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이 보수정당에 표를 주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 연구가 나와 있는 상태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극단적 보수주의자 레이건에게 표를 주었던 미국정치학회 회장이었던 바텔스의 《불평등 민주주의》와,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입니다. 두 저자는 이 책들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불리한 법안에 찬성하는 공화당과 보수정치인에게 표를 주는 이유와 민주당의 아성이었던 캔자스주가 공화당으로 돌아선 과정에 일어난 일을 방대한 자료와 통계를 통해 객관적으로 밝혔습니다(최근에 들어 이런 사례연구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 논란에서 보듯이 영세자영업자와 한계 상황에 이른 중소기업을 위해서라도 최저임금 인상의 시기와 폭을 조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저소득층이 많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일종의 동병상련인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디스’하는 결과로 귀결됩니다. 이들의 주장대로 하면, 영세자영업자와 한계기업들이 알바나 저임금 노동자를 쓸 수 있게 하라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열악한 상황의 고용주는 어떻게든 버텨나가겠지만, 그들보다 훨씬 숫자가 많은 알바나 저임금 노동자는 노동착취의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들은 또한 경제가 침체된 상황이기 때문에 최저임금을 올리면 영세사업장이 망해 더 많은 실업자가 생길 것이라고 합니다. 3D업종처럼 열악한 노동이 필수인 곳에서는 이미 외국인노동자를 쓰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시대는 변했고, 물질적 풍요로움도 경험했는데 1960년대의 노동으로 돌아가라니 청춘들이 차라리 취업을 포기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최저임금 인상을 감당할 수 없어 부도와 폐업을 하는 영세사업장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내수경제가 어려운 것은 정부와 경제 주체들의 잘못 때문이고, 그래서 서민의 소득이 줄어서 벌어지는 일인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가난한 사람들끼리 생존의 싸움이 벌어집니다. 가진 자들이 최소의 비용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것도 계급의식을 가질 수 없는 하층민들의 이전투구 때문입니다.
최저임금 인상은 진보와 보수로 나뉘는 것이 아닌, 인간의 기본적인 삶에 대한 것인데 이상하게 이념적 색칠이 가해집니다. 이런 이념적 색칠을 하는 주체는 당연히 보수 성향의 언론과 방송, 집단과 세력들입니다. 이들의 주장이 최저임금 인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확대재생산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최저임금 인상을 주장하는 자들은 경제를 모르는 아마츄어이자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을 붕괴시킬 수 있는 자들로 공격받습니다.
최저임금 인상 찬성파와 반대파 사이의 감정적 골은 깊어집니다. 그 결과 반대파의 대부분이 보수정당에 표를 주는 것을 선택합니다. 미국의 경우 공화당이 집권했을 때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빈부의 격차가 벌어졌음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공화당을 찍고, 우리의 경우 새누리당을 찍습니다. 물론 이들은 당장의 삶이 중요하기에 장기적인 성찰을 할 수 없고, 이것이 그들을 보수적으로 만듭니다. 그들에게 변화는 두려운 것이지요.
이런 현상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헌법, 국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구성원이 존엄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며, 국가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세금을 걷고 거대한 관료제를 유지하고, 공권력을 독점하는 것입니다. 헌법은 국가에게 강요되는 규범으로 국민의 삶의 질과 행복권을 실현하도록 정부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류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선택하고, 온갖 종류의 세금을 내고, 국방의 의무를 지고, 법을 지키는 것은 국가가 가난한 구성원들끼리 싸우는 일이 없도록 조세정의와 공정거래, 부의 재분배와 복지 및 사회안전망 확충 등을 최대화하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요인으로 불평등하게 태어났다면 인간의 의지와 연대로 불평등을 줄이는 방향으로 노력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최저임금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격렬한 토론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 도입했습니다. 어떤 종류의 노동을 할지라도 최저임금을 받으면 기본적인 삶의 질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최저임금제를 도입한 것인데, 지금의 논란은 본말이 전도된 채 진행되고 있습니다. 1대 99사회의 등장을 말하는 현실에서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정당이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이해와 욕망의 이분적 갈등을 유발시켜 분할통치를 공고히 하는데 있습니다. 홍준표의 무상급식 중단과 저소득층 자녀지원이 가장 전형적인 예입니다.
월평균 4만원밖에 안 되는 돈이지만, 이런 돈이라도 지원받는 쪽은 보수정당을 찍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쥐꼬리만한 지원으로 자녀의 성적이 올라가고 삶이 달라질 것도 없는데, 어떻든 지원을 받았다는 그것 때문에 무상급식을 주장하는 정당에 표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받는 최소한의 지원마저 끊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상당하고요.
