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철이 ‘니뫼러의 고백’을 고백성사 하듯 암송했다. 거대 언론이 현재 권력과 자본에 밀착했을 때 나타나는 전체주의적 성향에 대해 일격을 가하려는 재영이 절대 모를 수 없는 글이었다.
“‘처음에 저항하라(Principiis obsta)’ 그리고 ‘결말을 생각하라(Finem respice).’ 니뫼러가 제시한 두 개의 원칙이 그 참혹한 경험에서 나왔죠.”
“그런가요? 하지만 사후약방문 아닌가요? 히틀러는 투표로 권좌에 올랐잖아요? 법에 의한 통치를 전면에 내세운 것도 그가 아닌가요? 모든 독일인이 그를 선택하진 않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될 때까지 뭐하고 있었답니까? 아무튼 자기변명처럼 들리네요.”
“맞아요, 사후약방문이고 변명이 맞아요. 니뫼러처럼 저항정신이 투철한 사람도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깨달으니 참, 답답한 노릇이었어요. 모든 것이 변하고 있을 때, 변화를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인 것 같아요. 체제의 내부인으로써, 침묵했던 지식인으로써 자신의 무력함을 변호하고 싶었겠지만, 그의 말처럼 처음에 저항하지 않으면 어떤 결말도 생각할 수 없어요. 깨달았을 때는 늦어도 너무 늦었죠. 인간은 정말 과거의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는 족속인가 봐요?”
“제 생각도 같아요. 어쩔 때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아니라 만 악의 근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중에서도 배운 사람들의 책임이 더 크다고 봐요. 지식인이라는 게 뭡니까? 권력 주변을 알짱거릴 뿐, 지식의 왕국에 머물러 초연한 척, 격려라고 하는 게 시국선언문 몇 쪽이란 말입니까? 배웠으면 돌려줘야죠. 지식이란 어느 누구의 전유물일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동철의 눈에 적개심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고고한 척, 현실적 한계를 들먹이며, 체제의 수면 아래에서 시끄러울 뿐, 행동하거나 행동을 격려하지도 않는 이 땅의 지식인에 대한 비릿한 감정이 적나라하게 표출됐다. 재영도 그 점에선 의견을 같이 했지만 언론인으로써의 자괴감이 드는 것까지 막을 수 없었다.
“유구무언입니다.”
“아이고, 재영씨를 지칭한 거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제가 재영씨에게 얼마나 많이 배우고 있는데요. 좀 어려워서 그렇지, 큭.”
본성이 착해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동철이 손사래를 쳤다. 재영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국민이 인정하는 최고의 MC로써, 절대적 영향력의 소유자인 그는, 안타까울 만큼 거들먹거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재영은 그런 동철이 좋았다. 그는 동철이 전임 대통령에 대한 회한에서 빠른 시일 내에 벗어나 보다 창조적인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한 잔 더 빨까요?”
“병나발도 좋습니다!”
재영과 동철은 사막에서 겨우 빠져 나온 사람처럼 소주를 들이켰다. 늘어나는 취기보다는 마음의 갈증이 더욱 컸다. 동철이 아예 글라스로 잔으로 갈아타자고 했다. 마다할 재영이 아니었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안주는 싸늘하게 식어갔지만 빈 술병들은 테이블을 빼곡하게 채워갔다. 그런 두 사람을 보는 주인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연예인이라면 최소한 5가지 이상의 저 품질 고가의 안주는 기본 아닌가? 게다가 지금이 몇 시야, 소주 못 먹고 죽은 귀신이라도 씨였으면 모를까? 아니 이제는 소주잔을 아예 글라스 잔으로 바꿔달라고? 이 화상들아, 나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야! 제발 이익 짭짤한 안주 좀 시켜! 이런 주문들을 외는 주인의 눈빛에 짜증이 가득했다. 수리수리 마수리, 아부라카다부라!
“근데 재영씨, 도대체 뭘 먹었기에 그렇게도 아는 것이 많아요? 과학이면 과학, 정치면 정치, 경제면 경제. 이건 걸어 다니는 사전이 따로 없다니까? 검색도 필요 없겠어, 크큭.”
동철의 혀가 조금 꼬이기 시작했다. 주인은 두 병의 소주와 글라스 잔을 내려놓으며 더 시킬 안주 없느냐고 엄청(?) 우회해서 물었다. 그 마음을 알아챈 동철이 아예 메뉴판을 흔들었다. 알아서 갔다 달라는 얘기였다. 주인이 얼른 주방으로 들어갔다, 귀에 걸린 입의 잔영을 남기면서.
