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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서초동집회와 나꼼수의 역설, 그 본질을 말하다

 


인터넷을 통해 더 많은 정치 정보를 이용할 수 있지만, 기존의 관심이나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이런 경험 속에서 쉽게 휘둘릴 것이다.

 

                                                                                 ㅡ 피파 노리스의 《디지털 시대의 민주주의에서 인용》 

 

 

 

이명박 정부가 아고라의 논객, '미네르바'를 모두의 본보기로 삼아 정부 비판에 재갈을 물리려 했을 때 수많은 논객들이 사이버 망명을 택했다. 언론 장악과 대규모 종편 허용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통한 정부 비판이 줄어들지 않자 당시의 대표적 논객이었던 미네르바를 잡아들였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그렇게 헌법적 권리이자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막장의 수준까지 치달으며 국민을 협박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논객들의 대규모 사이버 망명이 이어지면서 놀라운 실적도 올릴 수 있었다. 

 

 

그 이후 아고라는 권위주의적 정부에 대한 저항의 장소이자 시민의 토론장으로써의 역할은 크게 위축됐고ㅡ또라이 기질이 강한 필자는 이명박 정부의 이런 폭력적 탄압에 맞서 논객의 길로 들어섰고, 여전히 용감한 소수의 논객들도 자리를 지켰지만, 그것으로는 미네르바와 망명한 논객들의 빈공간을 채울 수 없었다. 그들을 대신해줄 수 있는 무엇이 필요했다. 이명박을 절대 인정할 수 없었던 수많은 국민들은 누군가 나타나 막힐대로 막힌 가슴을 뚫어줄 통쾌하고도 시의적절하며 자극적인 말들을 쏟아주기를 바랐다.  

 

 

 

 

바로 이때 질식사할 것 같은 대중의 시대적 갈증과 욕구를 정확히 꿰뚫은 4명의 전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법적 제약을 받지 않는 신기술을 활용해 유쾌·상쾌·통쾌한 난도질을 펼칠 수 있는 사이버 전사를 자처했다. 종횡무진하게 활약할 그들은 향후 10년의 언론 지형을 뿌리 채 뒤흔들 난세의 영웅들이 될 것이었다. 그들은 손석희의 JTBC만으로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었던 이명박근혜의 역주행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분노를 화끈하고 노골적으로 풀어낼 것이었고, 특별한 것들을 내놓지 않아도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와 추종자들을 양산할 시대의 대변자(또는 빨대)가 될 터였다.

 

 

노무현과 이명박의 엄청난 차이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대중에게는 놀라울 정도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인적구성으로 이루어진 나꼼수의 등장이 바로 그러했다. 대한민국의 하늘을 떠다니며 아우성을 치고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들이, 깨어있는 시민들의 단결되지 못한 울분과 분노, 적의였으니 이를 눈치채지 못할 사람들은 없을 터였다. 분위기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있었고, 누구든 치고나오면 그것의 수준과는 상관없이 대중적 열광을 독차치할 상황이었고, 영악한 김어준은 이것을 꿰차는데 성공했다.



서울 한 구석의 지하 벙커에 4사람이 모였다(처음에는 3명). 그들 중에서 디지털 공간의 자유주의적이고 불손하며, 거칠면서도 평등주의적인 성향을 대표하는 김어준은 특유의 음모론처럼 '바이러스성 콘텐츠'를 양산하는데 도를 튼 대가이자, 수많은 이슈 중 대중의 흥미를 끌만한 것을 귀신처럼 낚아채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적절한 만큼의 육두문자를 사용하고 <닥치고 정치>를 통해 지저분한 과거를 세탁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친노이자 친문(문재인 이사장을 미래의 지도자로 선점한 것은 대단히 영리했다)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는 대중의 마음을 홀릴 선동가적 자질을 두루갖춘 영웅처러 다가왔다. 

 

 

주진우 기자는 탐사보도의 대가(주구장창 그것만 했기 때문일까? 그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일까?)로 알려져 있었으며, 특히 이명박근혜의 추적자로 유명했고, 그로부터 확인하기 힘들지만 대중의 관심을 폭발시킬 수 있는 자극적인 이슈를 제공할 수 있었다. 기성언론의 기자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장기 추적기는 그만의 장점으로 부각되며 대중의 마음을 훔칠 수 있었다.



