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이 조중동문과 지상파3사, 종편의 대대적인 마케팅으로 흥행대박을 거두고 있을 때, 박근혜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박정희의 위대한 업적으로 떠벌리며 다 차려진 밥상에 숫가락을 올렸다. <국제시장>의 실제 주인공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박근혜의 시대에 뒤떨어진 애국심 마케팅에 열을 올리며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박정희의 명예회복에 이용했다. 박근혜의 말처럼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박정희의 위대한 업적일까?  

 

 


 

 

 

답부터 말하면 선후가 바뀐 궤변에 불과하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는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의 작품이었지, 박정희의 업적이 아니다(위의 사진은 암살위협에도 불구하고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에 가해진 나치의 만행과 대학살에 진심으로 사죄하는 역사적 장면을 담은 것으로 유명하다). 히틀러의 나치는 유럽과 러시아, 아프리카에 계랑화가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힌 것만큼 독일의 인구 구성과 노동연령에도 치명상을 입혔다. 

 

 

종전 이후의 독일(서독)은 탄광에서 일할 젊은 노동자와 패잔병 및 중증환자들을 치료할 간호사가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1950년대)에 독일의 탄광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이 있었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이들은 노동자 중에서 대표를 뽑아 독일인과 소통창구를 마련했다. 노동자 대표는 탄광에서 채굴을 하는 대신 독일어를 배웠고, 그를 중심으로 한국의 광부들은 놀라울 정도의 협동심과 노동생산성을 보여줬다.

 

 

탄광을 운영하던 독일의 중장년층들은 이런 한국노동자에게 크게 감명을 받았고, 이 사실이 탄광에 투입할 노동자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브란트 총리에게까지 들어갔다.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여타 유럽의 노동자나 아프리카계 노동자에게서는 찾아볼 수도 없는 한국노동자의 협동정신과 지혜로운 대응에 감탄한 브란트 총리는 전후의 한국에 경제원조와 미국과 일본은 따라올 수 없는 최저이율의 차관을 제공하며 한국 정부에 광부 파견을 요청했다.

 

 

 

 

 

이것이 파독 광부의 대규모 파견으로 이어졌다. 한국 광부와 간호사 덕분에 대규모 원조를 받은 박정희 정부가 한 일이란 파독 광부를 모집해 정치 이벤트로 포장하는 것뿐이었다. 독일의 탄광노동자에 준하는 월급을 받은 파독 광부가 가족들에게 송금을 할 수 있기까지는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파독 간호사도 비슷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파독 광부의 대규모 모집과 마찬가지로 전후 독일을 한국보다 더 빠르게 부흥시킨 빌리 브란트 총리가 재등장한다.

 

 

전쟁에서 패전한 국가가 늘 그렇듯, 독일은 부상 당한 패잔병과 중증의 노인환자들을 돌볼 수 있는 간호사가 태부족했다. 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탄광노동자에 뒤지지 않을 만큼 고된 일이어서 독일 간호사들을 구할 수 없었다. 오직 50년대에 들어온 한국 간호사들만이 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봤고, 이에 감동한 환자와 의사들이 한국간호사들을 칭송하기에 바빴다. 그들은 환자에게 헌신적이고 성실하며, 선하고 검소한데다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월급의 대부분을 송금(한국 수출의 1~2% 정도)하기까지 했다. 

 

 

이런 칭찬들이 브란트 총리에게도 전해졌고, 그는 파독광부와 마찬가지로 한국간호사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국 정부에 대규모 간호사 파견을 요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의 반대로 한국에 무상의 경제원조와 최저이율의 차관을 제공하는 것이 어려웠지만(장면 총리가 세웠고, 박정희가 조금 수정했을 뿐인 경제개발계획도 미국의 반대로 무산될 뻔했다. 《박정희 정부의 선택》을 참조), 좋은 조건으로 한국의 간호사들을 대규모로 모집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부가 한 일이란 파독광부를 모집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모조리 빠진 자리에 감독이 일초의 시간도 배정하지 않은 박정희가 들어와 한강의 기적 운운하는 정치쇼를 벌인 것이 파독광부와 파독간호사의 또다른 <국제시장>이다. 남로당 경력 때문에 군대에서 쫓겨난 박정희(좌익 경력이 있는 인사 300명을 고발하는 조건으로 사형을 면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가 항일독립군의 악랄한 사냥군이었던 백선엽의 호출은 받아 군대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철저하게 만들어진 신화다. 국민을 수없이 죽음으로 내몰면서 본인이 직접 만든 뻔뻔하기 그지없는 조작이다. <국제시장>이 정치와 상관없는 파독간호사와 광부에 대한 아름다운 헌사라면 100% 동의한다. 그분들은 그 이상의 헌사를 받아도 된다. 그분들은 외화가 부족했던 한국 정부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에 정착해서도 한국에서 온 주재원이나 이민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이분들에게 바치는 아들세대의 헌사인 <국제시장>이 박정희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한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이용된다면, 가족과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친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에 대한 모독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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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耽讀 2015.12.21 07:34 신고

    전 이 영화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영화평은 못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박그네가 이 영화를 박정희 찬양을 위해 이용했다는 점이죠.
    아버지 찬양을 위해 영화까지 이용했습니다. 문화를 통해 지배죠.
    국제시장이 1천만명 넘게 본 동력 중 하나가 권력을 통한 동원은 아니었지만 '단체'관람이 많았다는 것은 영화 순수성 마저 왜곡했을 수도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5.12.21 15:57 신고

      산업화 초창기의 세대들에게는 위대한 헌사이겠지만 호남과 충청, 경기, 강원, 제주도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오직 영남만 나옵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5.12.21 09:16 신고

    영화가 나오고 나서 이거다 싶었겠죠..
    감독의 의사에 반하는 제멋대로의 해석을 수구 언론들이
    쏟아 내고 정치권이 이용한 영화였습니다

    • 늙은도령 2015.12.21 16:01 신고

      영화는 잘 만들었고, 앞선 세대들의 피와 땀에 합당한 헌사로 최고였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흐름이 너무 일방적입니다.
      자식 세대의 고통을 덜어줬지만 정신은 물려주지 못한 채 끝났습니다.
      황정민의 마지막 독백은 이 세대들이 성공했다는 것인지 실패했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3. 참교육 2015.12.21 10:28 신고

    아버자의 폭정만으로도 잔절머라가 나는데... 그 딸까지.... 하루가 지겹습니다,

    • 늙은도령 2015.12.21 16:01 신고

      제발 국민들이 박정희 일가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이해했으면 합니다.

  4. 2015.12.22 12:10

    비밀댓글입니다

  5. 구름바다 2015.12.24 02:08 신고

    이 영화를 보고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사람으로서 느낀 점은
    어느 정도 잘 표현했지만 지나친 장면도 많았다는 것이었죠.

    즉 극적 효과를 위해 주인공의 활약상이 너무 과장된 것과
    주인공의 너무 거친 막말 (입만 열면 욕이 나오는 것) 에서
    부산이 고향이고 지금껏 살아 온 사람으로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에
    옥의 티를 느꼈지만 (실제 부산사람들 영화 속처럼 입에 욕을 달고 살지는 않기에)
    우리 고장에서 그 시대를 살아 온 사람으로서 향수 같은 것을 느껴
    그런데로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현 정부의 집권층에서 아전인수 격으로
    박정희 정권을 미화하는데 활용하는 것에서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더군요.

    심지어 국기 하강식 장면을 보고
    박근혜 주변의 어떤 덜 떨어진 인간이
    새삼스레 국기 하강식 때 유신정권 시절처럼 부동자세로
    경의를 표하는 법령을 만들자는 말을 했다는 것에서
    정말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더군요.

    파독 광부와 간호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지를
    오늘에사 이 글로 잘 알게 되었습니다.

    늙은도령님의 칼럼 잘 보았습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합니다.

    • 늙은도령 2015.12.24 02:13 신고

      영화에 독재자의 미화와 정치적 정통성을 부여하니 그 세대의 노력과 희생에 대한 헌사가 빛을 바랬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저보다 10~20년 정도 앞선 세대를 그린 것인데, 그들보다 앞선 세대인 자발적인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그들에 대한 조명이 없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저도 고향은 부산이지만 1살 때까지만 살아서 아무런 기억이 없지요.
      동생이 다니는 회사가 삼성에서 롯데로 팔려 이제부터는 롯데를 응원해야 합니다.
      비록 임원이어서 언제 계약이 해지될지 모르지만....
      반갑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그를 바보라고 불렀다, 다른 말로는 그의 일생을 표현할 수 없어서. 영화 <변호인>은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거대한 전환’에 관한 짧고 투박한 이야기다. 국가의 폭력과 불의를 압축하는 사건과 마주쳤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속물 변호사의 위대한 변화에 관한 이야기다. 3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되풀이되는 국가의 폭력과 불의에 저항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영화의 완성도와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반감, 문재인 의원을 중심으로 한 참여정부 인사들의 정치적 부활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변호인>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변호사 시절의 노무현을 일방적으로 미화했다며 영화의 가치를 폄하할 수도 있다. 러닝타임에 얽매여 서둘러 끝낸 결말이 <죽은 시인의 사회>의 표절이 아니냐고 비난할 수도 있다. 

 

 

모든 것에는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ㅡ예고편에서 캡처  

 

 

영화적으로 볼 때, 프란시스 코풀라 감독의 <대부> 시리즈 1편과 2편처럼 전반부에는 속물 변호사 노무현의 성공과 야만적 국가의 폭력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다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국가의 야만적 폭력에 마주쳐 현실에 눈 뜨는 중반부에는 인권변호사 노무현과 압도적 힘을 가진 국가가 공작을 벌여 변호사 자격을 박탈하는 과정이 교차 편집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러나 <변호인>에는 국민의 자유와 삶의 질을 보장해야 하는 국가(정부)가 권력을 사유화해 국민을 사지로 내모는 압도적인 폭력에 대한 고발과, 깨어나는 시민으로서의 저항의 역사가 들어 있다. 정권의 안위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조작됐고, 그때마다 얼마나 심한 고문이 자행됐으며,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됐는지, 독재정권의 악마성이 들어 있다. 

 

 

<변호인>에는 돈을 잘 벌던 변호사가 그때까지 이룬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부와 권력, 기회의 독점에 따른 극도의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파괴하는 현 대한민국에 대한 정치적 성찰이 들어 있다. 왜 이 시대에 노무현 같은 바보가 필요한지, 그것도 여러 명이 필요한지 이 시대의 절박한 요구가 들어 있다.

   

 

예고편에서 캡처

 

 

나 아렌트의 말처럼 국가의 폭력이 “착취와 억압조차 사회가 돌아가게 만들고 나름의 질서를 확립”시키는 사건에 직면했을 때, 변호사 노무현은 현실을 직시했으며 분노했고 저항했다. 그는 정의의 담지자인 법의 언어로 국가의 폭력에 맞섰으나, 자신의 의뢰인을 지켜내지 못했고 변호사 자격마저 박탈당했다.

