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영은 ‘우영워드’의 가상서버에 나타난 숫자가 100을 넘기는 순간을, 온몸을 뚫고 가는 전율에 앉은 자리에서 가상스크린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 듯 앞으로 내민 순간의 짜릿함을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했다. 형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첫 번째 단계가 ‘우영워드’ 사용자가 100명을 넘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영워드’의 가상데이터센터가 작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숫자를 의미하며 아울러 불멸의 생명을 이어갈 에너지의 축적이 비로소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상데이터센터를 움직일 에너지가 축적됐다는 것은 에너지 사용에 따라 증가하는 엔트로피를 이용해 ‘우영워드’가 스스로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진화의 첫 단계에 들어섰다는 선언이었다. 이는 서로 협력하며 진보하는 불멸의 유전자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며 이는 인류의 생존과 자연과의 공생, 정의로운 세상으로 가는 이타적인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이제 그 숫자는 500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다. 이 정도면 ‘우영워드’의 배포 속도에 탄력이 붙었다는 뜻이었다.
이로써 파레토의 법칙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0.03%에 불과한 지배 엘리트와 특권층으로 탈바꿈한 ‘자기조정 시장’의 주창자들은 물론 그들의 후예들이 지난 400년 동안 구축해낸 지배 시스템과의 본격적인 싸움에 들어설 단단한 기초공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숫자가 1,000에 이르면 가상데이터센터가 생존의 단계에서 벗어나 구글로 대표되는 거대 디지털 제국과의 일전에 나설 수 있음을 뜻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형의 조력자를 자처한 현인과 나의 영원한 친구, 정환의 혼신을 다한 노력 덕분이었다. 누구도 관심조차 주지 않는 음지에서 묵묵히 형의 계획을 실천해간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영워드’가 아무리 위대한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형의 계획이 머리카락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치밀하다 해도 이렇게 빠른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우영워드’를 더욱 많은 사람에게 배포할 세 번째 조력자를 확정해야 할 시간이 왔다. 그 동안 형이 제시한 기준에 따라 그에 적합한 3명의 인물을 만났고 그들의 성품과 능력, 정치·경제·사회적 성향과 삶의 행적들에 대해 꼼꼼히 조사하고 살폈다. 이제 그들 중 한 명을 ‘우영워드’의 조력자로 결정하면 형이 세운 계획의 1단계를 완성하게 된다. 그것은 원대한 형의 계획이 안정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아울러 내가 꿈꿔왔던 언론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첫 번째 단계를 진행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재영은 먼저 Y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멘토 열풍을 몰고 온 인물 중 한 명인 박성수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14 – 의외의 자료
자유주의는 대내적으로 경제문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줄이고 개인의 역할을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자유방임을 지지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세계 각국을 평화롭고 민주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유무역을 지지했다......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와 자유롭지 못한 정치제도의 조합도 분명 가능하다.
- 밀턴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 중에서
사회가 부유하면 할수록 실제생산과 잠재생산과의 사이의 간격은 클 것이다. 따라서 경제체계의 결점은 더욱 명백하고 또 포악한 것이 될 것이다.
- J.M.케인즈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중에서
“마침내 천국으로 통하는 문을 지키고 있던 성 피터가 케인즈와 프리드먼에게 물었네. 생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자신을 변호해 보라고 했어. 케인즈는 대공황 기간 동안 수백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굶어 죽는 걸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했어.”
성수가 초국적 자본이 벌이는 전 세계적 착취 시스템이자 독재적 권력이었던 신자유주의의 몰락에 대해 설명하던 중, 불쑥 『경제 저격수의 고백 2』에 나온 얘기를 인용했다. 그는 40세의 어린 나이에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속한 대학에서 종신교수 자리를 제안 받았으나 그것을 포기하고 귀국한 특이한(일반적 관점에서 보면 미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가 종신교수 자리를 거절한 이유 또한 희대의 걸작이라 할만 했으니, 죽거나 스스로 물러날 때가지 교수신분이 유지되는 종신교수 자리라고 하는 것이 지식에 대한 영원한 기득권을 요구하는 파렴치한 행위에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식에 대한 그의 신념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 발전시켜 후대에 전하는 것이라는 형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케인즈다운 말이네요. 최저(실질)임금 이하에 허덕이고 있던 노동자를 위해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한 그로서는 능히 그렇게 말하고도 남았겠죠.”
