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웃사이더적 기질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제가 소아마비 장애인이라는 것에서 나온 것 같고, 상대적이고 때로는 절대적인 약자를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불의한 강자에게 지극히 도전적이었던 이유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런 아웃사이더적 기질과 풍부한 상상력,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 등이 무모할 정도로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얄팍한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본 사람은 저와 비슷한 성향과 기질에 빠지기 쉽고, 이는 『아웃사이더』의 저자 콜린 윌슨이 설파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콜린 윌슨은 아웃사이더란 '평생을 치통에 시달리는 사람'으로 자기보존의 본능과 끝없이 싸우면서도, 지독한 자아의 방황에 끔찍한 열병을 앓는 사람이고, 그 중에 일부는 성자의 깨달음에 이르기도 한다고 했는데, 저야말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삐걱거리면 걷는 양철로봇과 같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가 저로 하여금 사업에 실패한 이후 처음으로 세상의 어두운 면보다 밝은 면을 바라보게 한 최초의 순간이었고, 저는 그 후로도 한참이 흘러야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승의 주인에게 제출할 삶의 대차대조표에 기록할 삶의 변명들을 찾던 것에서부터 처음으로 해방될 수 있는 단초를 찾은 것이었지만, 그때는 제게 찾아온 놀라운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더 많은 책과 더 많은 영역에 대한 지적 탐구를 계속했고, 그것이 제 육체의 병들로부터도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그때는 제 몸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변화의 조짐들을 전혀 깨닫지 못했지만, 어쨌든 저는 딜리트 키를 한 번 누르면 완전히 삭제되는 최후의 선택을 뒤로 미룰 수 있었습니다. 삶에 대한 아주 자그마한 여유가 생긴 저는, 저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 주목하지 못한 채 주류 경제학(고전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과 거기서 인용된 책들을 네트워크 타듯이 넘다들며 지적 탐구의 분야를 넓혀갔습니다.
특히 밀턴 프리드먼을 필두로 한 시카고학파들의 저작들과 하이에크의 《노예로의 길》과 《자유에의 헌정》을 살펴보았습니다. 헌데 작은 지식이 쌓인 것 때문일까, 아니면 현장과 너무 다른 그들의 주장과 뻔뻔함 때문인가, 저는 그들의 형편없으면서도 탁월한 그래서 80년대 후반부터는 누구나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지적 사기(그들 스스로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를 끝까지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시카고학파와 그들의 현실 참여와 각종 기사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파고들수록 정치는 물론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죽어가는 모습이 떠올랐고, 그들이 만들어낸 세상의 실체에 대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계급적 의식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같은 그런 계급의식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공통의 정서적 유대 같은 것이었습니다. 공부가 깊어질수록 저의 분노는 커가기만 했습니다.
경제학 지식이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안내자도 없는 완벽한 독학이기 때문에 제 마음대로의 해석을 바탕으로 편향된 지식만 섭취하던 저는, 저의 얕은 지식과 경험으로 볼 때도 그들의 이론은 지구와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화폐주의와 자유방임적 무한경쟁을 통해 무정부적 자유주의를 최종 목표로 하는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빚도 자산이라는 허구의 논리가 인류를 종멸로 이끌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거대 자본과 금융산업이 대다수의 국가와 인류의 발전을 견인했던 실물경제를 담보로 다단계적 사기를 얼마든지 칠 수 있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고 주장이었습니다, 제가 L통신사를 상대로 일종의 허무맹랑한 사기(정확히 사기는 아니었다. 과대망상에 가까웠다)를 쳤던 것처럼. 그들은 거대한 지적사기군단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주류 경제학(신고전주의자)은 경제학자들이 먹고살기에 딱 알맞는 학문이었습니다.
오히려 J.S. 밀과 칼 마르크스에서 시작해, 칼 폴라니와 허버트 민스키,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장하준 및 센 등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주류 경제학자들의 책에서 더 많은 지혜와 진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훨씬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실물 경제와 금융 산업의 폭주에 적합했고 살아 있는 통찰이자 지식이었습니다, 『블랙스완』의 저자 탈래브가 시니컬하게 비판했던 것처럼.