 

 

영화의 끝에선 작은 희망의 불씨를 볼 수 있었지만, 국가의 폭력이 무력해졌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일어선 변호사들이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과 함께 한다고 해서 국가의 폭력이 사라진다는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았고, 정치적 해석도 끝까지 피해갔다.

 

 

어쩌면 제작진과 관계자들은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을 믿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전반부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변호사 노무현의 변화에 무게를 실어주는 방식이 다소 거칠고 설득력이 떨어졌지만, 직선으로 부딪치는 후반부의 노무현이 그 시절의 절박함을 이 시대의 경험들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예고편에서 캡처

 

 

이처럼 <변호인>은 아직도 서슬이 퍼런, 아니 최근에 들어서는 퍼렇다 못해 이글거리는 국가의 폭력이 두려워 자기검열의 흔적ㅡ영화에서 편집돼 사라진 부분들ㅡ이 곳곳에 묻어나는 시대의 아픔이 반영된 영화다. 그 증거는 영화의 맨 처음에 나오고 이것 때문에 필자는 영화를 보는 내내 목에 걸린 국가의 폭력이라는 가시에 불편함을 금할 수 없었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그 첫 번째 화면에 ‘실제 인물에서 모티브를 얻었지만 내용은 허구’라는 자막은 <변호인>에 가해졌을 유무형의 정치적 압박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사상 최고의 속도로 흥행기록을 가라치우고 있는 <변호인>의 흥행몰이를 외면하거나, ‘한국영화 전성시대’나 ‘2,000만 배우 송강호’로 평가절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화 <변호인>도, 교묘한 방식의 압박과 회유에 시달렸을 제작진도,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잊지 못해 상영관을 찾은 관객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국가 폭력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영화를 시작하는 한 줄의 자막이 보여주고 있다. 같은 이유로 해서 영화의 엔딩에 실제의 사건이 어떤 결말로 이어졌는지 자막처리를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예고편에서 캡처

 

 

영화 <변호인>이 진정으로 말하는 것은 ‘이 영화는 허구’라는 안전장치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현실의 팍팍함이다. 법정의 노무현은 시리도록 아려서 꽃처럼 아름다운 인물이었을지언정 우리네 삶은 여전히 국가의 폭력에 둘러쌓여 있다. 영화는 이것을 말해주려 했다. 달라진 것은 보다 세련되고 민주적 절차를 이용하는 국가 폭력의 진화 뿐이다.   

 

일각에서 말하는 ‘성공한 법정영화’라는 평가는 <변호인>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축소시키는 의도적인 폄하다. 이는 마치 <화려한 휴가>를 시대에 휩쓸려버린 사랑이야기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또는 <부러진 화살>을 어느 또라이 교수의 법정투쟁기로 제한하는 것이다.   

 

 

<변호인>은 인간 노무현에 대한 예찬이 아니다. <변호인>은 영화라는 매체를 빌려 국가의 폭력을 고발한 직선적인 영화다. 그래서 사악한 폭력의 으뜸이자 절대악이었던 나치에 대한 뼈저린 후회와 뒤늦은 성찰에서 나온 명제, ‘처음에 저항하라, 그리고 결말을 고려하라’라는 말을 <변호인>에 그대로 따온다면 ‘첫 화면의 자막을 기억하라, 그리고 마지막 장면과 비교하라’라 말할 수 있으리라.

 

 

많은 부분이 편집됐거나, 아니면 잔혹한 실화를 모두 담아낼 수 없어서 러닝타임이 턱없이 부족했던 <변호인>의 흥행이 어디까지 이이질지 알 수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잊지 마시라, 국가의 폭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시대는 지금 깨어있는 시민들의 연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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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교육 2015.12.19 08:05 신고

    권력과 폭력은 본질이 같습니다.
    행사를 정당성인가 아닌가에 따라 폭력이 되기도 하고 권력의 행사가 되기도 합니다.
    교육을 통해 본질을 가르쳐 주지 않아 사람들이 헷갈려 하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5.12.19 15:45 신고

      합의에 의한 허용된 폭력이지요.
      이것이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에 따라 이루어질 때는 공권력이고, 박근혜처럼 이용하면 야만공권력이 됩니다.
      국가의 폭력이 이럴 때 최고에 이르지요.

  2. 덕산 2015.12.19 08:28 신고

    내일은 또 어떤일이 일어날지란 걱정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권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쓰여질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실감하고 살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5.12.19 15:48 신고

      제일 걱정은 이명박 8년 동안 한국경제마저 말아먹었다는 것입니다.
      부채가 너무나 급격히 늘어 내년 후반부터 몰아닥칠 경제위기를 중하위층은 버텨낼 재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재벌들이 사상 최고로 임원수를 줄였고, 사업을 매각하고, 포기하고, 방어 위주의 경영으로 돌아섰습니다.
      IMF를 능가하는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는데 그것이 내년말이냐, 박근혜의 임기가 끝나는 해이냐의 차이만 남았습니다.
      암담합니다.
      저의 형제처럼 어떤 경우에도 최고의 자리에서 성공할 수 없는 분들이 정말 걱정입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5.12.19 08:29 신고

    헌법 조항을 외치던 그 감동을 아직 생생히 기억합니다^^

    • 늙은도령 2015.12.19 15:49 신고

      아... 그리운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이 이제 그의 돌파력을 흉내내려 하고 있으니 기대해봐야죠.

  4. 바람 언덕 2015.12.19 12:16 신고

    오늘 이 시대는, 그리고 나는 누구를 변호하고 있는 것인지...



<삼국지>에 대한 진보진영 인사들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삼국지>가 위대한 이유는 주류의 욕망을 다루었음에도 상대적 패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재구성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삼국지>는 잘난 사람들과 더 잘난 사람들, 더 이상 잘날 수 없는 사람들만 나오는 주류의 성찬일 뿐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가 접하는 역사란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말한 대로 ‘정치권력의 역사’여서 ‘국제적 범죄와 집단학살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기록해 후대에 전한 자들은 소수의 승자였기 때문에 절대다수의 희생을 부수적 피해 정도로 묘사할 뿐입니다



필자가 민주주의라는 것에 눈 뜬 이후 ‘대하사극’을 싫어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KBS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가 이제는 MBC도 공유하게 된 ‘대하사극’이란 소수의 승자들을 다룬 역사드라마입니다. 당대의 권력과 정치의 역학관계가 만들어낸 음모술수와 크고 작은 전쟁을 다룰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대하사극’의 단골 주제가 올바른 국가관과 지극한 애국심인 이유도 승자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거의 대부분 사극에 나오는 패자의 위대함도 승자의 위대함을 말해주기 위한 조연에 불과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순신은 세종대왕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일본의 침략을 막아냈고, 민초들은 그를 따라 왜구들에 저항했습니다.





오늘 캐치원을 통해 다시 본 <명량>에는 이런 공식이 가장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이는 영화관에서 봤을 때도 마찬가지로 느낀 점이지만, 그것이 ‘대하사극’의 절대공식이라는 점에서 ‘이름 모를 약자들의 희생’마저 승자를 위한 복종(대의나 애국심으로 포장된)과 찬양으로 포장되기 일쑤입니다.



<명량>은 이런 면에서 <삼국지>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둘 다 주류의 가치를 전파하고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이순신은 나라를 구하고도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유비는 선한 의도와 최고의 인재들을 독식하고도 정사(正史)에는 단 한 줄로 기록될 뿐이었습니다.



주류에서도 승자가 되지 못하면 푸대접을 받기 일쑤인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언제 가야 우리의 이야기로 역사를 기록할 수 있을까요? 극소수 승자의 역사를 민주주의의 폐품보관소로 보내버릴 수 있을까요? <명량>을 다시 한 번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역사가 이러할 진데, 승자들이 구축해온 체제는 얼마나 강고하겠습니까? 마르크스는 ‘모든 견고한 것들이 무너져 내려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고 예언했지만, 바우만은 《액체근대》에서 ‘무너져 내린 것이 액체상태가 돼 더욱 막강해졌다’고 주장합니다.



액체는 너무나 유동적이고 유연해서 어떤 형태로 변형될 수 있으며, 작은 틈새도 파고들어 세상 모든 곳으로 스며들 수 있으며, 그렇게 견고하게 자리 잡은 단단한 고체마저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절대적 화력으로 중무장한 강자들이 이제는 유연해지기까지 했으니 그들의 폭주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명량>의 흥행기록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벤저스2>의 흥행신기록도 스크린을 독점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전통의 ‘대하사극’과 현대판 ‘대하사극’이 안방과 스크린을 점령한 대한민국에서 절대다수의 패자들의 이야기는 어디 가야 볼 수 있을까요? 승자에게도 인간적 고뇌와 약점들이 많았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요? 



참고로 선조가 이순신을 그렇게도 경계했던 이유는 그가 민중의 왕이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한 이순신의 위대함은 일본과 중국에서 더욱 쳐줍니다. 특히 일본에선 이순신은 신의 영역에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이순신 연구가 활발한 편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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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달빛천사7 2015.05.03 08:33 신고

    국내영화는 명량이나 또 국제시장이나 보긴 했는데 별로 기억이 남지 않드라고요 그래도 어벤져스 2가 좋긴 하죠

  2. 험한강다리 2015.05.03 08:44 신고

    좋은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건강하세요!

    • 늙은도령 2015.05.03 09:40 신고

      사이먼 앤 가펑클을 좋아하시나 봐요?
      저도 너무 좋아하는 듀오였습니다.

  3. 참교육 2015.05.03 11:37 신고

    역사 책에는 민중의 역사란 없었지요.
    그러다 89년 민주화 투쟁을 전후로 거꾸로 읽는 역사니 민중의 역사라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교과서에는 왕조중심의 역사 지배사관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배워야할 필요가 무엇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교육입니다.

    • 늙은도령 2015.05.03 11:57 신고

      맞습니다.
      지금의 역사교육은 잘못돼도 너무나 잘못됐습니다.
      제가 그래서 교육부를 싸그리 뜯어고쳐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4. 트라이어 2015.05.03 11:45 신고

    명량 재밌게본 영화였죠... ^^

  5. 바람 언덕 2015.05.03 12:09 신고

    만약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역사는 더 일그러져 있었을 것입니다.
    전두환과 박정희의 다름 점이 있다면 그 치세의 기간일 텐데요.
    전두환에게 박정희 만큼의 집권기간이 주어졌더라면 그도 박정희 이상가는 대접을 받고 있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도 일베등에서 전두환을 찬양하는 것을 보면 정말...
    구역질이 납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해방이후 친일파들을 단죄하지 못한 댓가입니다.
    그 댓가가 지금 이 지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5.05.03 12:16 신고

      최근에 들어 전체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전체주의가 정부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도 한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좌우의 전체주의를 막기 위해 공적 독점을 파괴했는데 그것 때문에 사적 독점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은 사적 독점이 문제인 시대라 전체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살려야 합니다.
      일베는 극우 전체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집단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히틀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권위주의 독재보다 무서운 것입니다.

