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표퓰리즘의 대명사인 이재명의 행태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보편적 기본소득을 정치적 매표행위로 둔갑시킨 것도 모자라,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의 기득권 지키기에 올인한 의사들의 파업을 보면서도 전국민 2차 재난지원금 운운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한국판 트럼프'로도 부족할 지경이다. 의사와 전공의, 의대생들에게는 2차 재난지원금이 파업보조금이 될 수 있음은 생각조차 않은 정치적 매표행위의 화룡점정이다.
자신의 정치적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운 보편적 기본소득은 어떤 언어로 포장한다고 해도 시카고학파의 바람이자 목표였던 시장 우위의 소비 극대화로 귀결된다. 지난 50년 동안 공존과 상생의 도덕경제학에 사망선고를 내린 채 탐욕과 경쟁만 무한대로 키운 시카고학파의 부활을 이끄는 것이 '그때그때마다 달라지는' 이재명의 기본소득이다.
김종인의 기본소득은 궤변 중의 궤변에 불과하지만 하위 50%를 목표집단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재명의 기본소득보다 실현가능성이 높다. 경제학적 근거가 대단히 부족한 보편적 기본소득은 디지털적으로 변형된 마르크스주의적 오류가 특이점주의자들로 대표되는 기술전체주의자의 주장에 편승해 정치적 이익이나 챙기겠다는 지적사기에 다름아니다.
유사 유토피아적 뜬구름잡기의 전형인 보편적 기본소득은 시장경제의 극대화를 위해 시카고학파의 두 거목인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에 의해 정립된 개념이다. 경제학적 기반이 너무 미약해 유토피아적 정치철학까지 끌어들인 보편적 기본소득은 인공지능 특이점주의자들의 환상에 기대지 않으면 존립의 정당성마저 유지할 수 없는 허술한 논리로 가득하다.
얼마나 지급해야 목표한 바를 이루고, 지속가능한 경제정책이 될 수 있는지, 지난 몇십 년 동안 최초의 출발점에서 한 발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것이 보편적 기본소득의 현실이다. 피케티와 그의 동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1945~1975년까지 자본주의 황금시대를 견인했던 초고율의 누진과세없이 보편적 기본소득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100% 거짓말이다.
구글과 아마존, 페이스북, MS 등이 아니라 애플이 최초로 시가총액 2조달러ㅡ이것도 대단히 위험한 비이성적 과열의 결과이지만ㅡ에 오른 것도 무늬상이라도 제조업체의 옷을 둘렀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보편적 지급이라는 이상을 잃으면 모든 정당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이재명의 기본소득이 기존의 수당 수준에까지 떨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이 시카고학파의 경제정책과는 달리 불평등과 양극화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으려면 개별 국가의 1인당 GDP에 근접해야 한다. 기본소득 이외에 추가로 노동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으면 어떤 기본소득도 기존의 불평등이 극단에 이를 때까지 시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최저임금처럼 노동자의 임금을 결정하는 기준도 떨어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고 기본소득이 낮게 책정될 경우 국가는 극단의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국가경제와 재정을 박살내는 코로나19 펜데믹 같은 세계적 차원의 전염병이 창궐하거나 지구온난화에 따른 대규모 이상 기후, 지진이나 화산 폭발, 전쟁이나 원전 폭발 같은 대규모 재해도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보편적 기본소득이 집행됐다는 것은 더 이상 일자리 창출이나 새로운 산업부흥이 불가능한 경제환경이 구축됐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보다 먼저 보편적 기본소득을 실시하면ㅡ용혜인 의원의 주장ㅡ국경을 전면폐쇄해 이민자들의 유입을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 단 한 명의 유입이라도 이루어진다면 그 다음의 유입을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외국과의 거래에서 발생하는 온갖 경제적 문제들과 대규모 조세회피의 가능성을 차치하더라도.