보수적 성향의 구좌파로 분류되는 김용민은 개혁주의 성향의 기독교인을 자처했지만, '미국의 반지성주의(리처드 포흐프태터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를 대표했던 복음주의 선동가에 더욱 가까웠다. 그는 김어준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PD 경험으로 팟캐스트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자유주의 성향의 정치인인 정봉주는 대중이 듣고 싶은 기성정치의 내밀한 이야기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의 호기심을 낚아챌 수 있는 보물창고였다. 무엇보다도 이명박 정부의 정치탄압 희생자라는 상징성은 나꼼수의 저항적 상징성을 극대화시키는데 제격이었다. 



이렇게 한국의 대중언론사에 다시 나올 수 없는 참신하면서도 완벽한 조합이 탄생할 수 있었다. 거칠 것 없는 그들의 입담과 폭로, 조롱, 가십거리의 양산은 팟캐스트라는 새로운 매체를 타고 무서운 속도로 전파되었다. 어두운 뒷골목이나 골방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무차별적인 폭로와 이명박 씹기는 즉각적인 쾌감을 제공함과 함께, 갈수록 축소되는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에 대한 대중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대중은 열광했고, 그들에게 몰려들었으며, 수많은 아류들을 창출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꼰대들이나 좋아할 품위와 질에 억매이지 않는 메신저와 메시지의 완벽한 조합을 이루어낸 나꼼수의 최대 장점은 정알못은 물론 정치에 관심이 없거나 신물이 난 대중들에게는 신의 복음처럼 다가왔다. 쉬운 언어와 적당한 욕설로 이명박근혜의 정치적 퇴행을 까발리고 희화화하는 것으로 그들은 어떤 조합도 이루지 못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의 입을 거치면 반투명한 장막에 가려있던 한국정치의 부끄러운 민낯이 저잣거리와 거실, 자신의 방에서도 얼마든지 회자될 수 있는 안주거리와 식재료로 전환됐으니 막장드라마보다 막장정치가 재밌다는 분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이명박근혜 9년이란 막장정치와 비정상의 연속이었기에, 그것과 똑같은 눈높이에서 난장에 가까운 막말과 욕설, 음모론을 쏟아내면서도 대중들이 접근하기 힘든 현실정치의 뒷얘기를 안주처럼 곁들이니 대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들이 매일같이 쏟아내는 사이다 발언은 그것에 담겨있는 정보의 수준이나 평론의 질과 상관없이 대중들의 갈증과 말초신경을 완벽하게 풀어주었다. 그들을 지지하고 추종하는 대중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꼼수의 최대 공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규제도 받지 않고 모든 개인에게 '1대 1' 또는 '1대 다'로 접근할 수 있는 쌍방향 디지털기술을 이용해, 대단히 쉬운 언어로 정치공학을 풀어냈기 때문에 그 이전의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정치의 일상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들을 모방한 수많은 아류들이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성공은 가히 대중 동원에 성공한 정치혁명들과 비교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대중의 영웅으로 자리잡았고, 그들의 진정한 대변자이자 분노한 감정의 배설구로 부족함이 없었다.

 

 

남꼼수의 공은 이것 말고도 상당히 많다. 그들에 대한 대중의 사랑과 열광, 존경과 추종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해낸 것으로 인해 그런 영광을 누릴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 그들은 대중을 지배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지배하는 위치까지 올라갔고, 군림하려 하지 않았으면서도 군림하게 되는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다. 벙커에서 공중파 라디오를 거쳐 (잠시였다고 해도) 지상파까지 점령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거둔 성공에 대한 합당한 대가였다.  

 

 

검증도 팩트체크도 받을 필요가 없었던 그들은 더 올라갈 수 없는 높이까지 올라갔다. 그들은 그렇게 권력화되어 갔다. 지배하려 하지도 않았고 군림하려 하지도 않았지만 그들이 올라간 높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권력(정확히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영향력)에 물들어갔고 적극적으로 즐겼다. 그들에 열광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수백만 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표에 굶주린 수많은 정치인들이 그들의 호출을 기다렸고, 노통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이해찬 같은 유력 정치인도 그들의 손을 잡고 함께 춤춰야 했다.  