  6. 머무는바람 2015.05.03 12:10 신고

    어제 호핀무료라서 다시 한번 봤는데
    다시봐도 잼나더군요

  7. 로키. 2015.05.03 16:37 신고

    정말 대작이었죠. 스토리가 조금만 더 좋았다면.

    • 늙은도령 2015.05.04 02:30 신고

      그러게 말입니다.
      이순신 이외에도 다른 조연들이 지금보다 더 부각됐으면 좋았을 텐데...

  8. singenv 2015.05.03 22:17 신고

    화력을 갖춘 강자들이 유연성도 갖추게 되었다는 말에 심히 동조되네요!

  9. 나비오 2015.05.03 22:45 신고

    늙은도령님 덕분에 다시한번 명량의 감동을 재 음미해 봅니다.
    좋은 한 주 보내세요 ~~

  10. 공수래공수거 2015.05.04 09:13 신고

    이순신 장군이 위대했던 여러가지 이유중에
    하나는 아군의 피해를 극소화했다는 사실입니다

    한번도 지지 않았을뿐 아니라
    하물며 배 한척도 손실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은
    참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 늙은도령 2015.05.04 13:41 신고

      그래서 일본의 해군에선 신처럼 봅니다.
      정말 대단한 장수였습니다.

  11. 에쏘 2015.05.05 18:50 신고

    저는 <명량>도 재밌게 봤지만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더 재밌었어요- 각기 다른 해석과 호흡으로 이순신 장군을 보여줬는데 후자는 영웅으로만이 아닌 백성을 아끼고 자신 또한 그 중 한 사람임을 느린 템포로 보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그 업적이 더 작아 보인 건 아니지만요~ ^^

    • 에쏘 2015.05.05 22:16 신고

      저 역시도 <명량>을 재밌게 봤음에도 그런 면(하나의 인간이라기보다 영웅화하는?) 때문에 조금 불편했어요. 늙은도령님 답글처럼 말로 잘 풀어내진 못 했지만 ^^; 고개가 끄덕여지는 답글이에요- 권위주의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요. 특히 인간으로서 고뇌가 아닌 영웅으로서의 고뇌.. 부분. 저는 영웅 이야기보다 사람 사는 얘기가 좋거든요ㅎㅎ 뭐 나름대로 다양한 시각에서 그려진다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요^^ 그래도 어떤 인물을 우상화, 영웅화하면 경계하게 돼요. 결국은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인데.. 싶어서. 최근엔 손석희 일이 그랬어요. 손석희를 좋아하지만 잘못된 건 잘못된 건데 그걸 넘어 우상화하게 되면 나중엔 어쩌면 우상화, 영웅시한 사람들 손에 추락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뭐 그건 그렇고^^ 이순신이 당시 주류가 아니었기에 그에 대한 기록도 부족한 것이겠지요. 역사는 항상 승자 입장에서 쓰여지니까요. 그래서 난중일기가 더 의미를 가질 거구요^^ 그래도 현재까지도 연구가 부족한 건 저도 많이 아쉬워요. 일제 때 이순신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런 인물이 나올 수 없게 우리 민족한테 더 가혹하게 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있던데, 일본인들이 이순신을 바라보는 걸 보면 영 터무니 없는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해요^^

    • 늙은도령 2015.05.05 23:54 신고

      저는 이순신을 성웅이라고 하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이순신에 대한 깊은 연구가 없는데 많은 아쉬움을 느낍니다.
      나라를 구하고도 죽음을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주류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순신을 사람이 아닌 신화의 영역으로 올려버렸습니다.
      신화의 영역으로 올려버리면 우리와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순신의 고뇌마저도,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부정의는 별로 얘기되지 않습니다.
      누구를 우상화하거나 성역화하면 그의 인간적인 면이 멀어지고, 대신에 그는 권위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이순신을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권위주의를 퍼뜨립니다.
      우리는 이순신이 나와 같은 인간이었는데 그 당시의 상황에서 최선을 찾아나갔던 인간으로 다가가지 못합니다.
      누구를 우상화하거나 신성화하는 것은 늘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보수적인 기득권들이 많이 악용합니다.
      전 <명량>을 보면서 이순신을 신화화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어요.
      그 역시 당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인간이었는데, 성웅이 된 이순신은 그 정도의 어려움은 반드시 극복해내야 하는 인간 이상으로 그려졌습니다.
      좀 어려운 문제인데, 그래서 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여기에선 맞지 않을 것 같지만, 아무튼 그런 방식이 권위주의를 일반화하는 정치적 상징 조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 영화를 고르라 하면 ‘불의 전차’와 ‘성난 황소’ ‘록키’ ‘밀리언 달러 베이비’ ‘파이터’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밖에도 떠오르는 영화는 많지만 이 다섯 개의 영화는 시나리오부터 음악, 연기와 연출 등까지 영화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고루 갖추었습니다.





이중에서 ‘성난 황소’와 ‘록키’는 권투를 다룬 영화로 허리우드 역사상 최고의 영화에 속할 수 있는 명작입니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성난 황소’는 ‘택시 드라이버’ ‘대부2’ ‘좋은 친구들’ ‘미션’ '디어 헌터' ‘더 팬’ '캐이프 피어' 등과 함께 그의 명연기를 볼 수 있는 최고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메소드 연기(배우들이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배역에 완전히 몰입시켜 실물과 같이 연기하는 기법)의 전설처럼 회자되는 ‘성난 황소’에서의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는 그가 왜 20세기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인지를 말해줍니다. 나이가 들어 좋은 작품을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성난 황소’에서의 그는 권투선수와 한물간 코미디언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을 보여준 ‘록키’는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편집상 등을 수상했고, 스텔론은 남우주연상과 각본상(시나리오를 직접 썼다)에 노미네이트 된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콧대 높은 아카데미가 포르노 배우를 했던 스텔론에게 남우주연상과 각본상의 영광까지는 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 해도 의료사고 때문에 안면신경마비와 언어장애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지닌 스텔론이 포르노 배우를 하면서까지 허리우드를 떠나지 않았던 집념이 아메리칸 드림으로 이어진 것은 영화만큼 극적이었습니다. 영화 ‘록키’와 배우 스텔론의 가치는 여기까지가 최상이었습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인사가 돼 있었다’는 속담의 주인공이 된 스텔론은 신자유주의적 근육질 외교를 밀어붙인 레이건 정부의 유혹과 압력에 넘어가 ‘람보’와 ‘록키’ 시리즈로 부와 인기를 얻었지만, 반미정서의 핵심에 자리하는 액션스타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릅니다.





70~90년대 허리우드를 지배했지만, 성격이 전혀 다른 두 노장이 ‘그루지 매치’에서 만났습니다. 영화적으로 볼 때 ‘그루지 매치’는 최악의 권투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적 가치(가족을 앞세운 전체주의적 자본주의)를 전파하는 역할에 충실한 ‘그루지 매치’는 허리우드의 소재가 얼마나 빈약해졌는지 보여줍니다.





늙은 ‘록키’에 ‘성난 황소’의 라모타(복싱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슈가레이 로빈슨의 라이벌)를 접목했지만, 마틴 스콜세지 감독 이후 추락을 거듭한 로버트 드 니로를 보는 것은 총천연색 슬픔이자, 흐르는 세월의 안타까움이었고, 과거의 명성을 갉아먹는 연민이었습니다.





다만 부러운 것은 퇴물이 되가는 노장들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가 어떻게든 만들어지고, 흥행과 상관없이 전 세계로 보급된다는 점이었습니다. 허리우드는 탐욕의 유일제국으로 복귀 중인 미국의 핵심 자원이었고,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이런 허술한 영화도 전 세계에 팔아먹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위대한 복서였던 로이 존스 주니어가 해설자로 등장하는 ‘그루지 매치’를 끝까지 보는 동안 저는 ‘그로기 상태’가 됐습니다. 사상 초유의 고령사회의 도래에 맞춰 한물 간 노장의 팔아먹는 것도 좋지만, 이런 영화를 통해 과거의 명성을 되찾으려는 허리우드의 몸부림도 보기 좋지는 않았습니다.





로버트 드 니로, 정말 믿고 보는 몇 안 되는 배우였는데 세월 앞에는 장사가 따로 없습니다. 어쩌다 보게 된 ‘그루지 매치’.. 위대한 배우의 몰락을 보여준 씁쓸하고 가슴 아픈 영화였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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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달빛천사7 2015.02.27 06:53 신고

    이 영화 오래된 영화니까 다시보기가 좋군염 지금은 할아버지들이네욤

  2. 공수래공수거 2015.02.27 08:47 신고

    이런 영화도 있었군요 ㅎ
    국내 개봉이 안되었던 모양입니다^^

    • 늙은도령 2015.03.01 03:06 신고

      네, 캐치온에서 우연히 봤습니다.
      드 니로를 너무 좋아해서 그가 나온 영화는 무조건 보는데 최악이었습니다.

  3. 耽讀 2015.02.27 09:37 신고

    성난황소는 보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왜 저런 영화를 잘 만들지 못할까요?

    • 늙은도령 2015.03.01 03:06 신고

      그런 영화가 먹히지 않는 세상이 됐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4. 바람 언덕 2015.02.27 09:49 신고

    성난황소는 정말 최고였죠.
    드니로는 젊었을 때 정점을 찍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 빛이 바래지는 느낌입니다.
    그런면에서 연출가로 변신한 클린스 이스트우드가 더 매력적이라는 느낌이네요.
    어쨌든 말씀하신 것처럼 헐리우드 영화시스템에서 가장 부러운 것은
    나이많은 배우들이 여전히 왕성한 활약을 하고 있다는 건데요.
    우리 나라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지요. 문화적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건 정말 볻받을 만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3.01 03:09 신고

      은퇴 이후에도 여유가 있어서 그들이 형성하는 시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슈퍼맨에 말론 브란도가 잠시 나오는 것 때문에 출연료로 600만달러를 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고정팬이 만드는 시장이 수천만 달러에 이르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노후에 여유가 생기면 그럴 수 있는데 그럴 가능성이 보수정부 때는 없을 것이라서....

  5. 여행쟁이 김군 2015.02.27 11:14 신고

    최고의 스타! 오래된 영화인데 명작이죠~ㅋ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래요~

    • 늙은도령 2015.03.01 03:10 신고

      드 니로가 나온 영화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명작이 많습니다.
      더 팬과 히트 때까지만 해도 드 니로의 진가가 스크린을 압도했는데....

  6. 꼬장닷컴 2015.02.27 11:41 신고

    본문에 거론하신 영화 중 저는 록키만 봤습니다.
    저는 영화를 많이 안 보는 편인데 록키는 그 당시 워낙 유명했으니까요.
    오늘도 유익한 정보 감사드리고 기온이 좀 떨어진 것 같은데 감기 조심하십시요..^^

    • 늙은도령 2015.03.01 03:11 신고

      영화가 전성시대였던 것은 80년대 말까지입니다.
      그 이후로는 TV에 밀려 상업적인 면에 치중하느라 좋은 영화가 거의 없습니다.

