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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2부 17장 ㅡ 무영과 혜준의 만남



무영이 장고를 했던 내용을 삼혼과 삼영에게 말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각. 소림과 규모 면에서 뒤지지 않는 개방의 중심, 총타(總舵)! 이곳에서 종남파와 아미파에서 일어났던 일방적 도륙이 재현되고 있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침략자가 역천마곡도 천상천도 아니라는 것이다.



침략자는 단 두 명이었다. 그들은 두 전설의 문파 소속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도륙은 다를 바 없었다. 한 명은 여자였고 한 명은 남자라는 점에서 달랐지만 그들 자체가 얼음에 가깝다는 것은 동일했다.



“호호호홋! 이게 얼마 만이냐. 오. 이 붉은 피들. 넘실대는 살과 잘리고 뭉개지는 뼈. 호호호. 이렇게 재밌고 즐거울 수가!”



핏빛 웃음을 터뜨리는 한 명의 여인은 바로 칠백 년 전 강호를 존망의 위기까지 몰고 간 혈사 ‘세외지란’의 주인공인 일소빙혈사 설지연이었다. 헌데, 살인을 밥 먹듯 하고 있는 그녀는 아름답기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경국지색이었다. 얼굴이면 얼굴, 잘록한 허리, 긴 팔과 다리, 나올 곳은 확실히 나왔고 들어갈 것은 완벽하게 들어간 그런 미모에 이런 말이라니.



그래서 더 끔직했다. 후세에 한천마후로 칭해진 설지연은 자신의 독문 절공 극빙마혈공을 마치 봄나들이 온 소녀처럼 춤추듯 걸인들에게 휘둘렀다. 그녀의 손이 오른편을 향하면 그곳에는 어김없이 다섯 개의 음강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똑 같은 수의 개방 걸인들의 미간과 심장, 갈비뼈같이 피가 많이 나오고 뼈가 잘 드러나는 곳을 여지없이 관통했고, 날카롭게 부러진 뼈는 살을 뚫고 나오게 만들었다. 피는 몸에서 조금 튀어나온 상태로 얼어붙었다.



“호호. 또 피가 터지네. 어머. 뼈도 살을 뚫고 나왔어. 너무 아프겠다. 어? 헌데. 그냥 죽네. 아. 뒤에도 있지. 왼쪽도 남았고. 호호호.”



먼저 웃음이 터졌고 시선이 대상을 정하면 고개가 돌아갔고 그 다음에 오른편을 향했던 그녀의 손이 그 자리에서 연체동물처럼 휘어져 목 뒤로 감기듯 흘러갔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손목의 흔들림을 이용해 손가락을 털었다. 그 일련의 동작이 기묘했지만 그녀의 기괴한 아름다움을 가릴 수는 없었다.



슉! 슉!



다섯 개의 투명한 지음강이 빛살처럼 발사됐다. 그 속도와 위력은 빛이 번쩍했음을 느낀 시선이 체 뇌에서 정리되기도 전에 뒤에 있던 다섯 명의 육결 제자의 태양혈과 미간, 심장과 갈비뼈, 이마에서 생생하게 드러났다.



퍽! 퍽! 퍽!

“크악!” “커억!”



지음강이 지나간 곳에선 피와 뇌수, 뼈들이 사방팔방으로 튀어 올랐고 그에 따른 비명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다섯 개의 비명 뒤로 연이어 터진 열 개의 비명 때문이었다. 그 중 다섯 개는 뒤에 있던 육결 제자를 관통한 지음강이 멈추지 않고 조금 방향을 틀어 다시 그들 뒤에 있던 오결 제자 다섯 명의 각각 다른 부위에 박힐 때 발생했다. 지옥의 현신이 따로 없었다.



“큭!” “컥!”



생을 마감하는 다섯 개의 비명이 피와 살, 뼈로 이루어진 절명의 흔적들과 함께 터졌고 그만큼 그녀는 미친 듯이 웃었다.



“호호호홋! 너무 신나. 앞에서도 피. 뒤에서도 피. 살과 뼈는 또 어떻고. 호호호. 그럼 이번에는 어느 쪽일까? 호호.”



