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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워드

우영워드 ㅡ 꿈의 인공지능 검색엔진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형의 노트북을 찾았다. 그는 형이 누운 상태에서 한 자 한 자 사력을 다해 작성한 파일들을 노트북에서 찾아 밤낮으로 읽고 또 읽었다. 회사에 10일 간의 휴가를 낸 상태라 재영은 업무와 시간에 구애 받지 않았다. 육체적인 피로는 혼자라는 사실에 압도돼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라면이나 햇반, 물, 동료들이 사놓고 간 과일이나 과자 등으로 겨우겨우 때우는 공복은 지랄 맡기가 쥐새끼 같아서 아예 무시해버렸다. 이런 식으로 정신에 모든 힘을 집중할 때면 에너지가 육체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기 일쑤여서 뜻하지 않은 결과가 도출되기 마련이지만 재영은 형의 죽음을 떠올리면서 악착같이 버텼다.



‘형, 이 정도일지는 몰랐어. 아니, 아인슈타인이 환생한다 해도 이만큼은 못할 거야.’



재영은 형의 유골을 고향 강가의 바람에 날릴 때, 손가락 사이로 퍼져나가는 재의 온기가 너무나 생생해 주먹을 움켜쥐었고 한동안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수면에 떨어져 작은 파문도 일으키지 못하는 그 가벼움과 금방 시야에서 사라지는 허무함은 또 어떻고? 헌데, 재영은 형이 남긴 파일의 내용에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릴 만큼 엄청난 충격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집안 곳곳에 남아 있는 형의 흔적들로부터 죽음을 떠올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10,000권이 조금 넘는 독서량이 가져다 준 방대한 지식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재영은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의 깊이와 동서양을 망라한 철학과 모든 학문의 기초인 화학과 물리학을 거쳐 전자공학과 생명공학, 생체심리학과 뇌과학을 넘나드는 창의적 발상과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치밀하고 장대한 형의 계획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재영은 방대한 양의 자료를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일목요연하게 자동 정리해주는 전능의 워드프로세스와, 가상 메모리를 상ㆍ중ㆍ하단전으로 나누어 정보의 종류와 내용에 따라 저장 공간을 지정하는 인체공학적 방식, 신경회로인 뉴런과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장단기 기억을 만들어내는 시냅스의 전자ㆍ화학적 반응의 일부를 디지털 코드로 풀어낸 인공지능 검색엔진에 이르러서는 아예 사고의 기능마저 멈춰버렸다. 상당한 시간이 흐르도록 재영은 형의 계획에 대해 어떤 생각도 이어갈 수 없었다.



‘이건.. 거의 완벽한 인공지능이야! 어떤 검색엔진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재영은 인간 사고에 대한 저급한 이해를 바탕으로 디지털 제국을 건설하려는 구글과 애플, MS을 비롯해 반지성적 사이버 왕국을 건설하려는 모든 인터넷 검색 업체와 미디어에 대항하고, 깊고 고요한 사유와 모든 기억의 연결과 통합을 통해 이뤄지는 인격의 존엄성과 갈수록 그 존재가 미약해지는 민주주의를 지켜내겠다는 형의 계획이 일개 광언이나 비현실적 몽상에 대한 집착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영은 살아서 물리학의 대통일 이론을 완성하지 못한 아인슈타인처럼, 형의 계획을 실현할 도구들도 아직은 미완성이었지만 계획의 99%는 이미 실현된 상태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책이나 신문, 웹상의 글을 읽거나 텔레비전 뉴스나 드라마를 볼 때, 우리의 뇌가 그 내용들을 잠시 담아 두었다가 다른 내용들이 밀려들어오면 곧장 내보내는, 저용량의 작업 기억 속에 저장된 정보들을 일정 기간 기억할 수 있게 만드는 단기 기억으로 옮겨, 개념이나 사상 같은 것을 형성하는 스키마와 무의식 속에 자리할 정도로 오래된 기억 같은 삶 전체를 관통하는 장기 기억으로 바꾸는 과정을 이렇게 간단히 풀어낼 수 있다니! 형은 상상 속에서 수학적 계산,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장기 기억을 만들어내는 뉴런과 그것들을 연결하는 시냅스의 단백질 합성과정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냈어. 이건 구글과 MS 등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필사적으로 완성하려고 몸부림치는 꿈의 검색엔진이야! 아니, 어쩌면 그 정반대일수도 있고.’