“사돈 남 말 하십니다. 동철씨도 만만치 않잖아요?”
“저야 여기저기서 동냥한 것에 불과한데요, 뭘?”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어요. 경험을 통해 스스로 얻은 지식이 진짜 아닙니까? 사실 플라톤 주름지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제가,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엄청나게! 도대체 전공이 뭐였습니까?”
“허허, 이거 참. 대학 때는 물리학과 생물학을, 편입해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기웃거렸죠. 대학원에서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지만, 남아 있는 게 없어요. 뇌 속에는 온통 말똥과 쓰레기뿐이에요.”
재영의 혀도 급격히 꼬여 들었다. 주방에서 지글지글 끓는 소리와 고기 굽는 냄새가 요란하게 전해져 왔다. 동철이 글라스 잔에 소주를 가득 부었다. 재영의 눈에 입이 귀에 달린 주인의 잔영이 떠올랐다.
“엄청 공부하셨네요? 도대체 전공만 몇 개야? 어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근거리네. 근데, 플라톤 주름지대가 뭐에요? 성형수술 관련 용어인가요?”
“하하하! 성형 수술 용어라? 어떻게 보면 비슷하네요. 단순하고 정의하기 쉬운 것만 대상으로 삼고 복잡하고 가변적인 건 아예 무시하는 영역이 플라톤 주름지대니까. 다른 얼굴로 들어갔다 같은 얼굴로 나오는 성형외과도 일종의 플라톤 주름지대라 할 수 있겠네요. 죄다 김태희고 송혜교니..”
“김태희와 송혜교도 온다고? 이곳에? 언제?”
주방에서 미친 듯이 안주를 만들고 있던 주인이 쩌렁쩌렁한 소리로 물었다. 안주를 만들고 있는 상태에서 목을 길게 뺀 상태에서 홀을 향해 고개만 돌리니, 바동거리는 거북이가 따로 없다. 오십 줄에 접어든 주인의 두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고 얼굴 가득 기대감이 넘쳐난다. 수리수리 마수리, 아부라카다부라! 간절하게 원하면 이루어지는 법이다. 조금 전의 안주 사건이 이를 증명해주지 않는가? 주인은 기원하고 기원한다. 동방국 최고의 미녀, 김태희와 송혜교가 자신의 가계에 왕림해주길. 주시길. 주시길!
“크큭!. 귀는 밝아서. 신경 끄세요, 아저씨. 그 사람들이 이 시간에 여길 왜 와요? 그나저나 재영씨, 시대를 앞서가는 제 얼굴, 멋지지 않습니까? 요즘 대세는 못생긴, 아 그게 아니라 개성 있는 얼굴이 대세라는..”
“어련하시겠습니까? 견적 자체가 나오지 않을 만큼 대세는 대세지요, 하하하!”
“크큭. 그런가요? 우리 엄만 나 보고 잘 생겼다 하더구먼. 아, 그런데 플라톤 주름지대라? 허, 이거 참. 플라톤이 역사상 최고의 철학자요 교수라고 알고 있었는데?”
소주가 반쯤 차 있는 글라스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동철의 표정에 실망감이 완연했다. 그에게 플라톤은 특별한 존재인 것 같았다. 재영도 글라스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동철에게 물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동철씨께, 플라톤이 최고의 철학자고 교수여야 하는?”
꿀꺽꿀꺽. 재영이 글라스 잔에 가득 찬 소주를 맥주처럼 들이켰다. 그에 따라 이성을 잠식하는 취기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위장이 처음으로 거부의 반응을 전해왔다.
“있습니다, 있어요! 플라톤 주름지대니 하는 건 잘 모르겠지만. 꺼억! 플라톤이 최고의 교수여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있고말고요!”
동철도 취기가 급격히 올라오는지 말을 끝내는 소리의 톤이 커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과 표정, 말 속에는 진지함과 간절한 바람 같은 것이 철철 넘쳐흘렀다. 재영은 취기에 급격히 무너지는 정신을 악착같이 붙들며 동철에게 물었다.
