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한 판결이었음에도 1973년 낙태(를 개인의 권리로 인정한 것)에 대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은 ‘넌덜머리가 난 사람들의 연합’에게는 연달아 일어나는 터무니없는 일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ㅡ 미클레스웨이트와 울드리지의 《더 라이트 네이션, 미국 보수주의의 파워》에서 인용
당신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감한 주제에 대해 의사를 표현하는 일은 오래 전에 그만두었다.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원칙 때문에 인종주의자나 고집불통, 동성애 혐오자로 불리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람들을 공평하고 또 정직하게 대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옳은 일과 그른 일에는 차이가 있는 법이다.
위의 인용문은 미국 우파의 풀뿌리 조직인 ‘티파티’의 지도자 중 한 명인 글렌 벡의 《글렌 벡의 상식》에 나오는 내용으로, 공화당의 주류로 떠오른 기독교-신보수주의의 배타적인 신념이 고스란히 묻어나옵니다. 그들은 ‘인종차별과 원리주의, 동성애 불허’가 하나님의 뜻이자, 악에 대한 성전이라고 주장합니다.
궁극적으로 연방정부를 폐쇄시키는 것이 목표인 기독교-신보수주의 교합의 특징 중 하나가 좌파의 전략과 전술을 차용해 기독교의 복음주의 문화운동으로 대체한 것인데, 대표적인 것이 ‘낙태와 동성애 반대 운동’입니다. 그들은, 매케인의 러닝메이트였던 사라 페일린이 주장한 것처럼, 강간(근친상간과 집단성폭행까지 포함)으로 인한 낙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종파인 청교도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은 동성애를 낙태와 함께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악한 일’이자 헌법에 반하는 ‘그른 일’이라고 주장하며, 폭력과 테러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들은 미국에 상륙한 청교도들이 신의 이름으로 5,000만 명의 원주민(인디언)을 죽음으로 몰고 갔듯이, 낙태와 동성애도 멸종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이런 논리가 극단에 이르면 애를 낳지 않는 여성들도 멸종의 대상이 된다).
이들의 막가파식 성경 해석이 얼마나 궤변에 해당하는지는, 창조주가 모세에게 내린 십계명에 반하는 고의적인 총기사고를 옹호하는 논리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이들은 '살인을 하지 말라'는 십계명에 반하는 고의적인 총기사고를 옹호하기 위해ㅡ살인을 계속하기 위해 총을 쏜 자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총기에 있다는 궤변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통진당 해산과 아청법 합헌 판정을 내린 (정신 나간) 한국의 헌법재판소처럼, 보수 편향적인 미 연방대법원이 식민지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뿌리 깊고 극단적인 낙태와 동성애 혐오와 반대를 무릅쓰고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을 내린 것은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에 준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1》에서 자세히 다루었듯이, 헌법과 종교의 나라인 미국에서, 그것도 두 개의 가치를 지탱해온 연방대법원에서 ‘동성결혼 합헌 판정’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보수 성향의 이중개념자 엔서니 케네디 대법관의 선택이 결정적이었습니다(표현과 언론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에서 나왔다).
올 4월에는 천년 이상 지속해온 이성 간의 결혼에 무게를 두는 듯했던 그는 ‘결혼이 사랑과 신의, 헌신, 희생 그리고 가족의 최고 이상을 구현’하는 것이라면 ‘동성커플이 이러한 결혼의 이상을 경시한다고 볼 수 없으며, 그들도 결혼의 최고 이상을 존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라며 동성결혼 합법화에 한 표를 던졌습니다.
진보적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예수의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의 과학적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를 동일시하며, 진화론마저 ‘타락한 진보주의 과학자의 음모’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우파는 ‘다름을 틀림’으로 보기 때문에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을 신의 섭리마저 거부하는 타락한 진보주의 대법관들이 저지른 ‘그른 일’로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피로 물들인 선악의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는 진보의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이번 판결의 인류사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란 진보 성향의 대법관들이 캐스팅보드를 쥐고 있었던 이중개념자 케네디 대법관을 진보적 가치에 동의하도록 설득한 것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은, 어떤 사안에는 보수적이고 다른 사안에는 진보적인 이중개념자를 향해 우측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 가치의 정당성으로 그들을 설득해 좌측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진보가 정치적이고 법적인 승리를 위해 우측으로 옮기면, 바로 그만큼 진보적 가치는 보수화되기 때문입니다.
운동장은 그렇게 기울어지고, 경사는 심해지는 법입니다. '종교가 정치와 만나면 사회에서 피바람이 분다'는 인류의 경험적 성찰도 운동장이 기울질수록, 그래서 사랑과 관용, 자비와 포용이 자리할 수 없는 극단의 세상만 번성하게 됩니다. 종교의 최전선에서 신의 창조는 진화의 법칙을 만든 것이며, 미세조정만 자리하는 진화의 법칙에 따라 지금도 창조작업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모조리 무시합니다.
종교의 보수화가 정치의 보수화보다 더욱 무서운 이유는 세상의 모든 것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재단하는 아전인수격 마녀사냥에 있습니다. 이들의 외눈박이적 행태는 '사람의 아들'로 이땅에 와서, 차별받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했으며,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공적생활 3년의 가르침마저 훼손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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