 

 

대통령 당선이 유력했던 문재인 후보까지 선거 유세의 일환으로 그와 정봉주가 진행하는 프로에 출연해야 했으니 그들의 힘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알 수 있다. 나꼼수의 영향력은 모든 정당을 넘어 정부 고위관료에게까지 미쳤으며, 그 모든 것들이 권력화하는 과정의 정상적인 징후들이었다. 성남 시장에 불과했던 이재명이 강력한 대선주자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니, 그들의 영향력에 대해 더 말해야 무엇하겠는가.

 

 

해적방송으로 시작한 나꼼수가 이제는 현실정치에 최대한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언론권력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수백만에 이르는 지지자와 추종자들 때문에, 그들은 킹메이커를 자처할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인 권력을 쌓고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런 권력은 그들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는데, 그들은 달콤하지만 과유불급이었던 권력에 취해 자신을 경계하는데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팟캐스트 시절에는 작은 에피소드로 지나칠 수 있었던 실족과 실언들이 늘어났고, 권력화의 과정처럼 쌓이고 축적됨으로써 폭발력이 가중됐다.

 

 

김어준 총수가 과거의 잘못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는 것도 작은 실수와 잘못들이 연발된다 하더라도 사과를 하지 않아도 되는 해적방송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음모론과 예언이 틀렸다고 해서 청취자에게 사과할 일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원래 틀리기 일쑤인 것들이어서 사과할 필요도 없었다. 김어준이 늘어난 영향력에 때문에 보다 높은 자리로 올라선 이후에는 문제가 될 수 있는 발언에 대단히 조심했지만 음모론자 특유의 실수와 잘못까지 막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영향력이 살아있는 권력으로 자리잡은 뒤라 그런 실족들을 예전처럼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안들로 치환해버릴 수 없었다.


(작은 실수라도 인정하면 그것 때문에 무너지는 독재정치와 작은 실수가 하도 많아 사과가 일상이지만 그 대신에 어떤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민주주의의 결정적 차이에 대해 보충할 것)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간에 그들은 권력화했고, 이슈를 좌우할 만큼 실질적 영향력도 커졌기 때문에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며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액튼 경의 유명한 격언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것은 필연의 과정이었고, 모든 정치역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 권력의 영욕사였다. 지방선거에 악영향을 미친 김용민의 막말사건부터 김부선과 얽혀있는 주진우와 김어준의 이해할 수 없는 침묵에 이어, 정봉주의 부끄러운 퇴장까지 나꼼수는 더 이상 이전의 나꼼수가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재명이 결정타였다. 그들은 하자로 넘쳐나는 이재명을 차기주자로 키워왔기 때문에 그에게 불리한 모든 증거와 증언들에도 불구하고 이재명을 감쌌고, 그들에 열광했던 일부 지지자와 추종자들에게 역공까지 취했다. 감당할 수 없는 권력에 취하면 사리판단이 흐려지기 마련이며, 힘들고 어렵던 시절의 초심이란 기억에서 삭제시켰기 때문에 더 이상 교정수단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김어준 사단(또는 패거리)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을 권력의 사유화가 나꼼수 멤버를 궁지로 내몰았다. 



어떤 잘못과 실언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아도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는 신도들이 즐비하니 부지불식간에 궁지로 몰린 상황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어제의 잘못과 실수를 모두 다 묻어버릴 수 있는 새로운 이슈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데, 권좌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도 있는 단초를 제공할 이유가 없었다. 난 잘못과 실언을 남발하는 놈이었으니 니들이 알아서 소화해! 김어준 이렇게 말하는 듯했고,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치명적 피해로 작용한 잘못과 실언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아도 되는 풍토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적당한 욕설과 함께 쉬운 언어로 풀어낸 현실정치의 뒷담화로 인해 정치언어의 수준마저 낮춰놓았다. 서민의 언어로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정치와 민주주의, 시민 의식, 시대정신, 무엇보다도 사람 중심의 원칙과 상식을 풀어낸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와 민주주의, 시민의 수준을 몇 단계나 높인 것에 비해 나꼼수는 그들이 애용하는 욕설과 음모론, 정치언어의 수준 만큼 한국정치와 민주주의, 시민의 수준을 낮춰버렸다. 나꼼수의 역할이 예전과 같을 수 없음은 이런 부정적 결과들로부터 나온다. 



