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에는 시대의 흐름을 바꾸거나 규정 짖는 사건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19세기에는 프랑스혁명이 있었고, 20세기 초중반에는 경제대공황과 1, 2차세계대전, 식민시대의 종말이 있었습니다. 20세기 중후반에는 냉전에서 시작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과 신자유주의 제국의 독주,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러시아 및 동아시아의 금융위기가 있었습니다.
이제 15번째 해가 끝나가고 있는 21세기 초반에는 9.11사태와 이라크 전쟁, 미국을 덮친 카트리나, 신자유주의의 폭주가 불러온 글로벌금융위기가 있었고, 그에 따른 장기적인 경체침체가 이어지고, IS라는 새로운 악의 축이 등장했습니다. 이중에서 9.11사태는 제국이 민낯을 보여준 것과 동시에, 안전 담론에 편승한 ‘군‧산‧미디어‧연예복합체’라는 디지털 빅브라더의 탄생을 초래했습니다.
미디어는 연일 테러 장면들을 내보냈고,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확대재생산해 언제 어디서나 테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를 조장했습니다. 부시 정부는 헌법과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애국법’을 제정해, 무차별적인 도청과 영장도 없는 체포, 테러 예방이라는 명목 하에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프랑스에서 대형 테러가 일어난 이후에 박근혜 정부도 미국의 '애국법'을 모방한 테러방지법을 제정하려 합니다.
군산복합체의 새로운 먹거리로 떠오른 감시와 안전산업의 성장은 끝을 모를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CCTV의 폭발적이고 무차별적인 설치를 비롯해, 디지털 기술의 정화를 담은 각종 안전 관련 제품과 서비스가 봇물을 이루며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최인훈이 《광장》의 시작에서 갈구하던 개인의 공간은 사라지고, 구글 회장의 말처럼 더 이상의 프라이버시는 존재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9.11테러 이후 전 세계의 공황들이 감시 장비들을 다투어 도입했고, 기본권을 침해하는 승객들의 디지털정보가 대규모로 축적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무엘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미국과 서방의 최대 적으로 이슬람을 지목한 후 무슬림들은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취급됐고, 심지어는 범죄자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습니다.
자연법 사상의 총화인 천부인권과 각종 혁명의 결실인 시민의 기본권은 무시됐고, 테러와 범죄 예방으로 들어가는 예산은 천정부지로 늘어났으며, 복지와 교육, 공적부조 등의 예산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들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에 따라 요주의인물부터 정신질환자까지 세밀하게 분류되고 인위적으로 범주화돼 사회로부터 배제되거나 격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파시즘의 선봉장을 자처하는 박근혜 정부의 경찰이 시민의 권리인 시위와 집회 때 영상체증을 남발하는 것도 헌법상의 기본권에 반하는데도 안전 담론 때문에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시위나 집회가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상황을 가정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임에도 퇴출되지 않고 있습니다. 전문시위꾼을 가려내기 위함이라는 정권의 논리는 헌법과 법률, 민주주의마저 무력화시킵니다.
디지털기기(감시와 안전산업의 핵심도구)의 사용에 따른 디지털 기록과 영상들이 무한대로 쌓임에 따라, 개인별로 빅데이터가 형성됐고, 이에 따라 소비와 신용 등급을 매기듯이 개인별로 위험도가 매겨졌습니다. 밀착‧집중 감시를 넘어 차별화하고 범주화해서 감호조치까지 하는 유무형의 각종 불이익이 주어졌지만 이를 만회할 방법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근대민주주의(대의민주주의)가 최초로 정립된 미국이 민주주의 후진국으로 전락한 것도 9.11테러가 발단이 됐습니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 하에 민주주의와 헌법 및 국제법을 위반하는 내용으로만 이루어진 미드 ‘24’와 각종 근육질 히어로들을 찬양하는 허리우드 영화의 흥행성공도 9.11테러가 초래한 후유증입니다.
테러와의 전쟁을 팔아먹고 사는 미디어·연예사업은 전 세계적인 테러와 전쟁, 조직 및 마역범죄 등으로 인해 21세기의 상황이 비상상태(법이 정지되는 예외상태)라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줍니다. 이런 드라마와 영화들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피해의식을 강화하고, 그 반작용으로 위험이 제거된 안전사회에 대한 갈증이 인류의 소중한 자산인 평등한 자유의 제한조치까지 감내하게 만듭니다.
9.11사태 이후 미국에서 테러경보가 발령될 때마다 안전과 감시를 위한 예산이 평균적으로 수천억에서 조 단위의 세금이 투입됩니다(세월호 집회를 진압하는데 투입되는 경찰과 용역, 장비 등도 세금으로 충당된다. 민주주의와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의 자유는 타인의 불편을 전제로 함에도 야만공권력은 이를 무시하기 일쑤다). 그만큼 복지와 사회안전망에 투입돼야 할 예산은 줄어듭니다.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군‧산‧미디어‧연예복합체’를 이룬 감시와 안전산업만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여주는 것도 이런 테러 예방조치들이 남발되기 때문이며, 국가재정을 좀먹는 주역 중에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복지예산이 재정을 갉아먹는다는 자들의 주장은 재정집행내역을 살펴보면 정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테러방지법이 제정되면 이런 비용은 눈사태처럼 불어납니다.
울리히 벡이 정립한 ‘위험사회’의 등장도 이런 경향에 한몫했고, ‘군‧산‧미디어‧연예복합체’(안전·감시·산업복합체라고도 한다)의 시장규모를 무한대로 넓혀가고 있습니다. 이들 복합체가 세계경제를 주도할수록 극소수의 슈퍼클래스가 권력과 돈을 독점할 뿐만 아니라 인류가 선택한 체제인 민주주의를 극도로 축소시켰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기를 수입한 대한민국은 최고의 바이어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유일 제국의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을 넘어 실패한 국가에 속하게 된 것도 9.11테러를 초래하기까지의 탐욕과 일방독주 때문만이 아니라, 9.11테러 이후의 대처에도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사실상 강자와 부자들에게만 자유가 허용되는 과두정치 또는 우파 전체주의 국가로 접어들었습니다. 미국 상원의원의 2/3가 억만장자에 이를 정도로 정치권도 귀족화됐습니다.
오바마의 집권 이후로도 미국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미국경제가 무한대로 돈을 풀어 겨우 회복세에 접어들었다는 것만 빼면, 부시 정부 하의 미국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군인의 희생을 줄인다는 명목 하에 부수적 피해(민간인 폭격)를 양산하는 무인기(드론)의 폭격처럼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는 디지털 전쟁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스크린을 보며 버튼을 누르면 그만인 이런 비대칭적 전쟁은 ‘군‧산‧미디어‧연예복합체’의 성장과 동반하며, 그들의 지원 하에 시장규모가 확대되는 악마의 선순환을 구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더 큰 문제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일으켜 전 세계를 경제침체에 빠뜨린 금융산업의 탐욕도 무제한 양적완화와 폭력시장의 확대와 함께 되살난 것입니다. 제국의 부활이 가장 나쁜 방향으로 이루어졌고, 그 피해는 전 세계 국가들이 나눠져야 합니다(2부로 이어집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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