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에 초월했던 베이컨이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로 과학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사람이라면, 데카르트는 현재의 결과만 놓고 볼 때 문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경험을 통한 과학적 지식을 중시했던 베이컨과는 달리 자연과 종교에 대한 근대이성의 우월성을 《제1철학에 대한 명상》과 《방법서설》을 통해 정립함으로써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자 세상의 지배자로 확고한 위치를 다졌기 때문이다(정신과 육체의 분리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바탕이 됐다). 우리가 말하는 과학철학이란 데카르트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그는 과학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이성이라는 종교에 귀속시켰다. 



모든 생각과 추론, 사상과 개념을 부정할 수 있어도, 신이 준 선물인 생각하는 있는 과정만은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21세기의 명제는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나는 검색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뀌었다)를 정립할 수 있었다. 그의 성찰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의해 반박될 때까지 근대과학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베이컨과 데카르트(와 데이비드 흄)를 근대이성과 근대철학을 논할 때 맨앞에 두는 것도 연역과 귀납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을 정립했기 때문이다. 





근대과학과 근대이성이라는 무한 진보를 견인하는 양축이 인간의 의식과 시대의 문화에 확고하게 자리 잡음으로써 무차별적인 자연 파괴와 자원을 찾아 떠나는 식민지 시대의 팽창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근대국가와 함께 등장한 중농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고전파 경제학과 양축을 이루었다). 두 사람과 함께 ‘돌다리도 두들겨 본 다음에 건너라’는 방법적 회의에 대한 데이비드 흄의 회의적 방법론(특히 《오성에 관하여》를 보라)이 더해져 폭발적인 과학의 발전을 이루어냈다.



여기에 브라헤와 케플러, 뉴턴의 연구결과의 도움을 받은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통해 우주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됨에 따라 과학지식이 목표로 하는 대상은 무한대로 넓어졌고, 한 세기가 더 걸렸지만 종교적 제약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신과 동형인 인간은 과학적 결과가 축적되고 고도화됨에 따라 지구라는 협소한 근거지에서 벗어나 우주 정복에 나설 수 있을 것이고, 뉴턴 역학에 의해 우주의 법칙은 어디서나 동일하기 때문에 시간만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었다. 





비록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더욱 공고해짐과 동시에 깨져버린 고전물리학에 기반한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인공위성 같은 우주공학의 발전과 기념비적인 인간의 달 착륙으로 이어졌다. 우주과학의 눈부신 성공까지 확인한 지식인들은 과학 찬양에 열을 올렸고, 제러미 리프킨은 《유러피언 드림》에서 이런 황홀경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리스는 블랙홀의 권위자다...그런 리스가 과학 탐구의 방법 가운데 일부는 존재에 큰 위협을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실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그의 주장은 과학의 기본 자체를 위협하면서 학계에 암운을 드리웠다. 규제 없는 과학탐구가 현대 과학의 기초이기 때문이었다. 계몽주의 과학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연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 목표였다...과학 탐구에 대한 규제를 받아들이면 현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진보’가 비현실적인 목적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자연의 힘을 통제하고 우리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이성을 활용하는 인간의 능력에 회의를 갖는다면 지구상의 완벽한 삶에 대한 소중한 꿈도 사라지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계몽주의의 시초부터 과학계는 인간의 모든 탐구가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우주 정복과 식민지 건설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미래의 풍요로움에 대한 환상이 컸던 것에 비해서, 근대과학의 기초는 생각보다 빈약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이성이 생각보다 대단치 않아서 이런 환상은 오래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일정 속도에 오른 기차란 멈추기 어려운 법이다. 낙관적 결과에 힘입은 과학의 행진이 무분별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각종 폐기물과 부작용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독소를 지니고 있는 폐기물의 양이 늘어남으로써 장단기적인 위험을 축적하는 부작용(산업적 측면으로 볼 때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부수효과)이 속출했지만, ‘탐욕의 삼위일체’에게는 더 큰 진보를 위한 감내해야 할 ‘부수적 피해’에 불과했다. 





