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 이야기

푸코와 유시민 사이에 성립하고자 하는 내 출생증명서란?

 

 

 

처음은 두려움이고 설레임이다. 이곳에 글을 올리는 것도 이것이 처음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두려우면서도 설레고 있다.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떤 인연들을 만들고, 색다른 경험을 할지 나 자신도 궁금하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미래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불확실하고 현재도 누군가 개입하지 않은다면 불확정이라고 한다, 모든 게 멈추지 않고 변한다고 주장하는 양자역학은 공부하면할수록 모르는 게 많아지는 거의 유일한 학문이다.

 

그렇다면 글은 어떨까? 글쓰기로 압축하면 또 어떨까? 죽어있는 경험들의 시공간적 변형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을까? 무엇을 담아내던 현재만 존재할 뿐이라면 어떤 인칭인들 상관이 있을까? 글과 글쓰기가 과거와 미래를 대신할 수 없다면 글을 쓰는 모든 순간만 현재일 뿐일까? 지우고 수정하고 삭제하고 새로 쓸 수 있는데도 모든 게 현재에 속한다면 어떤 글이던 죽은 감정의 배설이자 표현일 뿐일까? 아인슈타인과 푸코는 과거의 사람일까 현재의 사람일까? 

 

 

미셀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한 사람 이상이, 의심할 바 없이 나처럼, 더 이상 얼굴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 쓴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라, 나에게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하지도 말라. 이것이 나의 도덕이다. 이것이 내 신분증명서의 원칙이다. 쓴다는 것이 필요할 때,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헸늗데 이 또한 무효화시켜야 하는가? 푸코에게 현재란 무엇이었을까? 인용문에 나오듯 자유였을까? 출생증명서처럼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게 현재였을까?     

 

특수 및 일반상대성이론을 정립한 아인슈타인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석학 중 한명으로 꼽히는 푸코는 존재했을까, 존재하지 않았을까? 모든 걸 분리하고 분절하고 도약하고 비약하면서 분석해서 분류하고 범주화해 낙인찍고 구분하는 권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권력의 방식과 똑같은 접근을 통해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권력을 해체하는데 성공했었다, 최소한 글이나 끌쓰기를 통해서는.

 

그는 이런 식으로 해체작업과 계보학적 분석을 통해 인류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지만, 너무나 많은 추종자로 하여 자신이 지적 권력으로 우상화되는 것에 부담을 느껴 무려 8년 동안이나 침묵을 했다. 아인슈타인이라면 엿이나 먹으라고 혀를 내밀고 말겠지만 푸코는 8년간의 침묵을 선택했다. 그런 과정의 결과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푸코의 출생명증서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아니라. 

              

좌우와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집중포화를 받아야 했던 유시민이 항소이유서로 모든 비판을 일정 기간 피할 수 있었다면, 푸코는 사정이 달랐다. 비판의 질과 양이 월등하게 높았고 깊숙했던 푸코의 입장에서는 모든 비판들에 일일이 대항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논란에 빠져들지 않는 방법은 침묵밖에 없었다. 그는 알제리에서 발행된 출생증명서를 프랑스로 가지고 오는 대신 8년이라는 침묵의 고행을 선택했다. 그의 의지는 돌파보다는 멈춤을 선택했다.

 

의지의 원인이자 결과인 자유만 놓고 보면 필자도 푸코와 비슷하다. 쓸 것이 필요할 때, 사유의 결과물을 기록으로 옮겨야 할 때, 이곳에 글을 남김고 영상으로 담아 유튜브에 올림으로써 비로소 자유로운 구속을 선택한다. 나는 글로써 말할 것이며, 영상으로써 존재할 것이다. 나의 얼굴은 없으며, 신분증명서도 갖지 않고 있다. 표절과 같은 모방이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한 비판은 하나만 가능하리니 침묵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부터는 그럴 것이다.

 

어느 누구도 완벽하지 않기에, 나 또한 끝없이 모방하고 보다 많은 습작을 통해 보다 깊은 유사함을 내것으로 속화할 것이다. 이를 위해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이며, 그것들을 글고 영상으로 대신할 것이다. 로렌스와 아렌트가 말했듯, 인간의 조건은 시작이며 언제나 사막과도 같았다. 자유로운 자만이 사막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며, 출발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내가 이해한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상보다 조금 높은 곳을 보기 보다는 현실의 가장 낮은 곳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에 대한 생각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죽음에서 시작하면 영원히 살 것이며, 출생부터 시작하면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오늘 또는 내일의 나는 또 다른 출발을 시작했고 할 것이다. 나의 실존은 푸코의 출생증명서가 아니라 나만의 죽은 감정이며 표현된 영상의 멈춤이자 탄생이다. 길은 있어서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지나왔기에 길이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으면서. 윤여정 배우의 여우조연상 수상을 축하하면서, 그레타 가르보와 다른 길을 가는 윤여정의 오늘이 브래드 피트의 냄새가 아닌 향기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윤여정 배우는 1947년에 국적이 없는 상태의 한반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출생증명성의 진실 여부를 가려주는 제헌헌법과 하위 법령들이 1945년에 모두 다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때만 한반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중앙일보 때문에. 미나리는 존재했어도 윤여정은 태어나도 태어나지 않았단다, 중앙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참 희한한 논리였고, 그래서 미국 가지가 보기에 브래드 피트에게선 마약의 냄새가 났던 것이다, CSI가 검증한 향기가 아니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