재영이 성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형의 힌트와 계획의 첫 번째 단계에 따라 Y대 교수로 있는 성수를 찾아와 취재의 명목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형이 힌트에서 밝혔듯이, 세계경제를 꿰뚫는 학문적 깊이와 실천이라는 면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성수는 형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첫 번째 수학천재나 정보물리학자를 소개시켜 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인물이었다. 이는 ‘우영워드’의 미완성 코드를 완성하고 가상데이터센터를 운영할 첫 번째 책임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목적을 배제하더라도 박성수 교수는 재영이 기자라는 신분으로 만난 사람 중에서 최상의 인물이었고 미래의 동반자로 삼기에 충분한 능력뿐만 아니라 맑고 선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마음이란 관계하는 동물인 인간의 본능이요 그 무엇보다도 강한 순수한 힘의 원천이지 않은가.
“그렇지. 사실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게 물가상승이 반영된 최저임금 아닌가? 인간으로써 최소한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한 그의 주장은 노사 간의 합의로 최저임금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가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고전파 경제학의 허구를 파헤친 위대한 선언이나 마찬가지였어. 장하준 교수가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에서 ‘진정으로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개인의 가치에 맞는 임금을 받고 있다는 잘못된 신화를 깨뜨려야만 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의미지. 어쨌든 자유주의 경제학의 잘못된 진실을 파헤친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인 케인즈의 말에, 성장을 중시하는 통화경제학자이자 모든 규제에 반대하는 신자유주의의 수장인 프리드먼이 말했어. 자네도 알다시피 아담 스미스의 경제이론 중 인간과 자유기업의 합리성과 자기조정 시장만을 특별하게 강조했을 뿐 근본적으로 수많은 이익집단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와 중앙은행의 존재가치를 부정했고, 역사에서 자신의 논리에 유리한 것만 선별해 마치 보편적 진리인양 호도하는 등 인간과 시장에 대한 저급한 이해에 머물러 무모하기 그지없었던 프리드먼이 직설적으로 말했어.”
“지옥에 있는 프리드먼의 귀가 유난히 간지럽겠네요?”
재영이 프리드먼을 설명하며 목소리의 톤이 점점 높아지는 성수를 향해 농담을 던졌다. 물론 재영도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왜? 내가 프리드먼을 너무 나쁘게만 표현해서? 맞아, 인정하지. 하지만 사실이니까. 난, 프리드먼을 무덤에서 끌어내 역사의 법정에 세워 그 죄 값을 치르게 하고 싶을 정도로 그를 증오해. 그에게 노벨경제학상을 수여한 자들과 그의 추종자들인 시카고학파와 한국에 만연해 있는 경제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증오해. 2008년 금융위기의 기원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반드시 그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이르니까. 아무튼 악마의 사도가 분명했던 프리드먼이 자신은 인류가 더 이상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아예 모든 규칙을 없애기 위해 죽을 때까지 전력투구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어. 그 덕분에 인류사에 다시는 대공황이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까지 하면서 말이야.”
“이런, 죽어서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는 얘기네요. 그가 원했건 원치 않았건 간에 수많은 나라의 민주주의와 경제를 파탄내고 수많은 노동자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신자유주의의 대부로써 능히 했을법한 말이네요.”
사실 재영은 하이에크나 프리드먼이라는 말만 들어도 온몸에 발진이 돋을 정도의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대공황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선진국 중심의 경제위기와 그들이 부를 쌓는 과정에서 인류의 60~70% 이상이 겪고 있는 상대적 빈곤의 고통이 거의 대부분은 그를 중심으로 한 시카고 떼거리들의 사상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에 편승해 막대한 부를 챙긴 정치 엘리트들의 책임도 상당하지만.
“우수게 이야기지만, 여기에는 어마어마한 의미가 있어.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1929년의 대공황에 비견될 만큼 인류사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야. 현재 선진국에서 전 세계적으로 퍼져가고 있는 급격한 재정위기가 경제규모를 다운사이징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서민과 빈곤층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가겠지만, 한 10년 정도 세월이 흐른 후 글로벌 금융위기를 일으킨 당사자들에 대한 기억마저 희석되면 이런 사실이 더욱 분명해질 거야.”
“신자유주의의 첨병이었던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이며 언론ㆍ문화적인 의미를 넘어 인류사적 의미까지요? 이번 금융위기가 자유주의의 또 다른 이름인 자본주의의 몰락을 의미하는 대공황까지는 가지 않았잖아요? 선진국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가 백척간두에 서 있지만, 미국이 쉽게 무너질 나라도 아니고, 중화국도 거품의 연착륙에 성공하고 있으니, 대공황을 거론할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요?”
