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죠? 제 말이 맞죠? 호호호. 동철 오빠가 얼마나 음흉한지 기자님은 모르실 거예요?”
“야 그러면, 책을 권한 재영씨도 나처럼 음흉하다는 얘기잖아? 두 남자를 한 방에 보내는구먼.”
“일타쌍피야!”
“아이고, 유구무언이올시다. 헌데 듣고 보니 니 말도 일리는 있네. 그나저나 재영씨, 『거대한 전환』은 다 읽지 못했습니다. 시간을 갖고 집중해서 읽어야 할 책 같아서.”
재영은 유리와 동철의 주고받음이 마치 잘 짜진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럴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것이 아닌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누가 뭐래도 그녀는 한국 최고의 슈퍼스타고 동철은 최고의 MC가 아닌가. 20세기의 정치ㆍ경제학 서적 중 가장 아름다운 어휘를 사용해 가장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준 『거대한 전환』이라 해도 조금 늦게 읽는 것이, 아니 아예 읽지 않는다 한들 무슨 문제가 되기나 할 일인가?
“저도 몇 번을 읽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저자의 통찰에 다가갈 수 있었지요.”
“두껍기는 얼마나 한데? 깨알 같은 글씨와 수백장에 이르는.. 어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
재영은 유리가 툭 던진 말이 의미심장했다. 단서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기자로써의 경험이 말해주지 않는가?
‘어, 그러면 책을 사서 조금이라도 읽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앞의 농담은 정말로? 이 여자 어쩌면, 상상 이상일 수도 있겠어?’
재영은 유리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음에 가해진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는 유리에 대한 판단을 완전히 뒤집을 수밖에 없었다. 정현 선배에게서 받았던 것을 빼면, 그것은 철저하게 멀리했던 이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자 신선한 충격이었다. 재영이 유리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 중에 종업원이 소주 두 병과 맥주 세 병, 야채샐러드와 글라스 잔을 들고 왔다.
소맥이여 영원하라!
재영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 느닷없는 생각이 평상시의 재영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정작 재영 본인 인식하지 못했다. 지금 그는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살고 있는 환경에서 떨어져 나와 미지의 세계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제가 동철씨에게 괜한 책을 권해나 봅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유리씨에게 불통이 튀다니, 여러 가지로 송구스러울 따름이네요.”
“송구스러울 것까지는 없구요. 알면 됐어요, 호호. 이것도 인연인데, 제가 한 잔 따라 드릴게요. 평생의 영광인 줄 아세요, 기자님.”
“이것 봐라, 나한테도 안 하던 짓을? 너 사람 차별하기냐?”
“짓이라니? 아, 우월한 내가 참아야지. 차별 하냐고? 당연하지! 짤막하고 못생긴 오빠에 비하면 기자님은 조각미남에 가까워. 따라서 차별은 당연한 거야.”
“하하하! 조각미남이라니요?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동철씨보다 조금은 나은가 보죠, 유리씨?”
차별이란 단어만 들어도 치를 떠는 재영이 유리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그는 그렇게 유리의 영혼에, 현재의 상황에 젖어 들고 있었다, 한지에 스며드는 먹물처럼.
“어, 재영씨도 그러깁니까? 저 그러면 삐칩니다? 제가 삐치면..”
“놔두세요, 삐치는 게 장기이니까. 열등한 인간들의 최대의 무기잖아요. 별 효과도 없는 것을, 뭐 그렇게 내세우는지? 그런데 기자님, 미디어는 재미있으면 그만 아닌가요? 거기서 재미 이상을 볼 필요가 있나요? 그 사람, 닐 뭐지?”
유리가 갑자기 화제의 방향을 돌렸다. 그 변화무쌍함이 재영은 새삼 놀라울 뿐이었다. 사고가 자유롭지 못한 그로서는 하나의 생각에서 다음 생각으로 갈아타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어떤 매개체라도 없으면 항상 하나의 생각에 골몰해 있기 일쑤였다. 재영은 사고의 체계를 거치지 않아도 일관성을 유지하는 그녀의 분방함이, 그러면서도 가볍지 않은 성품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동철이 조금은 불쌍했지만.
“나 삐쳤어!”
“하하, 닐 포스트만입니다.”
“그래요, 닐 뭐시기. 다른 것은 모르겠고, 전 ‘쇼비지니스 시대’와 그 뒤에 나오는 몇 개의 장들만 더 읽었는데, 도대체 뭔 말인지? 어쨌든 TV는 재미있어야 하지 않나요? 전 TV의 가치가 정보나 가치의 전달이 아니라 재미의 추구에 있다고 봐요. 그것이 TV의 속성이라 생각해요.”
