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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워드

우영워드 ㅡ 거대 언론 지배를 꿈꾸다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늘 경계에 있었어. 이제는 선을 넘을 수 있을까? 간절하게 바라면 변화는 가능한 것일까?’



잠시 상념에 빠졌던 재영은 형의 방으로 건너가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는 형을 살펴봤다. 그는 뼈만 앙상한 채 온몸에 온갖 의료장비를 달고 있는 형을 보는 일이란 언제나 가슴 먹먹한 아픔이었고, 한 인간에 대한 존재의 가치와 실존의 처절함에 대한 끝없는 논쟁이자 그 자체로 너무나 힘겨운 삶에의 투쟁이었다.



‘형은 어때? 간절히 원하면 형이 꿈꾸는 세상이 조금이라도 이루어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순간순간이 생존에의 투쟁인 형의 고통이 최소한의 결실이라도 맺을까?’



재영은 천형의 불치병이 가져다 준 그 끝 모를 고통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 형이 존경스러우면서도 한없이 안타까웠다. 부모의 유전자를 반반씩 물려받은 형제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렇게도 튼튼한 육체를 갖고 태어났거늘, 형은 어찌 저렇게도 철저하게 무력한 육체를 갖고 태어났단 말인가? 재영은 도무지 실현 불가능할 법한 잔인한 확률이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요즘 들어 너무 많은 시간을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만드느라 건강이 빠르게 나빠지고 있는 형이 걱정됐지만 그 고집을 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재영은 말없이 지켜볼 뿐 특별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다. 



잠든 형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내려다 본 재영은 의료장비들을 하나하나 살펴본 다음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형은 내일 아침까지 깨어나지 않을 테니 재영은 그 사이에 밀린 일들이 있는지 확인한 후 필생의 숙원사업을 진행시켜야 했다. 그는 노트북을 부팅해 회사 내부 망에 접속해 새로운 기사가 올라와 있는지,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기사 중 참고해야 할 만한 것이 있는지 확인했다. 특별히 눈에 띄는 기사는 없었다. 따라서 당장 해야 할 밀린 일들도 없었다. 재영은 노트북 옆에 놓여 있는 갤럭시S의 전원을 눌러 모든 사회와 통하는 디지털 광장인 액정화면을 띄웠다. 부재중 통화가 무려 17통이었다. 누군가 문명의 힘을 빌려 자신을 불렀을 연속적인 소리나 아우성들. 디지털 정보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나와 다른 이들의 소통은 거의 대부분 이렇게 이루어졌다.



‘미친 듯이 진동했겠구나.’



재영은 코끝을 찡그리며 부재중 통화 내역을 들여다보았다. 팀장에게서 온 것이 세 통이나 되었다. 세 번째 것이 한 시간 전인, 저녁 10시에 온 것이었다.



‘엄청 잔소리 듣겠군. 그나저나, 그제 보고한 취재기획안 때문일 텐데?’



재영은 커서를 팀장의 부재중 통화에 맞춘 후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보수적 관점의 박 팀장은 취재기획안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그와 통화하기 전에 취재의 논리와 타당성을 강화할 무엇이 필요했다. 재영은 진보적 성향이 강한 정현 선배를 떠올렸다. 이번 기획취재안도 사실상 그녀가 축적해온 자료와, 함께 한 취재 경험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선배와 통화해보자. 박 팀장이라면 선배에게 전화했을 거야. 뭐라 했는지 그것부터 들어보자.’



재영은 부재중 통화 중에서 정현 선배의 번호를 선택했다. 그녀 역시 3번이나 자신과의 통화를 시도했었다. 사실 재영이 세 번씩이나 전화를 받지 않으면 영원히 그와 통화하지 않겠다는 뜻이거나, 자신이 죽었다는 의미였다. 팀장이나 그녀가 3번 이상 재영과의 통화를 시도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재영은 정현 선배가 전화를 받기 전에 노트북 화면에 취재기획안을 띄웠다.



<거대 언론, 지배를 꿈꾸다>



정현은 모니터에 띄어놓은 취재기획안을 읽고 또 읽었다. 재영이 담당 팀장에게 제출하기 전에 자신에게 보내준 것이었다. 사실 그녀는 M방송국에 입사한 이래, 이처럼 공격적이고 방대하며 무모한 취재기획안을 본 적이 없었다. 한 마디로 미친 취재기획안이었다. 비록 재영이 기자로써의 본능이 출중하고 팩트 이면에 놓인 진실을 파헤치는데 탁월한 능력과 끈기, 취재의 집요함과 남다른 용기를 지녔다 해도 이것은 기름을 이고 불길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웃사이더적인 성향이 강해 깨어서 혼돈은 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안에 내재한 자유와 질서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자폭하겠다는 거야, 뭐야?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야? 역시 이놈에겐 한 번의 일탈이, 일탈 중 최고의 효과를 갖는 섹스가 필요해. 상대가 나면 좋고.’