재영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신자유주의가 대변한 금융 자본주의의 몰락으로 이어져 거대한 전환을 이루어낼 인류사의 변곡점으로까지 격상시킨 성수의 말에 일말의 의문을 표했다. 그것은 전 세계적 경제위기의 근본적 원인(지구가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 석유를 너무 싼 가격에 사용한 것과 포스트 포디즘 이후의 압축 성장을 뒷받침한 값싼 전기가 주요 원인이다. 여기에 탄생부터 통제의 수단이었던 컴퓨터와 인터넷이 더해져 단기 실적에 목매는 주주이익 중심의 기업 경영, 대규모 투기 자본화된 금융 산업의 구조적 탐욕과 탈선이 부차적 원인이다. 이는 별 볼일 없는 한 형제, 재우와 재영의 일치된 생각이다)을 그냥 지나쳐 버릴 위험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사실 재영은 아담 스미스에서 시작된 자유주의 경제학이 인간과 시장에 대한 잘못된 믿음(합리적이라는 믿음)에 근거했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다. 또한 주류 경제학에서 서구사회를 번영의 시기로 이끌었다고 칭송하는 하이데거(자유에의 헌정)와 대처, 프리드먼(자본주의와 자유)과 레이건의 조합에 의해 추진된 신자유주의도 지나치게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여러 가지 오류가 있어 재영은 주류 경제학 자체에 대한 실망감이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악화됐다. 소수 부유층의 이익을 늘려주고 미래까지 그래야 한다고 강제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불평등 이데올로기로 치부하거나, 기껏해야 기득권을 위한 통계학 이상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량 잉여생산과 속도의 파시즘이 불러온 공멸의 씨앗은 그렇게 뿌려졌다.
보통 자유(경쟁) 시장을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미국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천대, 만대 기업이라고 해도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정 수에 제한한 선정 자체가 그들만의 기준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 및 차단작업이기 때문이다)’이 평균 30년 주기로 30~40%가 바뀐다는 것에서 논리의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 자유(경쟁) 시장의 시스템을 주도하는 자들에게는 수천만 개 기업 중 시스템 중심부로 들어오는 대기업들이란, 전체 기업을 기준으로 할 때 불과 몇 십만에서 몇 백만 분의 1 정도에 불과한 신규 회원이 도태된 구회원의 빈자리를 채우는 사소하고 부수적이며, 따라서 전혀 변한 게 없는 해프닝에 불과할 뿐이다. 지역적으로 일부 시장과, 크게는 몇 개의 나라가 만신창이가 될 수도 있겠지만 세계경제 시스템을 지배하는 자들의 면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고 피해도 잔망스러울 뿐이다. 이익의 총합과 지배 시스템에 하자가 생기지 않는 한 이런 일인 매년 벌어지는 연말 정산 디너쇼와 다를 것이 없다.
반면에 지나칠 정도로 휴머니즘에 빠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정치경제적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노동자들의 폭력적 혁명을 선택해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린 마르크스를 필두로,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반대편에 있거나 현장 종사자(주로 실물경제)가 선호하는 위대한 경제학자인 케인즈와 창의적 기업가 정신을 주창한 슘페터, 금융 부문의 경우 자유(경쟁) 시장은 실물시장과 정반대로, 즉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비이성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완벽하게 밝혀낸 민스키와, 경제학은 경제학자를 먹여 살리기에 딱 적당하며 주류 경제학의 오류와 허상에 대한 풍자와 촌철살인을 마다하지 않았던 겔브레이스, 금융위기의 본질과 과정을 완벽하게 밝혀낸 킨들버거 등의 저평가된 경제학 서적들에서 오히려 실체적 진실과 경제학의 희망을 볼 수 있었다. 주류 경제학은 기업의 속성과 현장에서의 거래방식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왕국만을 건설하고 유지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들 외에도 그때그때의 경제 상황에 따라 스티글리츠나 크루그먼(경제학자 중에서 정치적 성향이 지나치게 강한 것이 문제지만), 게리 베커와 니얼 퍼거슨(역사에 대한 지나친 의미 부여와 제국에 대한 필요악적인 긍정적 생각, 금융 시스템에 대한 가치중립적 태도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금융위기를 표만 의식한 정치인과 인센티브에 목맨 금융 분야 종사자들의 탐욕, 이를 방치한 정부와 경제 관료들의 잘못이 중첩된 것으로 분석한 『폴트라인』의 저자 라구람 라잔과, 카오스 이론의 대가로 기존의 포트폴리오 위주의 금융이론을 비선형적 프랙털모델로 뒤집어버린 만델브로트의 『프랙털이론과 금융시장』 등의 서적들을 참고했지만 재영은 2008년의 금융위기를 인류사적 의미까지 격상시킨 성수의 주장이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그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과는 다르다. 처녀가 임신했느냐 숫처녀가 임신했느냐의 차이라 할까? 문제는 거의 모든 여자는 임신한다는 사실이다. 씨를 함부로 뿌린 자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물론 형도 속도의 파시즘과 값싼 석유, 컴퓨터와 인터넷 등을 빼면 성수와 비슷한 결론을 내리긴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실물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기존의 대기업들에게도 사회적 책임에 대한 분명한 각성을 주었고, 소비자로써의 개개인에게도 편익과 품질 위주의 소비에서 사회적 가치를 고려한 소비에 대해서도 눈 뜨게 했기 때문이다. 