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영워드

우영워드 ㅡ 뜻밖의 서류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이런, 벌써 눈치 챘어? 허, 이렇게 허무할 데가? 자넨 그게 문제야. 너무 똑똑해. 재미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고. 내 제자였으면 전 과목을 F로 도배해버릴 텐데?”

“제가 자퇴하고 말지요. 돌리지 말고 말씀해주십시오.”

“허, 성미까지 급한 것 하고는? 알았어, 내 말하지. 자네가 나보다 몇 백배는 더 생각하겠지만, 내부인으로서 요즘의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퇴행적 언론 환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재영은 자신이 3년 전부터 준비한 필생의 목표에 대해 성수가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말하자 말까지 더듬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언론 환경이라니?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매스 미디어에 관한 것임을 예상했지만 하필이면 언론 환경이란 말인가? 재영은 자신도 모르게 동그라진 눈으로 성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심장 박동은 더욱 빨라졌다.



“왜 그리 놀라나? 난 자네가 문제의 M방송국 기자라서 묻는 말인데? 그냥 수수방관만 할 자네도 아니고, 그래서 물어보는 건데 반응이 왜 그렇게 과도해?”

“아, 그거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수님 같은 분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갑자기 뛰어넘어가며 말하면 누군들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마치 미친..”

“미친년 널뛰듯 한단 말이지? 하하하,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 내가 너무 왔다 갔다 하기는 했어. 어, 이거 괜히 미안하네? 그래도 미친년 널뛰듯 한다는 말은 너무 심했어. 명색이 교수인 나에게, 안 그래?”



서둘러 말을 삼킨 재영에게 성수는 웃으며 말했다. 말실수에 대해 분명한 추궁도 곁들이면서. 재영의 얼굴은 물론 귀까지 빨개지리라! 최소한 얼굴의 일부라도. 성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속으로 숫자를 세고 계시죠? 어림없습니다. 전 학습효과도 없는 놈이랍니까?”



성수에 대해서 상당 부분 파악한 재영이 그의 생각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 넘겨짚었다. 장군에 멍군하는 격 이었니 이보다 확실한 반격은 어디 있으랴.



“이런, 귀신이 따로 없다니까! 도저히 못 당하겠어.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 - 장강의 앞 물이 뒷물을 밀어낸다)이라더니, 이건 왠지 씁쓸하네.”

“하하, 그것 보다는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 더 적절한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교수님?”

“하하하하! 그래, 그게 더 적절하겠어. 그럼, 내가 손오공이고 자네가 부처인 것으로 하지. 그건 그렇다 치고, 언론 환경에 대한 자네 생각은 어떤가?”

“더할 수 없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공영방송마저 관료주의에 빠져들었고 추악한 자사이기주의적 행태는 눈 뜨고 못 볼 지경입니다. 뼈 속까지 상업주의에 물들었어요. 미국보다도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못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심각한가?”

“네, 언론의 존립근거마저 흔들릴 정도에요. 동방국 언론 역사상 전례를 찾기 힘든 소셜테이너 금지규정과 도청사건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요. 10년 만에 정권이 바뀌었으니 낙하산 사장이야 그럴 수 있다지만, 언론 매체로써 절대 남겨서는 안 될 나쁜 선례들을 양산해내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에요. 앞으로 어떤 정권이 들어서던 간에 또다시 언론을 장악할 수 있는 근거가 점점 쌓이고 있는 거니까요. 기자와 PD들의 열패감이 너무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이젠 무력하기까지 한 것도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원인 중 하나에요. 게다가 지상파 방송을 새로 허가받은 4개의 보수 언론들이 점점 열악해지는 언론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차별적인 광고영업을 하고 스타급 PD와 제작자, 인기 연예인과 연기자, 특급 MC들을 빼오는 과정에서 몸값이 엄청나게 폭등하는 등 겉으로 들어나지 않는 물밑 전쟁이 가히 썩은 흙탕물로도 표현이 안돼요. 기업들도 이런 조폭 식 광고영업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골치 아파할 정도에요. 광고와 협찬을 따내기 위한 협박성 기사와 뉴스보도가 신문과 방송을 갈아타며 무차별적으로 진행될지 누가 알겠어요? 최근에는 타 방송사 MC와 PD, 작가들을 빼오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인기 프로그램을 죽이기 위해 암묵적으로 인정했던 여러 가지 관행마저 마구 까발리고 있어요. 이건 마치 스스로 자멸하려는 자들이 아니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을 일상으로 저지르고 있으니 답답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 거의 미칠 지경입니다. 뭔가 사단을 내지 않으면 미디어 생태계는 최소 2~3년 안에 공멸할 수도 있을 만큼 엉망이고 지독히 비관적이에요.”



언론 장악을 통해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낙하산 인사와 광고시장의 한계로 지속이 불가능한 4개 지상파방송을 무더기로 허가해준 것 때문에 언론 자체가 스스로 자멸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방송사 내·외부에서 비이성적인 일들이 난무하고 있다는 재영의 말에 성수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지는 몰랐다. 성수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거대한 전화의 시기에 직면하고 있는 시점에서 끝을 모르고 퇴행하는 언론을 보고 있자면 지식인이 아닌 평범한 국민의 입장에서도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어쩔 때는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반인륜적 언론의 행태에 대해 걱정하는 것조차도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미국에서 언론정책에 관한 가장 저명한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에드윈 베이커 교수가 자신의 저서인 『미디어 집중과 민주주의』에서 ‘미디어의 당파성이 미디어 집중과 맞물리게 되면 권위주의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누군가 나서 망령처럼 되살아난 권위주의 정권과 그와 결탁한 미디어 경영진의 반민주적인 행태를 제어하거나 멈추게 하지 않으면 어떤 불행한 결과가 초래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잠시 재영을 바라보던 성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책상 서랍을 열어 서류봉투 하나를 꺼냈다.



