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두절미하고 대한민국을 망치는 세 개의 집단(그 다음은 종교집단에 대해, 그 다음은 지식인과 철학자에 대해)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방송사와 교육부, 검찰이 그들입니다. 책을 읽는 비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대한민국의 경우, 방송이 차지하는 영향력은 정부와 국회, 사법부를 능가합니다. 사적이건 공적이건 거의 모든 콘텐츠는 방송에서 만들어집니다.
현대의 공적공간은 방송이 송출한 콘텐츠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입니다. 방송 이외에도 콘텐츠 산출능력이 있는 생산자는 있지만 그것이 공적공간에 진입하지는 못합니다. 설 연유에 가족과 친척들과 오가는 얘기들도 분야가 무엇이든 방송에서 산출한 콘텐츠가 주를 이룰 것입니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이 새로운 형태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유무형의 공통체를 창출하고 있지만 그것이 공적공간을 대체하기에는 너무나 분산됐고 개별적입니다. 사이버공간에서의 이합집산은 빛의 속도로 이르러 있지만, 현실의 시공간과 유기체인 인류는 물리적 한계를 넘을 수 없습니다.
가능하면 가벼운 것들, 오락적인 요소들이 포함된 얘기들이 공적공간을 지배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번 설 연휴도 비슷한 방식으로 지나갈 것입니다. 현실로 돌아와서도 방송 콘텐츠에 점령당한 동일한 일은 반복됩니다. 이렇게 공적영역이 사적인 것들로 지배당합니다. 진지한 토론이 필요한 정치와 경제, 사회 문제들은 외면하거나 배제시켜 버립니다.
이런 현실에서 방송이 권력과 자본의 시녀 역할에 충실하면 공적영역은 사적인 것들로 가득 찬 테마파크로 전락합니다. 가볍게 다뤄지는 모든 주제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오락화되고, 방송에 최적화된 형태로 이야기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의 인식은 방송 친화적으로 길들여집니다.
매스미디어 시대에서 이런 현상을 최대한 줄이려면 교육이 뿌리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교육이 아이들의 재능을 찾아내는 과정(개별화된 사회화, 자아에 대한 이해)인 동시에, 공적영역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들을 배워가는 과정(공통화된 사회화, 타자에 대한 이해)이어야 합니다.
개별화된 사회화는 직업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의 목표인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구축하는 과정입니다. 개인으로서 최고의 행복이란 내적인 나(내가 보는 다양한 나)와 외적인 나(타인이 보는 다양한 나) 사이의 일치가 클수록 커집니다.
모든 갈등과 스트레스는 내적인 나와 외적인 나 사이의 불일치에서 생깁니다. 아이들이 행복하지 못한 나라가 된 것도 이 때문이며, 그래서 교육부의 책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내가 되고 싶은 자아가 아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자아는 외적인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이 때문에 경쟁을 부추기는 석차가 필요하고 차별을 공고히 하는 스팩이 난무하게 됩니다. 공정한 출발과 기회를 지향하는 공교육이 무너진 것도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사교육비가 늘어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른 가계지출은 중산층이 무너지는 가장 잔인한 이유이고, 차별이 공고화되는 가장 불의한 이유입니다.
방송보다 더 큰 문제는 교육부의 기득권입니다. 대한민국을 망치는 최대의 적은 교육부임은 전 세계에서 아동·청소년 행복도가 가장 떨어지는 것에서 단적으로 증명됩니다. 교육의 신자유주의화를 넘어 교육제도 전체를 바꾸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극단의 갈등과 스트레스가 넘쳐나는 불행한 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필자는 방송에 대한 감시자 역할을 꾸준히 하고 있지만, 교육은 많은 논객들이 하고 있어 피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재야에서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들이 현실화될 수 있기를 바라고 응원할 뿐입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교육철학의 시대적 성찰을 볼 수 있는 글들이 늘기를 바랍니다.
재야의 힘으로 제도를 바꿀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다수의 학생과 부모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철학적 성찰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경쟁과 순위, 차별을 공고히 하는 교육이 아닌 공존과 상생, 협력의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런 철학적 기반 하에 촘촘히 얽혀 있는 글들이 이어져 하나의 구상으로 자리할 때 교육을 개혁하기 위한 기초가 튼튼해집니다.
세 번째는 검찰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믿습니다. 정치와 자본에 친화적인 이들의 행태는 대한민국이 반칙과 특권, 부정과 비리가 난무하는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이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부끄러울 지경이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현재의 검찰로는 답이 없습니다. 정치인과 재벌오너가 관계되면 검찰의 구형보다 재판부의 선고가 높은 현재의 상황에서 검찰에게 바랄 것은 없습니다. 노무현 같은 지도자가 여러 번 연속해서 나오지 않는 이상 검찰의 정치적 이용(권력과 자본의 시녀 역할)과 검찰의 정치적 복종(검사들의 정치적 행위)을 개혁할 방법이 없습니다.
최소한으로 볼 때 기소독점권을 분할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가능하려면 차기 대선주자들이 공통 공약으로 내걸고 실천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검찰의 법집행에 대한 시민의 감시가 일상화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해결책도 없지만, 국민참여재판도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설 연휴, 많은 얘기들이 오가겠지만 방송에만 매달리지 말고, 우리의 삶과 직결된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갔으면 합니다. 스마트폰도 내려놓고 가족과의 대화를 시도하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어렵고 삐걱거리겠지만, 대한민국이 돈과 권력보다는 사람을 중시하는 세상이 되도록 공적인 것들에 대해 얘기해봤으면 합니다.
나와 내 가족의 삶의 질이 바뀌려면 공적인 것들을 얘기하는 것이 늘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싫던 좋던 공적인 것과 연결돼 있습니다. 삶이 타인과의 관계인 까닭에 삶의 모든 것이 공적인 정치성을 띠게 됩니다. 타자 없는 나란 존재할 수 없고, 사회에서 벗어난 신적인 관계도 없습니다.
삶이 곧 공적인 것이며 정치적인 것이고 사회적인 것입니다. 전체 인류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배엘리트들이 개개인을 파편화시키고, 가족까지 포함한 모든 공동체를 해체하고,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에 빠져들게 하고, 정치와 사회적 이슈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도 공적인 것을 독점하기 위함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스타들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없지만, 정치적 행위로 집약되는 공적인 활동은 우리의 삶을 뿌리부터 바꿀 수 있습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정치로 방향을 바꾸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사유와 관조의 영역에 들었다 한들, 인간의 삶은 언제나 땅에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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