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이 기본소득을 또다시 들먹였다. 거짓과 위선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그에게는 기본소득이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그가 말하는 기본소득이 헨리 조지가 《진보와 빈곤》의 후반부에서 개념화했고(전반부에서는 고전파 경제학의 오류들을 비판하며 바로잡았는데 설득력이 높지는 않다),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이 '음의 소득'으로 스쳐가듯 언급했으며, 거대한 지적사기로 귀결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4차 산업혁명(2045년에 특이점을 돌파한다는 인공지능 포함)의 전도사들이 '초격차 사회'의 구원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기본소득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제시한 '차등 원칙(파레토 최적을 살짝 비튼 것으로 보인다)'의 한계를 답습할 수밖에 없다(주에서 파레토 최적을 다룰 것).
'공정으로서의 정의(사회주의의 요구를 대폭 수용해 자유주의적으로 풀어낸 정의)'를 정립함으로써 현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새장을 연 롤스는, 기존의 불평등을 인정한 상태에서, 추가로 이루어지는 경제성장은 '그 이익이 사회의 최소수혜층(최하위계층)에 가장 많이 주어지고,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분배(차등 원칙)를 전제로 할 때만 공정하다'고 주장했다. '정의'의 두 번째 원칙으로 제시한 이 '차등 분배'는 기존의 불평등을 바로잡을 수 없지만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면서도) 불평등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공정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주에서 롤스가 개념화한 제1원칙에 대해 설명할 것).
하지만 롤스가 집단화한 최소수혜층(최하위계층)에는, 필자 같은 장애인(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중도장애인 포함)도 있을 것이고 만성질환자나 휘귀질환자, 미혼모나 편모(부)가정, 노동 능력을 상실한 노인, 저임금 노동자, 성소수자, 이주민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포함됐을 터, 이들에게 똑같은 액수를 제공하는 차등 원칙은 최소수혜층(최하위계층) 내에서도 불평등을 초래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차등 원칙의 패자들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내몰리고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주에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드워킨처럼 구체적인 사례를 들 것) 기존의 불평등도 인정하는 롤스의 정의론은 이런 이유들로 해서 이중으로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선동적 표퓰리스트인 이재명의 기본소득이 토지보유세 등을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모든 국민에게 매달 일정액(100~200만원)을 주는 것이라면 롤스의 차등 원칙이 받았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5천만 국민에게 지급할 자금(년 600~1200조원)을 기적적으로 마련한다고 해도 그밖의 복지와 사회안전망 등을 폐지하거나 극도로 축소해야 하기 때문에 롤스의 차등 원칙보다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주에서 기본소득을 실시하기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기본소득 연구자들의 제안한 각종 세금의 신설을 다루되 2008년의 글로벌금융위기가 촉발시킨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 뉴딜정책이나 케인즈주의처럼 초고율의 누진증세를 하지 않고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쏟아붓고 무제한 양적완화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도 다룰 것).
기본소득으로는 생존을 이어가기 힘든 사람들도 문제지만ㅡ기본소득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존 복지와 사회안전망 등이 폐지됐거나 상당히 축소됐음을 상기하라ㅡ안정적이고 고임금의 일자리를 유지할 사람들과의 불평등도 더욱 커질 것이다. 기본소득에 들어갈 세금을 내고도 충분히 많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상류층과의 불평등도 줄어들지 않는다. 기업들은 기본소득을 핑계로 임금이나 사원복지 등을 대폭 줄이거나 없앴을 수 있으며, 자동화를 통한 대규모 해고를 단행할 수 있다(주에서 기타 사례들도 제시할 것).
소비 폭발은 만성적 인플레이션의 위험에 노출되며, 생산 폭증에 따른 원·부자재 구입 등으로 지구온난화와 환경파괴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 필연적으로 발생할 도덕적 해이뿐만 아니라 마약이나 도박 중독 같은 각종 부작용을 피할 수 없으며, 경기 악화에 따른 지급 축소나 중단도 발생할 수 있다(주에서 구체적인 각종 부작용을 다룰 것. 이를 테면 기본소득 실시를 통해 새로운 이익원을 창출하려는 각종 금융상품의 출시를 예상하고, 그에 따라 과소비나 빚을 내는 행태에 대해 다룰 것. 1020세대의 재정자립으로 1인가구로 독립함에 따라 가족의 파괴가 가속화되고 이에 동반될 수밖에 없는 과소비에 대해서도 다룰 것. 결국 기업의 배만 불려주고 불평등과 양극화를 늘리며 새로운 형태의 파산자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도 다룰 것).
이럴 경우 폭발적으로 터져나올 국민적 불만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정부란 존재할 수 없다. 신생국에 다름 없었던 19세기의 미국이나 별다른 소득권이 없는 알레스카 주처럼 특수한 시기나 환경에서나 가능한 기본소득은 대한민국처럼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지닌 국가에서는 실현불가능하다(주에서 19세기 미국의 특수한 상황과 기본소득을 실시 중인 알레스카의 상황을 설명할 것. 스위스에서 기본소득 도입을 반대한 국민투표 결과도 자세히 다룰 것).
이밖에도 기본소득 실시에 따른 부작용은 수없이 많다. 기존 산업과 서비스의 효율성 강화에 불과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도 기본소득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의 빈부격차, 즉 유발 하라리가 《호모데우스》에서 걱정했던 '초격차 사회(주에서 이에 대해서도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자세히 풀어낼 것.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설명할 것)'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4차 산업혁명은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과 미국의 실리콘벨리를 제외하면 별다른 주목도 받지 못하고 있다(주에서 이에 대한 증거들을 제시할 것). 영국처럼 제조업 경쟁력이 독일과 한국, 일본 등에 뒤떨어지는 유럽국가들이 인공지능에는 약간의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나라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다. 미래학자들과 특이점주의자들이 떠들어대는 '초격차 사회'는 사실상 허구에 가깝다.