“형! 정말 이 모든 걸 혼자서 다 만들어낸 거야? 이것 때문에 몇 년 앞당겨 죽음을 맞이했던 거야? 이 세상에 나 홀로 두고!”



재영은 자신도 몰랐던 형의 재능과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계획,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불굴의 의지와 신념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주의 창조주라 해도 이 정도로 완벽한 설계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컴퓨터가 여분으로 갖고 있는 전자기를 디지털 에너지로 변환시켜 디지털 엔트로피를 방출하는 방식의 순환으로 무한의 가상공간을 창출해내는 방식이란, 가히 디지털 열역학 법칙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었다. 



자가면역성 백신제조를 완성시키기 위해 유전자를 구성하는 물질의 화학적 단어인 A, T, G, C를 디지털 방식으로 치환해 모든 컴퓨터 바이러스와 악성코드를 무력화시키는 디지털 항체는 만능의 백신에 다름 아니었다. 개인이 어떤 것이든 기록(녹음과 타 사이트에서 복사해 온 것을 저장만 해도 가능)만 하면 자동색인이 이루어져 기억의 네트워크에 자동적으로 연결ㆍ통합하는 ‘우영워드’란 인간의 뇌가 기억을 형성하는 방식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해낸 최후의 컴퓨터 프로그램이라 해도 과하지 않았다.



물론 ‘우영워드’를 확장해 개인적 경험과 기억을 인간의 뇌처럼 통합해내는 디지털 뉴런과 시냅스 코드를 안정적 수준까지 끌어올리려면 고급 수준의 프로그래머가 필요하지만 동방국에서 그런 수준의 프로그래머를 찾는 일이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듯싶었다. 형이 정해놓은 목표치는 10만 개인데 그 중 8만 개는 완성된 상태였다. 대신 청사진이라 할 수 있는 디지털 코드의 게놈지도는 완성해 놓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머지를 채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형은 그런 적임자를 가려낼 수 있는 기준도 마련해두었고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는 힌트, 즉 지름길도 남겨뒀으니 자신은 그 길을 따라 여행하며 적절한 인물을 찾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형, 이거 너무 싱거운 거 아니야? 어차피 내 인생을 구속할 생각이었다면 좀 더 어려운 일들을 부탁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재영은 자신에게 최소한의 역할만을 남겨줬지만 그것만으로도 영원히 자신을 구속하게 만들어버린 형의 거대하면서도 무모하기 그지없는 계획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그 덕분에 형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은 조금씩 덜어낼 수 있었다. 형의 세운 계획의 첫 장은 디지털 세계에 대한 암울하기 짝이 없는 예언적인 묵시록이었고, 어찌 보면 썩을 대로 썩은 동방국의 현실에 대한 치명적 경고였다. 그것은 완벽한 절망에서 최대한의 희망을 찾아내기 위한 단 한 순간도 포기할 줄 몰랐던 무모하기 그지없었던 한 인간의 처절한 고투의 산물이며, 살아 숨 쉬는 매 순간순간이 고통이었던 철저히 고립된 영혼의 간절한 호소이자 치열한 투쟁의 산물이었다.



재영은 평생을 스크린을 통해 세상과 만났던 형의 디지털 세상의 미래를 이렇게 암울하게 봤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언제나 형은 컴퓨터를 통해서만 삶이 가능했기 때문에, 디지털 세상은 형의 모든 것이었다. 따라서 디지털 세상에 대한 형의 평가는 긍정적으로 나오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했는데, 형은 뜻밖의 해석을 내놓음으로써 잠시나마 자신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기대가 크면, 그 기대가 순수하면 할수록 실망도 큰 법이다.