이윤의 논리는 ‘빨리 빨리’의 행태가 필수적으로 초래하는 부작용들이 새로운 시장의 단초로 남도록 만들었다. 이것들이 또 다른 응용과학의 발전에 따라 이윤의 추가요소로 전환될 때까지 철저하게 감춰두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결과의 낙관론과 부수적 피해의 운명론을 되뇌면 충분됐다. 이미 시장논리에 길들여진 시민들은 언제나 자기유지의 타협과 힘의 열세에 따른 체념의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디지털기록의 축적으로 개별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 욕구를 창출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는 소비사회에 대한 체념을 넘은 소비사회를 구축하는 자발적 복종의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뜻한다(뒤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뉴턴 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대표되는 무한한 진보에 대한 과학적 맹신은 인류로 하여금 반성하는 성찰과 비판하는 능력을 망각의 창고로 보내버리도록 만들었다. 과학의 신성화는 갈수록 시민에게서 멀어지는 전문가들의 언어에 현혹되기 마련이어서 과학의 부작용을 보편적인 것으로, 언젠가는 해결될 일시적인 문제로, 그래서 그때까지는 개인이 알아서 대처해야 할 문제로 만들었다. 철저히 지배 세력에게 유리한 체념과 순응의 사회심리학은 이런 방식으로 과학의 부작용이 개인에게 분배되는 악마의 방식에 면죄부를 발행한다. 





최근 한반도를 강타하고 있는 초미세먼저의 공습(반 이상이 국내에서 배출된다)과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일본 제1원전의 폭발에 따른 방사능 유출의 위험성을 예보의 정확성과 그에 따른 개인적인 대처의 문제로 뒤집어버렸다. 자신의 대보다 다음 세대에서 주로 나타날 피해와 부작용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근대과학이 견인한 무차별적이고 무분별한 개발의 후유증으로 나타날 미래의 피해를 지금 확인해 그에 대한 보상을 ‘탐욕의 삼위일체’의 실질적 지배자들에게 청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볼 때, 과학의 역사를 위험 확산의 역사라고 입증한 울리히 벡의 성찰은 20세기 물론 21세기에도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바우만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과학의 부작용이 축적이자 확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위험은 근대성이 출발할 때부터 이미 ‘아는 것과 모르는 것들을 확률이라는 의미론적 지평 안에서 합치시켜’ 버렸다”고 말했다. 예측 불가능한 것을 확률을 통해 ‘오만하게 지배할 수 있다는 가정’을 담고 있는 미적분학의 발전이 과학계 전반에 퍼지면서, 인류를 비대칭적 종말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의 폭발적인 확산이 지구온난화와 토지의 사막화, 대양의 오염과 극도의 불평등으로 축적됐다. 이제는 과학의 부작용이 초래한 폭발 직전의 위험에 대해 체계적으로 분석한 울리히 벡의 성찰을 따라가는 바우만의 사유는 다음과 같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이 세계의 우연성과 무작위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의식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처럼 벡이 ‘오만’이라고 부르길 좋아하는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식의 자만심이 바로 근대적 의식을 지탱해주던 두 기둥이며, 결국 위험이라는 범주가 이 두 기둥을 화해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 ‘위험’이라는 범주는 두 번째 기둥인 ‘자만심’을 구해내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비록 원망스럽고 무서운 동반자일지라도 고집스럽게도 도처에서 계속 따라다니는 첫 번째 기둥이라는 동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동안은 과학자의 전유물이었던 위험이 비과학자들의 눈에 보일 정도로 증폭되자, 다급해진 정부와 더 이상 비밀을 숨길 수 없었던 과학자들은 ‘위험을 계산해내려는 기획’을 통해 다시 세상을 이끌어나가는 주도권을 움켜쥐었다. 과학적 지식이 부족하고, 전문적인 통계를 해독하기 어려우며, 주어진 정보의 타당성도 확인할 방법이 없는 개인들로서는 범죄자에게 범죄의 피해를 해결하도록 맡기는 것 이외에는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다. 





이에 고무된 과학자들은 위험을 통제하기에는 완벽하지 않지만, 과학의 발전과 지식의 축적을 통해 위험을 제어하는 확률의 오차를 최대한도로 줄여나가다 보면 ‘통제할 수 있는’ 상태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며, 과학적 의미의 ‘낙수효과’를 약속했다. 이를 위해서는 변함없이 정부의 예산지원이 필요하고, 그 결과물들을 이용해 폭발 직전의 위험을 통제하는 일은 여전히 정부의 위탁을 받은 기업들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약속한 것은 완전한 위험 통제와 전혀 실패가 없는 확률의 계산이 아니었다.