  7. 랩소디블루 2015.02.28 17:17 신고

    실베스터 스탤론 형님은 잘 지내고 계신가염 ㅎㅎ.

    • 늙은도령 2015.03.01 03:12 신고

      요즘 여러 영화에 나옵니다.
      노장들의 귀환에 한몫 보고 있습니다.

  8. 쩡은&참인간 2015.02.28 18:04 신고

    지나가는 세월을 이길 장사는 없는것 같아요.

    • 늙은도령 2015.03.01 03:12 신고

      그런 것 같습니다.
      드 니로는 그 능력에 비해 너무 형편없어졌습니다.
      안타깝기 그지 없네요.

  9. 참교육 2015.02.28 18:25 신고

    소개하신 명와 중 안본 것 찾아보아야겠습니다.
    이쪽 부분 너무 문외한이라서요...ㅎㅎㅎ

    • 늙은도령 2015.03.01 03:13 신고

      80년대 말까지는 허리우드 영화 중에서도 참 좋은 영화가 많았는데, 신자유주의의 이후로는 별로 없습니다.
      그저 블록버스터나 먹힐 정도입니다.



세부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영화의 짜임새를 별도로 한다면, 저출산‧고령화의 필수적인 결과인 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다룬 세 개의 영화가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와 웨인 크래머의 <크로싱 오버>,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 형제의 <로나의 침묵>이 그것입니다.





해리슨 포드가 주연인 <크로싱 오버>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어 풀어내는 관계로, 영화의 짜임새가 허술하고 어지러운 블랙버스터에 가깝습니다. 한 편의 영화에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고 했던 것이 패인이지만, 이민의 나라인 미국에서도 불법이민과 다문화가 그리 녹녹치 않은 문제로 부각했음을 보여줍니다.



로마시대 이후로 사라졌던 노예제도를 부활시킨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며, 경제가 나빠지자 노예해방의 이름으로 그들을 더 싸게 부려먹었던(노동유연화의 기원) 나라가 미국임을 고려하면, 불법이민과 다문화가 ‘아메리칸 드림’에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하자 또다시 그들을 내치고 있는 미국 특유의 DNA가 <크로싱 오버>에는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으로만 평가하는 미국 백인의 시각에서 제작된 <크로싱 오버>를 압축하면, “중산층 이상에게는 ‘아메리칸 드림’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저임금 노동자로 써먹던 노동자들이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고, 치러야 할 비용과 대가도 그만큼 커졌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로싱 오버>가 미국 특유의 위선이 스크린 뒤에서 작동하고 있다면, <그랜토리노>는 한 발 더 나아가 미국 백인 노동자가 이민과 다문화의 피해자가 됐다고 선언합니다. 그의 시각에서 보면 돈을 향해서만 달려가는 가벼워진 미국의 변화가 마뜩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미국적 가치의 핵심인 가족도 불편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보수와 수구 사이에 위치한 미국 백인의 시각으로 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풀어갑니다. 곳곳에 폭력을 배치해놓고, 그 폭력에 맞서야 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랜토리노>를 통해 자신의 본질이 <용서받지 못한 자>보다는 <더티 해리>에 가깝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영화에는 이민과 다문화가 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됐는지 전혀 다루지 않은 채, 은퇴한 미국 백인 노동자의 시각에서만 영화를 이끌어갑니다. 어린 베트남 이민자 남매와 나이와 인종을 뛰어넘는 우정은 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극대화하기 위한 드라마적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처럼.





파시즘적 속도로 달려가는 미국의 변화는 은퇴한 백인 노동자에게 야만적 폭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탐욕에 눈이 먼 파시즘적 속도에 맞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정의와 노동의 가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희생적이어서 영웅적으로 그려지는 자신만의 구원의식이자 현실도피적 결단입니다.   



하지만 한 쪽의 시각만 반영된 정의와 가치는 부분적인 정의에 불과할 뿐임에도, 반폭력적 메시지를 언제나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서만 그려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강박관념은 은퇴한 백인 노동자가 미래의 화해와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비극적 희생밖에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제조업을 포기하고 아이디어와 금융산업 위주로 돌아선 시대의 피해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이민자 폭력조직을 두려워해야 하는 사회적 약자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극적 결말이 전달할 수 있는 미학적 위대함에 크게 감명받을 터이지만, 바로 그 마지막 장면이 그 이상의 폭력을 담아낼 수 없다는 반동적인 메시지 때문에 가장 폭력적입니다. 



죽음을 미화하는 것이 폭력을 유발하는 극단적 선택이라면 거기에는 진실된 의미의 정의도, 진정한 화해도, 반성적 구원도 없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려낸 반폭력적 저항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폭력에 맞서는 비폭력적 저항은 일체의 폭력을 부정하는 것에서 양화가 악화를 해체하는 것입니다.  





‘그랜토리노’는 미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1972년형 포드사 중형차로, 미국 백인 노동자의 자존심이자, 갈수록 퇴색하고 있는 미국 특유의 ‘빌어먹을’ 애국심을 상징합니다. 은퇴한 미국 백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랜토리노>는 잘 만든 영화이며, 이민과 다문화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고든 수작입니다.



하지만 은퇴한 백인 노동자를 들어내면 <그랜토리노>는 반유대주의를 조장하는데 앞장 선 나치의 선동적인 영화를 떠올립니다. 세계를 지배하거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최상위 0.1%를 다룬 《슈퍼클래스》에서도 미국의 슈퍼엘리트(특히 부시 부자의 행정부에서 일했던 고위관료들)와 어울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는 보수적인 미국 백인의 이데올로기를 가감없이 드러낸 폭력적 영화입니다. 동시에 미국적 보수화가 일반화된 이명박근혜 정부의 7년 동안, 우리 사회가 이민과 다문화를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시각이 얼마나 보수화됐는지 간접적으로 말해줍니다. 백인과의 결혼은 국제결혼이고 중국 동포나 동남아인과 결혼하면 다문화 결혼이 되는 것부터 보수적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는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모든 것이 나쁠 때는 어떤 것도 문제가 된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크로싱 오버>와 <그랜토리노>에 비하면, <로나의 침묵>은 유럽에서도 심각한 국가적 사안으로 떠오른 이민(불법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절대적 약자인 이민자의 입장에서 그려낸 명작입니다.



‘모든 것에 값이 매겨져 있는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과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영화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로나의 침묵>은 불법이민과 다문화 문제가 부정적 세계화의 결과이자, 일단 거기에 발을 들여놓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는 한 탈출할 방법이 없음을 영상미학으로 보여줍니다. 소비사회는 돈이 없고, 소속이 없지만 삶의 매 순간이 폭력에 노출되는 것과 같습니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멸시킬 때까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을 ‘자기조정 시장’의 폭력적 허구성을 해부했다면, 다르덴 형제는 <로나의 침묵>을 통해 ‘자기조정 시장’의 필연적 결과인 소비사회의 파국적 종말을 그려냈습니다.





허리우드 키드였던 필자는 허리우드 영화의 포로였고, 지금도 비슷한 상태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민과 다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에 관한 한 <그랜토리노>와 <크로싱 오버>를 <로나의 침묵>과 비교해보면 문화적으로도 미국에 종속된 대한민국의 현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샤를리 에브도가 당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갈수록 늘어나는) 테러도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가다 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이슬람 원리주의가 아닌, 프랑스의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불법이민과 다문화 문제가 탐욕의 소비사회와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고 있는 정치경제적 혼란과 인간성 파괴의 냉혹한 현실, 표현의 자유를 악용한 자본주의적 탐욕입니다.



앞의 두 영화를 본 분이라면 다르덴 형제의 철학이 녹아있는 <로나의 침묵>도 보기를 바랍니다. 그 후에 시간적 여유가 되면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대인에게 말을 건네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의 ‘39번째 편지 : 로나, 침묵의 소리’를 꼭 읽어보면 현대의 소비사회와 부정적 세계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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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노을* 2015.01.27 06:48 신고

    하나도 보질않은 영화네요.
    함께 살아가는 우리이길 바라는 맘입니다.

    잘 보고가요

    • 늙은도령 2015.01.27 17:10 신고

      저도 우연히 보게 된 영화들입니다.
      사회적 문제를 다룬 영화를 원래부터 좋아해서...

      물론 다른 영화들도 좋아합니다.
      시간이 없을 뿐이지요.

  2. 공수래공수거 2015.01.27 08:31 신고

    저도 영화에 관심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아
    생소한 영화들입니다

    다운 로드가 가능한지 한번 찾아 보겟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0 신고

      로드가 다 가능한 영화입니다.
      저는 영화팬으로서의 세월이 40년이라....

  3. 꼬장닷컴 2015.01.27 08:40 신고

    본문과 관계없는 댓글 죄송합니다만..
    크린트 이스트우드 정말 오랜만인데 세월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아무튼 오늘 권하신 영화/책 기억해 두었다가 기회가 되면 봐야 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2 신고

      네, 합리적 보수로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정말 멋있었는데, 최근에 들어와서 합리적을 떼려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너무 보수적 관점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4. 耽讀 2015.01.27 10:02 신고

    다문화 시대에 들어선 우리들이 새겨야 할 영화 같습니다. 우리 역시 백인만 외국인으로 생각하고 동남아와 흑인은 외국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 판단입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3 신고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종적 차별은 같은 피부일 때 더 강한데, 세계화시대에서 가난한 나라의 이민자면 그것이 더욱 심해집니다.

  5. 달빛천사7 2015.01.27 10:39 신고

    아직 보지는 않았는데 이번주에 보죵 좋은하루되세염.

  6. 덕산 2015.01.27 12:31 신고

    그랜토리노라는 영화를 봤던 기억으로는 감동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뭔지모를 불편함이 있었던것이 기억이 나네요.
    우선 내 주위에 있는 외국인과 외국인 노동자의 위치를 한번 둘러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4 신고

      네, 인간을 인간으로 볼 때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집니다.
      자본주의는 계급을 없앴지만 너무나 많은 계층을 만들어 차별을 세분화했습니다.



조중동이 개입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념적 양극성을 띠게 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국제시장>의 흥행 성적이 보수 정부와 정당 및 집단에 의해 갈수록 왜곡되고 있습니다. <국제시장>은 한국의 산업화가 일부 지도자의 독점물이 아닌 덕수처럼 평범하고 힘없는 앞선 시대의 아버지들이 이룩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60~70년대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덕수처럼 살았고, 그들의 피와 땀과 희생들이 쌓이고 축적돼 한국은 6.25전쟁의 폐허에서 산업화의 토대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경제를 전혀 몰랐던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죽지 않았다면 산업화의 영광은 그가 아니라 <국제시장>의 주인공들인 덕수 세대에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1978년부터 하향세를 보인 한국 경제는 1979년을 거쳐 1980년에 이르러 극한에 달해, 정치적 정당성이 없었던 독재자 박정희를 권좌에서 끌어내렸을 것이고, 그의 신화도 거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아니 구국의 결단인 군사쿠데타와 유신독재가 압축성장이란 신화가 됐다는 제멋대로의 포장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것입니다. 





