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 이상이, 의심할 바 없이 나처럼, 더 이상 얼굴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 쓴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라, 나에게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하지도 말라. 이것이 나의 도덕이다. 이것이 내 신분증명서의 원칙이다. 쓴다는 것이 필요할 때,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ㅡ 미셀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에서 인용
음모론을 좋아하지 않지만, 자원외교 수사에서 조무래기에 불과한 경남기업이 타겟이 된 것과 성완종 사건이 참여정부 원죄론으로 번진 과정을 찬찬히 복기해보니 한 가지 음모론(의혹이 정확하겠지만)이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셀 푸코처럼, 글을 쓰는 것이 필자의 출생증명서라 머릿속으로 떠오른 음모론을 글로 옮겨봤습니다.
경남기업과 박근혜의 오랜 친분은 그녀가 7억원(1981년의 시가)에 이르는 성북동 집을 무상으로 기증받은 것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기수 경남기업 회장이 박정희와의 친분관계이건, 전두환의 명령 때문이건 박근혜에게 성북동 집을 무상증여하면서 그들 간의 친분은 시작됐습니다.
성완종이 경남기업을 인수한 이후에도 박근혜와 측근과의 인연은 계속됐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을 청와대(김기춘이 비서실장이었을 때 자원외교 수사가 시작됐기 때문에)에서 경남기업을 포스코와 함께 첫 번째 타겟으로 잡은 것은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청와대가 박근혜와 오랜 친분이 있고 실세들의 자금줄인 성완종의 경남기업을 타켓으로 잡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비리자판기’ 이완구가 총리에 오른 다음 경남기업을 집어넣었다는 것과 우병우 민정수석이 부패와의 전쟁을 기획한 것이라는 풍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헌데 성완종이 자살하며 남긴 55자의 리스트와 경향신문과의 통화녹취가 터져 나오면서 목표했던 것이 궤도를 이탈했습니다. 국정동력을 되찾기 위한 부패와의 전쟁이 부메랑이 돼 박근혜 대통령과 최고 실세들을 향해 시퍼런 칼날을 (김흥국처럼) 들이댔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났을까, 자원외교 국정조사를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한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이 참여정부 원죄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이후로 거의 모든 언론들이 참여정부의 비정상적인 성완종 사면 의혹을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검찰수사와 함께 성완종 사건의 본말이 전도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자, 여기서 음모론의 소재들이 생산되기 시작합니다. 가장 말이 안 되는 것은 성완종의 죽음이 참여정부 원죄론을 들고 나올 수 있는 계기로 만들었다는 설입니다. 김기춘의 청와대에서 경남기업을 첫 번째 타켓으로 잡은 것이 성완종의 2번째 사면과 얽혀있을 노무현과 이명박의 이면거래를 까발려서 이명박과 문재인을 동시에 죽이기는데 활용하려 했다는 설입니다.
청와대에서 자원외교 비리의 내사에 들어간 것이 이명박의 자서전에 나온 박근혜 비판 내용 때문이었다는 설이 강력하기 때문에, 박근혜 정부로서는 이명박 측에서 로비했다는 것과 이것을 노무현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밝혀낼 수만 있으면 1석3조의 대박(통일대박론을 능가하는)을 터뜨릴 수 있습니다.
이 음모론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첫 번째 이명박의 법무비서관을 지낸 권성동이 두 대통령간의 이면거래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성완종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수도 있어야 합니다. 성완종이 사용하는 모든 휴대폰을 도청함으로써 경향신문과의 통화사실을 알아냈고, 다급해진 청와대가 성완종을 암살했다는 것이 입증돼야 하는데, 이는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아니면 성완종을 회유해서 사면 당시의 상황을 자백하는 대신 기소유예나 무혐의처리해주는 시나리오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확보한 이면거래를 이용해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여주고 있는 문재인을 한 방에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했을 수도 있습니다.
박근혜는 남미순방을 2시간 반이나 늦추며 김무성과 독대할 때 어떤 언질을 주었을지 모릅니다. 자신이 남미순방에 나가있는 동안 정치검찰의 수사는 경남기업의 모든 자료를 회수하는데 전력할 테니 새누리당도 이에 협조하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야당으로서는 대통령이 부재한 상황에다 이완구가 총리직을 사임한 상태이니 본격적인 전투를 벌일 수도 없습니다.
이제 대통령이 귀국해 병원으로 직행했기 때문에, 보수층에서 동정론이 일어나면 박근혜는 성완종 사건에서 거의 다 벗어나게 됩니다. 여기에 종편과 보도채널들의 대놓고 하는 선거운동으로 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면 국민들이 깜짝 놀랄 만한 정국 수습책을 제시하며, 자신의 최측근까지 성역없이 수사하되 참여정부 원죄론도 확실하게 마무리지으라는 지시가 내려갈 가능성도 높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이명박 수사야 어려운 일이 아니니, 그 대가로 현역단체장인 서병수와 유정복만 빼고 나머지 6명의 사법처리부터 진행하겠지요. 그렇게 분위기를 만들어 보수층을 결집시키고, 중도의 동정표까지 끌어낼 수 있다면 이명박과 문재인을 죽이는 작업과 노무현을 부관참시하는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증거가 있을 리가 없는 둘 간의 이면거래란 양측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할 것이기 때문에, 이명박과 문재인만 피해를 입는 일이니 꽃놀이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명박 측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박근혜 정부가 요구하는 대로 문재인을 몰아붙일 수 있습니다. 이면거래 있었다, 우리가 요구했고 노무현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죄송하다, 그에 대한 대가는 받겠다 등등으로 이어지면서 문재인은 꼼짝없이 덫에 걸려듭니다.
박정희의 후광을 받은 박근혜 이후에 보수층을 결집시킬 수 있는 인물이 없는 새누리당에서는 문재인만 죽이면 차기 총선과 대선에서도 승산이 충분하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성완종 리스트로 김무성의 적수 중 가장 강한 이완구와 반기문까지 죽였으니, 거듭되는 실정에도 불구하고 정권재창출에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상이 제 머릿속에 느닷없이 떠오른 성완종 음모론이었습니다. 원래 음모론은 이처럼 퍼즐을 역으로 맞춰가며 만들어지는데, 그래서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세월이 하수상하니 뭔일인들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음모론이 나올 수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참담하지만, 정치검찰과 새누리당, 언론들이 삼위일체처럼 움직이니 이따위 허접한 음모론도 떠오르나 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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