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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청년에게 중동에 가서 일하라는 대통령



“대한민국의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 번 해보세요. 다 어디 갔냐고, ‘다 중동 갔다’고 (말할 수 있도록).” 



위의 인용문은 1975년 박정희의 정치생명을 연장시켜준 중동특수에 관한 말이 아니랍니다. 이 인용문은 2015년 3월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7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한 말이랍니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청년 고급인력의 해외 진출을 장려하자며 ’해외 일자리 포털 개설 및 스마트폰 앱 개발 계획’을 보고하자 박근혜가 한 말입니다(참석자 일동 함박웃음, ㅠㅠ).





아버지한테 배운 것이 평생을 거쳐 배운 것의 거의 대부분으로 보이는 박근혜는 IMF 환란 때보다 청년실업률이 높은 지옥 같은 상황에서 청년들로 하여금 중동에 가서 뭐 뺑이 치게 일하라고 추천합니다. 그녀는 중동 진출이 ‘하늘의 준 기회’여서 열사의 땅에서 돈을 벌어 국내로 부치랍니다. 박근혜는 퇴임 전에 제2의 ‘국제시장’을 직접 제작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아무리 선의로 표현했다고 해도, 박근혜 대통령이 사상 최악의 청년실업을 보는 관점이 이러합니다. 대통령은 나라가 선진국에 들어섰음에도 국내에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가 열악한 환경의 중동에 가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라고 합니다. 



어차피 희망도 없는 오포세대나 청년실신세대로 사느니, 죽도록 힘들겠지만 중동에 가서 돈을 벌면 암울한 미래를 대비할 수 있고, 덤으로 국가도 좋고, 노후준비도 못한 부모도 좋은 것 아니냐는 투입니다. 현재의 청년들에게 '국제시장' 세대처럼 가난했던 시절로 돌아가서 '닥치고 고생'하라는 것입니다. 



이러다간 아프리카에 가서 구속력이 하나도 없는 MOU만 잔뜩 맺어오면 이번에는 청년에게 아프리카로 가라고 할 판입니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가 수없이 많은 청춘들에게 비수로 박힌다는 것을 알았으면 이런 말은 꺼내지도 못했을 텐데, 공주에서 여왕으로 등극한 사람에게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중동에 진출하는 업체들은 북한이나 동남아 및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저임금노동자를 씁니다. 두바이 기적이 참담한 실패를 겪으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중동국가들도 저유가 때문에 떼돈을 벌던 시절이 지나갔기 때문에 높은 임금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중동특수란 저임금노동자가 필요한 일들뿐입니다.



최근에는 중동국가들이 발주하는 사업도 저가경쟁이 심해져 이익도 별로 남지 않습니다. 저유가의 영향도 상당히 작용하고 있습니다. 복지선진국인 유럽과 무제한 양적완화로 겨우 경제가 회복세로 접어든 (그러나 잠복된 부실이 너무 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미국의 청년실업률도 높은데, 중동국가들이 한국의 청년들에게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값싼 인력은 인도와 중국에도 넘쳐납니다. 아메리칸 드림이 아주 일부에게만 적용됐듯이, 제2의 중동붐이라는 것도 극히 일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며, 특히 청년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또한 중동에서 일한 것이 중요한 스펙으로 인정될 가능성도 없습니다. 산업적으로 뒤쳐진 중동에서 경험하고 배운 것을 써먹을 곳이라고는 남미의 가난한 나라와 아프리카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포세대, 청년실신시대라는 참혹하고 서글픈 유행어가 대한민국 청년들의 현실임에도 대통령은 그들에게 열사의 땅, 중동에 진출하라고 합니다. 대통령은 선택의 여지도 없는 청년들의 실업을 이용해 자신의 치적만 쌓겠다는 것인지, 발언의 선의를 추호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동국가들과 계약한 한국기업들이 그렇게도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다면, 사교육과 유학 등 온갖 스펙으로 중무장한 상위층의 자녀부터 자발적으로 갈 텐데 대통령의 굳이 청년들을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스펙 쌓을 돈도, 시간이나 여력도 없는 오포세대들에게 주어질 자리가 존재하기나 하겠습니까?   





고령사회로 접어드는 속도가 가장 빨라 청년이 짊어져야 할 사회적 비용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중동까지 가서 생고생을 하라고 하는 대통령의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청춘에게 무모하기 짝이없는 모험과 도전만 강요하는 대통령 밑에서 3년을 더 보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끔찍하기만 합니다. 



대통령의 무책임한 현실인식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습니다. 현재의 물가로 따지면 100억에 가까운 돈(당시 6억)을 전두환에게 받았으면서도, 그 정도 돈이면 소녀가장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대통령이니, 인간관계조차 포기할 수밖에 없는 엄혹하고 암울한 청년들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겠지요. 





정말 답이 없습니다. 대학 가서 배우는 것이 대출이고, 늘어나는 것이 빚이며, 졸업만 하면 신용불량자로 등록되는데, 대통령은 성공 가능성도 낮고, 죽도록 고생할 수밖에 없는 열사의 땅에서 미래를 찾아보라고 하니, 아버지 흉내내고 업적 신경 쓰느라 청춘들을 위한 마음이 쥐꼬리 만큼이라도 있기는 한 것일까요? 



민주적인 혁명을 일으키던, 향후에 다가올 선거에서 모조리 승리하던가 해야지, 이땅의 청춘들이 짊어져야 할 질곡의 끝이 어디인지 상상조자 안 됩니다. 미친듯이 노력할수록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현실에서 정말로 중동에라도 나가지 않으면 희망조차 없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인류는 고령사회와 장기적 경제침체, 지구온난화와 폭력시장의 확대, 핵발전 위협, 자연생태계 파괴 같은 글로벌 위험사회를 동시에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작금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이렇게 만든 기득권 체제를 뒤집지 않는 한 청춘들의 미래는 좋아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저임금을 생활임금으로 올리는 것조차 기득권의 저항 때문에 불가능한 나라에서 평생을 비정규 임시직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를 청춘들에게 희망과 미래를 얘기하는 것조차 사치일지 모릅니다. 젊은이게만 주기에는 너무나 아깝다는 청춘을 가지고도 절망에서 살아남은 법만 찾아야 하는 현실을 언제까지 두고만 볼 것인지, 이제는 성인들이 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