헌데 김재규의 저격이 박정희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기회를 박탈했고, 분출하는 민주화 요구에 대한 반작용으로 박정희의 독재가 보수세력의 논리인 민주화의 기초를 다진 산업화로 재포장되기에 이르렀습니다(산업화가 민주화를 견인한다는 것은 일부의 진실일뿐, 유럽과 아시아, 남미 등의 예를 보면 민주화가 산업화를 견인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전국에서 열화처럼 타오른 민주화 요구가 ‘서울의 봄’으로 폭발했지만, 박정희의 양아들로 알려진 전두환이 군대를 동원해 정권을 잡으면서 당시의 덕수들에게 주어져야 했던 산업화의 영광이 박정희에게 돌려졌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었기 때문에 이 땅의 덕수들은 산업화의 주역으로도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영광을 돌리기에는 박정희의 실적이 너무나 초라했고, 군부독재의 정당성을 쥐어짜내기 위해서는 산업화의 영광을 철저히 박정희와 그를 따르던 소수 엘리트에게 넘겨줘야 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약자들인 덕수 세대들은 산업화의 정당한 대가도 챙길 수 없었습니다. 현재의 노인빈곤율 세계 최고가 바로 이것에서 기원했습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라는 말처럼, 독일과 베트남을 거쳐 국제시장까지 이어진 수많은 덕수들이 흘린 피와 땀, 희생이 승자의 기록에 오르지 못했기에 두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역사의 전면에서 멀어졌습니다. 황정민과 오달수의 <국제시장>이 이런 덕수들에 대한 후세대의 세련된 헌사이며 조금은 일방적인 변론일 수밖에 없음이 이 때문입니다.   



영화에 담을 수 없었던 또 다른 덕수들이 노인에 접어든 지금 한국의 노인빈곤율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 것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시장>은 아버지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헌사이자 존경의 표시인 다니엘 데이 루이시 주연의 <아버지의 이름으로>이 관객에게 주는 감동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영화를 보고 자신들이 저지른 비뚤어진 권력암투의 역사를 반성해야 할 조중동과 보수세력이 정치적 목적으로 <국제시장>에 이념적 색칠을 덧칠하는 것은 빈곤에 처해 있는 오늘의 수많은 덕수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두 번이나 욕보이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독재자를 포장하는데 동원됐던 방식으로, 두 번째는 독재자의 딸을 재포장하는데 동원되는 방식으로. 



단지 시대적 환경이 다를 뿐입니다. 첫 번째는 민주주의의 경험이 너무 부족했고 가족의 행복이 우선이어서, 두 번째는 민주주의를 너무나 당연시 여긴 데다 개인의 행복이 우선이어서, 조중동과 그들의 똘마니들이 덕수 세대와 IMF 이후 세대들도 얼마든지 욕보일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박근혜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자처하는 덕수 세대들과 일베충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심각하게 고민하기를 바라지만 기대난망인 것인 현재까지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국제시장>이 덕수 세대들에게 폭발적 반응을 불러올수록, 6070세대들은 그들이 <국제시장>의 주인공이었을 때의 나이와 엇비슷한 현재의 2030세대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그런 간극을 파악하고 있는 조중동과 그들의 똘마니들에게 <국제시장>은 보수층의 결집과 일베의 숫자를 늘릴 비옥한 텃밭이나 다름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잘 차려진 밥상에 숫가락만 얹으면 되고, 청와대는 국정난맥상의 진원지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젓가락만 얹으면 되고, 조중동은 몇 편의 관련 기사로 농약을 뿌려주면 그만이므로.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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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05 06:40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5.01.05 16:56 신고

      네, 가서 자세히 봤습니다.
      저도 한 번 시도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5.01.05 09:55 신고

    본래의 취지,뜻을 제 맘대로 호도하고 있군요
    정말 어처구니 없습니다
    조중동..그리고 이 정권..

    • 늙은도령 2015.01.05 16:57 신고

      네, 원래 정치란 것이 그런데 조중동은 더욱 악용하지요.
      정말 무서운 놈들입니다.

  3. 뭐눈에는뭐만 2015.01.11 23:51 신고

    정치적으로 해석해서 개봉후 악평 퍼부은게 한걸레 오마이같은 좀비찌라시더만...ㅉㅉㅉ 오죽하면 문재인의원이 애국에 좌파우파가 어디겠냐라고 했겠나.



제가 본 유럽 영화 중 ‘멋대로 하라’와 ‘시네마 천국’ ‘인생은 아름다워’ ‘레옹’ 등등보다 더 좋은 영화로 평가하는 것이 ‘베를린 천사의 시’입니다. 이 영화는 영원히 사는 천사가 서커스에서 공중곡예(천사 역할)를 하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 후 반드시 죽는 인간으로 환생해, 여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제3자였던 천사가 인간으로 환생한 첫 경험에서부터 여인이 공연 중이던 장소에 도착했더니 서커스단이 이미 떠난 부분까지입니다. 상당히 긴 시간이지만 그 안에 담긴 철학적인 영상은 그 다음의 10분이 없었다면 거의 완벽한 영화였는데, 그 10분의 사족이 영화적 가치를 대폭 삭감시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천사에서 인간이 돼 처음 느낀 감각은 통증이었습니다. 그가 인간세계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신이 마련해준 황금갑옷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느낀 첫 번째 감각은 지독한 아픔이었고, 그가 처음 만진 물질은 피였으며, 그가 처음 본 색은 붉은색이었습니다.





그가 인간으로 깨어난 곳은 냉전시대의 상징이자 분단의 경계선인 베를린 장벽이었습니다. 그는 또 신이 준 황금갑옷을 사기꾼에 속아 헐값에 팔았고, 그 돈으로 제일 먼저 사먹은 것이 쓰디쓴 블랙커피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삶이 화려해보이지만 실제는 고통과 불행의 연속임을 보여줍니다.



항상 흑백(선과 악, 삶과 죽음)으로 보이던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보였다는 것도 삶에서의 관점이란 이분법적으로 나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춥고 음산한 베를린의 날씨도 천사였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이었고, 짝사랑한 여인을 찾아가는 과정은 셀레임으로 가득했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여인이 서커스를 하던 곳에 도착해보니 그녀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주인공은 그곳에 모여 있던 아이들을 통해 서커스단이 어디로 갔는지 알게 됐고, 그는 아이들이 준 단서를 기초로 여인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는 여인을 만나 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가 서커스단이 어디로 갔는지 알게 된 것에서 끝냈다면 완벽한 영화의 반열에 올랐을 것입니다. 인생은 아무리 고달프더라도 살만 한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주기 위해 주인공이 여인을 찾는 것까지 영화를 끌고 간 것은 너무나 아쉽기만 합니다. 아직도 희망이 있음을 남겨준 그 지점에서 끝났어야 영화적 완성도는 물론 관객에게 여분의 재미를 주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아무튼 이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영화가 미국으로 건너가 리메이크 된 결과가 ‘시티 오브 엔젤’입니다. 당시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두 배우(니콜라스 케이지와 맥 라이언)가 주연을 맡았지만, 어떤 철학적 메시지가 담긴 영화도 미국으로 넘어가면 극도로 단순화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시티 오브 엔젤’입니다.



영화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두 영화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는 마지막 10분만 없다면 롤랑 조페 감독의 인간 구원 시리즈 ‘킬링필드’ ‘미션’ ‘시티 오브 조이’보다 한 수 위거나, 시리즈 중 최고의 작품인 ‘미션’과 비교할 수 있는 불후의 명작에 올랐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윤제균 감독과 투자사가 처음부터 ‘포레스트 검프’의 한국판을 만들겠다며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고, 최고의 배우들을 캐스팅한 ‘국제시장’은 ‘포레스트 검프’의 오마쥬이자 한국판 리메이크의 관점에서 보면 100점 만점에 90점은 줄 수 있는 잘 만들어진(웰 메이드한) 블록버스터입니다.



사회와 계속해서 불화하는 덕수(황정민 분)는 지적 장애가 있었던 검프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덕수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하는 직선적이고 우직한 삶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관통했다면, 검프도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는 직선적이고 낙관적인 삶을 통해 미국의 현대사를 관통했습니다.





검프가 평생을 사랑한 여인이 있어 계속해서 달릴 수 있었다면, 덕수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어 평생을 헌신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검프가 미국 현대사의 중심에서 제국의 역사를 관통했다면, 덕수는 한국 현대사의 주변부에서 질곡의 역사를 관통했습니다. 지적 장애가 있는 검프가 미국의 위대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줬다면, 외골수 덕수는 한국의 산업화를 대변해주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유일 제국이자 예외국가로서의 미국을 그렸다면ㅡ정신지체 장애인이라 해도 미국인이면 세계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ㅡ‘국제시장’은 동족상잔의 비극적 피난민에서 서독으로 파견된 광부, 베트남에서의 장사를 거쳐 국제시장에 이르는 과정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렸습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를 형편없이 리메이크한 ‘시티오브엔젤’에 비하면 ‘포레스트 검프’의 구조를 모방한 ‘국제시장’은 원작에 뒤지지 않는 짜임새를 보여줌으로서 한국 영화의 또 다른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마땅히 칭송받아야 했지만, 모든 공을 독차지한 독재자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와 대가도 받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헌사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아쉬운 것은 원작을 리메이크하거나 모방한 작품들이 모태가 된 작품에 비하면 전작이 가지는 철학적이고 미적인 덕목을 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국제시장’을 관람할 때는 철저히 그 시대의 주역들에 몰입하는 것이 좋습니다. 등장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을 최대화하면 산업화 주역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어우러져 영화적 감동은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국제시장’이 지금 같은 열기를 이어간다면 애국심 마케팅, 방송과 언론의 집중조명, 압도적인 좌석점유율, 단체 관람 등으로 최고 흥행기록을 가라치운 ‘명량’을 넘어설 수도 있습니다. '국제시장'을 이념적으로 접근할 생각은 없지만, 한국 사회의 보수화가 얼마나 많이 진행됐는지는 앞으로의 흥행기록에서 알 수 있을 듯싶습니다.



다만 그렇게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다음에는 다시 냉혹한 현실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갈수록 커지는 부의 불평등과 새로운 엘리트주의의 등장 및 신분이동이 차단된 차별의 현실로 돌아오면, 우리 주변에서 또는 우리의 시선 밖에서 지독한 빈곤과 고독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국제시장’의 낙오자들을 살펴주십시오. 그들도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가장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국제시장’에 내재해 있는, 또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암묵적 합의와 의도적으로 배제된 역사의 실체를 절대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뒤섞여 버렸고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에 점령된 대중문화 시대에, 우리 시대의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려면 ‘국제시장’은 영화관 안에서의 감동으로도 충분할 듯합니다.