정현은 좀처럼 탈출구를 찾지 못해 여기까지 오게 된 재영이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방송국에 입사한 지난 13년 동안 전직 대통령이 자살한 것도 봤고, 권좌에 오른 모든 것을 다 아는 대통령이 낙하산 사장(푸른색 기와를 두른 구중궁궐에 끌려가 조인트도 당했다는 황당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에 대해 악의적 소문을 퍼뜨린 당사자를 고발하지 않는 것으로, 그래서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조직의 자금을 허투루 쓰지 않으면서도 자신과 조직을 폄하한 상대를 용서함으로써 타의 모범이 된 천하의 대인배)을 내려, 관철시키는 것도 지켜보았다. 게다가 (온갖 욕을 먹는 자리에 자신을 임명해 수명을 늘려준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대통령이나 4년 차에 이르면 당연히 빠져드는 레임덕을 막겠다고 결연한 의지로 내부 조직과 인사를 권력의 취향대로 만들어놓는 것도 지켜보았다. 최근에 들어선 언론이기를 포기한 듯한 행태도 남발되기에 이르렀다. 현재의 권력을 향한, 그 권력이 바뀌면 다시 차를 갈아탈 기회주의적 일렬종대! 이 상태라면 낙하산 사장의 연임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할렐루야!’



물론 이념을 달리 하는 대통령이 바뀌면 국가의 중심이 그들에게 기울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국영 방송이 아니라도, 국민 모두의 공적 재산인 주파수를 할당받은 방송국이라면 일정 이념에 경도되거나 자사이기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경쟁상대가 될 수밖에 없는 거대 신문사의 방송 진출을 막기 위해 뉴스와 교양 프로그램을 반대 논리로 도배하는 행태도 지탄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작태란 해도 너무해!’



정현은 한 국가의 언론과 방송의 80% 이상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현대국가에서 더 위험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상파 방송사도 모자라 보도전문 방송사 사장까지 낙하산으로 채워진 현재의 상황은 80년대 초의 5공 시절을 방불케 했다. 인류는 다양함을 존중하고 자유의 확장과 함께, 복지증대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평등의 확대를 위해서도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 분투해 왔다. 인류의 지향점이 거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을 내재하고 있다. 게다가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



민주주의란 견제와 균형 속에서 꽃을 피우며, 소수의 의견을 청취하고 반영하며, 참여와 여론 형성(이미 형성된 여론이란 없다. 실제로 여론 조사에 사용되는 질문에 따라 여론의 향방과 내용이 변하기 때문이다. 즉, 여론이란 한 개인이 오랜 기간 동안 습득한 지식이나 토론, 논쟁, 사고 과정을 통해 형성된 의견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특정 기간 동안의 사회 현상에 대해 그저 “예”나 “아니오”로 묻는 전화조사 방식이 주로 사용되기 때문에 응답자의 내적 의견에 대해 알아낼 방법이 없다. 따라서 여론 조사에 사용된 질문을 통해 여론은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숱하게 조작된다. 숫자가 객관적이라는 일반적인 통념에 기반해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된 한 통계학은 과학이나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교육, 의학, 법률, 언론, 종교 심지어는 방송 언어에까지 돌이킬 수 없는 수많은 부작용을 일으킨다)을 통해 투표에 선행하고 (칼 포퍼의 주장처럼) 국민에 의해 지도자가 선출되는 것보다 국민에 의해 잘못된 지도자를 끌어내릴 수 있는 것에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정현은 그런 신념으로 13년을 취재하고 방송했다. 언론에 몸담은 이상 자신이 바라봐야 할 대상이란 오직 진실과 정의, 그래서 시청자인 국민밖에 없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 아니 그 이상으로 실천했다. 하지만 낙하산 사장이 조직을 장악한 이후에는 상황이 급변했다. 언론으로써의 몰상식하고 비이성적인 일들도 다반사로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내세우는 논리라는 것이 시청률 부진이고 언론이 지켜야 할 균형 감각이라고 했다가 지금은 이익이 최우선이라고 핏대를 세운다. 광고주와 후원사가 원하는 것이라면 시청률도 필요 없다며 프로그램 편성도 손바닥 뒤집듯 제멋대로 칼질하니, 이건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정권에 불리한 기사는 아예 내보내지도 않고, 시청자는 안중에도 없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지니.. 열심히 취재하면 뭐해, 방송될 가능성도 없는데?’

“염병할 새끼들! 최소한의 기회라도, 언론이면 언론다운 취재기준이라도 제시해야 할 것 아니야? 그저 선정성 높고 날로 먹는 것만 낚아오라니! 개만도 못한 새끼들!”