“리블링은 ‘언론의 자유는 언론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것’이라고 말했네. 언론의 소유권이 한 사람이나 일부에게 집중되느냐 아니면 견해를 달리하는 다수에게 분산되느냐에 따라 민주주의가 좌우될 수 있다는 뜻이지.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만.”

‘알지요. 형의 파일에서 읽었고 매일 경험하고 있으니 어찌 모르겠습니까?’



재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다음에 나올 말이 형과 같은지 궁금했기 때문에 자신이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이걸 줄 테니 시간 나는 데로 읽어보게.”



재영은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성수가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서랍에서 두툼한 서류봉투를 꺼내 재영에게 건넸다. 오늘의 성수란 도저히 예측 불가능한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다. 재영이 얼핏 봐도 서류봉투는 한 손으로 받기 힘들 정도로 무거워 보였다. 두께를 가늠하면 족히 7~800페이지에 이를 듯싶었다. 성수가 건넨 서류봉투를 받아 든 재영은 그 무게가 주는 이질감과 알 수 없는 압박감에 고개를 갸웃했다.



‘USB에 담아주면 될 걸, 굳이?’



재영은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을 재빨리 움켜쥐었다. 그것은 치열한 기자 생활의 경험에서 나온 제2의 본능 같은 감각이었다.



“교수님도 프린트된 상태로 받은 모양인데, 서류를 준 사람이 누군지 말해주지 않으시겠죠?”

“응, 지금은. 침대를 같이 쓰는 마누라에게도 밝힐 수 없는 사람이니, 자네가 이해해주게. 자료를 읽고 나면 그가 누군지 어느 정도 추측은 할 수 있을 거야. 자료를 받고 많이 고민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만한 적임자를 찾을 수 없었어. 내가 조금이라도 자네를 믿지 못하면 절대 그 자료를 넘기지 않았을 거네.”

“어떤 자료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고맙기도 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두렵기도 하네요. 상당한 파괴력을 지닌 자료인 것 같은데?”



재영은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이 성수에게 적임자가 됐으니 둘 사이의 인연이 간단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치사는 나중에 하지. 일단 읽어보게. 절대 간단치 않은 내용이니, 심사숙고해야 할 거야. 난 일생의 모험을 선택했어. 자네도 같은 선택을 했으면 하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야. 그렇다고 내 선택에 얽매이지 말게.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모험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너무 큰 숙제를 안겨준 게 아닌지, 벌써 걱정되네?”



이미 재영에게 자료를 건넨 후인데도 성수는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러워 했다. 재영은 어떤 권력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교수라는 신분인 그가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모험이라고 말할 정도면 자료가 갖는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서류의 무게 이상으로 묵직한 내용이 들어 있으리라.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 읽는 대로 연락드리고 찾아뵙겠습니다. 참, 그리고 20세기와 21세기에 대한 제 생각은 교수님과 조금은 다릅니다. 저는 20세기를 풍요를 향한 속도의 파시즘과 소비의 시대라고 보며, 21세기는 그 속도와 가격 파괴로 가능했던 과소비의 저주가 초래한 부작용과 폐해들을 전 인류가 대신 짊어지고 하나씩 치유하는 시대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월가를 점령하라’며 미국 전역으로 번져가고 있는 패자들의 시위와 미국처럼 규모의 경제를 이루려다 스스로의 발목을 잡아 버린 유로존의 몰락에서 그 징후들을 보고 있고요.”



재영은 자신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짓은 채, 자신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못하는 성수를 뒤에 남긴 채 그의 방에서 나왔다. 재영은 형의 힌트에 대한 확신을 얻은 것뿐만 아니라 인식의 차이도 느꼈지만 그것보다는 미지의 자료에 대한 기자로써의 호기심과 흥분, 성수 같은 사람이 조심할 정도의 내용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과 무게의 과중함에 흥분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일어났지만 재영은 왠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단어들을 몸서리칠 정도로 싫어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그것 외에 달리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취재기획안의 속도를 높이자. 이 자료가 어떤 역할을 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나도 그처럼 주사위를 던질 때가 온 거야. 어차피 가고자 했던 길, 두려워할 게 뭐 있어? 게다가.’

“난 영원한 아웃사이더잖아!”



성수의 연구실에서 나와 계단이 있는 곳까지 복도를 걸어가던 재영이 자신을 향해 파이팅을 외쳤다.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의 말이 좁고 밀폐된 공간의 공기와 뒤섞여, 뚜렷한 공진을 만들자 마치 사자후처럼 쩌렁쩌렁 복도를 울렸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진동이 같은 흐름에 합쳐져 증폭되는 원리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실현된 것이었다. 다른 조건이 같을 때, 물리학 법칙은 언제나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강하건 약하건 간에 인간원리가 적용되는 우주의 행성이라면 단 하나의 예외도 존재하지 않는다.



“뭐라고요?”



마침 계단에서 복도로 들어선 30대 후반의 남자가 깜짝 놀라며 재영에게 물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의 단단한 신체의 소유자였다. 9층까지 계단으로 올라온 것이 분명하다면 최소한 몇 방울의 땀이라도 이마에 맺혀야 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호흡이 조금은 거칠어지거나. 어쨌든 그는 육체적 단련에 있어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자가 분명했다.



“아, 아닙니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재영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해 불의의 인물에게 사과하며 얼른 자리를 피했다. 오늘은 온통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재영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지만 내내 뒷골이 간지러워 죽을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