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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워드

우영워드 ㅡ 슈퍼스타의 그늘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동철과 재영이 2차를 하고 있을 때, 유리는 자신만의 성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며 감시하는 매니저도 돌아갔다. 친 여동생 같은 코디, 소영도 이층에 있는 그녀의 방으로 올라갔다. 유리는 잠시 하루의 일정을 되돌아봤다. 동철과의 만남은 언제나 삶의 갈증을 풀어주는 오아시스 같은 것이었다. 처음 본 재영이라는 기자도 느낌과 인상이 그녀의 맘에 들었다. 재영을 놀리기 위해 동철과 꾸민 연극도 성공적이었다. 요즘 들어 좀처럼 갖기 힘든 즐거운 시간이었다.



‘언제부터였지?’



유리는 동철과의 만남조차 스쳐가는 소풍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스크린에서만 생생한, 잘 만들어진 한 편의 독립영화를 보는 것처럼 변해버렸다. 몇 시간도, 운이 좋으면 며칠 정도 그런 기분이 유지되기는 한다. 모차르트의 재능에 대한 살리에리의 광적인 질투를 다룬〈아마데우스〉를 보고 난 후의 며칠처럼. 지금은 단지 다음 스케줄까지 13시간 정도의 자유만이 주어졌을 뿐이다. 최근에는 음반 활동을 접은 이후에도 몇 개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은 이제 통상적인 일이 됐다. 특별 MC를 맡은 프로그램과 대학 축제 5곳, 세 편의 CF 촬영도 남아 있었다.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는데도 광고 섭외는 줄기차게 들어왔다. 다만 제품의 종류와 회사의 크기가 하락세에 접어든 자신의 인기를 반영하는 것 같아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수액까지 다 빨리면 무엇이 남을까?’



유리는 겉옷을 신경질적으로 벗어 던진 후 곧장 욕실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성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루 동안 쌓인 세속의 찌꺼기부터 씻어냈다. 언제부터 이런 버릇이 시작됐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젠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의식이 됐다. 유리는 욕실로 걸어가는 동안 뱀이 허물을 벗듯 속옷과 브래지어, 팬티까지 벗어 던졌다. 그것은 거룩한 의식을 행하는 하나의 절차처럼 보였다.



‘아픔도 벗을 수만 있다면.’



유리는 곳곳에 배치된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타인처럼 응시했다. 그것은 단 1kg의 몸무게 증가도 허용치 않은 고문 장치와 다름없었다. 얇고 긴 팔과 D컵에 이르는 탄력적인 가슴과 군살 하나 없는 복부, 그 밑으로 길고 매끈한 두 다리는 기본적 본능마저 박탈당한 속박의 결과였다.



‘껍데기, 껍데기야!’



유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나신이 괴물처럼 보였다. 타인의 욕망과 그것이 필요한 광고주가 만들어낸 빛과 어둠의 합작품. 그녀는 문득 거울 뒤편의 배경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몇 발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한 발 한 발 뒷걸음칠 때마다 거울 속의 자신이 샹들리에 불빛이 미치는 곳에서 벗어나 희미하게 테두리를 이루고 있는 지점에 이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마치 뚜렷한 형상의 세계에서 모든 것이 모호한 암흑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 같았다. 한 발만 더 물러나면 이 혼탁한 세상에서, 모든 거짓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체를 박탈당한 영혼보다 정신을 박탈당한 육체가 더 슬픈 일이라 믿고 있는 현재의 그녀로서는, 더더욱.



‘너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유미는 거울에 반사된 빛과 벽에 의해 차단된 어둠이 치열하게 다투는 지점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무대 위에 올라서면 언제나 이런 느낌이 들었다, 퇴로가 차단된 감옥에 갇힌 듯한. 유리는 거울 속의 자신을 위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미끄러지듯, 그러나 거의 인지하기 힘든 미세한 거리의 변화를 확인한 순간, 그녀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신비한 이질감도 완벽한 단절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장면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실체가 뚜렷한 사건 같았다. 태어난 모든 사람이 죽듯, 홀연히 거울 속의 자신이 사라졌다. 미처 사라지지 못한 한 가지 생각만 빛의 세계에 홀로 남겨둔 채.



‘시들어지듯 죽고 싶지 않아.’



돌이켜 보면 지난 10년간의 삶이란 세상의 중심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이었다. 타인의 욕망과 주파수에 맞춰진 하루하루는 자신의 의지와 욕망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빛의 속도로 질주했다. 연예계란 0.1%도 안 되는 성공에 목맨 온갖 탐욕들이 자본의 논리에 따라 충돌하는 살육의 현장이자 대규모의 전쟁터였다.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욕망은 치명적인 대량살상 무기였다.