“유리씬, 왜 그렇게 생각하죠?”
재영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가 바라던 순간이자 터닝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토론이나 논쟁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질 생각이 없고, 자신도 충만했다. 다만 상대가 유리라는 것이 문제였다. 재영은 그래서 유리의 생각을 조금 더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 하냐고요?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TV가 정치나 경제, 철학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잖아요? 중요한 건 대중의 기호 아닌가요? 그게 아니라면, 뭐 하러 TV를 만들었겠어요?”
매스 미디어의 총아인, TV가 만들어낸 슈퍼스타다운 발상이었다. 단순하고 지극히 표피적이지만 정확한 이해였고, 무엇보다도 그녀가 말하니 정말 그럴 듯했다. 재영은 이럴 때면 진화의 과정도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존재 자체가 매력인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그는 인간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누적적인 자연선택도 때론, 외형의 우수함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어떤 테크놀로지가 적용됐던 간에, TV는 대중 친화적 매체라는 말인가요?”
“그런 어려운 말은 잘 몰라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중의 기호라고 봐요. 그 기호는 처음부터 재미였고요. 아무리 좋은 방송이라도 재미가 없으면 시청률이 떨어지고 방송국은 광고가 줄어들게 되고, 가수와 탤런트, 다수의 연예인들은 설 땅을 잃어버리게 되요. 기획사와 열악한 임금에 허덕이는 스태프들은 더 힘들어지겠고, 자연히 작품의 질도 떨어질 거예요. 그것이 대중이 바라는 것도 아니고, 해피한 것도 아니잖아요? 반대의 상황이 모두에게 좋은 게 아닌가요? 왜 재미가 문제가 되죠? 알고 보면 나도 얼마나 재밌는데?”
유리가 이번에는 나름, 논리 정연한 말로 재영을 압박했다. 재영은 유리가 공리주의적 사고의 함정과 승자독식의 룰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논리는 파이를 키우는 데만 집중해 분배의 논리가 무시되기 일쑤다. 이 때문에 파이를 키우기 위해 ‘자본가가 흘린 찌꺼기가 노동자의 욕망을 자극’해 사람들로 하여금 0.001%도 안 되는 대박의 꿈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자본주의적 먹이사슬로 귀착된다.
게다가 계량화할 수 있는 쾌락(또는 행복)은 물질에 기반한 것일 수밖에 없고,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쾌락(또는 행복)의 기준은 단순화된다. 그 과정에서 소수의 이익은 무시되기 일쑤다. 다수(이 표현에도 문제가 있다. 다수라는 기준은 무엇이며, 출생에 의해 출발점이 다른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기회의 불평등과 이익의 차이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 승자독식의 룰이 경제와 사회 전반으로 퍼지는 상황에서 지난 시절보다 물질적 풍요와 편리가 전반적으로 늘어났으니 다수의 이익이 증가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질적 풍요와 편리의 반대급부인 자원의 고갈과 환경오염, 지구온난화라는 기후변화가 초래하고 있는 파국적인 결과는 어떻게 생산 원가에 반영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이유만으로 정당성이 보증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승자가 가져가기 때문에 약자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는 비정한 승자독식의 룰은 민주주의의 가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매력이 넘쳐 주체하기 힘든 슈퍼스타 앞에서 뭐라고 말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악의가 없는 견해를 표방할 뿐이며 자아도취적 성향이 강하다 해도, 나르시스와는 다른 사랑스러운 환상에 빠져 있는 여인에게 논리의 우월함을 내세우는 어리석은 남자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심지어 로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남자는 안경 낀 여자에게 작업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하세요? 기자님이 그렇게 논리가 없으시면.. 아, 나의 매력에 빠지신 거구나! 늘 겪는 일이라 새로울 것도 없지만, 기분은 좋네요. 저도 한 잔 주세요, 기자님.”
유리가 정말 그녀다운 말을 하면서 재영에게 잔을 내밀었다. 뭐라고 답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지만, 유리의 말에 재영의 몸은 반응을 보이려 했다.
“아이고, 환장하겠네!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어, 볼 수가!”
“눈이 새우만하니 그렇지!”
“그래서 조명 빨 같은 헛것에 속지 않는 거야!”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유리의 말에 동철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하지만 재영은 동철의 말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손을 뻗기만 하면 만질 수 있는 거리에 앉아 있는 슈퍼스타, 유리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감정이 가는 대로 반응하면서도 인간적인 매력이 증폭되는 그녀의 실체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작동했다. 재영은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흐린 조명과 긴 속눈썹이 만들어낸 짙은 음영 속에서 투명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은하처럼 반짝였다. 재영은 단지 2~3초만 들여다봤을 뿐인데, 그 영롱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눈동자에 자신의 영혼까지 빨려 들어갈 듯한 강렬한 느낌에 급히 시선을 거둬들였다.
