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인간은 안경을 통해 육체적 한계를 물질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현미경의 발견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인 유전자나 세포까지 들여다 볼 수 있게 됨으로써 신체 자체를 변형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 산업적 이해가 더해지자 인간은 성형수술을 통해서라도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반영하는 ‘몸에 갇힌 사람들’로 변형되어 갔다. 신자유주의적인 거래와 관계를 위해 유리한 몸을 전해주지 못한 부모들은 성형수술과 피부 관리, 치아교정, 다리 교정 수술에 들어가는 돈이라도 물려주지 못하면 무능력한 부모로 낙인찍히거나 죄인처럼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화장은 아무리 많이 해도 결국은 드러나기 마련이니, 부모가 제공해야 할 기본사양에도 들지 못한다.
요즘 병원을 찾는 환자들 중에 자신의 몸에 대해 여러 가지 이상 증상과 극단적 부조화를 토로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그런 추세는 더욱더 강화되고 수적으로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인간으로써의 자신의 가치를 외적으로 드러나는 몸의 등급으로만 평가하는 공통적 경향을 갖고 있다. 그것이 사회가 만든 것이던, 자신의 의지로 한 것이던 결국 그들은 아무리 신체를 뜯어고쳐도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면 다시 불안해지고 움츠러든다. 그런 비정상적 두려움은 거식증이나 구토 증상 같은 신경 병리학적 이상 현상을 동반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TV와 인터넷을 둘러보라. 동방국 한양시의 도심을 걸어보라. 천편일률적인 유사 바비 인형들의 가공된 몸들을 신물 나도록 볼 수 있을 테니. 영혼과 육체의 불구자로 타인의 시선과 평가 속에서만 살아가는, 몸을 가혹한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시각문화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는 가짜 자아들의 아비규환적 절규들이 쉴 새 없이 들릴 테니.
물론 유리는 태생적으로 완벽한 몸을 물려받은 행운아 중의 행운아임에 분명하지만, 지금 의 유리가 되기까지 숱한 반복훈련을 통해 ‘거울뉴런’을 극도로 발달시킨 연기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는 타인의 시선에 저절로 반응하도록 프로그램된 살아 있는 로봇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는 타고난 그대로의 유리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환상 속에서 그들의 바람대로 살아가야 하는 가상의 유리일 수도 있었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극도로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자폐아의 정반대에 서있는.
‘당신은 행복한가?’
재영은 물끄러미 유리를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젖어 들었다. 하지만 유리라는 사람은 같이 있는 사람에게 유대감이나 행복을 전해주는 옥시토신이나 세로토닌이 넘쳐나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무장해제 되지 않고는 못 버틸 정도였으니 재영이라고 해서 어찌 다를 것이 있겠는가? 게다가 그는 지금 극도의 스트레스와 싸우고 있는 중이 아닌가? 누군가의 위로라도 받고 싶은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오지 않았던가? 재영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타인을 향해 좀처럼 열리지 않는 재영의 마음의 문이 유리라는 여인에 의해 대책도 없이 활짝 열렸다. 재영은 경국지색의 절대미인 앞에서는 이성의 차가움을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절감했다.
물론 문을 향해 걸어갈지, 문턱을 넘을지는 재영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문을 열 때 발생한 신선한 바람이 마음의 수면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는 것은 분명했고, 그것은 평생을 통해 다시 받기 힘든 최고의 보너스였다. 아직 유리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LP판의 홈을 따라 도는 바늘처럼 흔들리고 삐걱거렸지만, 이 정도라면 첫 만남치곤 상당한 수확이었다. 재영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을 만났고, 상황에 빠져들었으며, 자연스럽게 술에 취해 들어갔다.