바우만에 따르면 그들이 약속한 통제의 범주는 “단지 위험할 수 있는 확률과 예상되는 위험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는 능력만을 약속했을 뿐”이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는 원래 목표로 삼았던 일을 최대한 가장 효율적이고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해 자원들을 가장 최적의 상태로 분포시키는 방법을 계산하고 이를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약속”했을 뿐이었다. 만약에 인류를 공멸의 위기로 몰고 가는 사건들이, 과학자들의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발생하고 만다면, 그 사건들이 일어날 확률들에 대해서는 이미 계산해두었기에 대처가 가능하다는 약속 말이다. 



물론 엄밀하게 계산된 확률과 오차 범위 안에서의 실패일 뿐인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최소한의 피해ㅡ그것이 수천만에서 수억 명의 죽음일지라도ㅡ는 개인이 감당해내야 할 문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민주적 절차인 선거에 의해 공인된 정당성을 획득한 ‘단기적인 군주’로서 통치하는 정부의 행태가 정책 실패의 책임에서 갈수록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탐욕의 삼위일체’의 실질적 지배자인 세계적 특권그룹이 일방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현재의 구조 하에서 개인에게 돌아갈 피해를 보상해주거나 막아줄 방법이란 결단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원자탄의 발명은 위험의 보편성과 공멸의 동시성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과학이 견인하는 진보의 영원성에 대한 믿음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지만, 미국이 끝내 원자탄 두 개를 일본에 떨어뜨림으로써 인류가 공멸할 수도 있다는 위험은 오히려 탈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선례가 생겼으므로 핵무기 확산은 불가피할 것이며, 실제로 여러 나라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고, 상호견제의 버팀목으로 변질된 핵무기를 보유하는 국가는 갈수록 늘어났다.



또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국가들은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이면서, 더 이상 핵무기의 확산은 없어야 하며, 이에 대한 국제적 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본말이 전도된 이런 현상이 ‘위험사회’의 본질이며, 그래서 인류는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어떤 방법도 강구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에너지 안보를 확고히 하고 지구온난화에 대처하기 위해 핵발전의 확산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었다.





이렇게 절대 행해지면 안 되는 악마의 선례가 이루어졌음으로 과학의 광기를 이용해 이익을 독점하는 ‘탐욕의 삼위일체’의 행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사라져버렸다. 꾸준히 늘어나는 핵보유국 숫자가 이를 말해주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를 바로잡을 제대로 된 기회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세계적인 장기공황이 불러온 지난 7년 간 핵 관련 프로젝트들이 어느 때보다 활발히 이루어졌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늘 그래왔듯이 이제는 위험이란 불확실성의 미래와 함께 사는 것이 일상이 됐고, 개인이 사회적으로 발생한 위험을 감당할 수 있도록 스스로 무장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공멸의 순간에 이르지 않으려면 전 지구적 차원의 공동노력이 필수인데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이 신자유주의적 선동은 미래세대의 선택지를 갈수록 줄인다는 점에서 무책임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모두가 전멸할 위험을 항시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핵우산’이란 정치논리의 미친 허구성은 말할 것도 없고, 지구온난화에 따른 온갖 피해마저 개인이 감당해야 할 것으로 떠넘겨지고 있다. 과학이 철학을 귀찮게 여기면 인본주의적 가치는 사라지고, 오직 자본의 탐욕을 추구할 뿐이다. 



                                                                                                         사진출처 : 구글이미지 


                                   


  1. smm 2015.04.21 06:12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도 엄밀히 따지면 존재가 우선이죠. 지가 존재하니까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죠. 아뭏튼 어느 영역이든 철학이 없는 진보는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듯합니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의 그림자가 철학을 할 수 없는 환경으로 개인들을 내몰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하지만 도령님처럼 이렇게 지속적으로 외쳐주며 지식인의 소임을 다하는 강단있는 소수가 적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 늙은도령 2015.04.21 06:28 신고

      어디선가 좋은 글을 쓰고 준비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이것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 현실정치적인 것들도 다루다 보니 자꾸 늦어지네요.
      하긴 공부할 것도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당분간은 과학사 관련 책들을 집중적으로 봐야 합니다.
      지금 보고 있는 자발적 복종이 시대에 대한 책들을 다 읽으면 읽으려고 이미 10여권을 구입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나저나 책값이 많이 나와 죽일 지경입니다.

