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9일) 안산 화랑유원지 제2주차장에 있는 세월호희생자 합동분양소에 다녀왔다. 세월호참사가 일어난지 620여 일이 넘은 후에야 분향소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건강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그들 앞에 서있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방문한 5시 쯤에는 방문객이 없어서 감당하기 힘들 만큼 적막했지만, 모든 희생자들에게 일일이 말을 건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분향소 내 좌측에서 시작해 한 명 한 명의 사진과 이름, 그 앞에 놓여있는 편지 등을 보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중앙 지점에 이르렀을 때, 필자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이르는 동안 필자의 영혼과 심장에 하나씩 쌓여가던 슬픔의 무게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커진 까닭도 있었지만, 아직도 어둠의 심연에 갇혀있는 미수습자의 명패를 보는 순간 당장이라도 터져나올 듯한 슬픔과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세상은 어떻게든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멈춰있었다. 사진으로나마 돌아온 희생자들 사이에서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두 명의 단원고 학생 앞에서는 시간마저 흘러갈 수 없었고, 필자도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팔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거리에 그들의 명패가 있었지만, 필자가 느낀 거리는 이승과 저승 만큼 멀었다. 현실의 시간은 흘러갔지만 나는 멈춰있었고 그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는 세월호참사가 지겹다고 말하지만, 그들에게 이곳에 와 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세월호참사를 기억하고 조속한 인양을 촉구하고,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요구해야 하는 이유가 1m도 안 되는 공간에 넘칠 만큼 쌓여있었다.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이유가 이곳에는 억겁의 무게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하늘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아이들이 아직도 맹골수도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그날의 숱한 오보처럼 쌓여있었다.
그렇게 한 생을 모두 다 보낸 듯한 시간이 흐른 후 필자는 발걸음을 뗄 수 있었고, 그것이 대통령을 둘러싼 풍문이던, 세월호 실소유자에 대한 음모론이던 반드시 밝혀내 그 대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만 다짐하며 분양을 마칠 수 있었다. 아직은 더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고, 살아서 무엇을 해야 할지가 명료해졌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했고, 지켜주지 못해서 부끄러웠다.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한 후, 합동분양소에서 겨우 나올 수 있었지만 나에게 주어진 여분의 삶은 그곳에 놓고 왔다. 세월호가 온전히 인양돼 미수습자들을 찾고, 성역 없는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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