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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저와 책이 있는 풍경

거대한 전환ㅡ부의 불평등의 기원에 대해


어떤 책들은 감히 서평을 쓰는 것조차 누가 되는 것들이 있다. 책의 첫 장에서부터 끝장에 이르는 동안 온몸을 관통하는 지적 선율과 시대를 관통하는 성찰에 지상의 언어가 모두 초라해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한 시대의 지식과 경험을 빌렸으되 영원 불멸하는 가치를 지니는 것들이 있다.


 

여기 이 책이 그렇다. 칼 폴라니의 몸을 빌어 1944년에 쓰여진 《거대한 전환》은 책의 부제처럼 우리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에 대해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걸작이다. 유럽에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 책이 2009년에 이르러서야 한글로 번역된 것은 미스터리 그 자체라 할만하다. 이 책과 함께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읽으면 인류의 근현대사를 꿰뚫어 볼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몰락하는 시점에서 자기조정 시장(시장경제)과 그것을 떠받드는 사상과 이념의 허구성과 폭력성을 고발한 이 책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운명적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애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던 것들이 이 책에는 담겨 있다.  

 


먼저 이 책의 94페이지를 보자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자기조정 시장(시장 근본주의자와 신자유주의 핵심으로 모든 시장정보가 공개되는 완전경쟁이 이루어지면 최고의 효율성을 이루어 인류 전체가 풍요로워진다는 아이디어)의 문제를 이 보다 더 정확히 파악한 문장이 있었던가? 인간을 노동으로, 자연을 토지로 변환시킨 자기조정 시장은 인간과 자연이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인간 욕구를 파괴해버리고 단 하나만을 남겨놓는 사탄의 맷돌처럼 애초부터 자기조정 시장이란 아이디어는 지구라는 행성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허구였다. 



자신이 정식화했지만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애덤 스미스의 자기조정 시장이란 신의 섭리나 자연의 법칙처럼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이 있어도 실현될 수 없다. 시장에 주어진 모든 정보를 검토한 후 거래를 하는 것은 신이라도 불가능하다.노벨경제학상 수상사인 스티글리츠의 말처럼 원래 보이지 않는 손’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허구의 아이디어인 자기조정 시장이 경제체제의 축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호황은 없었고 주기적인 공황만이 일어났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없어서 보이지 않는다



지금껏 자기조정 시장의 허구성을 말한 이들은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칼 폴라니처럼 자기조정 시장의 본질을, 그 화려한 유혹의 이면에 자리잡은 탐욕과 착취의 시스템을 낱낱이 밝혀낸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자본주의를 비판한 마르크스조차도 이익을 둘러싼 자본과 계급 간의 투쟁에만 집중했을 뿐, 자기조정 시장이 가지고 있는 파국적 결말의 필연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장하준 교수가 《그들이 말해주지 않은 23가지》에서 말한 것처럼, 지구에 대해 선입견이 없는 외계인이라면 주류 경제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자기조정 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시장 경제란 선진국과 초국적기업 및 기업집단 간의 불평등한 거래를 숨기기 위한 허구의 개념임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이제는 선입견이 있는 인간이 보더라도 자기조정 시장이란 부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핵심임을 알게 됐다.     

 


다시 209페이지를 보자.



시장 패턴이라는 것은 잠재적으로 오직 그것에만 따라오는 고유한 동기, 즉 물물교환과 교역이라는 동기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모종의 특별한 제도를 따라 창출할 수 있으니, 그 특별한 제도가 바로 시장이다.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이것이 바로 경제 체제를 시장이 통제할 경우 전체 사회 조직을 압도해버릴 만한 결과가 나오는 이유이다.


