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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세월호참사와 자발적 복종에 대하여



질서를 바라는 것은 풀 수 없는 그리고 충족될 수 없는 목마름입니다. 이 욕망은 각자의 현실이 무질서한 것처럼 여겨지게 만들어서 무질서 상태를 고치도록 요구합니다. 이런 까닭에 저는 감시가 결코 활력을 다하거나 일감이 없어질까 두려월 필요가 없는 얼마 안 되는 산업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ㅡ 지그문트 바우만, 데이비드 라이언 대담 《친애하는 빅브라더》에서 인용 




9.11테러가 불러온 변화와 비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세월호참사는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나라 대한민국에서도 감시와 안전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을 견인하며 민주주의를 작동불능의 상태까지 위축시키고 있습니다. 왜 위험사회가 됐는가에 대한 질문은 사라졌고, 그 때문에 세월호참사의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대신.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24시간 감시체제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민은 자신의 프라이버시(구글의 회장인 슈미트는 프라이버시 자체가 없는 세상이 됐다고 했지만)와 기본권조차 포기한 채 새롭게 등장한 감시사회의 안전담론에 자발적 복종을 보여주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실제로 시민의 안전을 높이기보다는 권력의 통제를 강화하는데 유용한 감시 장비들의 확대 설치를 반대하는 여론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체제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에 적응해서 남들보다 조금 낫게 살아남으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의 질서와 개인의 안전을 중시하는 안전담론의 강화는 사회의 보수화와 인식의 보수화를 동시에 강화합니다. 안전을 높이기 위해 질서를 강화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정치‧경제‧사회적 자유와 충돌하기 일쑤여서 가진 것을 지키고 늘려야 하는 기득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사회와 인식의 보수화를 추동합니다. 



이런 경향이 강화되면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참극인 세월호참사가 지겨운 것으로 변질되고, 가끔씩 일어나는 해상교통사고로 치부되기에 이르며, 자식의 목숨을 팔아 한몫 챙긴 유가족들의 생떼가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색깔론까지 발전합니다. 250명의 아이들을 포함해 304명의 죽음이 안타깝지만, 내 자식과 부모형제들이 아니어서 더 이상 엮이는 것조차 불편하게 됩니다.  



 


OECD 가입국 중 부의 불평등과 사회복지지출이 가장 나쁜 대한민국은 사회갈등지수도 최상위에 위치합니다. 여기에 분단 현실을 악용하는 현 집권세력과 보수언론들의 안보상업주의가 더해지면 안전에 대한 욕구는 민주주의와 시민의 기본권이 제한되는 것을 감수할 정도로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울리히 벡이 말했던 《위험사회》의 출현이 인류가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획득한 적극적 자유(제도와 법으로 보장되는 자유, 내 마음대로 살게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소극적 자유인 자유방임과 구별된다)와 민주주의마저 제한하기에 이릅니다



사회와 인식의 보수화를 강화하는 이런 추세가 박근혜 정부 내내 이어진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시민의 기본권도 돌이길 수 없는 지경까지 후퇴할 것은, 집회마저도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작금의 현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월호참사 1주기를 맞아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집회를 폭력집회로 규정해 무차별적인 진압과 체포를 자행하는 것도 질서 유지와 공공의 안녕을 내세운 안전담론의 득세가 어디까지 왔는지 말해줍니다.



특히 ‘군‧산‧미디어‧연예복합체’의 일원인 언론(특히 쓰레기 방송들)은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며 반인륜적인 사건·사고 뉴스를 집중보도함으로써 위험과 공포를 극대화합니다. 범죄율의 증가나 하락 같은 것은 보도하지 않고, 왜 이런 사건사고가 일어나는지도 보도하지 않고, 오직 위험과 공포만 부추깁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빌붙어 최대 이익을 거두면 그만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온갖 오보를 쏟아내며 세월호가 침몰하는 것을 생중계한 언론들이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보다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선회한 것도 모자라, 유족을 체제를 전복하려는 세력으로 몰고가는 짓거리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런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의 보도를 통해 자사의 매출을 극대화하면 만사 OK라는 것입니다. 모든 뉴스에 오늘의 사건·사고가 갈수록 늘어나는 것도, 보도의 선정성과 폭력성이 갈수록 심화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9.11테러 이후의 미국이 민주주의와 헌법적 가치마저 제한하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진 것처럼, 세월호참사 이후의 대한민국이 비슷한 방식으로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작금의 상황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렇게 됐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칠 정도로 안전담론에 매몰돼 민주주의와 기본권 등이 축소되고 침해받는 것까지 감수하게 됐을 때, 감시체제의 강화는 지배엘리트의 이익만 무한대로 늘려줍니다.



최소 250명에 이르는 어린 학생들이 체제와 어른들의 잘못으로 죽어갔음에도 세월호참사가 지겹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일베 같은 극우주의자들이 계속해서 설칠 수 있는 것도, 이들을 지지하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끊이지 않는 것도, 세월호집회의 폭력성만 부각하는 쓰레기 방송들이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도, 테러와의 전쟁이나 안전담론에 매몰된 사회와 인식의 보수화가 자발적 복종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들입니다.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21세기가 위험사회와 감시사회, 정신이상사회가 된 것은 상위 1%에 속하는 지배엘리트와 슈퍼리치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참사도 이런 극단의 불평등 때문에 발생한 위험들이 하위 99%에게 전가된 참극의 전형입니다. 이익은 상위 1%에 집중되지만, 위험은 하위 99%에 전가되는 ‘리스크 대이동’이 세월호참사의 숨어있는 본질이며, 이 땅의 기득권들이 깨놓고 진실규명을 방해하는 이유입니다.



부와 위험의 불평등이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주장하는 ‘군‧산‧미디어‧연예복합체’의 논리는 허구로 가득한 퇴행적 현상의 전 지구적 차원의 지적 사기입니다. 디지털 빅브라더의 등장은 위험사회의 폐해를 최소화할 것이라는 주장도 어떤 경험적 증거가 제시된 적도 없으며, 세월호참사가 일어났을 때 수없이 많은 안전시스템들이 무용지물이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그저 편하게 살다 편하게 죽고 싶을 뿐입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자발적 복종은 진실을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더욱 가난해지고 위험해진다고 해도 진실을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세월호참사에는 이 모든 것들이 집약돼 있지만, 진실규명의 노력을 외면하면서 자발적 복종에 길들여져 갑니다. 어쨌든 자신은 세월호에 타지 않았고, 수장되지 않았으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어제 같은 오늘을 살고, 오늘 같은 내일이라도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15년 전에 노회찬이 '그래서 살림 좀 나아지셨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이, 지금에는 자발적 복종을 거부하는 대학생들이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질문의 변화와 차이 만큼 하위 99%의 삶은 퇴행했고, 우리를 먹여살리는 유일한 체제인 민주주의는 고사 직전에 이른 것입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애써 외면하는 과정에 흘린 것들로 즐비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