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의 일차적 피해자는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ㅡ 지그문트 바우만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전체의지와 일반의지 사이에는 종종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일반의지가 오직 공동의 이익만을 지향하는 데 반해, 전체의지는 사적 이익을 따르며 다수의 특수한 의지들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특수한 의지들 가운데 일단 지나친 부분과 모자라는 부분이 서로를 상쇄하고 나면 차이들의 총합으로서 일반의지가 남는다.
위의 인용문은 루소가 《사회계약설》에서 ‘일반의지’가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이유를 설명한 부분입니다. 루소는 사회를 갈등으로 몰아넣는 모든 불평등의 기원을 수천 년에 걸쳐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심화시키는 사회구조에 있다고 봤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을 선량하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들었”는데 “사회가 인간을 사악하게 만들고·노예 상태로 만들며 불행으로 몰아넣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회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런 불평등을 타파하려면 사회혁명(프랑스혁명은 루소에 사상적 기반이 있다)을 이끌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했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일반의지’입니다.
루소는 완전한 평등을 지향하는 일반의지에 기초한 ‘사회계약’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면(루소는 계몽의 힘을 너무 믿었다) 모든 불평등이 사라져 인간은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한 자연상태(그에 준하는 사회 또는 국가)로 돌아갈 수 있다고 봤습니다.
이런 상태에 이르면 정당이나 정치단체의 결성도 금지됩니다. 모두가 선량하고 자유롭고 평등하기 때문에 구태여 정치적 조직이 필요없게 됩니다. 이것이 마르크스에 이르면 ‘능력만큼 생산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한다’는 완전평등의 ‘자유의 왕국’으로 발전합니다.
이밖에도 다른 철학과 사상의 기원이 있지만 진보좌파의 신념과 가치, 도덕의 근간은 이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보좌파의 최종 목적은 완전한 자유입니다. 결과의 평등은 완전한 자유로 가기 위한 사회적 운동이나 혁명의 목표일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변증법적 발전의 최종단계에서 이루어지는 평등에 기초한 자유입니다. 이런 사회를 진보좌파적 의미의 유토피아라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양자론을 거쳐 양자역학이 일반화되면서 불확실성을 거부하는 변증법(근대물리학과 진화론의 결과물)이 지닌 치명적인 한계가 밝혀졌지만, 진보좌파의 신념과 가치, 도덕은 민주공화국의 핵심으로 자리합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정신에 녹아있으며, 역사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내천과 홍익인간까지 이어집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꿈꿨던 ‘사람사는 세상’도 여기에 근원하고, 문재인의 ‘사람이 먼저인 세상’도 마찬가지의 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식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공산주의적 사상을 전파한 예수의 가르침보다 선교에 의한 세력 확장에 방점을 찍은 바울의 가르침을 따름)와 손잡은 친일파 중심의 뉴라이트(신자유주의 우파)가 조선을 넘어 한반도의 역사를 폄하하고 왜곡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문창극의 동영상은 뉴라이트의 세계관이 완벽히 녹아있는 정수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이 이조 5백 년 동안 허송세월을 했기에, 하나님이 일제식민지라는 시련을 주었지만 미국의 도움으로 해방됐고, 친일 경력이 있지만 윤치호 같은 기독교도 덕분에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고 공산화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식민지근대화론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한민족과 조선(이들에게는 이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 친일파에 대한 면죄부, 기독교 근본주의에 대한 찬양, 친미와 친일에 뿌리가 있는 극단적인 반공, 독재시대의 경제성장에 대한 예찬 등으로 이루어진 뉴라이트의 핵심이 문창극의 동영상에 녹아 있습니다.
이중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와 극단적인 반공, 친일파의 면죄부인 독재시대의 경제성장 예찬이 황교안에게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 했던 홍익인간과 인내천의 애민사상 및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을 향한 진보좌파적 가치들을 철저히 배척하고 탄압하는 사상적 기반을 이룹니다.
부의 불평등과 결과의 차별을 인정하고 장려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온전하게 녹아있는 박근혜의 ‘줄푸세’가 대한민국을 비정규직과 반칙과 특권이 넘쳐나는 보수 반동의 나라(반민주공화국)로 만들려면 문창극과 동족이자 공안검사 출신인 황교안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판사 임용을 앞둔 사람들에게 사상 검증을 자행한 국정원처럼, 모든 국민을 잠재적 빨갱이로 보는 공안적 시각은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과 함께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두 가지 핵무기입니다. 여기에 가장 폭력적인 기독교 근본주의까지 장착한 황교안은 디지털 전체주의를 자행할 적임자입니다.
P.S.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아날로그 전체주의(푸코가 정형화한 벤담의 파놉티콘적 독재, 모두를 감시하는 것)였다면, 박근혜의 줄푸세는 디지털 전체주의(푸코의 일괄감시 개념과 아감벤과 낭시의 추방 개념이 더해진 바놉티콘적 독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로 다룰 생각인데, 박근혜가 사물인터넷에 매달리는 이유도 디지털 전체주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박근혜가 이 개념을 알고 추진하는 것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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