 

합리적인 인간의 자유롭고 이기적인 이익 추구 행위가 자기조정 시장의 중재하에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는 애담 스미스의 선언이 있은 후, 인류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부담에서 벗어나 마음껏 돈벌이에 나설 수 있었다. 자기조정 시장의 아이디어, 즉 자유주의 경제가 순식간에 전세계를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인데이런 이익 추구의 무한경쟁은 전세계를 초토화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거의 10년 단위로 되풀이되는 경제공황과 빠르게 고갈되고 있는 자원, 더욱 심해지는 지구온난화와 대지의 사막화, 토지의 대규모 오염, 물 부족 사태, 천연자원의 고갈, 미세먼지의 범람 등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일본의 제1원전 폭발과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폭주는 지구의 반발을 불러와서 인류를 종말로 내몰고 있다.


                                                       2008년 금융 대붕괴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

 

결국 칼 폴라니의 분석처럼 자기조정 시장이란 유한한 지구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아이디어에 불과하며 금융 자본이 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인류와 실물경제를 담보로 한 거대한 지적사기에 다름 아니다. 이런 파괴적인 자기조정 시장의 악몽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사회의 근간인 상호성과 재분배의 회복이 필요하다. 공동체의 역할을 하는 사회의 회복, 바로 그것이 칼 폴라니가 제시하는 해답이며 지속 가능한 경제의 실현이다.


 

마지막으로 603~604페이지를 보자.



따라서 사회의 발견은 자유의 종말일 수도 있고 그것의 재탄생일 수도 있다...인류는 더욱 성숙해질 것이며, 복합 사회 안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형상을 갖춘 채 존재할 수 있다...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셈이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히려 그것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를 쌓아 올리는 법을 배웠다...그러한 진리를 자신의 자유의 기초로 삼은 것이다...이렇게 가장 밑바닥의 체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시 새로운 생명이 솟구치게 된다...이제 인간은 자신의 모든 동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풍족한 자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인간이 그러한 스스로의 과제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권력이나 계획과 같은 것들을 도구로 삼아 자유를 건설하려 한다고 해도 그것들이 인간의 원수로 변하여 자유를 파괴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복합 사회에서의 자유의 의미이다. 이것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천혜의 땅에 세워진 미국의 경제가 무너지고대부분이 선진국인 유로존이 위기에 직면한 현재,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그 원인과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성경 같은 책이다. 회의 재발견, 그것만이 우리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며, 이는 미셀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의 주제이기도 하다. 21세기 최고의 석학으로 불리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액체근대》에서 칼 폴라니가 육화된 노동에만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오류를 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 폴라니의 성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위험사회》는 《거대한 전환》 못지않은 책이다.



현대의 상황을 유동하는 액체로 정의한 바우만의 성찰은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와 맥을 같이하며,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자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지만, 푸코의 성찰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칼 폴라니의 작은 오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인류가 물보다 싼 석유를 대체할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칼 폴라니의 성찰이 바우만의 성찰보다 더 유효할 수 있다.     



신주유주의 이후의 세계를 새롭게 구축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일반 국민은 물론 이 땅의 지도자들이 밤을 새워서라도 읽고 또 읽어야 하는 보물 같은 책이다아울러 이 땅에서 진보좌파의 이름으로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는 자들 중에 합리적 자유주의, 즉 좌파 신자유주의를 부르짖는 고전파 경제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제학자와 통상관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재벌 개혁과 노동 개혁, 금융 개혁과 관치 경제 탈피는 진정한 의미의 신자유주의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지난 15년간 진보좌파와 보수우파 대통령이 이 나라를 통치했지만 그 결과가 자살률 1위의 무한경쟁 사회, 내수가 없는 수출 중심의 일방적 경제, 심화되는 부의 양극화, 기본적 사회안전망의 부족, 보편적 복지제도의 미비, 1000만 명을 육박하는 비정규직, 거의 4000조에 이르는 부채로 넘쳐나는 나라가 대한민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주하는 기차를 멈추는 것이지,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다. 그런 다음에 사회적 토론과 합의를 통해 새로운 대학민국을 구축해야 한다. 이런 국가 개조의 맨 처음에 칼 폴라니의 성찰이 주요함은 《거대한 전환》이 증명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