“뭡니까? 우리 동철씨를 괴롭히는 게 뭡니까? 플라톤, 그 사람! 자기 시대에만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이 시대 이곳까지 따라와 동철씨를 괴롭힘 답니까? 대체 뭡니까, 뭐에요”
플라톤이라면 질색하는 재영이 따지듯 물었다. 그는 위대한 철학자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인종차별주의자였고 노예 찬성론자였으며, 이데아로부터의 모든 변화를 타락이라 주장해 인류의 발전을 제한했다. 게다가 그는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활용해 자신의 주장을 강화시켰으며 최종적으로는 자신과 같은(실제 그는 공자처럼 당시의 권력자가 자신을 찾아주길 바랐다) 현자가 다스리는 유토피아를 인류가 지향해야 할 유일한 이상향으로 정의했다. 일체의 변화를 용인하지 않는 유토피아, 즉 완벽한 전체주의(히틀러의 나치, 왜국의 군국주의, 3대 세습이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지배체제를 구축한 조선국이 이에 속함)를 창시한 위대하면서도 위선적인 철학자였으니 재영으로써는 플라톤에 대해 탐탁하게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쥐꼬리만큼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흔히 미국에 정착해 청빈한 삶과 지독한 노동, 다음 세대를 위한 저축을 통해 미국의 기초를 다진 청교도들을 뜻한다. 이들의 전통은 19세기 말까지 이어져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어냈다)의 정신적 선조도 그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초기 기독교 신앙에 미친 그의 영향이 절대적이었기에 칼뱅의 교리를 따른 아일랜드 계 백인 프로테스탄트들을 그의 사상적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후손이라 치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광활한 대지와 누구든 노력만 하면 성공이 보장되는 천혜의 신대륙(잔혹하게 몰살된 인디언 입장에서 보면 구대륙)에 도착한 그들이 대륙의 원주민이자 자연과 더불어 살던 인디언들을 무참히 몰살시킬 수 있었던 것도, 신이 내린 천혜의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은 신의 선택을 받은 유일한 선민(백인 우월주의에 전형이자 플라톤이 태생적으로 지배계급으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인 자신들이 다스리는 게 신의 뜻이라는 의식에서 나왔다. 신대륙에 ‘언덕 위의 도시’를 구축하겠다는 그들은 자유와 함께 개인 및 기업의 이익 추구를 절대적 가치로 내세워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를 단시일 내에 구축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전 세계에 그들의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것이 ‘예외적 존재’로써의 신이 준 사명이라며 선제적 침공을 서슴지 않는 등, 영국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되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이자 최악의 대통령이었던 부시가 소명의식 운운(실제는 석유 확보와 함께 당시 달러화를 대체할 듯한 기세를 보여주었던 유로화 결제를 막기 위한 것이 주된 목적이었지만)하며 마치 십자군의 후예라도 되는 양, 이라크 등을 침략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플라톤의 유토피아적 발상에서 이를 수밖에 없다. 미국의 전체주의적 성향을 그 기저부터, 낱낱이 파악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이런 복잡한 재영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동철이 플라톤에 대한 재영의 적개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꿈이 대안학교를 설립하는 거예요. 플라톤처럼 끄윽. 최고의 학교를 만드는 게 제 필생의 꿈이거든요.”
“대안 학교요? 아, 그 얘기 어디서 읽은 것 같은데, 어디였더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동철씨, 어떤 대안 학교를 만드시려고?”
“20분 공부하고 40분 쉬는 그런 학교요. 10분 공부하고 50분 쉬어도 상관없지만. 교사는 가르치기보다 애들의 얘기를 더 많이 들어주는, 그런 학교요. 끅.”
재영은 동철의 표정에서 몽환적인, 그러나 오랫동안 준비해온 자의 의지와 일관성이 느껴졌다. 놀라운 것은 20분 공부하고 40분 쉬는 것이었다. 가르치기보다 들어준다? 얼마나 멋진 발상인가. 경쟁만 강요하는 기존의 교육제도에 대한 통쾌한 전복이 이것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비록 동철이 모델로 삼았던 플라톤은 자신이 세우려는 이상적인 학교가 아테네 자체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알았을 수도 있다. 칼 포퍼처럼, 나는 플라톤과 ‘대화’를 나누지 못했으므로).
‘동기의 순수성에서 보면 플라톤이 동철의 아래야.’
재영은 동철이 새삼스럽게 보였다. 그의 매력은 끝이 어디일까, 재영은 그것이 궁금했다.
“저는 말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10조의 ‘행복추구권’을 최고의 가치라고 봐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전 이것이 영원불멸의 진리라고 생각해요. 꺼억.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무튼 이것 하나면 다른 건 필요 없어요. 전 그렇게 믿어요.”
“헌법에는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이 들어있지요.”