‘국제시장’에서 다룬 현대사의 중요 장면들을 가지고 정반대의 영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투자비가 부족할 터이고, 상영관 확보가 힘들 것이며, 언론과 방송의 조명도 받지 힘들 것입니다. ‘국제시장’에 들어간 투자비의 반만 있어도, 상영관수(좌석점유율)의 반만 배정돼도 ‘국제시장’ 이상의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음 작금의 현실이 너무나 척박하기 때문입니다.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을 IMF세대와 삼포세대가 리메이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년쯤 후에 두 세대를 대표하는 감독이 21세기의 ‘국제시장’을 만든다면 어떤 사건들이 선택되고, 어떤 스토리로 녹여서, 어떤 해석을 영상에 담을지 궁금합니다. 성장과 개발이 아닌 분배와 공정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나올 것은 분명합니다.



후세대가 앞선 세대의 피와 땀과 희생의 열매들을 따먹으며 발전했던 인류의 역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퇴행의 시대를 살아가는 불행한 세대들이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처럼 앞선 세대에 대한 헌사를 영상을 통해 재현하기를 바란다면 너무 뻔뻔한 것은 아닐까요?





그들은 '베를린 천사의 시'의 주인공이나 '포레스트 검프'처럼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 자신의 인생 모두를 포기할 여력도 없고, 결혼과 출산까지 포기한 세대라 인류의 진화를 따라가기도 힘들고 미래의 희망을 꿈꾸기도 힘듭니다. 덕수는 노력하면 돈을 벌 수 있었지만, 그들의 후세대는 육체노동 이상의 노력이 필요한 숨막히는 스펙을 갖추고도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합니다. 



덕수는 자신의 미래를 선택을 할 수 있었고, 돈을 벌어서 저축도 할 수 있었지만 그의 후세대는 선택 가능한 직종이란 비정규직이나 알바, 실업자 뿐이어서 저축은 꿈도 못꿉니다. 등록금 대출금과 이자를 갚느라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야지 가족을 이루는 첫 단계인 연애조차 할 수 없습니다. 



IMF세대와 삼포세대가 리메이크하는 '국제시장'이 과연 윤제균 감독처럼 일방적 관점으로만 풀어갈 수 있을까요? 이들이 영화를 통해 앞선 세대에게 '정말 수고하셨습니다'라는 헌사를 바칠 수 있을까요? 그들도 효도를 하고 싶어하고, 가족을 이루어 미래를 꿈꾸고 결실을 맺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들도 자신의 인생역정을 녹여낸 '국제시장'도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런 기회가 주어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현실의 척박함 속에서.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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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수래공수거 2014.12.31 08:30 신고

    국제시장도 일단 자연스레 노이즈 마케팅이 되 버렸네요
    천만 영화가 될지 두고 볼일입니다
    명량까지는 힘이 없어 보입니다

    전 에전의 영화는 잘 모릅니다
    이제 서서히 알아가는중입니다^^

    • 늙은도령 2014.12.31 12:24 신고

      국제시장은 잘 만든 영화인데 정치적 마케팅이 가미되니 노이즈로 변했습니다.
      아무튼 새해에는 좋은 시간 되십시오.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라 할 수 있는 ‘국제시장’을 두고 벌어지는 각종 논란을 보고 있자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중병에 걸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포레스토 검프’는 빈곤의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인 미국에서만 가능한 영화라면 ‘국제시장’은 일제가 남겨놓은 분단의 고통을 안고 있는 한국에서만 가능한 영화입니다.





전체화하는 성향이 있는 국가와 경제성장이 유일한 가치인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대단히 성공한 나라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건너 띈 채 흥남철수에서 시작되는 ‘국제시장’은 지나치게 과장된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경제규모 14위에 오른 경제성장의 역사를 다뤘습니다.



언제나 뛰어나 연기를 보여주는 황정민과 오달수가 이끌어가는 ‘국제시장’이 산업화의 숨겨진ㅡ또는 정치적으로 동원되거나 그 이유 때문에 지나치게 축소된 이름 없는 주역들에게 바치는 헌사임은 그래서 당연합니다. 오로지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그분들에게 저 또한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경의를 표합니다.



그들의 삶을 수십 년 간 지켜본 필자이기에, 그들의 헌신과 희생이 한국을 경제규모 14위의 선진국으로 만든 진정한 동력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극소수의 승자나 강자의 기록이 아닌 절대다수의 패자와 약자의 기록이어야 한다면, 한국 산업화는 그들의 피와 땀, 희생의 기록입니다.





헌데 말입니다, 지금의 한국을 만든 그들의 대부분이 이제는 벗어날 수 없는 빈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 빈곤이 그들이 그렇게 지키려 했던 자식과 손주들에게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노인빈곤과 복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보다 못하다는 통계가 나왔고, 자식들은 낀 세대로 외면받고 있으며, 손주들은 88만원 세대나 삼포세대라고 불립니다.



‘이 고생을 우리 후손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라는 ‘국제시장’의 주역들 중 과연 몇 %가 그들의 피와 땀, 희생에 걸 맞는 대가를 받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삶을 누리고 있을까요? 국가는 세계 최고의 빈곤국ㅡ전쟁이 끝난 해의 통계니 그럴 수밖에 없다ㅡ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음했지만, 그들과 그들의 가족과 후손은 그에 합당한 삶의 질을 누리고 있을까요?





‘국제시장’이 산업화 주역들에 대한 헌사로서 충분한 영상미를 담아냈지만, 여전히 고달프고 힘겨운 그들의 현실은 담아내지 않았습니다. 윤제균 감독이 오로지 그들에 대한 헌사만 얘기하고 싶었다면, 그는 대단히 성공한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한국을 분배가 아닌 성장의 관점에서만 보면 대단히 성공한 나라인 것처럼.



'포레스토 검프'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 '람보'와 '록키' 등을 영화적 재미로만 볼 수 없었던 것은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을 영화적 재미로만 볼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흥남철수부터 낙동강 넘어까지 이어진 피난행렬 때 미국 B-29의 무차별 폭격에 저희 어머님 친척분들이 돌아가신 것처럼, 현대사의 질곡을 넘기지 못한 분들도 많고 노력의 대가를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분들은 더더욱 많기 때문입니다. 

      



P.S. 영화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과포장된 ‘해운대’와 비교하면 ‘국제시장’이 낫지만, 윤제균 감독이 한국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평가는 동의하기 힘드네요. 윤 감독이 보수의 아이콘이 될 가능성은 상당히 높지만, 아직까지는 영화로 보여주는 철학적 깊이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비해 너무 떨어집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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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교육 2014.12.30 05:08 신고

    성장과 분배... OECD 몇법째니 국민소득 얼마니 한느 수치 노름... 민초들에게는 그림 속에나 있습니다.
    분배없는 성장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림의 떡입니다.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 작품들이 좀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4.12.30 05:50 신고

      네, 그런 영화가 잘 만들어진 형태로 나왔으면 합니다.
      문제는 제작비와 상영관 확보인데 박근혜 정부 4년차를 넘어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국제시장과 정반대의 시각에서 현대사를 다루고 싶은 영화사가 있다면 제가 시나리오도 써줄 생각이 있습니다.
      영화광이었고 지금도 영화광인 저로서는 정말 녹여내고 싶은 한국 현대사의 내용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4.12.30 08:27 신고

    국제 시장 영화를 가지고 보수층에서 이용하는듯 합니다
    제가 보는 메시지는 "아버지"였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보면 당연히 원래의 색깔을 차단합니다
    만일 윤제균 감독이 그러한 의도였다면 영화의 많은 부분을
    다르게 표현할수도 있엇을겁니다

    보수들이 변호인에 대항하고픈 마음으로 이 영화를 이용한다는
    느낌입니다
    거기에 진보들도 덩달아 춤추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4.12.30 11:32 신고

      영화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는 잘 만들었고 산업화 주역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그분들이 가난하고 자식과 손주들이 빈곤의 대물림에 처한 상황을 말한 것이지요.
      우리는 그런 부분을 강조해 노인빈곤과 청년실업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찬사가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면 지금보다 수천 배 더 해야지요.
      헌데 이 영화는 그분들에 대한 헌사로서는 최고이지만, 그것으로 또 다른 현실에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그분들을.
      전 그것이 답답할 것입니다.

  3. 바람 언덕 2014.12.30 12:09 신고

    요즘 논란이 많네요, 이 영화.
    보질 않아서 글로 옮기진 않았습니다만, 대충 보니.
    어떤 내용인지 감이 잡히더군요.
    .
    .
    .
    올해도 하루 밖에는 안 남았네요.
    마무리 잘 하시고, 멋진 새해 맞이하시길...

    • 늙은도령 2014.12.30 12:11 신고

      영화는 좋은 영화입니다.
      헌데 영화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들에게 바치는 헌사라면 그것으로 충분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헌사가 갈등을 더 부추기는 원인이 됩니다.



대한민국의 영화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모두를 만족시킬 결과란 없다고 해도 대종상처럼 선택이 제한돼 닫힌 느낌의 영화상과, 청룡상처럼 선택이 다양해 열린 느낌의 영화상이 있습니다. 대중문화가 내적 검열의 한계를 넘나들며 예술적 다양성과 대중의 욕망 사이의 접점을 찾는 것이라면 다양한 선택이 돋보이는 청룡상이 대종상보다는 보다 축제다워 보입니다.



                                                 


올해의 대종상과 청룡상을 비교해보면 레드카펫을 빛냈던 여배우의 의상에서, 시대정신이 담겨 있는 최우수작품상까지 어떤 영화제가 예술성과 상업성이 교차하는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상자와 수상자 위주의 대종상에 비해 후보를 비롯해 다양한 연기자들이 참석한 것만으로도 청룡상은 대중문화의 꽃인 영화제의 의미를 잘 담아냈습니다.



역대 최고 흥행기록을 갈아치운 <명량>이 거의 모든 상을 휩쓸어 버린 대종상에 비해, 방송과 언론의 조명 없이도 천만 관객을 넘어선 <변호인>이 최우수작품상과 남우주연상(송강호) 등 4관왕을 차지한 것은 다양성과 열린 소통을 중시하는 청룡영화상이 아니면 나오기 힘든 결과였습니다. 





특히 35회 청룡영화상의 히로인인 여우주연상은 파격적 선택이 돋보이는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전도연, 김희애, 손예진, 심은경이라는 쟁쟁한 후보들이 즐비한 가운데, 밀양성폭행 사건을 다룬 독립영화인 <한공주>에서 열연한 천우희가 수상자로 발표되는 순간의 짜릿함과 하염없는 눈물 속의 수상소감은 청룡영화제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극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주체할 수 없었던 천우희의 눈물은 희생당한 여고생의 영혼이 그녀의 몸을 빌려 흘리는 눈물 같았고, “유명하지 않은 제가 이렇게 큰 상을 받다니”라며 입을 연 후 “앞으로도 독립영화, 예술영화에 관심과 가능성이 열렸으면 좋겠다”는 수상소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거대 공룡이 독점하고 있는 영화생태계에서 독립영화와 예술영화에 작은 위로와 열악한 환경에 굴복하지 말라는 작은 격려가 됐습니다. 





