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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세속의 욕망으로 가득한 이 시대의 기독교와 천주교에 대해



인류의 역사는 언어와 문자, 도구와 기술발전의 역사이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종교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원시시대에도 그들 나름의 종교는 존재했습니다(프로이트의 《종교의 기원》을 참조). 근대 이후로는 이성과 자본이라는 종교가 가장 막강했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그 둘과 손잡고, 또는 그 둘과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여러 개의 종교가 집단을 이루며 거대한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근대이성이 현대성으로 이어지면서 현대종교가 하는 역할은 갈수록 변질되고 있습니다. 특히 신도수가 많은 종교일수록 집단화 정도가 높아지면서 자본주의적 기득권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유권자인 신도수를 무기로 정부와 정당과의 거래도 서슴지 않습니다(다른 무엇보다도 로버트 퍼트남의 《아메리칸 그레이스》를 참조).



특히 대형교회의 세속화는 종교개혁 직전의 가톨릭의 타락을 떠올립니다. 그때의 천주교는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권력집단의 전형을 이루었기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잉태된 고도로 치밀해진 추문정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고전 《데카메론》에서 나오듯, 수도원과 수녀원 사이에 고아원이 생길 정도로 가톨릭의 타락은 끝을 모를 정도였습니다(《데카메론》은 유럽을 초토화시킨 페스트 덕분에 나올 수 있었다).



종교개혁 직전에는 천국행 티켓을 판매한 교황까지 있었으니, 원죄로부터의 구원을 명분으로 바벨탑 쌓기에 여념 없는 대형교회의 타락은 그때의 가톨릭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막상막하며 난형난제고 용호상박이며 도진개진입니다. 거대한 성전을 건설한다며 신도의 지위에 따라 헌금의 액수가 차이가 나고, 이를 당연시 여기는 것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러다간 신학이 일수놀이의 경영학으로 바뀔 판입니다. 전국 곳곳에 자리한 대형교회의 프랜차이즈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재현을 위해, 성직자들이 합작해 전신을 성형시켜버린 21세기의 예수를 닥치는 대로 팔아먹고 있습니다. 대형교회의 사업화는 세속화의 핵심이라 자본주의적 가치들이 성서의 가르침을 왜곡하며 신앙에도 가격을 매기는 행위가 도를 넘고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두 명의 추기경을 배출한 한국천주교는 바로 그 두 명의 추기경으로 인해 무서운 속도로 보수화되고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갈수록 멀어지고 있습니다. 주교회의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한국천주교의 보수화와 세속화는 대형교회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천주교 신자인 저로서는 예수와 전혀 다른 가르침을 말하는 두 명의 추기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야훼(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대량살상도 마다하지 않은 살벌한 창조자였다)가 모세를 구원의 목자로 선택한 이유는 99명의 양보다 1마리 양을 구하려 했기 때문인데, 이 땅의 곳곳에서 1마리 양으로 핍박을 받는 분들 곁에는 두 명의 추기경을 볼 수 없습니다. 이들 때문에 낮은 곳으로 임하지 못하는 이 땅의 예수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공허하고 허망하기까지 합니다. 





신앙에도 가격을 매기고 신용등급을 부여하는 미국식 기독교를 벤치마킹한 것이 보수화된 대형교회의 타락을 이끌었다면, 천주교의 보수적인 퇴행은 두 명의 추기경이 주도하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곧 이 땅에 임한 예수임을 두 명의 추기경은 실천적으로 입증해야 함에도, 칼 세이건의 말처럼 두 명의 추기경은 성전과 성서 안에서만 안주하려 합니다.  



종교와 사회가 만나면 피바람이 분다는 유럽 속담이 있듯이, 현재 이 땅의 거대 종교집단들의 행태는 세속화와 대형화가 너무 강해서 수많은 사회적 문제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이제 국민은 종교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자라는 이유로 종교의 세속화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바뀌었습니다. 이명박에게 몰표를 주었으며, 문창극과 황교안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세월호참사에 소극적이며, 중태에 빠진 백남기씨를 외면하고, 일제의 만행에 면죄부를 발행한 위안부협상에 찬성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대형교회 위주의 기독교입니다.  



종교가 인간 구원과 사회 정의를 포기하고 세속에서의 세를 과시하는 것으로 변질되면, 반드시 대형화와 권력화를 추구하게 됩니다. 신자 한 명 한 명이 돈으로 보이고, 신자수를 늘리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돌입합니다. 종교의 본질이 호도되고 세속화하는 지점이 신자수의 확대에 집착할 때 발생함은 인류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음에도 이 땅의 종교집단들은 이를 외면합니다.





타 종교에 대한 폄하와 선교활동의 폭력성은 여기서 나옵니다. 종교와 신앙에 우위가 있다면 예수는 부처와, 또는 마호메드와 서열부터 정리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싸우고 죽이고 속이며 천상의 세계에서 세력을 넓히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을 것입니다. 국가권력과 결탁한 경험이 있는 천주교와 기독교의 정치세력화와 세속화는 종교의 존재이유마저 말살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신앙에 대한 몰이해가 초래한 확장일변도의 대형화가 신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사회에는 피바람이 불게 됩니다(유럽인들의 경험이 이것에 농축돼 있다).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은 세속의 법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어떤 일도 가능하다는 인식이 폭력과 테러로 변질되기 일쑤입니다. 천주교와 기독교가 세상에서 가장 폭력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욕망을 추구할 때 세상은 중재가 불가능한 격랑 속으로 빠져듭니다. 세속화와 대형화로 대표되는 종교의 신자유주의화는 이렇게 세상을 핏빛 경쟁으로 물들게 합니다. 이념이 물러간 자리에 종교가 들어와 경쟁을 부추기고 전쟁을 선언하며 세속의 세계에서도 주인행세를 하는 꼴입니다(예수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야훼의 것은 야훼에게 바치라고 했고, 남에게 받고 싶은 대로 먼저 행하라 했습니다).  





어떤 종교도 지상에서의 부와 권력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영원한 구원에 이르려면 하늘에 부를 쌓으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가장 초라한 마구간 구유에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고통 속에서 죽은 뒤, 가장 초라한 여인 옆에서 부활한 것도, 왕자였던 부처가 모든 부와 권력을 버리는 것에서 깨달음에 이른 것도 종교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줍니다. 



헌데 이 시대의 기독교와 천주교가 그러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으로 인해 구별지워지고 배척하고 다투는 것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종교가 할 일이란 피안의 세계로 사라지거나,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 인류의 구원에 충실하는 것, 둘 중의 하나 뿐입니다. 바벨탑을 짓지 않고 낮은 대로 임하지 않는 천주교와 기독교는 위선이며 차별이고 치명적인 선동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신의 존재가 문제였던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신을 들먹이고 팔아먹는 자들이 문제였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