트럼프와 시진핑의 미중 무역전쟁, 영국과 유럽의 노딜 시나리오, 아베의 수출 규제, 자한당의 장외투쟁에 따른 국회의 식물화 등 민주적 토론과 정치적 절차를 거쳐 사회적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불가능해진 것도 나꼼수로 대표되는 팟캐스트와 홍준표 등으로 대표되는 유튜브방송이 상대를 공격하고 비난하고 싸움만 부추길 뿐 민주적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국민의 삶과 특별한 관련도 없는 이데올로기나 진영논리에 갇혀 상대를 적으로 만들어 공격하는 행태들이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결해야 할 정치를 양극화로 몰고가고 있다. 노사정위원회 등에서 힘겹게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낸다고 해도 양극화된 국회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기 일쑤다. 국민이 갈갈이 찢겨 있으니 진영논리와 당파적 이익, 자신의 재선만 생각하는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삶을 높여주는 법률은 통과시키지 않는다. 


(개헌과 검찰개혁, 공수처 설치, 세계적인 우경화, 경제대공황 징후, 최저임금 인상의 장기적 효과 등을 보충할 것) 


그리하여 나꼼수의 역설이 현실화 됐다. 권력화를 절대적으로 피해야 했던 자가 권력화의 길로 들어서면 반드시 모습을 드러나는 역설! 안철수 현상에 질식해버린 안철수가 그랬던 것처럼, 감당할 수 없는 권력은 당사자를 몰락시키기 마련인데 나꼼수의 리더였던 김어준 총수도 똑같은 저주에서 피해갈 수 없었다. 김어준을 지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고, 그들의 영향력도 상당한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어 김어준 총수가 이번 위기를 극복해낼 수도 있으리라. 민주진보 진영에서 김어준이 할 수 있는 일이 넘칠 정도로 남아있으니 역설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와 권력은 지속될 가능성도 높다.

 

 

권력을 내려놓은 것처럼, 환골탈태에 준하는 변화는 대단히 힘든 작업이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에 준할 만큼 힘든 작업이다.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몇 단계 높이는 일도 만만치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김어준을 비롯한 나꼼수 멤버가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할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지지자와 추종자들이 그들의 변화를 원하지 않을수록 나꼼수의 역설은 그들의 주변을 맴돌며 지속적으로 말을 하게 된다. 



그들의 공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꼼수의 역설은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를 보라고 하는데, 김어준과 주진우, 김용민과 정봉주가 그들의 성공을 이끌어낸 지금까지의 모습에서 벗어나 성공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미지의 변화를 선택하려고 할까?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변화된 나꼼수는, 다시 말해 보다 세련되고 정치적 올바름을 의식하는 나꼼수는 대중이 열광하는 나꼼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재명과 그들 간의 관계가 얼마나 밀착돼있는 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재명이라는 악재를 적절한 수준에서 손절매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어줄 사람들이 그들의 지지자나 추종자이니 역으로 이용해 위기를 재도약의 기회로 바꿀 수도 있다. 그들의 지지자가 여전히 많은 상황에서 구태여 변화를 택할 이유도 부족하다. 이재명의 정계 퇴출(대법원의 유죄 확정판결)에서 최고조에 이를 나꼼수의 역설이 나꼼수의 변화를 담보한다고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보는 변화라는 과정이란 단지 자신에게 합당한 정도의 영향력과 권력으로 현재의 위기를 재포장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모든 역사가 현대'라면 그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보다 높은 목표를 위해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자신의 영향력을 줄이고 자연스럽게 따라온 권력을 내려놓을 사람도 없다. 이재명이 악착같이 싸우며 도와달라고 해도 적정한 수준에서 적절한 때에 그와 절연하면 그만이다. 



그 동안 이재명과 관련된 온갖 논란에 침묵과 회피로 일관했던 이유와 그를 악착같이 변호해주었던 이유를 대중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풀어내는데 성공할 수도 있다. 정치는 생물이라고 했으니 지금은 예상할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아니, 그런 상황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윤석렬의 검찰이 자한당과 기레기들과의 노골적인 담합을 통해 조국 법무부장관과 그의 가족을 만친창이로 만들고 끝을 알 수 없는 공갈협박으로 항복을 받아낸 것처럼. 