이밖에도 높은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 상황에서, 경쟁국의 부상으로 국가적 차원의 경제 펀더멘털이 약해졌을 때, 보편적 기본소득을 실시하지 않은 나라에서 우리와의 수출을 기피하는 경향이 강해질 때(자신의 나라에서 벌어 타국의 기본소득에 사용되는 것을 그냥 지켜볼 나라는 없다) 등처럼 보편적 기본소득의 지속불가능한 이유는 넘칠 만큼 많다.
재난지원금이야 일회성이거나 아무리 많이 해봤자 몇 번에 그치기 때문에 보편적 기본소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처방이다. 코로나19 펜데믹의 피해가 건강이 나쁠수록, 개인이나 가족이 가난할수록, 가난한 지역에 살수록, 가난한 나라에 살수록 커지는 것까지 고려하면 둘의 연관성은 완전히 단절된다. 경제적 인센티브로 시민적 덕성과 이타주의적 상호주의를 대체하는 인간과 가족, 공동체의 해체 같은 윤리적 차원의 문제는 무시한다고 해도.
보편적 기본소득에 관해서는 좌파보다도 우파의 접근이 그나마 현실이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무지하기 그지없는 김종인의 궤변처럼 기존의 현금성 복지를 통폐합해야 하는 것을 계산에 넣는다면 개진도진이 돼버리지만. 혼자하는 공부지만 공부가 깊어질수록 보편적 기본소득에 부정적이 되는 이유는 피케티 같은 석학들의 솔직하고 부정적인 평가와 동일하다.
유발 하라리와 제레미 다이아몬드 같은 세계적 석학 8인이 공동집필한, 그러나 너무 쉬워서 두세 시간만 투자하면 완독할 수 있는 《초예측》 같은 교양서적만 읽어도 보편적 기본소득의 허구성을 알 수 있다. 특이점주의자들의 환상에 부정적인 프로그래머들이 늘어남에 따라 보편적 기본소득의 초기 정당성마저 무너지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현실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부족한 자들의 대국민 지적사기가 보편적 기본소득이다. 불평등과 양극화를 성공적으로 줄인 더욱 우월한 정책들이 1945~1975년 사이에 이미 채택되고 운영된 적이 있음에도 기본소득 추종자들의 지적사기는 멈출 줄 모른다. 작은 단위에서 진행된 기본소득 실험들이 모조리 실패한 이유만 알아도 그들의 지적사기를 막을 수 있다.
하긴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살인과 테러를 저지르고,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담보로 의사들이 집단파업을 하면서도 큰소리칠 수 있는 세상이니 보편적 기본소득을 내세운 지적사기야 어린네 장난이리라. 표퓰리스트가 되지 않으면 무능한 정치인이자 지도자 소리를 듣는 정치경제적 환경에서 온갖 사기꾼들이 판치는 것을 막을 방법도 없으리라.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신과 동일한 창조의 영역이지만, 과거의 좋은 점들을 되살리는 것은 집단적 반성으로도 충분하다. 기레기들의 가짜뉴스와 탐욕스러움이 모든 것을 왜곡하고 사이비 지식인들이 큰소리칠 수 있는 세상이니 진실이 설 자리가 없는 것도 당연하다. 지친다, 몇 걸음만 걸어도 다리를 거는 지적사기들의 만연함에.
노인일수록 탐욕스러워지고 청년일수록 편협해지는 세상이. 그들을 그렇게 몰고가는 것으로 자신의 이익만 탐하면서도 시민을 타락시키고 갈등만 양상하는 언론과 지식인, 정치인의 추악하기 그지없는 삼각동맹이.
P.S. 방금 뉴스를 보니까 이재명이 재난지원금을 선별지원하는 것은 평등의 원칙에 벗어나며 보펴적 복지에 위반된다는 헛소리를 했다고 합니다. 마르크스도 기절초풍할 평등에 대한 새로운 정의ㅡ지극히 표퓰리즘적인ㅡ를 창조해낸 이재명의 헛소리를 확인한 후 관련 내용을 내일 중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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