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의 동생으로 그의 사후 대선에 출마했던 로버트 케네디는 ‘미국인들이 단순한 물질 축적에만 탐닉해 있다’고 지적한 뒤, ‘물질적 빈곤을 없애려고 아무리 노력한들 더 어려운 일은 따로 있다’며 ‘만족하지 못하는 결핍에 맞서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위해 더 큰 삶의 일원으로써 시민에게 요구되는 덕목인 도덕과 정의, 공동선을 회피하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로버트 케네디도 유세 도중 형처럼 암살 당했다
우리 국민총생산은 한 해 8,000억 달러가 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기오염, 담배 광고, 시체가 즐비한 고속도로를 치우는 구급차도 포함됩니다. 우리 문을 잠그는 특수 자물쇠, 그리고 그것을 부수는 사람들을 가둘 교도소도 포함됩니다. 미국삼나무 숲이 파괴되고, 무섭게 뻗은 울창한 자연의 경이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포함됩니다. 네이팜탄도 포함되고, 핵탄두와 도시 폭동 제압용 무장 경찰차량도 포함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팔기 위해 폭력을 미화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국민총생산은 우리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민총생산에는 우리 시의 아름다움, 결혼의 장점, 공개 토론에 나타나는 지성, 공무원의 청렴성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해학이나 용기도, 우리 지혜나 배움도, 국가에 대한 우리의 헌신이나 열정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합니다(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재인용).
출구조사 결과 이재명이 오차범위 밖의 당선으로 나온 것을 보자마자 몇 년 전에 읽었던 이 부분이 생각났습니다. 작은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네 곳에 분산해둔 책들을 뒤져 해당 책을 찾아냈습니다. 물질적 풍요(폭력혁명을 통한 결과의 평등)라는 단 하나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구좌파의 승리를 보며 지도자와 시민에게 요구되는 덕목에는 그 이상의 것들이 있음을 말한 로버트 케네디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케네디는 종교적∙도덕적 담론을 회피했던 형(천주교 신자는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공화당과 보수진영의 공격을 받았다)과는 달리 보다 큰 삶에 합류해 연대하고 배려하고 봉사하고 희생할 수 있는, 그래서 가치 판단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공동선과 선한 삶 같은 시민적 미덕을 강조했습니다. 60~70년대의 반전운동과 인권운동, 양성평등 등을 주도했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열풍 때문에 종교적∙도덕적 담론을 보수주의자에게 넘겨줌으로써 진보의 지평이 좁아진 것을 경계했습니다.
제가 다른 지역과는 달리 경기도지사 선거에 집중했던 것은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어떤 형태의 삶과 가치 추구도 가능하다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가 지도자를 선택할 때도 똑같이 적용되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가 개인적 차원에서는 상당한 정당성이 있지만 지도자 차원에서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너무 높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명박와 박근혜를 노통과 문프와 비교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물질적 풍요로 덧씌워진 결과의 평등은,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생산성이 최고조에 이른 자본주의가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린 후 노동자의 폭력혁명에 따른 잠시 동안의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에 이르러야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모든 국민에게 낮은 수준의 평등을 강제하는 1인 또는 1당 독재의 전체주의로 귀결됐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이 하나의 예외도 없이 똑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마르크스의 예언 중 맞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철학과 정치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결과의 평등을 외치는 이재명에게 표를 줄 것은 얼마든지 예측이 가능했는데 깨어있는 시민으로써의 문파들이 그것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구좌파의 교리를 더 이상 신봉하지 않는 노통과 문프의 골수지지자들의 힘만으로는 거대 팟캐와 기득권 언론의 벽을 돌파할 수도, 결과의 평등을 지향하는 세속적 열망(물질적 풍요)도 뛰어넘을 수 없었습니다.
로버트 케네디가 주목했던 시민적 덕목을 얘기하기에는 경기도의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하고, 서울에 비하면 경제 수준이 열악했던 모양입니다. 미약한 수준에 머물렀겠지만 이재명의 갈라 치기도 승리에 일조한 것이지요. 문프의 인기를 주어먹고 있는 민주당 후보라는 유리함에 구좌파의 몰표까지 받아먹었으니 단기간에 이재명의 승리를 뒤집기는 힘들었던 일이었지요. 문프의 등에 칼을 꽂을 확률이 가장 높은 이재명이 문프 덕분에 당선된 것이니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습니다.
마지막 희망은 경기지역에서 이재명의 득표율이 민주당 후보들 중에서 제일 낮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이재명의 당선이 도덕성과 자질, 능력에 치명적 문제를 드러냈음에도 오로지 문프 덕분에 당선됐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당선무효를 이끌어내는 데도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시민보다 더 높은 도덕과 정의를 지도자에게 요구하는 문파의 투쟁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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