‘어쩌면 형에게 디지털 세상이란 질서정연하고 아름다워야 했던 건 아닐까? 물리학자들이 하나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방정식에 우주의 원리를 담아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형은 암울하기 짝이 없는 「디지털 묵시록」을 작성한 이유에 대해 말하길, 현재 스크린을 지배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배할 소수의 기술과 전략 및 소유주들의 목표를 정확히 알아야만 그에 대항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우영워드’를 사용할 이용자들이 현재의 상황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가질 수 있도록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서 작성했다고 했다.



형은 또한 리처드 도킨스가 발견한 ‘밈’이라는 유전자가 디지털 세상을 인간의 가치를 증진시키는 장이 되도록 변화시킬 수 있는 희망의 단초 중 하나로 보였다고 했다. 형은 ‘밈’이라는 유전자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TV와 개인용PC, 휴대폰과 인터넷을 거쳐 스마트폰과 태블릿PC에 이르기까지 자기복제와 돌연변이, 자연선택을 통해 장기간에 걸쳐 일어났던 누적적 진화가 스크린이라는 디지털 공간에서 제어하기 힘든 속도로 빠르게 일어나는, 그래서 잘못된 진화를 막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메스를 들이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에는 ‘우영워드’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근데 형, 힘들지 않았어? 매 순간 지속되는 고통에 저항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런 거대한 일들을 해왔으니, 난 엄두도 못 낼 것 같은 데? 형이 위대한 리처드 파인만이나 루게릭병이 악화된 이후의 스티븐 호킹처럼 탁월할 정도의 상상력과 직관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재영은 만일 신이 있다면, 육체적으로 무력하게 태어난 형과 지독할 정도로 축복받은 육체를 갖고 태어난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로 해서 그의 뜻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겠지만, 그것보다는 이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홀로 진행하면서 형이 꿈꿨을 세상이, 형의 일생과 하루하루의 투쟁이 정말로 행복했을지 그것이 못내 궁금했다. 사실 신이야 그를 찬양할 인간이 없으면 그 권능의 가치조차 의미 없는 철저히 인간 의존적 존재 아닌가? 신은 인간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인간이 필요했을 뿐이고 그 대표적 모델이 형의 일생이 아니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Fuck your Heaven!"



재영은 수면제와 진통제를 먹지 않는 몇 시간의 잠도 잘 수 없을 정도로 끔직 했던 육체적 고통과 24시간 내내 살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끝끝내 안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던 정신적 고투의 연속이었던 형의 일생 - 오직 컴퓨터 앞에 누워 시선만으로 모든 것을 해야 했던 그 처절한 28년 모두 - 을 떠올리며, 인류를 위해 기꺼이 참혹한 고통을 감내하며 초라하고 누구 하나 슬퍼하거나 기억하지 않은 죽음을 선택한 디지털 전사의 출사표를 계속해서 읽었다. 그것은 영혼을 뿌리까지 갉아먹는 끝없이 이어진 육체적 고통과의 팽팽한 투쟁의 증거들이었고, 동시에 그것 모두를 그리움으로 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의 의무와 책임에 대한 종신 서약서였다.



재영아, 한나 아렌트는 그 잠정적인 패배와는 상관없이 독재정치와 전제정치가 인류를 항상 따라다녔다고 말하며 『전체주의의 기원』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었어. “그러나 역사에서 모든 종말은 반드시 새로운 시작을 포함하고 있다는 진리도 그대로 유효하다. 이 시작은 끝이 줄 수 있는 약속이며 유일한 ‘메시지’이다. 시작은,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 되기 전에 인간이 가진 최상의 능력이다......새로운 탄생이 이 시작을 보장한다. 실제로 모든 인간이 시작이다.”