이런 선별적 복지와 공적 부조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세상을 바꿀 힘은 없기에 그것이라도 받으려면 보수정당에 표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최저임금 인상을 반대하는 상당수 사람들과 이런 사람들이 모이면 형편없는 투표율이라도 과반수가 넘는 국회의원을 보수정당에 몰아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민국은 남북분단 상황이 맞물려 보수정당의 절대적 우위가 계속해서 지속됩니다. 민주정부 10년은 그래서 한국 현대사의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당장 몇 푼의 돈이라도 손에 쥐려면 보수정당을 찍는 것이 훨씬 유리한데 진보정당을 밀어줄 이유가 없습니다.
전과 14범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집값 상승이 기대됐기 때문에 욕망의 투표를 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이명박과 보수정당에 몰표를 주었습니다. 참여정부가 좌파정부여서 고의적으로 집값을 떨어뜨렸다는 것에 조중동이 집중포화를 가해 유권자들이 이명박에게 표를 던지도록 만든 것도 한몫했습니다.
전 세계의 경제 역사를 살펴보면 진보정권이 집권했을 때 성장률도 높고 빈부격차도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저호황이 지속된 시대에는 거의 모든 정부가 높은 성장률을 기록해서 확률적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이 시기를 빼면 진보정당의 업적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은 전 세계 공통의 진실입니다. 언론과 교육이 중요해지는 것이 이 지점인데, 이들이 이런 역사적 사실은 보도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은 채, 보수정당의 주장(자본과 재계의 입장을 대변)만 확대재생산함으로써 TV와 신문으로부터 정보를 얻는 노년층을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언론은 성인들에게, 교육은 청소년들에게 보수적 가치를 주입시키고 의식속에 각인시켜 보수화시켜버립니다. 이렇게 수십 년을 길들여지다 보면 보수적 가치와 현실 간의 엄청안 괴리에 무감각해집니다. 합리적 이성은 사라지고 동물적 욕망만 남습니다. 이런 인간의 욕망에 호소하는 보수정당들은 신앙처럼 자유민주주의를 울부짖으며 '자유(이들이 말하는 자유는 방임에 가깝다)'를 위해 사회경제적 평등도 '파이가 커져 흘러넘칠 정도(낙수효과)'에 이르기까지 뒤로 미루자고 합니다. 기한은 정해진 것이 없고, 기준도 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평등은 물론 자유까지 박탈하는 정책을 남발합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합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으며, 보통의 믿음보다 훨씬 더 적게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욕망이 명령하는 데로 행동하고 선택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존재입니다. 이것 때문에 당장의 이익과 욕망에 호소하는 보수정당의 호소가 먹혀듭니다. 언론이 선정적인 방식으로 연일 떠들어대고요.
그 결과 저학력 빈곤층은 보수우파의 노예가 됩니다. 이런 경향이 극단에 이르면 '민주주의보다 독재가 더 낫다'는 《자발적 복종》에 이릅니다.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노예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애국심이라고 포장합니다. 국가가 조금의 지원금만 주면 폭력적인 관제집회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완벽한 노예에 이르며, 정신적·물질적 주인인 보수정당과 후보에게 표를 몰아줍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열악하게 만들고 가난을 대물림하게 만드는 보수정당을 찍는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남북이 분단된 대한민국은 이것이 일상화된 나라이고, 이제는 종편을 통해 노년층을 대상으로 극단적 종북좌파몰이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선별적 복지나 국가 지원금 등을 제공할 수 있는 보수정당과 후보에게 표를 몰아줍니다. 이미 세뇌된 그들은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되면 떡고물의 크기가 커질 것이란 환상의 포로가 됐기 때문에 진실을 알려줘도 빨갱이라며 극도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방법이 없고, 진보적 성향의 중년층과 청춘들과 극심한 세대갈등이 빠져듭니다. 선별적 복지를 받기 위해, 하나의 부스러기라도 더 얻기 위해, 자신을 꼴통이나 꼰대라 하는 젊은이들을 용납할 수 없어 보수정당과 후보에게 표를 줍니다.
문제는 당장의 이익과 욕망 때문에 보수정당에게 표를 주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있습니다. 보수정당이 집권하는 기간 동안 다른 계층의 소득 증가에 비해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이 더 늘었는지 살펴야 하는데, 보통 이것을 하지 않습니다(클릭하면 한국적 상황까지 설명한 2부로 이어집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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