“재영씨가 중요시 여기는 헌법 조항은 무엇인데요? 기자라는 직업을 떠나서요?”
“헌법 119조 2항입니다.”
동철의 질문에 재영은 직각적으로 답했다.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었다.
“뭔데요? 외우고 있다면 말해주세요.”
“좀 깁니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너무 길지요?”
“길긴 기네요. 요즘 한참 회자되는 공정사회를 위한 대기업 때리기의 근거와 비슷하네요. 솔직히 전 잘 모르겠어요. 경제는 영 꽝이라. 하지만 힘없는 서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헌법이 규정한 ‘행복추구권’이라고 봐요. 나머지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라 생각해요.”
“그래서요?”
“전 우리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상대를 짓밟아야 올라설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났으면 해요. 그냥 그 자체로 행복했으면 해요. 공부, 공부, 공부! 그렇게 올라서고 나도 딸꾹, 또 짓밟아야 할 것이 남아 있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어요? 저는 아이들에게 행복을 돌려주고 싶어요, 행복을! 네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친구와 함께 가는 게 삶이라고! 딸꾹, 두려워하지 말고 사다리를 걷어차라고!”
열정 가득한 동철의 말에 재영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진심에서 흘러나온 울림이 너무나 맑고 고와서, 그 공명을 함께 하고 싶어서, 자신은 동철의 꿈을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동철씨, 일본이 나은 위대한 정치학자인 마루야마 마사오가 『현대정치사상과 행동』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헌법의 규정 배후에는, 표면의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름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무수한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축적되어온 노력의 흔적이 구불구불 아스라이 이어지고 있다”고. 동철씨 얘기를 듣다 보니 문득 그의 말이 생각나서 드리는 말입니다.”
“일본에서도 그런 뛰어난 인물이 나왔네요?”
“일본이란 나라, 절대 만만한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의 입장에선 어떻게든 그들을 뛰어넘어야 하는 입장이지만 실체적 진실까지 무시할 수는 없지요. 정말 뭐 같지만.”
“그러게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비관하지 않아요. 우리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과 공간이 제공되기만 하면 그들을 따라잡는 일도 멀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딸꾹! 제가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달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아이들이 밝은 웃음과 신명나는 놀이의 공간을 제공하는 날을 위해서예요. 그래서 저의 하루하루가 행복에 가까운 것 같아요, 딸꾹!”
재영은 술 때문에 딸꾹질을 하면서도 자신의 처지에 대해 비관하지 않는 동철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그러다 문득 재영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동철의 꿈처럼 신명나는 것인지, 정말 자신은 그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너무나 오랫동안 한 가지 목표만을 바라본 결과 눈이 흐려지고 시야가 좁아진 것이 아닌지 갑자기 헷갈렸다. 무엇이 정의고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이란 말인가?
‘그리고 난 행복한가?’
절대! NEVER!
재영은 마음속으로 강하게 부정했다. 누구나 자신이 변해가는 경우에는 그 누구도 변하지 않은 것이 불변의 진리라면, 플라톤 주름지대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자는 동철이 아니라 자신일지도 몰랐다. 미래로 통하는 길이 투명하고 꼭 질서정연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성지에 이르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여정이 나름대로의 가치와 행복을 갖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재영은 지난 3년 동안 그 사실을 완벽하게 잊고 있었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는데 무엇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들, 설사 이룬다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재영은 갑자기 두려웠다, 굳건해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자신의 믿음에 미세하나마 균열이 가는 것이. 재영은 너무나 부러웠다, 이미 긴 순례의 길에 들어선 이후에도 그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 믿는 동철의 확신이.
“어, 근데? 재영씨, 왜 저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는 거예요? 저 남자가 싫다고 말했잖아요! 딸꾹. 저 여자 엄청 밝혀요, 왜 이러시는 거예요? 크큭!”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재영은 그저 웃었다. 왜 웃느냐고 물으면, 웃음이 나와서 그랬다고. 웃는데 다른 이유가 필요하냐고?
“안주 대령이요. 어, 술도 몇 병 가져와야겠네? 김태희와 송혜교는 언제 오는 거야?”
불쑥 튀어나와 여러 개의 안주를 내려놓으며 상냥하게 묻는 주인의 말에, 재영도 웃고 동철도 웃었다.
“하하하하하!”
“크크크큭!”
영문을 모르는 주인만 눈알을 번뜩거렸다. 입술은 위 아래로, 삐죽 나오거나 샐쭉 들어갔다. 헌데 그 눈빛이 왠지 사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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