35회 청룡영화상은 대중과 다양한 영화와 배우로 소통하려는 열린 선택의 미덕을 보여주었습니다. 거대한 기획의 허리우드도 독립영화와 예술영화가 없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입니다. 갈수록 자본의 논리만 강화되고 있는 한국 영화생태계에서 천우희 여우주연상 수상은 상상력의 다양성이 한국영화의 경쟁력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공주>를 가슴 아프게 관람한 영화광으로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천우희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꽃다운 희생자를 열연한 천우희씨, 유명한 배우만 큰상을 받는다면 그것만큼 재미없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영화가 대중이 꿈꾸는 어떤 것이라면, 꿈을 연기하는 배우는 꼭 유명할 필요는 없답니다. 님의 연기는 충분희 훌륭했고, 상은 그에 합당한 관객의 선물이며, 희생자를 잊지 않겠다는 대중의 약속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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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달빛천사7 2014.12.18 08:52 신고

    어제 인터넷검색하다 보긴했는데 여우주연상 한공주 ㅋㅋ 좋은하루되세요

  2. 공수래공수거 2014.12.18 09:07 신고

    한공주 좋은 영화입니다
    밀양여중생 사건을 영화화 한...
    다만 후보작의 손예진의 작품이 그대로 해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저는 신인 여우상 받은 김새론이 좋았습니다
    도희야..영화도 참 좋은 영화입니다

    • 늙은도령 2014.12.18 09:10 신고

      손예진은 대종상에서 받았으니 만족하겠지요.
      김새론 영화는 보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다양성은 영화의 생명입니다.

  3. 어린나그네 2014.12.18 22:09 신고

    오늘도 머물렀다 많은 영감받고 갑니다~




학생들은 그를, 자신들의 진정한 캡틴이자 친구이며 스승인 그를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부모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기계로 전락한 자신들의 젊은 날에 무엇이 진정한 교육이고, 누구도 아닌 나만의 걸음으로 가야 하며, 카르페 디엠 즉 현재를 즐겨야 하며, 언제나 다른 각도에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해야 하며, 평생을 추구해야 할 자신만의 가치를 찾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해준 사람이다. 그의 수업방식은 우리가 살아있는 존재임을 자각시켜 주었고, 서툴고 억압받고 있지만 여전히 푸르른 청춘에게 가슴 뛰는 하루하루를 선사해줬다. 





아버지의 압박을 견딜 수 없었던 친구의 자살도 그의 잘못이 아니다. 이 숨막히는 권위와 억압의 체제에 길들여진 채 그를 실패한 선생이자 스승으로 보낼 수 없다. 학생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한 명의 학생이 권력의 정점에 있는 교장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책상 위로 올라선다. 그것은 억압의 체제에 대한 작은 항거이자, 처음 맛본 자유의 소중함을 이어가기 위함이며, 영혼없는 육체를 지닌 공부하는 기계로 체제의 엘리트가 되는 순탄한 길을 거부하는, 진정한 스승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있고, 마지막 인사이자, 학생들이 자신의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우뚝서는 순간이었다. 



                                                                       


다른 학생이 뒤를 이어 책상 위로 올라섰고, 그렇게 여러 명의 학생들이 책상 위로 올라와 떠나는 스승에게 자유를 향한 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아니 이제부터 시작됐음을 젊음의 패기로 보여줬다. 수업 중에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가서 짐을 들고나온 선생은 학생들의 용기있는 행동에 고마움을 표하며, 안타까움이 담긴 밝은 웃음 속에 교실을 나올 수 있었다. 영화는 그렇게 끝났고 그 다음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관객들 모두가 책상 위로 올라선 학생들의 미래가 어떠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교육이란 그런 것이고, 뒤를 계산하지 않는 청춘의 순정한 용기와, 체제에의 순응을 요구하는 일방적 권위에 저항하는 정의와, 자유를 향한 뜨거운 열정이 그러한 것이었다. 고등학생에 불과한 어린 나이이지만 분명한 자아를 지닌 삶의 주체로서,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체제에 저항해 책상 위로 올라선 학생들은 떠나는 스승이 가르쳐준 자유의 진정한 가치를 지켜나갈 것임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이제 시작하는 그들은 앞으로의 삶도 능동적으로 살아갈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들은 기득권과 체제가 요구하는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볼 것이며, 자살한 친구를 위해 세상을 좀 더 자유로운 곳으로, 충분히 살만한 곳으로, 언제나 사람이 먼저인 곳으로 만들어갈 것이다.





캡틴, 오 마이 캡틴.. '죽은 시인의 사회'의 로빈 윌리엄스가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했다. 우리 시대의 명배우가 지난 11일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굿모닝 베트남' '굿윌헌팅' '사랑의 기적' '피셔 킹' '버드 케이지' '미세스 다웃파이어' '에이 아이' '후크' '더 앵그리스트 맨 인 브루클린' '바이센테니얼 맨' '어거스트 러쉬' '쥬만지' '박물관은 살아 있다' '등에 출현해 우리를 웃기고 울렸던 로빈 윌리엄스의 갑작스런 사망(63세)은 그만이 가진 우수 어린 특유의 눈빛과 너무나 선하고 환한 웃음을 다른 영화에서는 볼 수 없다는 뜻이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의 사망과 함께 알려진 그의 인생 역정은 화려하게만 보였던 할리우드 스타들의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그가 평생을 알코올 중독과 마약 중독과 싸우면서, 최근에는 심장수술을 받고 건강 상의 위기를 극복했음에도 최후에는 심각한 우울증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하니, 스타의 삶에 깊게 드리워진 그늘의 깊이를 추측하기도 만만치 않다. 유독 투명한 웃음을 많이 선사하고, 따뜻한 가슴을 지닌 의사 역할을 많이 맡었던 그였는데.. 그는 자신의 상처는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다양한 종류의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활들이란 현대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보여준 '피셔 킹'을 제외하면, 활달하고 밝은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에이 아이'와 '훗크'에서 로빈 윌리엄스와 함께 작업했던 스티븐 스틸버그 감독도 "로빈 윌림암스는 번개 같은 코미디의 천재로 우리의 웃음은 그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천둥 같은 존재였다"고 고인을 평가한 뒤, "나의 친구인 그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며 재능 있는 명배우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그의 연기란 늘 그런 영혼의 울림을 지닌, 막 잡아올린 물고기처럼 자유를 향해 파닥파닥 몸부림치는 그런 것이었다.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 오바마 대통령이 그의 트위터에 올린 글처럼, 로린 윌리엄스는 대체 불가능한 배우였다. 그가 영화와 TV드라마에서 보여준 연기는 현존하는 배우 중에 대체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연기를 통해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한 다재다능한 배우였다. '죽은 시인의 사회'와 '피셔 킹' '굿윌헌팅'과 '사랑의 기적'에서 보여준 연기들을 번갈아 보면 그의 능력이 얼마나 출중한지 알 수 있다. '굿모닝 베트남'에서 보여준 다양한 목소리 연기란, 어느 배우도 흉내낼 수 없는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남아 있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이다. 필자처럼 죽음에서 시작해 탄생으로 가는 삶을 살고자 해도 영혼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영원히 떨칠 수 없는 한계이자 투쟁의 대상이다. 평소 사랑하고 좋아했던 지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날 때마다 가슴 한 곳이 뻥하니 뚫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곤 했다. 최근에는 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매우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죽음을 알고 나서 며칠 간 홀로 가슴앓이를 했는데, 로빈 윌리엄스의 죽음도 비슷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영원한 피터팬 같던 윌리엄스의 쓸쓸한 퇴장은 삶과 죽음이 만들어내는 영원한 딜레마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음을 말해준다.  





아케데미 시상식 재단은 공식 SNS계정을 통해 "Genie, you're free(지니 당신은 자유입니다)"라고 애도를 표했고, 윌리엄스의 딸인 젤다 윌리엄스는 아버지의 영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바쳤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내용을 차용했다. "사랑해요, 그리울 거에요. 하늘을 계속 볼게요...당신은 그들과는 다른 별을 갖게 될 거에요. 당신이 밤에 하늘을 바라보게 되면, 내가 그 별들 중의 한 별에서 살고 있고, 그 별들 중의 한 별에서 내가 웃고 있을 거에요. 그러면 당신은 마치 모든 별들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일 거에요. 당신은 웃을 줄 아는 별을 가지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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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덕산 2014.08.13 09:05 신고

    "죽은시인의 사회"에서 던져준 메세지 이 글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 늙은도령 2014.08.13 19:48 신고

      우리나라 교육자들이 실펀했으면 하는 영화였죠.
      공부는 평생할 수 있는데 자아의 정립은 어려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강요된 관점을 주고, 질서에 복종하는 것만 가르치면 미래의 삶은 자기 것이 되지 못합니다.



최근 두 편의 영화가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모든 기록이란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한국의 블랙버스터 < 명량 >을 필두로, 손익분기점을 일찌감치 넘은 < 군도: 민란의 시대 >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이 두 편의 영화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일일 상영 스크린 수가 1,000개를 넘어선다는 점에서도 압도적인 흥행을 거두고 있습니다. 지난 6월 개봉했던 <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 >의 흥행과 비교해도 이 두 편의 한국 영화의 선전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 중에서 최고이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 명량 >은 개봉일 당시의 스크린 수가 1,159개였지만 지난 일요일부터는 무려 1,586개의 스크린에서 상영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최대 상영 횟수가 무려 7,960회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는 올해에 개봉된 한국영화로는 최대의 스크린 점유인데, 멀티플랙스들이 <명량>의 스크린 수와 상영 횟수를 올리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입니다. 





< 군도: 민란의 시대 > (이하 '군도')도 비슷합니다. 개봉 첫날의 스크린 수가 1,250개였지만, 26일에는 1,394개까지 늘어났고, 상영 회수는 <명량>에 버금가는 7,119회에 이른다고 합니다. 위대한 영웅인, 그래서 성웅으로 추앙받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상업적인 영상과 뛰어난 시나리오로 멋지게 풀어낸 < 명량 >에 밀리기 전까지는, <군도>의 1주일간 독점했던 스크린 수는 1,000개 이상을 꾸준히 유지했습니다.



헌데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8월 현재 국내 스크린 수는 모두 2584개입니다. 결국 <명량>과 <군도>가 전체 스크린의 60% 이상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명량>과 <군도>가 잘 만들어진 영화여서 이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두 영화의 스크린 독과점이 최고의 흥행신기록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판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가 '어떤 인사가 유명한 이유는 그가 유명한 인사였기 때문에 유명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떠오릅니다.