기본소득을 노령연금이나 아동수당, 청년배당 등처럼 제한된 국민에게 용돈 수준을 제공하는 것으로 계획한다면 기본소득이라는 명칭부터 바꿔야 한다, 또 다른 기본용돈이나 그와 비스무리한 어떤 것으로. 이재명이 재정자립도 1위의 성남시장 시절에 실시한 청년배당이 그의 자식과 같은 나이의 청년들에 한정(꼼수의 대마왕!)해서만 용돈 수준으로 제공한 것도 이 때문이다(주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 시민권까지 받은 청년에게도 기본용돈이 주어지는 어이없는 사례들도 있었음을 밝힐 것).
물론 사회경제적 약자를 대상으로 기본소득을 실시하는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가부장적인 보편적 복지나 획일적 평등(구좌파가 추구하는 결과의 평등)을 주구장창 요구하는 진보좌파가 조금만 생각을 바꾼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기본소득은 실시할 수 있다(주에서 진보좌파의 바람과는 달리 정치현실과 어긋나기 일쑤인 보편적 복지의 허구성에 대해 다룰 것. 개인의 부를 조사하는 행정비용이 크다는 이유로 전체 국민에게 일정액을 직접 싸주는 기본소득의 허구성도 다룰 것. 기술 발전은 어디에 써먹을 생각인가?). 이럴 경우에도 기존의 복지나 사회안전망은 유지해야 한다(주에서 그 이유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할 것). 결국 용돈 수준의 기본소득을 제외하면 이재명의 만병통치약 같은 기본소득은 '자신의 능력을 다해서 일했지만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도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는' 신에 버금가는 고귀한 성품의 인간들로 구성된 유토피아(마르크스가 말한 자유의 왕국)에서나 가능하다(마르크스가 말한 자유의 왕국과 그에 대한 추상의 오류에 대해 자세히 다룰 것).
진정한 의미의 기본소득은 경제성장이 더 이상 불가능한, 즉 제로성장의 시대나 특이점을 돌파한 인공지능 덕분에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몰락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최고의 노동생산성에 이른 시대에나 가능한 유토피아적 관념의 산물에 해당한다. 그것도 아니면 존 롤스가 사회계약의 대안으로 제시한 '무지의 베일'에 가려진 '원초적 사회'에서의 합의(주에서 자신의 능력이 좋은지 나쁜지, 자신의 재산이 많은지 적은지, 자신의 직업이 돈을 벌기에 유리한지 불리한지 등을 전혀 모르는 무지 상태에서의 합의이기 때문에 가장 공정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가정되는 이유를 다룰 것)'에서나, 로널드 드워킨이 《자유주의적 평등》에서 '원초적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자원 배분의 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무인도에서의 경매'(주를 통해 처음 이곳에 도착한 이주민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똑같은 자금을 분배 받고, 자신의 기호와 성향을 실현시켜줄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경매에 참여한다. 그렇게 확보한 자원으로 각각의 개인은 자신의 꿈을 실현해간다. 이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가설적 보험시장과 이에 근거한 조세제도, 자원 배분의 재교정 등이 추가로 마련되는 내용을 자세히 다룰 것)에서나 가능한 꿈의 소득이다.
기본소득에 대해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실현불가능한 이유들이 줄줄이 튀어나온다(주에서 한두 가지 예를 제시할 것). 이재명의 기본소득은 위기를 돌파할 만병통치약도 아니며, 그것의 실현가능성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유토피아적 환상에 빠져있는 지지자들을 뭉치게 만들 수단도 되지 못한다. 기본소득은 사회주의적 이상향(주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할 것)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결과의 평등 중간 어디쯤에 자리하는 자본주의적이고 시장중심적인 제안이라는 점에서 좌우 모두에서 수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기는 하다(주에서 좌우의 기본소득을 소개할 것).
기본소득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연구하고 있지만, 위에서 제시한 이유들과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한 것과 비슷한 이유들로 해서 성공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 할 수 있다. J노믹스가 현재로써는 불평등과 양극화를 줄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며, 쓸모 없는 학문으로 전락한 경제학에서 그나마 건질 수 있는 것들ㅡ소득주도성장(노동자를 위한 성장)과 혁신성장(기업을 위헌 성장), 공정 경제(국민 모두를 위한 포용적 성장)ㅡ로 구성된 최상의 경제기조이다.
신과 동격인 '보이지 않은 손'이 없으면 언제나 실패하는, 그래서 정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자기 조절 시장'이라는 허구의 아이디어(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참조하라)를 숭배하는 자유한국당 꼴통들의 '미신경제학(토마스 프랭크가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에서 사용했음)'은 19세기의 불평등에 접근해 있는 현재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산업자본주의에서나 통했던 사고와 투쟁방식을 고수하는 노동계가 대다수 국민으로부터 고립된 그들만의 투쟁으로 한정되지 않으려면 J노믹스에 담겨있는 미래지향적 함의에 동참해야 한다(주에서 노동계의 고립 현상에 대해 자세히 다룰 것. 구좌파와 신좌파의 갈등 및 노조의 역사와 목표의 변화까지 다룰 것).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오늘은 여기까지. J노믹스를 다룬 글은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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