  2. 최홍대 2015.04.21 15:16 신고

    철학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삶의 철학따위는 없이 무조건 누구보다 잘살겠다는 생각만 넘쳐나면 결국에는 칼날이 자신을 향할듯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4.21 15:20 신고

      네, 그렇습니다.
      인간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너무 생각을 쉽게 버립니다.
      인간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기술은 편리함을 주지만 그것이 꼭 올은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3. 2018.04.02 09:20

    비밀댓글입니다



세부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영화의 짜임새를 별도로 한다면, 저출산‧고령화의 필수적인 결과인 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다룬 세 개의 영화가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와 웨인 크래머의 <크로싱 오버>,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 형제의 <로나의 침묵>이 그것입니다.





해리슨 포드가 주연인 <크로싱 오버>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어 풀어내는 관계로, 영화의 짜임새가 허술하고 어지러운 블랙버스터에 가깝습니다. 한 편의 영화에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고 했던 것이 패인이지만, 이민의 나라인 미국에서도 불법이민과 다문화가 그리 녹녹치 않은 문제로 부각했음을 보여줍니다.



로마시대 이후로 사라졌던 노예제도를 부활시킨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며, 경제가 나빠지자 노예해방의 이름으로 그들을 더 싸게 부려먹었던(노동유연화의 기원) 나라가 미국임을 고려하면, 불법이민과 다문화가 ‘아메리칸 드림’에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하자 또다시 그들을 내치고 있는 미국 특유의 DNA가 <크로싱 오버>에는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으로만 평가하는 미국 백인의 시각에서 제작된 <크로싱 오버>를 압축하면, “중산층 이상에게는 ‘아메리칸 드림’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저임금 노동자로 써먹던 노동자들이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고, 치러야 할 비용과 대가도 그만큼 커졌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로싱 오버>가 미국 특유의 위선이 스크린 뒤에서 작동하고 있다면, <그랜토리노>는 한 발 더 나아가 미국 백인 노동자가 이민과 다문화의 피해자가 됐다고 선언합니다. 그의 시각에서 보면 돈을 향해서만 달려가는 가벼워진 미국의 변화가 마뜩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미국적 가치의 핵심인 가족도 불편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보수와 수구 사이에 위치한 미국 백인의 시각으로 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풀어갑니다. 곳곳에 폭력을 배치해놓고, 그 폭력에 맞서야 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랜토리노>를 통해 자신의 본질이 <용서받지 못한 자>보다는 <더티 해리>에 가깝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영화에는 이민과 다문화가 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됐는지 전혀 다루지 않은 채, 은퇴한 미국 백인 노동자의 시각에서만 영화를 이끌어갑니다. 어린 베트남 이민자 남매와 나이와 인종을 뛰어넘는 우정은 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극대화하기 위한 드라마적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처럼.





파시즘적 속도로 달려가는 미국의 변화는 은퇴한 백인 노동자에게 야만적 폭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탐욕에 눈이 먼 파시즘적 속도에 맞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정의와 노동의 가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희생적이어서 영웅적으로 그려지는 자신만의 구원의식이자 현실도피적 결단입니다.   



하지만 한 쪽의 시각만 반영된 정의와 가치는 부분적인 정의에 불과할 뿐임에도, 반폭력적 메시지를 언제나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서만 그려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강박관념은 은퇴한 백인 노동자가 미래의 화해와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비극적 희생밖에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제조업을 포기하고 아이디어와 금융산업 위주로 돌아선 시대의 피해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이민자 폭력조직을 두려워해야 하는 사회적 약자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극적 결말이 전달할 수 있는 미학적 위대함에 크게 감명받을 터이지만, 바로 그 마지막 장면이 그 이상의 폭력을 담아낼 수 없다는 반동적인 메시지 때문에 가장 폭력적입니다. 



죽음을 미화하는 것이 폭력을 유발하는 극단적 선택이라면 거기에는 진실된 의미의 정의도, 진정한 화해도, 반성적 구원도 없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려낸 반폭력적 저항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폭력에 맞서는 비폭력적 저항은 일체의 폭력을 부정하는 것에서 양화가 악화를 해체하는 것입니다.  