다음이미지에서 인용



이 두 영화의 스크린과 상영 횟수의 독과점은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얼마나 기형적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말해줍니다. 실제로 한국 영화의 점유율을 계속해서 올려주고 있는 두 영화와 전체 유료관객수가 10~20만을 넘은 두 편의 영화를 빼면 나머지 영화들의 스크린 확보수와 상영 횟수는 7%에 대에 불과합니다. 3일을 기준으로 할 때, 전체 상영 영화가 62편이니까 58개의 영화는 철저한 찬밥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러니 다른 영화들이 작품성과 흥행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고 해도 30~50만 명에 이르는 관객수도 기록하지 못한 채 사장되고 있습니다. 같은 블록버스터인 <해무>와 <해적>마저도 희생양이 될 듯합니다. 물론 이런 영화들은 곧바로 케이블채널과 영화전문채널로 넘어가거나 동시 상영을 하는 것으로 겨우겨우 투자금을 환수하는 실정이지만, 이런 스크린 수과 상영 횟수의 독과점은 한국영화계를 구조적으로 질식시키는 요인을 작용하고, 아무리 뛰어난 작품성을 지녔다 해도 상업적인 요소가 부족한 영화들은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이런 기형적인 독과점 현상은 CJ, 롯데, CGV, 메가박스 등처럼 대기업들이 영화의 제작과 배급, 유통까지 장악하면서 벌어진 현상입니다. 이런 독과점 현상 때문에 제작비 10억 미만의 영화들(총 183편 중 133편으로 73%에 이른다)의 매출액은 2.1%, 전체 관개 수는 2.2%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삼성전자나 LG전자 등의 독과점 문제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막상 그 시대를 대변하는 문화 영역 독과점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미국조차 블록버스터라 해도 전체 스크린의 20% 정도를 차지할 뿐입니다. 




오로지 수익성만 따지는 이런 약육강식의 왜곡된 구조는 한국 영화산업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 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다양한 기호와 욕구마저 획일화시킵니다. 현대의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영화산업이 탐욕스런 수익의 논리만 추종하면, 문화의 다양성은 고사하고, 영화산업의 기반이 되는 문학의 세계마저 천민자본주의에 종속되게 됩니다. 대기업이 제작과 배급, 유통까지 수직계열화를 하면 우리나라의 문화산업은 수익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전체주의적 경향을 띠게 됩니다.






신자유주의적 논리의 무서움은 이렇게 정신과 문화의 영역마저 돈의 논리에 지배받도록 만듭니다. 연일 한국영화계의 신기록을 작성하고 있는 <명량>의 주인공,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은 12척의 배로 수백척에 이르는 일본의 함대를 무찌른데 있음에도, <명량>이란 영화로 되살아난 2014년의 이순신 장군은 대기업의 독과점 덕분에 일본의 해군이 아닌 한국의 다양한 영화들을 지키려는 12척의 배를 수장시키고 있습니다. 



경제의 생산방식과 사회적 교환방식에 집중하느라 마르크스가 등한시했던 것 중에 하나인, 문화의 다양성이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그래서 영상산업의 독과점을 염려했던 벤야민, 아도르노, 부르디외 등의 《미학이론》들도 12척의 배에 실린 소규모 한국영화들과 함께 깊은 바다 속으로 침몰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투자자이자 배급자이며, 유통자인 거대 기업에 찍히면 제작자와 감독은 물론, 평론가와 소비자의 다양한 선택까지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세삼 부각시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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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달빛천사7 2014.08.06 05:53 신고

    명랑이 드디어 대박이군염 잘보고 감니다. ㅎㅎ.

  2. 새 날 2014.08.06 11:13 신고

    스크린 점유율 때문에 히트친 부분도 분명 맞지만, 명량의 히트는 현실의 갑갑함을 달래려는 서민들의 간절함이 묻어있는 듯해요

    • 늙은도령 2014.08.06 15:00 신고

      그것이 상업적인 요소를 잘 녹여넨 것입니다.
      이순신과 아들 간의..
      12척으로 일본 배 200여 척을 무너뜨리는 것 등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습니다.
      영화를 비판하려는 게 아니라 영화를 제작, 배급, 유통까지 대기업이 주무르니 다른 좋은 영화들의 설자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문화는 한두 편이 대박을 치는 것보다 여러 개가 소박을 칠 때 문화적 다양성도 커지고, 서로 함께 사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3. 참교육 2014.08.06 19:26 신고

    명랑... 저도 내일 아침 부러기기로 했습니다.
    많이 기대됩니다.

  4. 양성호 2014.08.06 21:25 신고

    임진왜란 초등학교 단체관람때부터 봐왔는데 뭔갑자기 이순신열풍이야 휴가피크때 태풍오고 날씨더워 에어컨바람에 데이트족들 몰려 한마디로 소가 뒤로가다 쥐잡은꼴이네 이순신을 알고싶으면 솔직히 김명민이 주인공으로 나온 테레비드라마를 보던지 칼의노래를 읽는게 낫다고 본다

    • 늙은도령 2014.08.06 22:18 신고

      이순신에 대한 연구조차 잘 안 된 곳이 한국입니다.
      외국에서 더욱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순신 장군에 대해 공부하고 제대로 알려면 기본적인 인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5. 2014.08.06 22:24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4.08.06 23:01 신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 동안 별로 신경쓰지 않고 글만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용방법은 살펴보지 않았는데, 독자를 위해서라면 제가 바꾸어야죠, 즉각즉각.
      ㅋㅋㅋ
      감사합니다.

  6. 쿠쿠쿠(윤약사) 2014.08.06 22:37 신고

    아이들 만화영화마저 배급사에 따른 스크린 할당의 차이가 확연하더라고요.
    <드래곤 길들이기2> 이외에는 애들이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없을 지경이에요.ㅠㅠ
    좀 더 선택의 여지가 많았으면 좋겠는데, 이미 <명량>,<군도>가 성인 스크린 점령...

    이 부분이 많이 아쉽더라고요.

    • 늙은도령 2014.08.06 23:03 신고

      다양성을 죽이면 그 피해는 아이에게도 미칩니다.
      문화가 대기업의 먹거리로 전락하면 언제나 국가주의, 애국심, 지독한 상업성, 선정주의 등등으로 얼룩지게 됩니다.
      그래야 수익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며, 소규모자본으로 진행되는 영화계의 아웃사이더와 비주류들도 자신의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캐치온에서 '더 프라미스드 랜드(The Promised Land)'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본 시리즈로 유명한 맷 데이먼이 주연한 이 영화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대응부터 유병언의 죽음과 그의 아들의 체포까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온갖 음모론이 대한민국을 종횡무진으로 휘젖고 있는 상황에서 재미있는 시각을 던져줍니다.

 

 

                                                     

                                                                                     다음이미지에서 인용

 

 

제가 몇 편의 글에서 밝혀듯이 음모론에는 사실과 진실을 물타기 하기 위한 역음모론이 있습니다. 이를 테면 A라는 언론사 오너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죽었다고 합시다. 그러자 그의 갑작스런 사망을 두고 온갖 음모론이 나돌기 시작합니다. 그런 음모론 중에 A가 B라는 신인여배우나 C라는 톱스타의 스폰서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집니다. 여러 가지 근거들이 동원되면서 A의 사망에 포함된 추문들이 극에 달해 언론사는 빼도박도 못하게 됐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이 커지자 A가 오너로 있던 언론사에서 역음모론을 흘립니다. B와 C가 문란한 사생활 때문에 A가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고 말입니다. 헌데 B와 C는 그 병에 걸리지도 않았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 밝혀집니다. 이로써 사망한 A가 B와 C와 수시로 성관계를 갖는 대가로 스폰서를 했다는 음모론이 허무맹랑한 것으로 결론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다른 음모론들도 허구로 취급되며 얼마 가지 않아 시중에서 사라집니다.

 

 

여기서 A와 B와 C의 실제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음모론 때문에 사실에 근접해 있는 나머지 음모론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A의 죽음도 불행한 교통사고로 확정됩니다. A를 둘러싸고 있던 지난 날의 풍문들도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A가 오너로 있던 언론사는 명예를 회복하고 예전의 영향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영화  '더 프라미스드 랜드(The Primesed Land)'는 이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요즘 미국의 새로운 먹거리 등장한 세일가스 개발을 소재로 가스가 매장된 것으로 확인된 지역을 '글로벌'이라는 석유회사가 매입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습니다. 내용의 핵심은 거대한 석유시추기업인 글로벌사가 성실한 주인공을 통해 지역 주민을 설득하게 하면서도, 환경단체회원을 가장한 또 다른 직원을 파견해 지역주민들의 반대를 이끌어냅니다.

 

 

그런 다음에 환경단체회원이 지역주민들을 반대로 이끄는 과정에서 했던 말들이 거짓임이 드러나고, 이런 사실에 분노한 지역주민들은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아섭니다. 하지만 맷 데이먼이 거짓말을 한 환경주의자가 글로벌사에서 파견한 직원임을 알게 됩니다. 지역 주민들의 최종 투표가 있기 전날에 알게 된 사실 때문에 주인공은 고민하게 되고.. 그 다음은 너무 뻔하게 진행됩니다, 지극히 미국적인 방식으로.   

 


다음이미지에허 인용

 

 

영화적인 요소로 평가한다면 석유시추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과 졸부(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비참한 최후를 그린 'There will be blood'보다 많이 떨어집니다. 미국이 얼마나 위대한 나라인지 바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허풍과 자랑질을 떨었던 '포레스트 검프'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기도 합니다. 미국의 헐리우드가 맡은 역할이 미국의 악행에 대한 세탁이 전문인 까닭에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었지만, 음모론과 역음몰론이 난무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더 프라미즈드 랜드'가 던져주는 함의는 결코 작지 않다고 보입니다. 

 

 

뭐만 하면 빨갱이 타령을 해대던 자들이 세월호 참사가 100일을 넘어서고, 7월 재보선이 코앞에 다가오자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에 비유하며, 보상과 배상 및 특혜의 차원으로 프레임 전환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무려 250명이 넘는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해 304명(무조건 그 이상이다)에 이르는 국민의 죽음 앞에서 전통의 빨갱이 타령을 써먹을 수 없자, 돈과 특혜의 문제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내수경제 침체가 세월호 참사 때문이라고 말하는 대통령에서부터 자식 팔아 목돈 챙겼으면 입 닥치고 살라는 보수단체 회원까지 단 3일 만에 프레임 전환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코앞에 닥친 재보선에서 국회 과반수를 유지하는 것이니 무슨 짓인들 하지 못할 것이며, 폭력과 폭언을 사용하는 것도 마다할 이유가 없겠지요. 



현 집권세력의 역음모론이 세월호 유족을 돈에 환장한 사람들로 만들다가 국민적 반발이 심하자, 이제는 배상과 보상 및 특례의 문제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박근혜와 새누리당이라면 무조건 편을 드는 유권자가 최소 40%에 이르는 나라가 우리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집권세력의 역음모론은 계속해서 분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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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교육 2014.07.27 11:06 신고

    반드시 진실을 밝혀내야 합니다.
    그것이 유가족이나 아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요 속죄의 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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