그러다 문득 저는 한 가지 공통점 비슷한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한 동안 방향을 못 잡던 중에 문득 떠오른 것인데, 그것은 현대로 접어들수록 주류 경제학자들이 갖추지 못한 것들의 공통분모였습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제학자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더욱 심했는데, 그것은 위대한 현인들의 특징인 철학적 사고와 과학적 지식의 부족이었습니다. 또한 미국 중심의 편향적인 가치관과 기회주의적 속성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제 지적 탐구는 다방면으로 확대됐습니다. 주류 경제학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때부터 주객이 완전히 전도됐습니다. 저승에 제출할 삶의 대차대조표에서 엄청난 마이너스를 만회하기 위해 시작한 생의 마지막 여정이 생각보다 길어지게 되었고, 그 내용도 처음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제가 읽은 책들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고, 저자들이 인용하고 추천한 책들을 중심으로 끝없는 지적 여정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렇게 지식은 쌓여갔고, 몇 번인가 두뇌 이곳저곳에서 각자 따로 있던 각각의 분야들의 지식들이 조금씩 합쳐지거나, 일부라도 연결되는 그런 생각하지도 못했던 경험들을 누릴 수 있게 됐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제가 알게 된 것들을, 사업 실패의 경험과 함께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들과 미래세대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신 나간 생각이라며 야단맞기에 딱 알맞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죽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된 것이지요. 물론 그 당시에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새로 알게 된 사실에 대해 더욱 확실한 증거들을 찾아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방향을 틀었는데, 지금에서 돌아보면 제 건강도 그때부터 끝없이 이어지던 추락에서 상승 쪽으로 돌아선 첫 번째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 끝에는 더 큰 추락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지만, 젊었을 때 읽었던 천여 권에 이르는 문학서적들과 각종 교양서적에서 접할 수 없었던 실질적이면서도 저에게는 미지의 영역에 있었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읽은 것들을 모두 다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각종 지식들을 꾸역꾸역 뇌 속으로 밀어넣었습니다. 앞에서 경험한 것, 이렇게 무식하게 정독한 것들을 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들이 하나의 종합으로 귀결되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중중의 병들을 달고 사는 환자가 어설프게라도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려면 최소한의 건강이 뒷받침돼야 했는데, 제 몸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다는 것은 제게는 분명 커다란 기적이었습니다. 뇌의 기능이 살아나자 육체의 건강도 좋아지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정말로 문은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리는 것이었고,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에 찾아온 무모한 생각 하나가 저를 다시 살게 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하루에 몇 십 분씩이라도 운동을 다시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조금씩 쌓여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운동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10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지만, 저는 분명 마지막 선택을 생각했던 시기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건강해져 있었습니다. 공황장애는 완벽히 극복할 수 없었지만, 육체적 고통은 많이 줄어들었고 망가진 간과 허리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이런 변화를 바탕으로 저는 닥치는 대로 물리학과 화학(이것은 제 형님과 동생의 전공이라 공부하기가 수월했습니다)에 대한 교양과학 서적들을 사서 읽었고 생물학과 유전공학, 뇌과학과 정보통신과 언론방송 분야까지 닥치는 대로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몇 번을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많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무작정 읽고 또 읽었습니다. 모든 책을 정독했고, 몇 번이나 다시 읽어야 이해하는 부분도 늘어났지만, 하루하루 속도는 빨라졌습니다.
동시에 자연철학과 정치학으로 범위를 넓혔고,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쓴 책들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머리가 터지라고, 두뇌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일고 또 읽었습니다. 막무가내 식 독서가 300여 권을 넘어설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속살을 볼 수 있는 통섭적 지식을 찾고야 말겠다는 미친 짓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소설 같은 책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고, 철학적 사고와 과학적 추상을 요구하는 것들은 몇 번을 되풀이해서 읽어야 했습니다.