나머지 다섯 개의 비명은 그녀의 말이 거의 끝날 때쯤 들렸다. 이 비명들은 그녀의 왼손이 목을 타고 뒤로 감길 때 오른손이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스쳐 겨드랑이 옆으로 휘어지며 왼손과 똑 같은 방식으로 날린 지음강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들 역시 육결 제자였고 지음강이 통과한 신체 부위는 뒤의 걸인들과 같았다.



“크아아!” “컥!”



압도적이면서도 너무나 빨라 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지음강이 개방의 무인들에게 강타되면서 다시 피가 튀고 살과 뼈가 뒤엉켰다. 물론 그것들은 순식간에 얼어붙어 곧바로 땅으로 떨어졌다.



‘어떻게 다섯 개 지강 모두가 지 마음대로 움직여? 그것도 두 번 연속해서. 말도 안 돼.’



이것이 육결 제자 사이에 유일하게 섞여있던 칠결 제자 취얼개가 이승에서 했던 마지막 생각이었다.



“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좀더 버티다 안 되나. 에이, 재미없어. 그래서 또 죽여야겠어. 호호호!”



천하제일빙미 설지연이 칠백년을 격해 터뜨리는 혈소가 섬뜩하게 넘쳐나는 이곳은 개방 총타 그 정문 쪽이었다.



“일단 소개를 대피시켜라.”



길이가 반 장보다 조금 짧은 청록색 타구봉(打狗棒)을 연신 휘두르며 방주 천결개가 몇 명 남지 않은 장로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칠결 장로 중 살아남은 네 명이 급히 방향을 틀어 이제 막 소개로 책정된 난영화 구지옥을 총타(總舵) 밖으로 탈출시키려 했다. 개방의 본거지인 총타의 뒤편에서 오히려 개방의 후계자가 탈출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장로로써 소개의 안위를 책임지는 백결철권 구절환과 세 명의 장로는 개방의 절기 백결신권(百結神拳)과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을 연이어 구사하며 마지막 힘을 불사르고 있는 방주를 쳐다봤다. 그들의 시선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삼십 년을 함께 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로 스쳐 지나갔다.



'잠시라도 시간을 끌어주시면...'



그들의 생각은 공통적으로 이랬으나.



“그럴 수야 없지. 내가 못 보내지. 특히 그 어린년은 더. 카카카카.”



또 한 명의 얼음인간, 빙혈천마 사마천이 천결개의 타구봉을 왼손으로 툭 처내며 오른 손목을 안에서 밖으로 뿌리 듯 아주 짧은 탄력을 붙여 급히 털었다.



슝! 슝!



네 번이 강력한 빙장이 격발됐고 한 번의 가는 빙기가 발사됐다. 네 개의 빙장은 거리를 뚝뚝 잘라내며 네 명의 장로를 향해 최단 거리로 쏜살같이 날아들었고 하나의 빙기는 구지옥의 목 뒤에 있는 천주혈(天柱穴)을 노렸다.



구절환과 세 장로는 자신들의 당문혈(當門穴)과 제문혈(臍門穴)을 파고드는 엄청난 한기에 본능적으로 몸을 틀고 손을 뻗었지만 빙장은 그들 손을 그대로 뭉개면서 당문혈과 제문혈 주변을 아예 관통해버렸다.



뻥!



경쾌한 충돌음이 일었고 약간의 피가 튀기는 했으나 그것도 금새 얼어버렸고 정말 관통된 부위는 정말 매끈해서 더욱 처참해보였다. 엄청나게 빠른 극음의 한기가 뚫어 만들어낸 단면은 즉시 얼었기 때문에 매끈한 것이 잘린 상태에서 피가 엉겨 붙은 핏줄과 근육 등이 그대로 보여 오히려 더 참혹했다. 이어서 틱 하는 소리가 구지옥의 천주혈에서 났고 그녀는 그대로 마비돼 앞으로 쓰러졌다.



“으아아악! 이 짐승 같은 놈! 죽어라!!”



이 모든 것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본 천결개가 사마천이 튕겨낸 타구봉을 겨우 되돌려 그것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그대로 후려치며 소리쳤다. 그의 터질 듯한 분노에 그의 몸도 반쯤은 떠올랐다.



“클클. 이것으로 끝인가? 개방에선.”