사뿐사뿐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안에서만 밖이 보이는 반투명한 창문 너머에는 우주의 암흑물질처럼 도시의 어둠을 이루는 검은 물질이 자신의 시야에 걸리는 모든 것들에 내리고 쌓였다. 테이블 위로는 빈 술병의 숫자도 그만큼 늘어갔다. 대화가 즐겁고, 견해와 관점이 때로는 달랐지만 술의 힘을 빌린 발작적인 웃음이 그들 사이에서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몇 번은 그 웃음소리가 너무 커서 작은 술집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그럴 때면 술집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유리와 동철에게 쏠렸다. 눈의 실핏줄들이 터질 듯한 그들은 TV와 인터넷에서나 볼 수 있는 두 사람을 힐끔힐끔 보던 것에서 하늘이 주신 절호의 기회인양, 굶주린 여우와 늑대처럼 동철(주로 마니아적 기질이 강한 아주 소수의 여자들)과 유리(평생 잡아보지 못한 삼팔광땡에 로얄스페이드플러쉬를 잡기라고 한 듯, 절대 오늘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모든 남자들, 심지어는 술집 주인과 종업원은 물론 60대로 보이는 주방장까지 방울 달린 놈들은 모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들은 유리의 몸을 가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투명망토처럼 뚫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안광이 지배를 철하는 모양이다.
촬영 스케줄 때문에 유리가 먼저 자리를 뜬 후 재영과 동철은 자리를 보다 은밀해서 자유롭고 저렴해서 부담스럽지 않은 곳으로 옮겨 본격적인 2차 라운드로 돌입했다. 거대한 첨단 도시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후줄근한 냄새와 욕망의 쓰레기로 가려진 광화문의 뒷골목, 그 인적 없는 비현실의 공간에서 둘은 그들만의 여행 속으로 빠져들었다. 재영은 입사 이후 처음으로 써보는 연차 덕분에 꼬박 하루 반의 여유가 생겼고 동철도 내일(자정을 넘었으니 오늘이다) 저녁까지 촬영과 행사 스케줄이 없어 시간적으로 쫓기지 않았다. 세상 첫 날에도 있었고 종말의 날에도 존재할, 새벽2시에 기차를 갈아 탄 재영과 동철은 그들이 당면한 현실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재영이 오늘 얘기할 것이라 생각했던 『죽도록 즐기기』란 중간 역은 이미 한 시간 전에 지났다. ‘성찰없는 미디어세대를 위한 기념비적 역작’이라고 해도 둘의 대화에 끼어들 처지는 되지 못했다.
“저는 정말 몰랐어요. 전임 대통령께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기 전까진 미디어가 이렇게 무서운 흉기가 될 줄 몰랐어요. 총보다 왜곡된 펜이 더 무섭고 진실보다 악의에 찬 허구가 더 단단해 보였어요. 옹호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침묵했고 저도, 저마저도.. 제가 봐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는데, 그분은 어떠했겠어요?”
동철은 평생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에 갇힌 사람처럼 재영에게 말했다. 그의 말 속에는 행동해야 할 때 행동하지 못한 회한으로 가득했다.
“저도 거기에 한 몫 했으니 미안하고 죄송할 따름이지요. 이 땅에서 권위주의라는 치명적인 악령을 걷어 가신 분이었는데, 그땐 왜 몰랐을까요?”
동철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자책감을 갖고 있던 재영이 동철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촛불이 무서운 기세로 타올랐을 때, 전임 대통령에 대한 엄청난 추모 행렬이 이어졌을 때, 그 핵심에 자리한 시민들의 열망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로 남았을 터였다.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 그분의 꿈이셨죠. 이젠 절대 놓칠 수 없는 제 삶의 목표가 됐지만.”
“우리 시대의 사명이기도 하고요. 역사의 퇴행은 5년만으로도 너무 넘쳐요. 압축성장의 신화까지는 모르겠지만, 왜제의 잔재에서 나온 변종의 산업화 세력들은 이제 퇴장할 때가 됐어요. 애국심에 삶의 대부분을 바친 베이비 붐 세대들도 퇴장하는 마당에, 유신의 악령에서 튀어나온 듯한 자들의 꼴들이란!”
“정말 추접해요.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 추켜세우는 걸 보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이권을 팔아 대통령에 오르는 과정은 또 어떻구요? 당시의 국민들이 오죽했으면 그를 몰아냈겠어요. 재임시절에 한 일이란.. 어휴, 생각하기도 싫어요. 반칙과 특권이 판치는 세상은 지난 60년으로도 족해요. 이젠 변해야 해요.”
