피하고, 망해가는 벤처기업들이 이제는 역으로 영업사원으로 들어와 물건이나 팔아 연명이나 하라고 부추기고, 정말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말 그 그대로 고립무원이었고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결국 아주 작은 돈이라도 되면 무엇이든지 해야 했고, 그것도 닥치는 대로 해야 했고, 어느 곳이든 달려가 어떤 것이든 가져다 팔아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저희 대리점이었던 기업에 가서 후발주자들이 만든 장비나, 저의 회사에서 만든 바로 그 장비를 받아서 팔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저를 믿어준 개인투자자와 월급을 주지 못했던 직원들에게 조금의 빚이라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조금은 웃기지 않습니까? 저의 회사에서 만든 장비를 제가 받아서 파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럴 수도 있다는 게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게 사업이며, 돈의 세계이며, 실패하면 모든 책임을 CEO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법체제이자 냉혹한 현실입니다. 빚도 자산이라는 경제학의 주장이 허상이자, 악마의 유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부에서 떠들어대는 패자부활전이라는 것은 극소수에게만 가능한 꿈나라 얘기에 불과합니다, 절대적으로.
아무튼 저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리거나 자살 이외에는 어떤 방법도, 선택 가능한 대안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야 했습니다. 차비보다 조금 더 돈이 되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서울시 전역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하루의 일을 마치고 밤늦게 어머님이 계신 집으로 들어갈 때마다 마음을 모질게 다잡고, 갈수록 힘들어하는 동생 부부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썩은 동아줄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이어갔습니다.
그러게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팔았고, 어떤 조건에서라도 일을 했고, 투자받은 비용의 천 분의 1라도 갚아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저를 떠나간 직원들 중에 일부가 저를 임금체불로 노동부에 제소했고, 그중에서 한 명은 영업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자동차마저 압류해갔습니다. 그들은 다른 벤처기업에서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했다가 쫄딱 망해서 제가 거둬들인 직원들이었습니다.
저는 결국 벌금 200만원에 처해졌습니다. 모든 재산을 날린 상태였던 저는 벌금 200만원을 만드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리 큰 금액도 아니지만 200만원을 분할해서 납부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호적에 빨간 줄이 가고 말았습니다. 개인투자자들은 저를 제소할 방법이 없자 매일 같이 전화하고, 이미 경매에 들어간 집에 찾아와 돈을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저의 인맥과 영업능력이 필요했던 기업들이 저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쳤고 저는 몇 백만 원이나, 아니 몇 십만 원이라도 돈이 된다면 대한민국 최남단까지 가서 영업을 했습니다. 제품을 팔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판매에 성공하면 그 전부를 개인투자자들에게 보내 투자금의 일부라도 갚아나갔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개인투자자들의 손해를 보충해주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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