정현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힘들었다. 그렇다, 진실과 정의라 해도 기회를 얻어야 승리할 수 있지 않은가? 신은 주사위 노름을 하지 않는다며 섭리의 절대성을 주장한다고 해도 진실과 정의에게 어떤 무대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자신을 비롯한 기자와 PD들에게 더 이상 무대란 주어지지 않았고, 급기야 보복성 인사 조치로 연예본부로 발령 나지 않았는가? 현 상황에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고 사실을 밝힌다 한들 그것이 시대정신과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데 어떤 도움이 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정권이 바뀐다 해도 달라질 보장도 없었다. 다음 정권이라고 자살한 전임 대통령과 비슷하거나 현 대통령과 다를 거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권력이란 무엇이라도 변형시켜 타락 시킨다. 지금까지 이런 권력의 속성에서 벗어나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또한 현대국가라는 것이 얼마나 수많은 이익들의 경연장이자 집합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더 희망이 없어 보였다. 정현은 그렇게 지쳐 갔고 피로가 쌓였으며 다시 충전해 투쟁할 여력조차 없을 만큼 방전되기에 이르렀다.



‘이건 유서야. 기자가 언론을 향해 비수를 꽂겠다고?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해. 절대 불가능해.’



정현은 초조한 마음에 한 발 떨어져서 취재기획안을 들여다보았다. 재영을 아끼는 편향성 때문에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려면 냉정한 눈으로 취재기획안을 볼 필요가 있었다. 누구나 감정이 비정상적으로 고조되면 이성이 자리를 내주고 꼬리를 감추기 마련인데, 하물며 아웃사이더적 경향이 강한 재영이라면 말해 무엇 하랴?



‘이런다고 달라질까?’



정현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객관적이 아니라 아예 주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이번 시도는 일방적인 싸움도 되지 않을 터였다. 국지전도 치르지 못할 전력으로 전면전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철저히 분리된 채 오직 죽창만 들고 있는 난쟁이와 첨단무기로 무장한 거인이 싸움을 벌인다면, 결과야 뻔하지 않는가? 게다가 지금은 낙하산 사장이 조직을 완전히 장악해 관료주의화 됐고 극도로 상업화된 시스템 속에서 전통의 노조마저 무력해진 상태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한다면 재영의 취재기획안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폐기 통보를 받은 꼴이었다. 지난 4년에 걸친 방송국의 이익집단화와 그것에 무력했던 직원들의 열패감이 그것을 증명했다. 차라리 박 팀장의 선에서 깨지면, 그것이 베스트라는 판단이 들 정도로 정현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정권이 바뀌는 게 확실하다 해도, 이건 너무나 큰 싸움이야. 이것 때문에 여러 사람이 다칠 수도 있어.’



정현은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봤지만 생각은 재영의 의도에서 점점 뒤로 물러났다. 그 속도도 점차 빨라졌다. 뒷걸음질이란 자신에 어울리지 않는 행위였고 그래서 어색했지만 빌어먹을 것이 빨라지는 속도에 맞춰 생각의 균형마저 제대로 유지됐다. 정현은 자신을 향한 자책과 변명을 거기서 끝내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은 기자로써의 신념보다 취재의 결과에 따른 부작용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지키고 키워온 신념에 반하는, 주와 부가 뒤바뀐 행태이자 타협이었고 이제는 화석화된 무기력한 생각이었다. 



특히 연예본부로 발령이 나기 전의 몇 개월 동안에는 재영과 한 팀이 되어 취재를 나갈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모습에 깜작 놀라곤 했다. 정현이 느끼는 자책과 혼란의 수위는 점점 높아져 갔다. 그 과정에서 의식 저 밑에 꾹꾹 눌러두었던 현실의 높은 벽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수시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는 신념이 자신에 대한 것인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것인지 헷갈렸지만 재영의 취재기획안에서 점점 물러날수록, 그 속도와 균형이 완전한 협력을 이룰수록 차마 자신에게 하지 못했던 마지막 질문에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나는 그만큼 깨끗했을까?’



그녀가 기자로써 겪었던 지금까지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익을 넘어서는 이념은 없다고. 역사와 이데올로기는 벌써 종언을 고했고, 권력은 거대 금융자본과 초국적기업 및 거대 언론을 거쳐야 실현될 수 있다고. 서로 견제해야 할 네 개의 거대 세력이 이룩한 단단한 카르텔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데 그들 모두를 다 까발리겠다는 이런 황당무계한 취재기획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생각이 이에 이르자, 정현이 이번에는 분명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진실과 정의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재영의 취재기획안이 실현불가능하다는 판결을 확정하는 중에 낮 익은 음악이 청각을 간질였다. 충전 중인 아이폰이 마치 생명체처럼 스스로 빛을 발했다. 언제부터인가 타인과 자신의 연결은 그렇게 작동했다. 



정현은 선명한 액정화면에 떠오른 전화번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친 기획자, 매력이 넘치면서도 그것을 철저히 부정하는 후배, 어떤 특별한 일탈이 없으면 스스로 정한 울퉁불퉁한 운명의 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려갈 남자, 그래서 한 번은 꼭 진탕하게 뒹굴고 싶은 남자, 천형의 병 때문에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 죽었다고 하지만 형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지독한 자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자학적인 아웃사이더, 재영을 나타내는 11자리의 숫자가 두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정현은 잠시 망설이다 갤럭시S를 집어 들어 천천히 귀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