‘살아남으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하는.’



그녀가 경험한 연예계란 첨단 미디어와 절대 다수의 꿈과 욕망이 만들어낸, 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경연장이자 죽음의 소용돌이였다. 일단 그곳에 들어서면 누구나 타인의 욕망이 투영된 꼭두각시로 전락한다. 뼈가 닳고 근육이 뒤틀리는 육체노동과 사랑마저 통제되는 시스템 속에 갇혀 버린 채 흘러간다. 엄청난 갈채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돈은, 평균적 노동의 보상 수준을 넘어섰기에 치명적인 마약과도 같았다. 하지만 재주는 사후에 부여된 속성이고 성공은 성공 자체가 강화되는 승자독식의 결과일 뿐이다. 표절과 상납의 고리는 부수적인 사안에 치부될 정도로 섞어 버렸거나 조작된 채.



“신데 fucking 렐라!”



유리는 소리쳤다. 날카로운 그 소리에 한 점 한 점 내려 그녀의 어깨 위에 쌓여 있던 어둠의 파편들이 이리저리 튀어나갔다. 그녀의 외침은 벽에 부딪쳐 울부짖었지만 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pretty woman은 영화에서나 존재해. 난 껍데기에 불과해. 대중이 원하는 대로, 시스템이 주문하는 대로 움직이는 마네킹이었어. 난 어디에도 없었어.”



유리는 신들린 무당처럼 중얼거렸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대중의 욕망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결코 기다려주지도 않았고 작은 실수에도 살을 도려낼 듯 칼날을 들이댔다. 버려지는 것은 일순간이었다. 인기란 환영이고 돈이란 자신을 태워버리는 주문이자 연료였다. 대중의 기억은 수시로 변하는 기호처럼, 지속되지도 않았고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면을 몰라.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유리야, 넌 어떻게 할래?”



유리는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물었다. 동철의 말처럼, 대중은 거기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다. 그들에게 즐길 권리는 있지만 스타를 이해하거나 보호해줄 의무란 없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연예인들은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노예계약이나 장기간의 합숙훈련, 박탈된 보편적인 인권, 노래와 격렬한 춤은 물론 연기력과 토크 실력까지 요구하는 현실에서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진다. 용도폐기는 또 얼마나 자주 일어났던가?



“이대로 살 거야? 나머지 삶도 껍데기로 보낼 거야? 말해봐, 유리야?”



미처 따라오지 못해 빛의 세계에 남겨져 있던 생각마저 어둠으로 끌어들인 유리가 스스로에게 다시 물었다. 몇 개월째 뇌리를 떠나지 않는, 마음은 이미 답을 내렸지만 현실에 깊이 빠져 있는 두 발이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하나의 생각. 스스로 묻고 저항하고, 단죄하고 용서하는 지난 1년 6개월간의 치열한 갈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어느 한 순간, 유리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몸도 부르르 떨렸다. 두려움 이상의 공포와 종말처럼 다가오는 체념. 이 모든 것은 어떤 힘든 결정을 내릴 때 그녀가 드러내는 전형적인 연쇄반응이었다.



띠딩팅팅티잉딩! 띠딩팅팅티잉딩!



그 반응의 끝에서 누군가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끝이 안착하는 느낌의 특유의 멜로디가 들렸다. 그것도 두 번이나 연달아. 즉각적으로 신경이 곤두섰다.



“이 시간에, 대체 어떤 작자야?”



유리는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환하게 밝아진 스마트폰이 자신을 유혹했지만 그녀는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1년 6개월이나 끌어온 생각을 실행하기로 결정한 순간, 우연 또는 필연처럼 전해져 온 문자메시지가 불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곧장 샤워하러 들어가지 않은 것이, 오늘 따라 스마트폰을 꺼두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될 것 같은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동철 오빠가 보낸 문자메시지일 거야. 오늘 맛있게 술 먹었다는, 뭐 그런 거.”



유리는 자신에게 유리한대로 문자메시지로 자신을 찾는 사람을 동철로 단정함으로써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려 했다. 그녀는 망설였다. 문자메시지의 내용을, 보낸 사람의 전화번호를 확인하지 말라고 내부의 누군가가, 어둠 저편에 숨어 있는 누군가가 연이어 경고를 보내는 것 같았다. 그 섬뜩한 느낌에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거울 속의 자신에게 10년 동안 유보했던 자유를 선물하고 싶었던 오직 한 발만큼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