‘엄청난 흡입력이야. 어떻게 보면 몽환적일 정도니. 몽환적?’
재영은 문득 유리가 논쟁을 걸어오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이런 눈동자의 소유자가 논쟁을 걸어온다는 것이 왠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재영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빛을 발했다.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재영은 그 미소의 끝에서 유리의 말에 가벼운 이의를 표했다.
“쇼비지니스만을 놓고 보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겠죠? 하지만 재미를 추구하는 쇼비지니스가 TV와 인터넷 전반에 작용한다면 시청자 역시 재미에 빠져들지 않겠어요? 결국에는 TV와 인터넷이 정해놓은 틀, 즉 삶의 오락화라는 그물에 갇혀버리게 되지 않을까요?”
“TV와 인터넷이 정해놓은 틀이 삶의 오락화라는 건 잘 모르지만, 어쨌든 TV 프로그램과 인터넷 사용은 결국 개인이 선택하잖아요? 자신의 기준에서, 그것이 재미이든 정보 검색이든, 웹 서핑이든 간에 취사선택이 가능하잖아요? 경우에 따라서는 안 보고 안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TV 시청과 인터넷을 많이 한다고 생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이 복잡한 세상, 그냥 쿨하게 사는 게 최고 아니에요? 난,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열띤 음성으로 반론을 마친 유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미간 사이에 주름이 잡혔지만, 재영은 그 주름마저 매력적으로 보였다. 눈동자에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이 아직까지 작용하는 듯싶었다.
“물론 안 보면 문제없지요. 인터넷도 안 하면 그만인 것처럼. 남는 시간에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고, 유리씨처럼 노래를 불러도 좋겠지요. 하지만..”
“내 노래가 얼마나 좋은데! 기자님도 불러봤죠, 당연히?”
“하하, 당연히 불러봤죠. 몇 번 안 되지만.. 불러보긴 했죠.”
재영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유리를 생각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뱉은 말에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냥 넘어갈 그녀가 아니지 않은가? 뒤늦은 재영의 후회에 유리가 쐐기를 박았다.
“어떤 노래요? 한 번 불러보세요.”
“네, 불러보라고요? 허, 이거 참 어떡하지? 장소도 그렇고, 이렇게 갑자기 시키시면..”
재영이 어찌할 줄 몰라 쩔쩔매는데, 다행히 동철이 나섰다.
“야, 재영씨에게 노래를 불러보라니? 당근이지!”
“네? 동철씨까지 이러시면..”
“호호호! 됐어요, 됐어. 기자라면서 왜 이렇게 부끄러움을 타신데? 하긴 내 앞에서 부끄럼 타지 않는 남자가 없긴 하지만, 호호호호!”
유리가 한껏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맑은 웃음소리가 공명이 되어 홀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모든 남자 손님들의 시선이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는 듯 바삐 움직였다. 유리의 몸, 구석구석을 훑는 매직(이 일어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아이들의 향연!
“허허, 다음번에는 꼭 불러볼게요. 연습도 좀 하고요. 헌데 유리씨, 아까의 얘기로 돌아가면, 사람이 세상을 쿨하게만 살 순 없잖아요? 세상과 소통하는 게 TV와 인터넷만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지만, 상당한 시간을 그 앞에서 보내는 게 현실이니, 결국 TV와 인터넷이 제공하는 틀에 갇혀 버리지 않을까요?”
“TV나 인터넷 앞에 앉는 게 왜 그들이 제공하는 틀에 갇히는 거죠? TV나 인터넷이 내 전부가 될 수는 없잖아요? ‘늘 깨어있으라’ 그런 상투적인 말 말고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요? 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재영은 가능한 한 유리의 눈높이에서 생각을 물었지만, 유리는 동의하지 않았다. 비록 유리의 주장이 표면의 진실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녀의 논리는 명확했다. 디지털 시대에서 쿨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정의 내리는 논리의 기승전결이 완벽했다. 재영은 자신의 논리와 대척점에 서있는 그녀를 이해시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질문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도 확인했고, 그녀를 이해시킬 이유는 더더욱 없었고.
‘그래, 확실해? 처음 보는 사이에 이렇게까지 공격적일 이유가 없잖아? 혹시 동철이라면 모를까?’
생각이 이에 이르자 재영은 지금까지의 상황이 단순해지고 또렷해졌다. 동철과 유리가 자신을 향해 연출하고자 하는 대강의 얼개도 그려졌다. 재영은 살짝 입가에 미소를 띠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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