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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세월호집회는 불법적인 폭력집회가 아니었다



세월호 집회가 폭력으로 치달아 불법이라는 정부와 새누리당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야만공건력에 대한 시민의 저항권에 대해 다루어보겠습니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부당한 공권력의 집행에 맞서는 시민의 저항권이 최근에 정립된 개념이라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정치적 자유와는 달리 시민의 저항권은 인류 문명과 거의 동시에 정립된 개념입니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남자시민으로 한정됐다는 점에서 현대의 민주주의와는 구별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자유라는 개념이 정립된 것도 근대에 이르러서입니다. 노예라 해도 어느 정도의 자율성은 보장됐지만, 현대적 의미의 자유는 근대국가와 거의 동시에 정립된 정치사회적이고 법률적인 개념입니다. 그 바탕에 저항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침해불가능하고 양도불가능한 천부인권과 대부분의 국가가 헌법으로 보장하는 기본권은 거의 다 피통치자들의 혁명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토크빌의 《프랑스혁명과 앙시엥레짐》과 《미국의 민주주의1, 2》,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을 비교분석한 아렌트의 《혁명론》 등에서도 자세히 나와 있지만,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기본권은 수많은 피통치자의 목숨과 희생, 피와 땀, 세금을 내고 전쟁에 참가하는 대가로 회득한 것입니다.



국가에 절대주권을 (최초로) 부여한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도 자신의 생명이 위협당할 경우에는 국가를 부정하거나 전복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동양에서는 맹자가 ‘백성이 제일 귀하고, 그 다음이 나라고, 가장 가벼운 것이 왕’이라며 ‘왕이 잘못에 대해 간언을 듣지 않으면 바꾸라’고 함으로써 혁명권과 저항권을 인정했습니다.



자유주의자인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1, 2》에서 당시까지의 역사가 승자와 강자에 의해 저질러진 대량학살과 국제전쟁범죄의 역사였다며, 향후의 세상이 절대다수의 약자들이 주인이 되는 열린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는 또한 피통치자가 통치자를 뽑는 것에 민주주의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가 실정할 때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에 민주주의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을 놓고 미셀 푸코와 노엄 촘스키가 대담(《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을 하면서 푸코는 최소한의 폭력만, 촘스키는 그것이 정의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이라면 상당 수준의 폭력도 인정했습니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대한 정치철학자와 사회학자들 중 대다수가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통치자에 대한 피통치자의 폭력적(비폭력이 우선하지만) 혁명과 저항을 인정하는 체제임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헌데 새누리당과 보수언론, 종편, 지상파3사, YTN과 연합뉴스TV 등이 세월호 집회가 폭력적으로 변질돼 광우병 집회(정확히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집회) 때와 비슷하다고 왜곡된 보도를 내보냈습니다. 실상은 다릅니다. 경찰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을 받은 차벽(명박산성보다 심했다)을 치는 불법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경찰과 사복경찰들(폭력행위를 유도했다는 보도도 있다)은 유족의 눈에 캡사이신을 뿌리고 문지르고, 물대포까지 쏘는 등 초법적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미국의 연방대법원에서 '현존하고 명백한 위협'이 아니면 어떤 표현과 집회의 자유도 막아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경찰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헌법상의 권리와 민주주의의 핵심인 기본권에 해당하는 권리행사를 아무런 권한도 없으면서도,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가상해 세월호집회를 불법으로 규정까기 했습니다. 이는 명백히 헌법과 실정법 위반이며 오로지 상대적 힘이 우위를 바탕으로 독재에 협조하는 것일 뿐입니다.  





집회를 제압하는 과정에서도 압도적인 공권력이 저지르는 인권침해 사례를 확인하기 위해 집회에 동행한 인권변호사까지 강제연행했을 뿐만 아니라, 속전속결로 구속영장까지 신청(대부분 기각되고 두 명만 발부됐다)하는 등 유신독재시대의 행태를 재현했습니다. 경찰이 헌법과 민주주의를 무시했기 때문에 폭력적인 저항을 하는 것은 피통치자의 권리이자 정치적 자유입니다.



