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마르크스로 칭송받으며 노벨경제학상 수상을 예약해둔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가 부의 불평등을 설명하는 공식을 통해 각종 계산을 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고,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자료가공도 있었음을 밝혔습니다. 피케티는 이런 오류에도 불구하고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추호의 변함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빛을 바랜 것은 분명합니다.
“자본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을 항상 앞서기 때문에 부의 불평등은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다”는 피케티의 공식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처럼 너무나 간단명료해서 전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오류와 부정을 인정해야 하는 회복하기 힘든 수모를 자처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좌우의 경제학자들이 피케티 현상을 “자본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면 자본수익률도 떨어진다는 기본 법칙을 고려하지 않아 시작부터 오류가 있었던 가설”이라고 일축하는 것과, “부의 불평등 해소라는 진보적 과제에 대해 ‘과학 공식’처럼 간단명료한 주장을 펴자 덮어놓고 찬사를 보낸 해프닝”이라고 꼬집는 것이 힘을 얻게 됐습니다(원래 비판만 잘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피케티의 주장에 100% 동의할 수 없었던 필자는 자신의 오류를 인정한 피케티를 보면서 마르크스적 오류가 떠올랐습니다. 마르크스적 오류란 뉴턴역학이나 다윈의 진화론처럼 현실경제를 단순명료하게 나타내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지나친 추상화(단순화)에 매몰되는 것을 말합니다.
뉴턴역학과 다윈의 진화론, 헤겔의 변증법과 블랑키의 사상(당시에는 마르크스보다 영향력이 있었다. 일찍 죽지 않았다면 마르크스와 쌍벽을 이루었을 것이다)에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시작된 초기에 그것의 전체 역사를 예측하기 위해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과 변증법적 유물론(역사결정론)으로 단순화시키는 추상화의 오류(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에 빠졌습니다.
순수한 자본주의라면 마르크스의 설명이 정확하고 이를 능가하거나 부정할 방법이 없지만, 현실의 자본주의는 계급투쟁과 변증법적 유물론으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가 베르그송 정도의 물리학적 지식이 있었다면, 완성하지 못한 《자본론》 4권에서 이런 오류들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어서 너무나 아쉽기는 합니다.
마르크스는 정치와 과학기술, 언론, 종교, 문화, 교육, 철학, 제도, 법, 관습, 전통 등을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치부했지만, 정치적 기술(마키아벨리적 추문)과 뗄래야 뗄 수 없는 현실의 자본주의는 그의 성찰과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푸코의 지적처럼 마르크스의 성찰로 양자역학이나 분자생물학, 인문과학 등의 발견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생산관계라는 하부구조와 시장에서의 교환과정에 집착하는 바람에 상부구조를 이루는 다양한 변수들을 고려하지 않았고, 폴라니의 지적처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현실경제의 다양성과 지배적 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합의를 무시했습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의 성찰이 대체적으로 옳음에도 레닌의 경우처럼 실제현실에 부딪치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 많았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차치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칼 포퍼, 한나 아렌트, 울리히 백 등의 현실성 높은 비판들을 반박하기 힘든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나왔습니다.
반면에 모순과 오류투성이의 경제학인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최소통치로 대표되는 작은 정부와 모든 규제를 부정하는 시장근본주의를 통해 국가의 전체화하는 경향과 개인화하는 경향을 동시에 풀어냈기 때문입니다(미셀 푸코와 노엄 촘스키 등이 명료하게 설명했다).
신자유주의가 체계화되고 일관된 논리가 관통하는 과학적인 경제학이 아니라, 정치의 힘을 빌린 현실적인 통치학이 된 것도 국가의 두 가지 성향을 꿰뚫었던 데에서 나왔습니다.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 대처와 레이건이 정권을 잡으면서 시카고학파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는 무소불위의 통치술로 격상됩니다.
자본주의(특히 신자유주의)의 결과인,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에 대한 피케티의 공식이 대체적으로 옳지만, 우주의 원리를 하나의 공식에 담아낸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E=MC2로 압축된다)처럼 단순화된 공식으로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는 부의 불평등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단순화(진리와는 다르다)의 속성상 근본주의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의 개념을 극도로 단순화한 유일신 사상이 배타적인 근본주의로 빠져들어 폭력을 양산(십자군전쟁, 좌우의 전체주의,
미국의 제국적 탐욕, IS의 테러 등)하는 것처럼, 단순화가 극에 이른 모든 근본주의는 이분법적 세상에서만 유효합니다.
진보좌파가 마르크스적 오류에 빠지면 보수우파의 꼴통과 동일해지는 것도 단순화의 속성인 근본주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김기종의 광기도 민족근본주의에 뿌리하고 있으며, IS의 테러도 이슬람근본주의에 뿌리하고 있습니다. 자본과 초국적기업의 탐욕도 시장근본주의에 뿌리함은 상식의 영역에 해당합니다.
양자역학과 분자생물학 등을 접하지 못한 마르크스가 뉴턴역학과 다윈의 진화론(근대를 지배한 두 가지)에 기반한 추상화와 결정론에 빠졌다면, 피케티 또한 자신의 공식에 빠져 피케티적 오류에 빠졌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21세기의 마르크스, 피케티의 오류 인정은 발전적이고 긍정적입니다. 현대경제학이 최소한의 밥값이라도 지불하려면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피케티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피케티가 5월에 전문이 공개될 <21세기 자본에 대하여>에서 《21세기 자본》에 나오는 자신의 공식을 어떻게 수정할지 지켜봐야 하겠지만, 우주의 원리를 파악하는 통합이론의 발견에 실패한 아인슈타인처럼 피케티도 부의 불평등 심화를 설명하는 공식 발견에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몇 개의 공식으로 현실경제와 부의 불평등을 풀어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피케티의 능력과 보수적 시각에서 진보적 시각으로 전환된 것으로 볼 때, 그가 마르크스의 성찰에 근접하는 성과를 낼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경제학을 설파해 세계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데 일조한 맨큐에 비하면 갈수록 심화되는 부의 불평등에 대한 피케티의 성찰은 오류를 통해 현실경제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가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내놓지 못한다 해도 21세기의 참담한 현실로 위대한 마르크스를 불러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역할을 했습니다.
5월에 전문이 공개될 <21세기 자본에 대하여>가 기다려집니다. 아울러 후속 연구가 계속해서 나오기를 기원해 봅니다. 부의 불평등이 세습자본주의로 전환되고 있다는 발견만으로도, 그래서 글로벌 부유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만으로도 피케티의 성찰은 인류의 공존과 공생에 한 가닥 빛을 선사하는 거대한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피케티가 마르크스에 견줄 만한 위업을 이루기는 힘들었지만 최대한 노력해서 근접하기를 바랍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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