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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저와 책이 있는 풍경

발터 벤야민의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요약

 

 

 

 

저를 기준으로 할 때 20세기 최고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는 발터 벤야민입니다. 나치의 학살을 피해 미국 망명을 시도했으나 그것에 실패하자, 47세라는 이른 나이에 자살을 선택한 유대계 독일인이었지만, 그가 남긴 사유의 결과물들은 너무나 독창적이고 뛰어나서 모든 산문들이 아름다운 시처럼 다가옵니다. 

 

 

그가 남긴 저작들은 상당한 집중을 해야 이해할 수 있는 사유들로 가득해서 쉽게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번역자의 능력까지 포함해서 볼 때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분들은 《베를린의 어린 시절》과 《일방통행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는 꼭 보셨으면 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일종의 종교를 볼 수 있다. 즉 자본주의는 예전에 이른바 종교들이 그 답을 주었던 것과 똑같은 걱정, 고통, 불안을 잠재우는 데 핵심적으로 기여한다(자본주의는 한 번 빠져들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교환의 과정이며,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 이외에는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적이다. 정치마저도 민생이라는 경제적 행위가 최상의 가치로 자리잡는다).

 

 

 

 

현재 상태에서 이 자본주의의 종교적 구조에서 세 가지 특성만큼은 인지할 수 있다. 첫째 자본주의는 순수한 제의종교로서, 어쩌면 지금껏 존재했던 가장 극단적인 제의종교일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직접적으로 제의와 관계를 맺는 가운데에서만 의미를 지닌다(보이지 않는 손으로서의 시장경제가 유일한 통로로 이를 거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특정한 교리도 신화도 모른다. 제의의 이러한 구체적 성격과 연관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두 번째 특성인데, 즉 제의의 영원한 지속이 그것이다. 자본주의는 꿈(희망)도 자비도 없는 제의를 거행하는 일이다. 그 속에는 ‘평일’이란 것이 없고, 모든 성스러운 치장의 의미, 경배하는 자의 극도의 긴장이 펼쳐지는 끔찍한 의미에서의 축제일이 아닌 날이 없다(끝없는 혁신과 신제품을 요구하는 무한경쟁을 떠올리면 된다. 현재의 대한민국이 바로 그러하다).

 

 

 

 

세 번째 특성으로 이 제의는 부채를 지운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추측건대 죄를 씻지 않고 오히려 죄를 지우는 제의의 첫 케이스이다. 이 점에서 이 종교체제는 엄청난 운동의 추락 과정 속에 있다. 죄를 씻을 줄 모르는 엄청난 죄의식은 제의를 찾아 그 제의 속에서 그 죄를 씻기보다 오히려 죄를 보편화하려고 (한다)(자본주의는 신용창출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에 최후에 남는 것은 빚이다).

 

 

 

 

이 자본주의라는 종교운동의 본질은 종말까지 견디기, 궁극적으로 신이 완전히 죄를 짓게 되는 순간까지, 세계 전체가 절망의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견디기이다. 그것은 이러한 절망의 상태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가 존재의 개혁이 아니라 존재의 붕괴인 점에 바로 자본주의가 지닌 역사적으로 전대미문의 요소가 있다(자본주의는 돈이 되는 모든 것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된다. 무한한 진보란 종말로 가는 길이다).

 

 

 

 

자본주의라는 종교의 네 번째 특성은 그것이 신의 숨겨져 있어야 한다는 점, 그 신이 지은 죄의 정점에서 비로소 그 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점이다...억압된 것, 죄스러운 생각은 아직 해명되어야 할 깊은 유비관계에서 보자면 바로 무의식의 지옥이 그 이자를 지불하는 자본이다(자유시장 배후에서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순전히 제의로만 이루어진, 교리도 없는 종교이다. 자본주의는ㅡ칼뱅주의에서 뿐만 아니라 나머지 정통 기독교 교파들에서도 입증되어야 할 테지만ㅡ서구에서 기독교에 기생하여, 종국에는 기독교의 역사가 그것의 기생충인 자본주의의 역사가 되는 형태로 발전해왔다(자본주의는 끝없는 확장을 추구하는데 이는 기독교의 선교방식과 유사하다). 

 

 

 

 

걱정들은 자본주의 시대에 고유한 정신병이다...탈출할 길이 없는 상태는 죄를 지우는 상태이다. ‘걱정들’은 이 탈출구 없음의 죄의식을 나타내는 지표다. '걱정들'은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는 불안에서 생겨난다. 종교 개혁기에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흥기에 유리한 여건을 마련했다보기보다, 기독교 자체가 자본주의로 변형되었다(무한경쟁을 부추기며 국가나 기업 같은 집단의 이익을 강조하는 자본의 행태를 보라. 미국과 유럽의 역사와 대형교회의 행태를 보라).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를 인식하기 위해, 원래 이교가 최초에 종교를 ‘상위의’ ‘도덕적’ 관심으로서가 아니라 가장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관심으로서 파악했다는 점, 달리 말해 이교는 오늘날 자본주의처럼 그것의 ‘이상적’ 또는 ‘초월적’ 성격에 대해 확실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자본주의가 물질만능주의와 소비지상주의로 귀결되는 것을 떠올려보라.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타락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