현재 전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폭력경찰의 잔인한 무력진압을 서울발 뉴스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외신들도 세월호 1주기 집회와 성완종 리스트가 맞물리면 박근혜의 퇴진도 가능하다는 뉘앙스의 보도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외신만 봐도 경찰의 폭력성과 위법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월호 집회 참가자가 폭력으로 맞선 것은 시민의 저항권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세월호가 지겹다가나, 세월호집회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글들을 보면 이들의 인식이 얼마나 천박하고 빈민주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의와 양심, 진실과 상식, 자유와 민주주의보다 기득권에 유리한 질서만을 말합니다. 진정한 무임승차자들이 이들 같은 사람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질서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될 때(공권력도 마찬가지다!)만 가능한 것이며, 집회의 자유는 타인의 불편함을 전제로 한다는 것까지 무시합니다.





우리가 시민의 권리과 기본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세월호 집회처럼 불의한 권력에 맞서 피와 땀, 목숨을 바친 투쟁을 통해 이룩한 것들입니다. 그들이 세월호 집회를 비판할 때 사용하는 표현의 자유와 권리는 세월호 집회 참석자들 같은 분들의 목숨을 건 투쟁으로 쟁취한 것들인데, 세월호 집회를 욕하는 사람들은 무임승차를 넘어 공권력의 야만적 폭력까지 옹호합니다.



수천 년에 걸친 피통치자들의 저항과 투쟁, 희생을 통해 힘겹게 쟁취한 정치적 자유와 천부인권,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각종 복지제도들을 공짜로 누리는 무임승차가 부끄러워서인지, 세월호가 지겹다거나 집회가 저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모든 권력의 원천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 즉 평등한 자유의 실현이 근본인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불의한 정부에 대한 저들의 저항과 투쟁은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시민의 혁명으로 가는 첫 번째 단계이고, 당신들의 아이들이, 그 이후의 아이들이 누려야 할 민주주의와 기본권, 정치적 자유와 사회경제적 평등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부의 불평등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가 가능해진 것 때문에 발생했는데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니 분노가 치밀 정도입니다.





정부가 차벽을 설치하고 국제기준과 헌법 및 민주주의에 벗어나는 진압이 이루어질 경우 정당한 공권력이 아닌 폭력집단의 만행이 되기 때문에, 이에 맞싸우는 것은 민주주의와 헌법에 저촉되지 않습니다. 불법을 바로 잡는 데 정의의 폭력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허용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고, 실제로 현대의 민주주의는 그런 과정을 통해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된다는 전제 하의 법집행이 폭력적 수단을 허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이는 대통령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평등하고 공정한 정의의 폭력입니다. 경찰과 용역, 사복경찰의 불법적이고 압도적인 힘 앞에서 죽음을 각오한 저항만이 이 땅의 민주주의와 피통치자들의 권리와 자유를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오늘에는 법정에 끌려간 사람이 내일에는 위대한 혁명가가 될 수 있는 것이 현대민주주의가 추구해야 할 방향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유족들은 현 정부 하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자식사랑이 전 세계인들의 가슴에도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정부가 진상규명을 꺼려할수록 세월호참사의 진상을 알리고 조속한 인양과 실질적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집회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합니다. 독재에 맞서려면 제2의 4.19혁명이나 6.10항쟁 이상의 것들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집회 참석자보다 많은 경찰을 동원하고, 차벽을 설치해 인간의 생리현상까지 불허한 경찰의 폭력진압이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줍니다. 현 정부는 출범부터 정치적이고 민주적인 정통성이 없었는데, 이제는 독재시대에나 가능한 일들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세월호 집회에서 발생한 폭력은 불법이 아니라 야만공권력에 대한 시민의 저항권에 근거한 것입니다. 



정당성을 상실한 정권은 유효기간이 지난 불량식품과 같습니다. 정부가 폭력으로 국민을 제압하려 한다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고, 한 치의 물러섬도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 걸음 물러날 때마다 보낼 수 없는 아이들의 영혼은 그만큼 멀어지고, 자유와 천부인권 및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 희생으로 이룩한 헌법상의 기본권은 축소됩니다, 아직도 맹골수도에 갇혀 있는 아이들의 슬픈 영혼처럼. 



지금은 제2의 4.19혁명이나 6.10항쟁 이상의 것들이 필요한 시기이지, 독재권력의 부패한 폭정에 자발적 복종을 보여줘야 할 때가 아닙니다. 억압과 착취 속에서도 세상은 돌아간다 했는데 작금의 대한민국이 그러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