 

 

필자가 말한 나꼼수의 역설이 민주진보 진영의 몰락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들의 지위를 그들의 영향력에 맞는 적절한 위치로 재조정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나꼼수의 공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로 살아남을 수도 있다. 어쩌면 예상치도 못한 극적인 반전을 그들로부터 이끌어낼 수도 있다. 촛불혁명 이후 시민들의 정치 수준은 전세계 어떤 나라보다 높아졌기 때문이다. 노통처럼, 조국도 지키지 못했으니 어떤 결과가 나올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그들의 반전이 어디까지 이루어질지 예측할 수 없지만, 최소한 지금은 나꼼수의 시간이 아니라 나꼼수 역설의 시간인 것만은 확실하다. 지금까지는 김어준과 나꼼수 멤버가 질문을 던졌다면 앞으로는 그들을 향해서도 질문이 던져질 것이다. 이를 테면 잘못과 실언에 대해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노무현 대통령을 정말로 존경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를 팔아 성공의 열쇠로 사용한 마케팅 전략의 야비함이었는지?' 왜 다른 정치인이 아닌 이재명이어야 하는지?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의 최종 목표는 이재명을 차기 대통령으로 키워내 더 많은 권력과 부를 챙기려는 것인지? 



극문 뒤에서 웃고 있는 작전세력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문프의 지지율이 떨어짐에도 기승전이재명만 떠드는 작전세력이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무슨 근거로 여의도집회는 문통과 조국 전 장관이 감사해 하며, 서초동집회는 불편해 할 것이라고 하는지? 여의도에서 집회하면 패스트트랙 법안의 국회 통과가 가능하고 서초동에서 집회하면 불가능한 것인지? 깨어있는 시민의 집단지성을 그렇게도 옹호했으면서도 이번에는 왜 부정하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인지? 여의도집회보다 서초동집회에 힘을 실어주면 왜 분열 조장이고 갈라치기인 것인지? 무슨 기준으로 그런 일도양단의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인지? 두 집회의 시너지 효과를 올릴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음에도 이재명 지지자가 판을 치는 여의도집회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지? 



모든 언론과 거대 스피커들이 밀어준 여의도집회보다 극문의 뒤에서 웃고 있는 작전세력으로써 한줌도 안 된다는 문파들이 SNS와 블로그 등을 통해 아름아름 연락하고 공유한 결과인 서초동집회에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했다면, 민심의 진정한 표출은 서초동집회에 있는 것이 아닌지? 언제까지 저급한 이분법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재단하는 것인지? 조국과 윤석렬을 분리해서 접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윤석렬을 옹호하는 이유가 나름대로의 취재 결과와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있는 유시민의 주장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그런 것들을 물어야 한다. 그것이 나꼼수 역설의 또 다른 핵심이자 본질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꼼수에 대한 중간평가가 절실한 시점이다. 그들을 계속해서 지지하거나 신뢰하더라도, 그들을 더 이상 지지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 하더라도, 한국정치와 언론사에서 그들이 어떤 역할을 했고, 그것에 어떤 시대적 의미가 있었고, 한국정치와 언론사에서 그들의 명과 암은 무엇이었는지 돌아볼 때다. 질문을 던질 뿐, 질문은 받지 않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며, 지위와 권력, 역할에 걸맞는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도 본격적인 결과를 내놓아야 할 시점이고, 그것이 곧 총선의 결과로 이어질 터, 싫던 좋던 그 모든 것들에 영향을 미칠 나꼼수에 대한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평가가 지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김어준의 모토가 '쫄지 마, 씨바'였으니, 자신과 동료에 대한 냉정하면서도 비판적인 중간평가에 쫄거나 불편해 하면서 시사타파TV 진행자처럼 한줌도 안 되는 지지자들을 선동해 보복을 가하지는 않으리라.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이 글은 초고였습니다. 이 글을 쓴 지 얼마 안 있어 간암이 재발한 것을 알았습니다. 유튜브 방송을 1회만 내보내고 중단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3개월에 걸친 치료와 재활을 거쳐 9개월 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바람에 집필하던 책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님의 건강도 급격히 악화돼 집에서 돌보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고요. 글의 부분적 업데이트를 오늘에서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