‘그랜토리노’는 미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1972년형 포드사 중형차로, 미국 백인 노동자의 자존심이자, 갈수록 퇴색하고 있는 미국 특유의 ‘빌어먹을’ 애국심을 상징합니다. 은퇴한 미국 백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랜토리노>는 잘 만든 영화이며, 이민과 다문화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고든 수작입니다.



하지만 은퇴한 백인 노동자를 들어내면 <그랜토리노>는 반유대주의를 조장하는데 앞장 선 나치의 선동적인 영화를 떠올립니다. 세계를 지배하거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최상위 0.1%를 다룬 《슈퍼클래스》에서도 미국의 슈퍼엘리트(특히 부시 부자의 행정부에서 일했던 고위관료들)와 어울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는 보수적인 미국 백인의 이데올로기를 가감없이 드러낸 폭력적 영화입니다. 동시에 미국적 보수화가 일반화된 이명박근혜 정부의 7년 동안, 우리 사회가 이민과 다문화를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시각이 얼마나 보수화됐는지 간접적으로 말해줍니다. 백인과의 결혼은 국제결혼이고 중국 동포나 동남아인과 결혼하면 다문화 결혼이 되는 것부터 보수적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는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모든 것이 나쁠 때는 어떤 것도 문제가 된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크로싱 오버>와 <그랜토리노>에 비하면, <로나의 침묵>은 유럽에서도 심각한 국가적 사안으로 떠오른 이민(불법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절대적 약자인 이민자의 입장에서 그려낸 명작입니다.



‘모든 것에 값이 매겨져 있는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과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영화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로나의 침묵>은 불법이민과 다문화 문제가 부정적 세계화의 결과이자, 일단 거기에 발을 들여놓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는 한 탈출할 방법이 없음을 영상미학으로 보여줍니다. 소비사회는 돈이 없고, 소속이 없지만 삶의 매 순간이 폭력에 노출되는 것과 같습니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멸시킬 때까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을 ‘자기조정 시장’의 폭력적 허구성을 해부했다면, 다르덴 형제는 <로나의 침묵>을 통해 ‘자기조정 시장’의 필연적 결과인 소비사회의 파국적 종말을 그려냈습니다.





허리우드 키드였던 필자는 허리우드 영화의 포로였고, 지금도 비슷한 상태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민과 다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에 관한 한 <그랜토리노>와 <크로싱 오버>를 <로나의 침묵>과 비교해보면 문화적으로도 미국에 종속된 대한민국의 현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샤를리 에브도가 당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갈수록 늘어나는) 테러도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가다 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이슬람 원리주의가 아닌, 프랑스의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불법이민과 다문화 문제가 탐욕의 소비사회와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고 있는 정치경제적 혼란과 인간성 파괴의 냉혹한 현실, 표현의 자유를 악용한 자본주의적 탐욕입니다.



앞의 두 영화를 본 분이라면 다르덴 형제의 철학이 녹아있는 <로나의 침묵>도 보기를 바랍니다. 그 후에 시간적 여유가 되면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대인에게 말을 건네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의 ‘39번째 편지 : 로나, 침묵의 소리’를 꼭 읽어보면 현대의 소비사회와 부정적 세계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저녁노을* 2015.01.27 06:48 신고

    하나도 보질않은 영화네요.
    함께 살아가는 우리이길 바라는 맘입니다.

    잘 보고가요

    • 늙은도령 2015.01.27 17:10 신고

      저도 우연히 보게 된 영화들입니다.
      사회적 문제를 다룬 영화를 원래부터 좋아해서...

      물론 다른 영화들도 좋아합니다.
      시간이 없을 뿐이지요.

  2. 공수래공수거 2015.01.27 08:31 신고

    저도 영화에 관심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아
    생소한 영화들입니다

    다운 로드가 가능한지 한번 찾아 보겟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0 신고

      로드가 다 가능한 영화입니다.
      저는 영화팬으로서의 세월이 40년이라....

