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본 유럽 영화 중 ‘멋대로 하라’와 ‘시네마 천국’ ‘인생은 아름다워’ ‘레옹’ 등등보다 더 좋은 영화로 평가하는 것이 ‘베를린 천사의 시’입니다. 이 영화는 영원히 사는 천사가 서커스에서 공중곡예(천사 역할)를 하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 후 반드시 죽는 인간으로 환생해, 여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제3자였던 천사가 인간으로 환생한 첫 경험에서부터 여인이 공연 중이던 장소에 도착했더니 서커스단이 이미 떠난 부분까지입니다. 상당히 긴 시간이지만 그 안에 담긴 철학적인 영상은 그 다음의 10분이 없었다면 거의 완벽한 영화였는데, 그 10분의 사족이 영화적 가치를 대폭 삭감시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천사에서 인간이 돼 처음 느낀 감각은 통증이었습니다. 그가 인간세계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신이 마련해준 황금갑옷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느낀 첫 번째 감각은 지독한 아픔이었고, 그가 처음 만진 물질은 피였으며, 그가 처음 본 색은 붉은색이었습니다.
그가 인간으로 깨어난 곳은 냉전시대의 상징이자 분단의 경계선인 베를린 장벽이었습니다. 그는 또 신이 준 황금갑옷을 사기꾼에 속아 헐값에 팔았고, 그 돈으로 제일 먼저 사먹은 것이 쓰디쓴 블랙커피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삶이 화려해보이지만 실제는 고통과 불행의 연속임을 보여줍니다.
항상 흑백(선과 악, 삶과 죽음)으로 보이던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보였다는 것도 삶에서의 관점이란 이분법적으로 나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춥고 음산한 베를린의 날씨도 천사였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이었고, 짝사랑한 여인을 찾아가는 과정은 셀레임으로 가득했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여인이 서커스를 하던 곳에 도착해보니 그녀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주인공은 그곳에 모여 있던 아이들을 통해 서커스단이 어디로 갔는지 알게 됐고, 그는 아이들이 준 단서를 기초로 여인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는 여인을 만나 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가 서커스단이 어디로 갔는지 알게 된 것에서 끝냈다면 완벽한 영화의 반열에 올랐을 것입니다. 인생은 아무리 고달프더라도 살만 한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주기 위해 주인공이 여인을 찾는 것까지 영화를 끌고 간 것은 너무나 아쉽기만 합니다. 아직도 희망이 있음을 남겨준 그 지점에서 끝났어야 영화적 완성도는 물론 관객에게 여분의 재미를 주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아무튼 이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영화가 미국으로 건너가 리메이크 된 결과가 ‘시티 오브 엔젤’입니다. 당시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두 배우(니콜라스 케이지와 맥 라이언)가 주연을 맡았지만, 어떤 철학적 메시지가 담긴 영화도 미국으로 넘어가면 극도로 단순화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시티 오브 엔젤’입니다.
영화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두 영화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는 마지막 10분만 없다면 롤랑 조페 감독의 인간 구원 시리즈 ‘킬링필드’ ‘미션’ ‘시티 오브 조이’보다 한 수 위거나, 시리즈 중 최고의 작품인 ‘미션’과 비교할 수 있는 불후의 명작에 올랐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윤제균 감독과 투자사가 처음부터 ‘포레스트 검프’의 한국판을 만들겠다며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고, 최고의 배우들을 캐스팅한 ‘국제시장’은 ‘포레스트 검프’의 오마쥬이자 한국판 리메이크의 관점에서 보면 100점 만점에 90점은 줄 수 있는 잘 만들어진(웰 메이드한) 블록버스터입니다.
사회와 계속해서 불화하는 덕수(황정민 분)는 지적 장애가 있었던 검프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덕수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하는 직선적이고 우직한 삶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관통했다면, 검프도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는 직선적이고 낙관적인 삶을 통해 미국의 현대사를 관통했습니다.