내 죽음도 너의 삶에서 또 다른 시작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모든 것을 준비했어. 난 육체적으로 무력했기에 정신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어. 그것은 나에 의해서 너에게 가해진 속박이기도 했지만, 나는 너를 통해서만 세상과 만났을 수 있었기에 같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그렇게 교감한 우리는 세상의 어떤 힘과도 맞설 수 있는 작지만 강력한 연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너와 내가 형제이기 이전에 완벽에 가까운 조합일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우리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주사위를 던지는데 두려워하지 않았고, 어떤 숫자가 나오는 것도 개의치 않았어. 확률이란 그저 확률일 뿐이니까.



그것을 바탕으로 나는 신자유주의가 창출한 상업적 전체주의(대량 생산과 가격 파괴로 이루어진 소비의 파시즘)와 사회의 파멸에 대항해 인간 본연의 가치를 지킬 수 있는 무모하리만치 담대한 한 가지 계획을 세울 수 있었고 죽음에 임박해서도 흔들림 없이 계획을 진척시킬 수 있었어. 나도 너처럼 무모한 낙관이나 분별없는 절망에는 반대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 나갈 때, 너와 나는 동전의 양면일수도 있고 그 반대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추호도 배제하지 않았어. 가족과 사회를 포함한 인류의 역사에서 악화가 언제나 양화를 구축하고,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착취와 억압조차도 사회가 돌아가게 만들고 나름의 질서를 확립’시키는 것처럼 말이야.



그럼에도 나는 잠재된 가능성을 보여주고 현실에 도전할 수 있는 열정과 동기만 불러일으켜주면, 평범한 사람도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특권층과 지배 시스템을 향한 혁명의 방법으로 폭력적 수단을 얘기하는 건 아니야. 그것이 정의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했다 해도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어. 물론 공권력의 야만적 집행에 저항하는 폭력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정의의 실현에 폭력이 없다면 어떤 정의도 실현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저항권으로서의 정당한 폭력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권력으로 하여금 공권력 사용에 신중을 기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지. 



그래서 나는 사이버상의 폭력을 정의의 이름으로 실행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기로 했어. 물리적 파괴와 상관없는 특별한 형태의 폭력이라 죄의식까지는 갈 필요는 없겠지. 나는 그래서 혁명의 수단으로써 개개인의 지식의 강화를 선택한 거야. ‘우영워드’는 뇌가 지력을 높이고 인격을 형성시키는 방법과 최대한 동일하게 설계됐기에, 나는 개인의 노력이 늘어날수록 혁명의 성공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리라 확신해.



나는 지금 바라고 기원하고 있어. 비록 선택의 여지도 거의 없고 반강제적이지만, 어쨌든 최종 선택은 너에게 달려 있어(얘기가 여기서 끝나면 다 너의 책임이라고 뻥도 쳐놨어). 재영아, 형에겐 너에 대한 투명한 확신과 순결한 사랑이 있어. 나는 너에게 일방이 될 수도 없었고 너는 나에게 타방으로 존재할 수도 없었잖아.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면, 나의 주관이 끝나는 곳에 너의 객관이 있었고, 너의 주관이 향하는 곳에 너의 객관이 불을 밝혀주었어. 돌이켜 보면 우리는 둘이면서도 하나였고 하나이면서도 여럿이었어. 비록 내가 이룬 것은 작고 미약하지만 너를 거치면 분명한 형태로 작동하리라는 믿음은 그래서 정당하면서도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해. 나는 그렇게 살아서 탐욕을 조장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어떤 권위와 독점적 시스템에도 저항할 거야.



그 모든 것의 시작은 하나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에서 출발해. 너와 나의 이름을 따 ‘우영’이라 이름 붙였으며, 뇌의 작동원리에 가장 가까운 인공지능 검색엔진을 내장한 워드 프로세스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이 바로 그것이야. 인공지능 알고리즘인 ‘우영워드’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우리의) 최종 목표는 모든 사람이 ‘우영워드’를 자유롭게 사용해 지식과 정보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며, 출생이라는 단 하나의 우연에 의해 비롯된 재산과 기회의 차별, 지리적 족쇄와 인종적 편견에서 벗어나 자연과 우주를 만끽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공생하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거야.