  3. 꼬장닷컴 2015.01.27 08:40 신고

    본문과 관계없는 댓글 죄송합니다만..
    크린트 이스트우드 정말 오랜만인데 세월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아무튼 오늘 권하신 영화/책 기억해 두었다가 기회가 되면 봐야 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2 신고

      네, 합리적 보수로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정말 멋있었는데, 최근에 들어와서 합리적을 떼려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너무 보수적 관점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4. 耽讀 2015.01.27 10:02 신고

    다문화 시대에 들어선 우리들이 새겨야 할 영화 같습니다. 우리 역시 백인만 외국인으로 생각하고 동남아와 흑인은 외국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 판단입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3 신고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종적 차별은 같은 피부일 때 더 강한데, 세계화시대에서 가난한 나라의 이민자면 그것이 더욱 심해집니다.

  5. 달빛천사7 2015.01.27 10:39 신고

    아직 보지는 않았는데 이번주에 보죵 좋은하루되세염.

  6. 덕산 2015.01.27 12:31

    그랜토리노라는 영화를 봤던 기억으로는 감동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뭔지모를 불편함이 있었던것이 기억이 나네요.
    우선 내 주위에 있는 외국인과 외국인 노동자의 위치를 한번 둘러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4 신고

      네, 인간을 인간으로 볼 때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집니다.
      자본주의는 계급을 없앴지만 너무나 많은 계층을 만들어 차별을 세분화했습니다.




현대(성)의 병폐가 정점에 이르러 발생한 미증유의 참극인. 미국 월가 발 2008년의 신용 대붕괴가 유럽으로 전이돼 복지국가 신화에 종지부를 찍더니, 최근에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같은 신흥국의 위기로 확산되고 있다. '결과의 낙관론'이 부른 이런 참사들이 이어지며, 인류의 진보는 퇴행을 거듭하고 있고, 머지 않은 장래에 파국적 결말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공포가 확산일로에 있다.



                   작년 1월1일에 작고한 울리히 벡의 저작들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것은 비극이다.



독일의 재부상은 현대(성)의 퇴행을 보여주는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이다. 독일은 1945년부터 오이켄과 뢰프케 등의 질서자유주의(사회적 시장경제로 신자유주의의 원형을 제공했다)를 기반으로 압축성장을 이루었지만, 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극도의 경기 침체에 빠져들었다. 이후 제3제국의 특징인 파시즘에 뿌리를 두고 있는 녹색운동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며, 70~80년대의 장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국민이 절약에 동참하고 국내투자(복지와 SOC투자 축소, 외국인에게 돈을 걷는 것 등)를 최소화한 채, 수출에 올인한 것이 신용 대붕괴를 전후로 해서 독일의 급부상을 견인했다. 



거대 금융자본의 탐욕 때문에, 소가 뒷걸음치다 횡재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독일의 부상은, 그런 성공이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한데도 유럽의 지형도를 뿌리 채 흔들고 있다. 유럽이 고도의 발전을 이루었던 시기는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졌던 1945~1975년 사이의 '황금시대 30년' 뿐이었다. 신자유주의의 점진적인 부상과 케인즈 모델의 점진적인 몰락이 교차한 1979~1980년을 정점으로 유럽은 저성장이 고착화됐고, 각종 불평등이 양산됐다.     



2008년 금융 대붕괴 이후의 유럽이란,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라는 속담의 전형이었다. 바로 그 3년이 흐른 2011년부터 (독일을 제외한) 유럽은, 미국이 그런 것처럼 1929년에 버금가는 대공황으로 빠졌들었다. 이로써 서구의 양대 축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를 착취하고 약탈했으며, 일방적인 세계화를 통해 부와 권력과 위험의 불평등을 초래한 서구의 개발레짐과 채무레짐을 거쳐, 화폐 근본주의로 이어졌던 개발과 금융 위주의 성장 모델의 허상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바우만이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언급한 내용은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임을 보여준다.