검프가 평생을 사랑한 여인이 있어 계속해서 달릴 수 있었다면, 덕수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어 평생을 헌신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검프가 미국 현대사의 중심에서 제국의 역사를 관통했다면, 덕수는 한국 현대사의 주변부에서 질곡의 역사를 관통했습니다. 지적 장애가 있는 검프가 미국의 위대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줬다면, 외골수 덕수는 한국의 산업화를 대변해주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유일 제국이자 예외국가로서의 미국을 그렸다면ㅡ정신지체 장애인이라 해도 미국인이면 세계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ㅡ‘국제시장’은 동족상잔의 비극적 피난민에서 서독으로 파견된 광부, 베트남에서의 장사를 거쳐 국제시장에 이르는 과정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렸습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를 형편없이 리메이크한 ‘시티오브엔젤’에 비하면 ‘포레스트 검프’의 구조를 모방한 ‘국제시장’은 원작에 뒤지지 않는 짜임새를 보여줌으로서 한국 영화의 또 다른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마땅히 칭송받아야 했지만, 모든 공을 독차지한 독재자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와 대가도 받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헌사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아쉬운 것은 원작을 리메이크하거나 모방한 작품들이 모태가 된 작품에 비하면 전작이 가지는 철학적이고 미적인 덕목을 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국제시장’을 관람할 때는 철저히 그 시대의 주역들에 몰입하는 것이 좋습니다. 등장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을 최대화하면 산업화 주역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어우러져 영화적 감동은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국제시장’이 지금 같은 열기를 이어간다면 애국심 마케팅, 방송과 언론의 집중조명, 압도적인 좌석점유율, 단체 관람 등으로 최고 흥행기록을 가라치운 ‘명량’을 넘어설 수도 있습니다. '국제시장'을 이념적으로 접근할 생각은 없지만, 한국 사회의 보수화가 얼마나 많이 진행됐는지는 앞으로의 흥행기록에서 알 수 있을 듯싶습니다.
다만 그렇게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다음에는 다시 냉혹한 현실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갈수록 커지는 부의 불평등과 새로운 엘리트주의의 등장 및 신분이동이 차단된 차별의 현실로 돌아오면, 우리 주변에서 또는 우리의 시선 밖에서 지독한 빈곤과 고독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국제시장’의 낙오자들을 살펴주십시오. 그들도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가장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국제시장’에 내재해 있는, 또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암묵적 합의와 의도적으로 배제된 역사의 실체를 절대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뒤섞여 버렸고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에 점령된 대중문화 시대에, 우리 시대의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려면 ‘국제시장’은 영화관 안에서의 감동으로도 충분할 듯합니다.
‘국제시장’에서 다룬 현대사의 중요 장면들을 가지고 정반대의 영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투자비가 부족할 터이고, 상영관 확보가 힘들 것이며, 언론과 방송의 조명도 받지 힘들 것입니다. ‘국제시장’에 들어간 투자비의 반만 있어도, 상영관수(좌석점유율)의 반만 배정돼도 ‘국제시장’ 이상의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음 작금의 현실이 너무나 척박하기 때문입니다.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을 IMF세대와 삼포세대가 리메이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년쯤 후에 두 세대를 대표하는 감독이 21세기의 ‘국제시장’을 만든다면 어떤 사건들이 선택되고, 어떤 스토리로 녹여서, 어떤 해석을 영상에 담을지 궁금합니다. 성장과 개발이 아닌 분배와 공정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나올 것은 분명합니다.
후세대가 앞선 세대의 피와 땀과 희생의 열매들을 따먹으며 발전했던 인류의 역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퇴행의 시대를 살아가는 불행한 세대들이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처럼 앞선 세대에 대한 헌사를 영상을 통해 재현하기를 바란다면 너무 뻔뻔한 것은 아닐까요?
그들은 '베를린 천사의 시'의 주인공이나 '포레스트 검프'처럼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 자신의 인생 모두를 포기할 여력도 없고, 결혼과 출산까지 포기한 세대라 인류의 진화를 따라가기도 힘들고 미래의 희망을 꿈꾸기도 힘듭니다. 덕수는 노력하면 돈을 벌 수 있었지만, 그들의 후세대는 육체노동 이상의 노력이 필요한 숨막히는 스펙을 갖추고도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합니다.
덕수는 자신의 미래를 선택을 할 수 있었고, 돈을 벌어서 저축도 할 수 있었지만 그의 후세대는 선택 가능한 직종이란 비정규직이나 알바, 실업자 뿐이어서 저축은 꿈도 못꿉니다. 등록금 대출금과 이자를 갚느라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야지 가족을 이루는 첫 단계인 연애조차 할 수 없습니다.
IMF세대와 삼포세대가 리메이크하는 '국제시장'이 과연 윤제균 감독처럼 일방적 관점으로만 풀어갈 수 있을까요? 이들이 영화를 통해 앞선 세대에게 '정말 수고하셨습니다'라는 헌사를 바칠 수 있을까요? 그들도 효도를 하고 싶어하고, 가족을 이루어 미래를 꿈꾸고 결실을 맺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들도 자신의 인생역정을 녹여낸 '국제시장'도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런 기회가 주어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현실의 척박함 속에서.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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