전반적인 이해도 딸렸지만, 하나의 책에서 인용된 다른 책들로 옮겨가며 지적 탐구영역을 넓혀갔습니다. 정말로 무모했지만, 조금씩 나아지는 결과들이 하나 둘씩 모양을 갖추면서 저는 일정 수준 이상까지는 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정말 닥치는 대로 읽었고, 제가 직접 책을 사서 읽기 전까지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이때쯤에는 읽은 책들이 500여 권을 넘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지적 탐구를 향한 주먹구구식 독서의 양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중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아니 어쩌면 건강이 좋아지는 것 이상으로 경이로운 일일지도 몰랐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머리 여러 곳에 따로 따로 저장돼 있던 500여 권에 이르는 책의 내용들이 어느 순간부터 서로 연결되고 합쳐지더니 하나의 개념과 이해로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경이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니콜라스 카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밝힌 것처럼 뇌의 가소성 원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뇌의 여러 부위에 따로 존재했던 책의 내용들이 새롭게 살아난 뉴런과 시냅스에 의해 연결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철학·방송·교육·역사 등의 온갖 서적에 나왔던 내용들이 서로 몸을 섞더니 명료한 형태로 융합되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읽은 동안에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도 두껍게 가렸던 속살들을 드러내더니 이내 합쳐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경험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어서, 제가 가장 싫어하게 된 플라톤의 경이로운 체험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후로 책을 읽는 속도와 이해도가 높아졌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책들도 도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헌데 진정으로 경이로운 일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뇌에서 일어난 극적인 변화에 의해 세상의 이면과 진실이 보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온갖 병으로 망가진 몸에서 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늘 그렇듯이, 처음에는 그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보다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 맞을수도 있을 것 같겠지만 분명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간의 기능이 극도로 저하되는 간경화가, 수시로 일어나는 공황증상과 깨어 있는 모든 순간마다 통증을 전해오는 디스크 증세와 만날 때마다 저는 2~3개 월 간격으로 죽을듯한 고통에 시달리다가도, 체력이 되살아나며 다시 살아갈 만큼의 회복이 되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회복된 체력이 제 나이 또래의 평균적인 것에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할 만큼 미약한 것이었습니다. 저로서는 통증이 줄어든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울 따름이었습니다.
이런 통증의 업&다운이란 현세와 지옥을 오가는 느린 마차처럼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 갈아먹는 것은 변함없었지만, 이런 기간이 지나가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는 있게 됐습니다. 사실 저는 한 번 건강이 악화되면 최소 2주는 사경을 헤맬 정도로 고통에 시달립니다. 피부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내적 각성의 고열은 극도의 피로를 가져다줍니다. 신문의 기사 하나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TV 시청을 2분 이상 지속할 수 없을 만큼의 극한의 피로감에 빠져듭니다.
로댕의 지옥의 문
그렇게 1분1초가 단테의 불길처럼 짓밟고 가면, 저는 조금씩 극도의 무력함과 피로에서 패잔병처럼 풀려나곤 했습니다. 그래서 뇌의 변화에 이어 일어난 육체의 변화를 건강 자체가 좋아진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될 극한 고통과 견딜 만한 고통의 사이클 중의 하나라고 평가 절하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그런 업다운이라도 생긴 것에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1%의 희망 때문에 산다고 하지만 그 망할 놈의 1% 때문에 현실적 두려움인 99%의 절망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작은 몇 평의 방에서 빛과 어둠의 경계에 갇혀 있던 육체에, 하루하루의 힘겨운 삶에 작은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좀처럼 인정하기가 어려웠고, 다시 찾아올 통증에 대한 예단이 제 영혼을 좀먹곤 했습니다. 정신에 이은 육체의 변화는 분명히 예전의 싸이클과는 달랐고 저는 업다운의 폭이 줄어들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그런 변화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그것은 마치 작열하던 태양이 어둠으로 넘어가기 전에 휴식의 공간처럼 황혼을 만들어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전해주었습니다. 수면제가 들어간 다량의 신경정신약의 힘을 빌어 잠이 든 후, 느지막이 깨어나면 약 1~2분간 주어지던 무고통의 평화로운 순간들이 조금씩 길어지더니, 정신과 영혼까지 갉아먹던 육체적 통증이 완연하게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그런 변화, 육체적 통증에 어느 정도 대항할 수 있게 된 체력의 회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죽는 순간까지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건강의 호전이 조금씩 현실이 되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절대 제 것일 수 없으리라 포기했던 희망이 비로소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저 알고나 죽자고 했던 그 자포자기식 저항이, 한 가닥 미련이 저를 끈질긴 고통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심연에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빌어먹을 1%의 희망이 절대적인 확률로 저를 짓눌렀던 99%의 두려움과 현실적인 한계와 압도적인 절망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의 여명이 너무나 무겁게 자리하고 있어 절대 물러설 것 같지 않았던 칠흑 같은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면서(내가 다시 살게 된 이유 ㅡ4).
P.S. 이 글을 쓴 3년 후인 어제, 마침내 서울까지 운전을 하고 갈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너무 지쳐서 세월호광장과 소녀상에 갈 수 없었지만, 서울까지 운전해 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갈 생각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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