바우마도 너무 고령이어서 걱정이 앞선다.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낸 경제학자 프랑수아 브루기뇽은 1인당 평균 소득을 기준으로 비교했을 때 1인당 평균 소득을 기준으로 비교했을 때 국가 경제들 간의 불평등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데 비해 세계 최상위 부자들과 세계 최하위 빈자들 간의 간격은 계속 벌어지고 있고 각국 내의 소득 격차도 계속 확대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콩쿠르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에릭 오르세나는...최근의 변화는 세계 인구의 상위 10퍼센트의 평균 소득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서는 최근의 변화의 크기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돌연변이(‘주기상의 한 국면’과는 분명히 다른 변화)의 메커니즘을 파악하려면, 상위1퍼센트, 아니 아마도 상위 0.1퍼센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최근의 변화가 초래한 진정한 영향 즉 ‘중산계급들’의 ‘프리카리아트(비정규직·파견직·실업자·노숙자들을 총칭)’로의 전락이라는 결과를 간파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제안이 정당하다는 것은 한 국가를 대상으로 한 것이건 다수의 국가를 대상으로 한 것이건 간에 모든 연구를 통해 확인된다. 모든 연구들이 동의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불평등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는 부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최상위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는 반면 빈자들, 특히 최하위 빈자들은 더 가난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더군다나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진다.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이렇게 새로운 형태의 빈곤층을 양산하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의 냉혹한 현실은 사회 내의 모든 사람에게, 혹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분명한 진실이 됐다. 특히 지난 40년 동안 신자유주의의 폭주로 인해 인류가 배운 교훈이라면 ‘가장 부유한 사회 구성원들이 갈수록 케이크의 더 큰 몫을 차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경제 모델(낙수효과를 처음 정립한 존 롤스의 《정의론》이 자유 시장 자본주의에 도덕적 정당성까지 부여해준 것을 넘어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어준 경제 모델)은 결국 자멸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명백한 교훈도 전 지구적 네트워크를 구축해 그 효과를 독점하고 있는 초국적기업들(애플, 구글, MS, 삼성전자, 도요타, 폭스바겐, 포드, GM, 현대차 등)과 거대 금융자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한 때 전 세계시장을 점령한 채 실질적인 세계 최고의 부국이었고, 《평등이 답이다》에서 모든 통계수치로 볼 때 최상의 국가에 속했던 일본의 몰락과 몸부림은 ‘독일 중심의 유럽의 재편성’과 비교할 때 현대성의 병폐가 한 가지 현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거의 해프닝으로 끝난, 하지만 초국적 제약업체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이익과 각 국가의 공적자금을 물 쓰듯이 써버리도록 만든 대중매체의 선정적인 ‘신종플루의 습격’에 대한 보도처럼, 거의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선정적인 방식으로 중계돼 인류에게 극도의 공포를 안겨준 3.11 제1원전 폭발은 현대(성)의 병폐가 한두 가지가 아님을 드러낸다. 최근에 들어 전 세계 언론을 통해 선정적으로 보도되고 있는 에볼라 바이러스의 확산도 몇 년 후에는 '제2의 신종플루의 습격'이 될 수도 있다(물론 전 세계에서 1억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했던 '스페인 독감'이 재현될 수도 있다).  



독일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잃어버린 20년의 일본은 1급전범의 후예인 아베가 총리에 올라 두 번째 내각을 구성함과 동시에 파시즘의 동양판인 군국주의의 부활을 위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 나가고 있다. 1,000억 달러에 이르는 피해를 발생시킨 고베 대지진에 이어 갈수록 도쿄를 향해 지진대가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재무장과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의 변신은 새로운 냉전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것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만일 고베 수준의 지진이 도쿄에서 일어난다면 그 피해액만 34조 달러(2008년 신용붕괴보다 피해액이 더 크기 때문에 세계경제는 3번째 대공황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높다)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기 때문에, 일본 정치권의 초조함이 비이성적 행태를 부추기고 있는 형국이다. 아베 총리와 그의 추종자들이 미국(또는 오바마 정부의 묵인 하에)과 국제사회의 경고(또는 무기력한 말장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한민국과 중국을 향해 끊임없는 도발적 언사와 행위를 강화시키는 이유는 일본에 팽배해 있는 패배의식과 숙명적 종말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가를 좌지우지하는 유대인의 로비도 천문학적인 재정적자 감축 때문에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이(그러나 이스라엘의 가자주민 대량학살 정도는 미 정치권을 움직여 국제여론의 비판으로부터 호모막을 칠 정도는 된다)에, 아베 내각의 의도적인 군국주의 부활은, 스스로의 탐욕으로 무너졌지만 전 세계에 그 피해를 배분함으로써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했던 제국의 몰락과 어우러지면서, 전 지구적 차원의 긴장과 민주주의의 후퇴를 초래하면서 세계의 불확실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지진이라는 자연적 사건을 논외로 친다고 해도, 이런 전 지구적 현상은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탄생의 순간부터 내재했던 필연적 결과여서 다시 한 번 언급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충분히 이루어진 상태라 그 연구들을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할 것이며, 앞선 연구들의 공통점을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영원한 진보에 대한 믿음과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역사를 연구한 거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그 출발에 베이컨과 데카르트, 스미스와 리카도, 뉴턴과 다윈, 석탄의 효율적인 사용을 가능하게 해준 화학과 그것이 전부인 영국 발 산업혁명이 있었다. 