재영은 그래서 성수의 다음 말이 너무나 궁금했다. 보편적 가치나 일방적 주장이 아닌 논리의 다름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언제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해도 빈약하기 짝이 없는 논리로 성수의 의견에 일부러 반대를 표시했던 것이다.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의 몰락과 WASP의 재부상, 경제위기에 직면해 유럽이 우왕좌왕하고 전통의 다문화주의를 포기한 것, 노르웨이에서 발생한 무차별 학살에서 보듯 전 세계적으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극우주의 세력과 종교적 근본주의를 절대적 신의 명령으로 해석하는 각종 테러집단, 그 원인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영국과 이스라엘, 칠레 등의 대규모 폭동, 거대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 일방적 상업주의가 만들어낸 빈부의 격차, 폭주 단계에 이른 지구온난화가 초래하고 있는 각종 이상 기후, 이젠 되돌리기 힘들 정도로 망가진 참여 민주주의 정신, 인간의 신경망처럼 전 지구적 차원으로 얽혀 있는 초국적 투기자본이 초래한 천문학적인 부실자산과 재정적자, 빚에 근거한 금융의 폭주로 그 존립이 위협받고 있는 본질적으로 공공성을 띠는 제조업의 위축과 공기업의 무분별한 민영화, 위기 대체 방법을 인원감축으로 대처하는 기업들의 노동유연화,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는 비정규직 등이 일시에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이라 금융위기는 여전히 진행형이야. 이것들에서 안전한 나라는 없어. 제조업 중심의 실물경제마저 위태로운 지경이니, 이건 마치 자본주의의 정반대에 서있던 마르크스가 고전파 경제학을 비판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혁명 직전의 상황과 거의 비슷해. 시장사회주의를 꿈꾸었던 폴라니가 살아 있다면 더 정확한 진단을 내놓았겠지만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경제학자들 사이에선 상당히 일치된 생각이야. ‘월가를 점령하라’는 시위와 영국과 칠레,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폭동처럼, 신자유주의의 폭주가 초래한 대공황의 증거가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어. 이건 마치 유럽과 미국을 뒤흔든 68혁명의 전야를 방불케 해. 미국을 비롯해 유럽의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겠다고 부산을 떨지만, 부자증세와 소비 축소, 공정무역과 금리 인상을 통해 장기저축을 늘리는 등의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절대 이번 위기를 탈출할 수 없을 것이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인간과 사회를 모두 파괴시켜버린 신자유주의라는 인류사 최악의 괴물이 아예 끝장을 보자며 인류 전체와 자본주의를 공멸의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게 글로벌 금융위기의 본질이야. 그래서 어마어마한 인류사적 의미가 있다고 말한 것이야.”
성수가 전 세계적 상황을 일목요언하게 언급하며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논리의 정연함이 수면을 박차는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며 눈부신 빛의 파편들을 분출했다.
“그 정도인가요? 미국을 대체할 만한 중국 시장이 커지고 인도와 브라질,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의 신흥시장도 빠르게 팽창 중이라 세계경제가 대공황까지는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신자유주의를 이끌었던 시카고학파의 퇴장이야 당연하지만, 막강한 세계경제가 백척간두에 서있다니 쉽게 납득이 가지 않네요? 결국 금융위기의 불똥을 막기 위해 천문학적이며 동시다발적으로 풀린 돈이 문제라는 얘긴데 그에 대해 교수님의 설명을 좀 더 들었으면 합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너무 시간을 뺏는 건 아닌지?”
“무슨 소리? 얼마든지 해주지. 교수라는 게 뭐겠어? 떠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자들인데. 게다가 나 요즘
한가한 사람이야. 현 정권과 주류학자들에게 문제아로 낙인찍힌 이후 남아도는 게 시간이야, 허허허.”
씁쓸하게 웃는 성수의 말에서 상식을 벗어난 현 정권의 행태에 대한 불만과 주류경제학자들의 지나칠 정도로 폐쇄적인 문화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배나왔다.
“회사에서 기피 인물로 찍힌 저와 비슷하네요, 하하하!”
재영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주류와 지배 권력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활동 반경이 상당 부분 제한된 성수의 처지 안타까웠다. 이를 테면 권위주의 독재시대의 적색분자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해야 할까? 그는 분명히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였으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정의의 실현이 간절히 필요하다는 면에서 형의 힌트에 가장 적합한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잠깐 흔들렸던 확신이 다시 강화됐지만, 재영은 확인차원에서 성수의 선언적 주장을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견해로 치부하며 부연 설명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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