사마천은 자신의 머리를 내리찍는 타구봉을 향해 오른손을 튕겼고 그와 함께 그의 음성이 냉혹하게 개방의 총타 뒤편을 울렸다. 일방적인 살육이 끝을 향하고 있었다. 무림 전체에 정보망을 지닌 거대문파 개방의 역사가 폐문의 직전까지 몰렸다.







“제천님이 깨우라 명해 깨웠지만 정말 대단한 년 놈이다. 단 둘이서 두 시진만에 개방을 초토화시키네. 헐헐. 헌데? 어느 선에서 저들을 없애지? 아. 고민 좀 되네.”



그들이 있던 자리에서 십 장 떨어진 허공 중에 일환의 음성이 적막을 깼다.

그의 신형은 바람이 불면 그 방향으로 출렁거렸고 먼지라도 일라치면 스르르 비껴갔다.



“점점, 끝을 향해 가고 있군. 크크. 재미도 있어지고. 그래. 지겨운 천년이었어. 클클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 아이를 만나러 간다. 가슴이 마구 뛴다.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됐으리라. 그 예쁨은 이제 아름다움이 됐을 것이고, 그 눈부신 미소는 더 매혹적이 됐으리라. 



아이의 이름은 혜준이다. 내가 처음 천상무극진기요결을 아버지로부터 받아 들었을 때 나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그 아이, 이제 숙녀인 혜준은 유일한 여자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책을 봐도 그 글자가 하나의 얼굴로 떠오르며 자꾸 뒤에 옆에 있는 것 같아 때 없이 고개를 돌리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그녀를 사랑함에 틀림없다.



내가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 아이는,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가슴만 격렬하게 떨었다. 그 때문에 어깨도 같이 들썩였다. 눈은 파르르 떨렸고 눈망울은 있는 대로 커졌지만 이미 물기로 뒤덮였다. 손은, 그 하얀 섬섬옥수는 소중한 무엇을 쥔 듯 주먹을 꽉 쥐었고 다리는 후들거려 서있는 것이 불안해 보였다. 허리는 경직돼 딱딱하게 굳었고 주변의 근육은 극도로 긴장했다. 온몸이 격하게 흔들렸던 것이다.



그녀는, 나의 혜준은.



“오랜만이야. 혜준아. 나 무영이야.”

“…”

“이렇게 살아주어서 고마워. 보고 싶었어. 너무나도.”

“…흑!”

“이제부턴 내 곁에만 있어. 내가 지켜줄게. 누구도 너를 어떻게 하지 못하게 할게.”

“…흑흑흑흑!!”

“이제까지는 아무 것도 주지 못했지만 이후로는 줄 것만 넘쳐나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없음을 자책할 정도로 아직 또 주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에 행복해 할게. 혜준아.”

“…오빠! 무영…오빠!! 흑흑흑흑흑!!!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흑흑흑흑!! 단 한 순간도 오빠를 잊은 적이 없었어.”

“…나도 그랬어. 나 역시 그랬어. 혜준아.”

“아침에 깨어 내 머리맡에 햇살이 있으면 그것이 오빠의 미소라 생각했고 아침상을 차리며 만두라도 있으면 그것이 또 오빠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게 해 나를 울렸어.”

“…혜준아.”

“낮에는 오빠가 많이 갔던 내궁 뒤뜰에서 오빠의 손이 간 곳이나 오빠가 디뎠을 발자국을 찾아 걷고 또 걸었고 해질녘엔 노을처럼 웃던 오빠의 미소를 찾기 위해 황혼이 모두 어둠이 될 때까지 거기에 서있었어.”

“…아!”

“또 저녁이 될라치면 이 혜준은 오빠가…”

“됐단다. 그것으로 충분하고 넘치도록 됐어. 혜준아. 그만 해. 나도 너를. 나도 너를…”



사. 랑. 해.



그리고 이날 두 사람은 한 사람, 바로 무영의 아버지인 검강천의 진정한 모습과 고뇌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왜 혜준에게서 검강천의 진기가 내장돼 있었는지, 무영이 선천지체에 대한 의문을 왜 느끼고 있었는지 그들을 비로소 알게 됐고 그것이 검강천이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선택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 아버지… 진정한 무인이셨던 아버지의 뜻을 이제야 이 못난 아들이 알겠습니다.’

‘천주님. 그 깊은 뜻과 그 외로웠을 시간들이… 지금의 무영 오빠가 되기 위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그 오랜 시간들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