생명의 신비와 존엄성이란 탄생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 계량적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따라서 인류에게 풍요라는 선물과 공멸이라는 숙제를 동시에 안겨준 과학과 기술의 지적 윤리를 재설정하고, 노력에 합당한 이익을 보장하되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차별을 초래하고, 그 차별의 확장이 정의의 실현과 사회의 결속을 해칠 정도에 이르지 못하게 조절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돼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지금 무너지고 있는 세계경제를 되살려 내고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들어내려면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인류의 지향점은 결국 개인의 권리와 성장을 유인하는 자유가 먼저 치고 나가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각종 권리의 남용과 성장의 과실을 독점하려는 욕망 및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려는 탐욕을 적정선에서 제어하고, 정의의 관점에서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평등의 확대에 있다고 믿어.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본연의 모습이고, 신에 의한 창조이던 누적적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이던 간에 인간이 가장 발달한 두뇌를 갖게 된 근본적 이유이자 만물의 영장으로써의 의무라고 생각해. 루소의 말처럼 ‘덕성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좋은 제도가 덕성을 기’르는 것이고, 칸트의 말처럼 ‘오직 좋은 정치제제를 통해서만 사람들이 높은 수준의 도덕적 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마찬가지로 너와 내가 극명하게 다른 장단점을 지닌 채 이 땅에 태어난 이유도 그런 인류의 지향점에 일조하라는 절대 명령(넌 이런 말을 가장 싫어하지만)에 의한 것이 아닐까? 재영아, 나는 너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었어. 너는 그런 나를 위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고. 내가 이런 미치광이 같은 무모하고도 지난한 목표를 향해 도전할 수 있었고, 소정의 결과물을 산출할 수 있었던 것도 너라는 측정 불가능한 잠재력을 지닌 인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어. 어쩌면 나는 너라는 위대한 인간의 여러 분신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그것을 분명하게 믿으며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허무맹랑하리만치 무모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어. 그 계획은 다음의 3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 번째 단계는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재영아.



하나 : ‘우영워드’의 목적과 구성

둘 : ‘우영워드’의 확산을 로드맵과 타임스케줄

셋 : 최후의 선택 또는 유일한 보험



재영은 그 뒤로 한참이나 이어진 형의 계획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도, 그 준비의 철저함과 과정에 대한 담대함, 결과에 대한 치밀한 예측과 확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마도 이런 느낌은 세부 계획이 하나하나 실현될 때마다 더욱 커질 것이며 결코 줄어들 이유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바다는 태초 이래로 그에 이르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도 여전히 넉넉하게 남아서 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형이 준 힌트에 따라 박성수 교수와 많이 친해졌어. 형의 예상대로 상당한 능력의 소유자야. 당연히 정의롭고 진실해. 그리고 또 한 명의 기인, 형이 메일로 의견을 주고받았던 현우씨도 만났어. 그에게 형의 계획을 얘기할 날이 곧 올 거야. 헌데 형, 목표를 이루려면 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잖아? 그래서 내가 꿈꿔왔던 일을 진행해야 할 것 같아. 형, 이해해줄 수 있지? 형의 계획에서 많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니까.”



재영은 액자 속의 형에게 그간의 과정을 설명하며 계획으로부터 잠시 동안이나마 이탈(돌아가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목표에 대해 간곡한 이해를 구했다. 그것은 마치 죽음이라는 것이 남은 자에게 주어진 일이고 구속이어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한 형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하나의 의식처럼 보였다. 죽은 자는 산 자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기에(재영은 그렇게 믿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일체의 꾸밈과 가감도 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 망자의 혼령처럼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