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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문재인과 노무현의 리더십은 다르다1



퇴임한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퍼부어지던 일방적인 비난이 문재인 의원에게 가해지고 있습니다. 혹자는 계파정치를 일삼는 친노의 수장이라며 비난하고, 혹자는 노무현 같은 파괴력이 없다며 비난하고, 좌고우면한다며 비난하고, 대선패배와 보궐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지 않았다며 비난하고, 지난 대선을 부정하지 않았고 개표부정에 대해 침묵했다며 비난하고, 박지원 같은 동교동계와 반문의원들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송금을 통치행위로 보지 않았다며 비난하고, 무엇보다도 친노 패권주의를 추구한다고 비난합니다.





이 모든 비난의 근거가 무엇이던 간에 노무현 리더십과 문재인 리더십이 다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듯이 문재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문재인을 비난하는 내용이 다른 것도 그래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나는 문재인의 친구’라고 말한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2인자였던 문재인 의원을 따로 떼놓고 볼 수 없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자신을 향한 어떤 비난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문재인의 운명이라 그것에 대해 얘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좋으나 싫으나 문재인은 노무현 참여정부의 성공과 좌절을 어깨에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으며, 그 무게에 짓눌려 현실정치인으로써 실패할 수도 있고, 무게를 소화해내 노통보다 더 훌륭한 대통령으로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현실정치인 문재인의 몫이며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문재인의 패배에 짓눌린 저는 ‘나는 문재인의 리더십을 이렇게 본다’와 ‘문재인의 착각이 국정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면’, ‘문재인, 바닥까지 내려와 새정연을 바라보기를’ 같은 여러 편의 글들을 통해 문재인을 비판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하면서 그의 재도전을 자극하고 싶었습니다. 문재인의 패배를 힘들게 받아들인 제가 이런 글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서 나오는 다음의 인용문들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합니다.



“생명의 통일성이 전적으로 생명을 시간 위의 길에서 앞으로 밀어주는 약동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경우에, 조화는 전면에 있지 않고 후면에 있다. 통일은 배후의 힘으로부터 나온다. 그 통일성은 맨 처음에 추진력 역할을 하는 것이지, 마지막에 위치하여 끌어당기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베르그송은 종으로의 진화란 ‘생명의 통일성’을 유지한 채, 가장 단순한 형태의 유기체에서 가장 복잡한 유기체로 진화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다양한 종으로 분화된 유기체의 진화가 조화(=생명의 통일성)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진화의 종착점에서 끌어당기는 견인력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환경에서의 적응과 셀 수도 없는 변이의 과정 속에서도 출발할 당시의 추진력을 잃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화가 미래의 견인력에 이끌려가는 수동적인 것이라면 적응과 변이의 매 단계마다 어떤 자유의지(최근의 뇌과학은 자유의지가 없다고 하지만)도 작동할 수 없습니다. 이럴 경우 ‘생명의 통일성’이란, 조화를 이루어내는 힘이 시간적으로 미래인 전면에 있기 때문에 모든 진화는 전면에서 끌어당기는 직선적인 발전만 보여줄 것입니다. 여기에는 반전(방향전환)도 예기치 못한 방해도, 선택을 하는 자유이자 책임인 자유의지의 발현도 없습니다. 



반면에 가장 단순한 유기체들이 다양한 형태의 적응과 예측 불가능한 변이를 통해 복잡한 유기체로 진화하는 중에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출발 당시의 추진력, 즉 배후의 힘에 있다면 종으로서의 진화는 지속되는 추진력에 힘입어 미래를 향한 매 단계마다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단계마다 처하게 되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과 변이가 역동적으로 일어나면서도 출발점과의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간 노무현에게 적용한다면, 진화와 변이를 추동하는 출발점의 추진력은 돈만 잘 버는 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와 민주화투사로 변신할 때의 ‘노무현이 파악한 시대정신’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정치에 뛰어든 다음의 적응과 변이를 거쳐 '노무현의 정신'이 됐습니다. 그리고 진화의 운동으로 대변되는 지속(이념과 가치의 방향성)이란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서야 진화와 변이를 멈춘 ‘노무현의 정신’이 될 수 있을 터이고요.  



문재인의 운명으로 이어진 ‘노무현의 정신’이 그를 통해 진화하는 다음 단계는 「창조적 진화」에 나오는 다음의 인용문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하나였던 노무현과 문재인이 둘로 나뉘어지는데, 이런 진화와 변이를 통해 문재인 리더십이 하나둘씩 형태를 갖춰 갑니다, 진화와 변이의 추진력은 배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출발점에서의 생명의 통일성(=진보적 자유주의)을 유지하면서.



“어떤 점에서 상호보완되는 사항들 간의 조화는 도중에 서로 적응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조화는 출발점에서만 완전무결하다. 그것은 근원의 동일성에서 비롯된다. 진화 과정 가운데 처음에는 상호보완적이어서 하나로 융합되었던 여러 사항이 동시에 성장하면서 멀어지는 데에서 조화는 온다.”



문재인이 현실정치 속으로 뛰어들 것을 결심했을 때 ‘문재인의 운명’이 탄생한 것입니다. 같은 제목의 책에서 초보정치인 문재인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노무현의 운명에 완전히 갇혔음을 토로합니다. 이는 노무현의 정신이 문재인의 운명으로 이어진 것을 뜻하는데, ‘조화는 출발점에서만 완전무결’하다는 위의 인용문이 노무현의 비극적인 죽음에 이르러서야 '문재인의 운명'이 탄생할 수 있었음을 말해줌으로써 두 사람의 통일성을 담보해줍니다.



문재인의 운명이 된 노무현의 정신(=진보적 자유주의와 사람사는 세상)이 ‘근원의 동일성’을 말해주며, 당연히 ‘처음에는 상호보완적이어서 하나로 융합’돼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출발한 문재인의 운명은 진화의 과정(단기적으로는 국회의원 당선과 중기적으로는 야권의 대선후보)은 노무현의 정신과 ‘근원의 동일성’을 이루며 하나로 융합돼 있던 미세하면서도 분명한 차이들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멀어지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근원의 동일성(=생명의 통일성)’에서 나오는 추진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때문에 다양한 진화와 변이에도 불구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유기체(국회의원 출마)에서 제법 복잡해진 유기체(야권의 대선후보)로 진화한 문재인만의 리더십은 이런 과정을 통해 구축된 것이며, 출발점의 추진력이었던 ‘노무현 정신’과의 조화는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대선 패배 이후 문재인이 보여주었던 모습들도 끊임없이 변하는 정치 환경에서의 적응과 변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런 과정은 문재인에게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될 수 있지만,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 문재인은 온갖 비판과 압박, 공격을 받으면서도 진화와 변이를 멈추지 않았으며,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노무현의 정신을 보다 세심하고 담대하게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문재인이 당대표에 도전한 것은 대선 패배의 핵심요인 중 하나였던 지리멸렬하고 정치적 리더십을 상실한 야당을 수권정당으로 거듭나게 만들기 위함이며, 이번 도전이 다음 대선 도전과 별개의 과정으로 진행될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마지막 도전에 들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대표 도전과 승리를 통해 자신의 리더십이 '노무현의 정신'에서 어떻게 얼마나 진화했는지 보여줌으로써, 두 번의 패배는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문재인과 노무현의 리더십은 다르다2).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