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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줄푸세를 포기하지 않는 한 서민만 죽어난다



이완구 총리 지명자가 언론이 제기하는 의혹에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듯이 단 하루(그것도 토요일)만에 반박자료를 내놓았습니다. 청와대로서는 이미 검증이 끝났고 관련 자료도 다 확보한 상태라는 뜻이며, 청문회는 요식행위로 끝날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기력한 야당이 이완구를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 같지도 않아 사실상 이완구는 총리에 올랐다고 봐야 합니다.





문제는 이완구가 총리가 되면 박근혜 대통령이 민주주의에 합당한 지도자로 변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며, ‘줄푸세’로 대표되는 정책 방향이 바뀔 가능성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보존의 본능이 지독할 정도로 강한 대통령이 권력을 나눌 리도 없으며, 설사 책임총리에 준하는 권한을 준다고 해도 서민만 죽이는 ‘줄푸세’의 기조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완구 총리가 ‘줄푸세’에 동조하는 신념의 소유자라면 최경환 부총리와 손잡고 지금보다 더욱 강력하게 ‘줄푸세’를 밀어붙일 것입니다. 경제관료들에게 둘러싸여 경제위기의 급박성에 빠져든다면, 그리고 탈출구가 경제활성화를 위한 확정적 재정정책, 규제완화, 노동유연화, 복지 축소 밖에 없다는 주장에 넘어간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입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필연적으로 자기 확신의 강화(확인 편향의 오류)가 이루어져 공통된 생각에 신성을 부여해 우상화하는 경향을 띠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압도적인 정보과 권한의 우위에서 오는 자기 확신은 국란을 돌파하는 영웅적 희생을 감당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이라고 미화하기 일쑤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지율이 30%까지 떨어져도 자신이 옳다는 생각에 추호도 변화를 보이지 않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으며, 모든 부처의 정보를 통합해 판단한 정책과 조치들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확신으로 국민적 반대와 저항을 돌파하려고 합니다. 권위주의적 통치는 그럴 때 모습을 드러내고 자기 최면을 극대화합니다. 



결국 결과가 말해주리라. 민주주의에서 멀어진 지도자는 단기적으로 욕을 먹는 것은 무지한 국민들의 한계이니 효율적 정책집행으로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한 발도 물러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권위주의적 독재가 과정의 고단함을 무시한 채 결과의 탈콤함에 집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는 내가 옳았음을 증명하리라, 권위적 지도자에게 지독하게 달콤한 이 말은 과정을 중시하는 현대 민주주의에 적용될 수 없는 화석화된 명제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끝없이 축적되는 현재라는 과정들이 쌓여서 미래라는 결과(그때에는 또다시 현재가 된다)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춘기 소녀의 꿈처럼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과정입니다. 행동이고 저항이고, 참여해서 떠들어 정부의 정책방향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과거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미래의 모습에 정의와 공정, 평화과 상생, 공평과 관용을 위한 현재의 의지와 노력을 투영할 수 있을 때에만 소망의 근사치로 갈 수 있습니다. ‘미래는 무조건 지금보다는 좋아질 거야’라는 결과의 낙관론이 현대의 민주주의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정화인 ‘줄푸세’는 지난 40년 동안 민주주의를 극도로 축소시켜 국민의 기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시켰고, 모든 불평등과 극도의 차별을 양산했으며, 지구온난화와 환경 및 생태계파괴처럼 인류와 자연의 공존 가능성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과의 낙관론이 성장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보장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최경환 부총리가 대학생을 만나 '미래세대를 위해 개혁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아무리 떠들어도 그것은 기존의 가진 자를 위한 개혁일 뿐이며, 정종섭 행정자치부장관이 주민세와 자동차세 인상이 서민증세가 아니라고 말해도 그 말을 믿을 국민은 거의 없습니다. '줄푸세'를 아무리 포장해도 서민만 죽이는 '줄푸세'일 뿐입니다. 





이완구가 총리가 되면, 박근혜 대통령의 최악의 아집인 ‘줄푸세’가 철회될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필자는 남은 3년이 지극히 비관적입니다. 저항의 방법과 의지를 모두 다 잃어버린 파편화된 개인과 무력한 시민단체는 어떠한 대안세력도 만들어내지 못할 정도로 길들여져 있는 상황에서 지리멸렬하게 보수화된 야당이 박근혜 정부의 폭주를 막아낼 에너지를 끌고 올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법인세 인상을 건너 띤, 그래서 부자증세가 분명함에도 엄청난 저항에 직면한 연말공제 대란에서 보듯, 자신의 이익에 직접적 피해가 발생할 때만 개인은 저항할 뿐입니다. 모든 언론이 연말공제에 광분했던 것도, 권력과 자본에 순치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이익에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사 표현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저항의 최소화가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어우러지면서 대한민국은 어떤 반칙과 비리도 가능한 나라가 됐습니다. 집단적인 망각은 생존의 지혜처럼 확고해졌으며, 조울증적 분노와 체념이 무서울 정도로 교차하는 화약고 같은 나라가 됐습니다.      





대한민국을 망치는 첫 번째가 보편적 가치의 상실에서 나오는 의식의 보수화라면, 그것을 주도하는 것은 언론(특히 메이저 신문과 방송사)이기에, 이들을 통해서만 국민의 언로가 열리는 대중매체 사회에서 박근혜 정부의 ‘줄푸세’를 저지시킬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중매체란 태생적으로 상류 지향적 테크놀로지라 가치의 편향(강제적인 부의 재분배 같은 것)을 지향하지 않는 한 의식의 보수화를 추동할 뿐입니다.  



복지와 교육의 수장이 전업맘과 취업맘의 차별을 유아를 수단으로 이간질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짧고 단편적인 분노의 표출만 난무할 뿐 그것을 조직화하는 정치적 권리의 표출이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일정 부분 진보 정당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최소한의 저항이라는 의식의 보수화가 빚어낸 결과이기도 합니다.  



제비 한 마리가 봄을 의미하지 않듯이, 이완구 한 명이 박근혜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통치를 바꿀 수 없습니다. 수구와 극우를 앞세운 종북몰이와 공안 정국 조성도 ‘줄푸세’를 끝까지 밀어붙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한 박근혜 정부의 1%를 위한 효율성의 잔치는 의식의 보수화에 힘잆어 계속될 것입니다, 국민이 제 목소리를 내고 민주주의를 찾아 거리로 나서지 않는다면.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