“변해야죠. 변하게 만들어야죠.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을 만들어야죠. 어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동철씨가 확실하게 총대 매시지요? 동철씨 같은 분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국민들에게 절대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미디어 시대이니, 어때요?”
재영이 동철의 의중을 타진했다. 비록 가벼운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거기에는 그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한 연예인이 움직인다면 그 위력과 폭발력은 수천수만 개의 기사보다 월등한 것은 이미 검증을 마친 상태가 아닌가.
“총대까지 매지는 못하겠지만, 하려고요. 제 능력이 닿는 지점까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갈 생각이에요.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무려 14명이나 자살한 호산자동차 해고자들, 쥐꼬리만 한 장학금에 비해 미친 듯이 오르기만 했던 등록금에 울부짖는 대학생들, 마음으로 따라간 바람버스의 시민들과 함께 할 생각이에요. 대신, 총이 아니라 말로써 하려고요.”
동철이 솜씨 있게 받아 쳤다. 농담을 가장한 재영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투쟁에 대한 확실한 의지도 보였다. 정치란 결국 말이고, 참여란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이루어질 때 오히려 완벽했다. 과거의 기억은 무력했지만 미래의 모습은 양보할 수 없기에 현재의 의지가 중요했다. 그렇게 뜻이 통하고 잔에는 술이 담겨 있으며, 마음이 간절하니 재영과 동철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잔을 비웠다. 차가운 소주가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내렸다. 그것은 의식의 수면을 떠도는 기억의 초대였고, 파문을 일으켰지만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못하는 번뇌와 망각의 손짓이었다.
“이젠 그분을 보내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철은 재영과 자신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지독할 정도로 자신에 엄격했던 원칙주의자이자 치열한 행동가였던 전임 대통령을 떠올렸다. 동철은 또다시 그분이 몸을 던진 언덕에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봤다. 작은 돌들도 구별할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 그분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을 때 찰나의 시간이라도 주어졌을까?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생과 사의 경계가 그 사이에 있었고 자신은 지켜드리지 못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악마와의 거래도 마다하지 않을 텐데, 나는 파우스트가 될 수 없고 떠난 사람은 다 운명이라 한다.
“동철씨, 남은 자의 역할에 집중합시다. 그분을 보내드리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분도.. ”
재영은 소탈하면서도 원칙주의자였던 전임 대통령이 끝내 벗어나지 못했던 계몽주의적 태도, 현 대통령의 회전문 인사 정도는 아니지만 그것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코드 인사(대부분이 깨끗했지만 이념적 편향성이 강했던), 원했건 원치 않았던 간에 이념 갈등에 따른 분열의 강화와 의도하지 않은 정치적 무관심의 확대, 복지제도를 확대시켰으나 부의 양극화라는 대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책적 실수, 이익집단의 노비로 누더기가 돼 버린 비정규직법과 미국에 종속되기 쉬운 한미FTA 체결 등의 정책적 실패나 보완책이 미흡했던 것도 많았다는 사실을 얘기하려다 그냥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이 땅에서 권위주의의 잔재를 상당 부분 쓸어낸 것만으로도 위대한 전임 대통령이 비참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한없는 회한에 잠겨 있는 동철에게 그런 지적들은 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칼처럼 작용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재영은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동철이 안쓰럽게 보였다. 그가 현실 참여의 폭을 넓히리라 마음먹은 것도, 그 8~9할은 전임 대통령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기인했을 것이다.
“알아요, 알고말고요. 그분이 떠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어요. 우연히 인터넷에서 ‘니뫼러의 고백’이라는 글을 읽었는데, 재영씨도 알겠지만,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습격했을 때, 나는 다소 불안해졌다. 그렇지만 결국 나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어 나치는 사회주의자를 공격했다. 나의 불안은 조금 더 커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어 학교가, 신문이, 유태인이, 이런 식으로 잇달아 공격대상이 늘어났으며, 그때마다 나의 불안은 커졌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어 나치는 교회를 공격했다. 그런데 나는 그야말로 교회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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