그들에게서 시작된 근대이성의 요란한 질주는 사회경제적 평등ㅡ초기의 미국과 신자유주의 이전의 스웨덴과 노르웨이와 덴마크가 달성했다ㅡ을 유보시키며 자유의 이름으로 ‘유동하는 공포’를 동반한 채 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현대(성)로 넘어갔다. 이후로 너무 많은 폐해를 양산하는 석탄을 대신해 ‘물보다 싼 석유’의 등장으로 현대의 비약은 어지러울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부정적 폐해도 포함되기 때문에 오직 양적인인 성장만 나타내는 지표인 GDP를 기준으로 할 때)을 거듭했다.





유럽의 제국주의와 유일 제국 미국의 역사이기도 한 석유시대의 무한 확장은 ‘가격파괴의 저주’와 함께 이기적인 개인주의의 정화인 소비하는 개인화를 통해 시장규모를 최대한 늘리는데 성공했다. 석유 매장량의 끝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바닥에 이를 터ㅡ21세기를 넘길 것 같지는 않다ㅡ영원한 성장을 약속했던 근대이성의 질주는 대체에너지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과학기술의 한계 때문에 크게 휘청거리고 있다. 



무한한 진보를 약속했던 열역학 제2법칙도 엔트로피의 질이 너무나도 나빠져 더 이상 전가의 보도로 사용할 수 없다. 양자역학의 발전은 한편으로는 진보의 무한 동력이지만, 그 파국적 위험성은 인류 문명 전체의 종말로 불러올 수 있어 확률이 허용하는 한에서만 유효할 뿐이다. 나노과학은 초미세먼지와 조우하며 새로운 형태의 전염병과 신종질환을 양산할 위험성을 동반하고 있다.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인용된, 마샤 에인절의 《뉴욕 북 리류》의 2009년 1월 15일자 기사는 갑자기 ‘위험해진 세상’에 대한 한 가지 단서를 제공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제약회사들은 시장을 더 확장할 수 있는 보다 새롭고 극히 효율적인 방법을 완성시켰다.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들을 홍보하는 대신에, 오히려 자신들의 약들에 적절하게 들어맞는 질병들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전략은) 미국인들에게는 오로지 단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만이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일이다. 약물 치료를 필요로 하는 의학적인 상태를 지닌 사람들과 반면에 바로 자신도 약물을 필요로 하는 상태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쯤을 전후로 해서 의료와 제약 산업은 새로운 수요 창출을 극대화해 이윤을 추구하는 마케팅 전략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사의 묵인 하에 제약회사들은 자신들의 우월한 권력을 활용해,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만큼 건강에 대한 관심사가 커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건강하게 살려면 자신들의 약들을 먹고, 균형 잡힌 몸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피트니스에 매달리며, 조금만 몸이 이상해도 병원을 찾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는 인식을 심는데 성공했다. 



약의 효능이 질병의 호전에 대해 약속할 필요는 없으며, 의료행위를 받는 사람들이 정말로 심각한 상태인지, 아니면 그저 여러 가지 통증 중 하나에 불과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따지지 않는다. 하나의 약이 효과를 보이지 못하면 다른 약을 먹으면 되고, 깨알 같은 전문용어로 써 있는 부작용들이 일어나면, 그것을 줄이는 다른 약을 머거나 의료행위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참는 데 익숙한 고통도 최근에는 질병으로 재정립된다.” 



최근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는 ‘위식도 역류(필자의 어머니의 지병인 식도성 역류염)’는 예전에는 속쓰림이었으며, 온갖 형태로 나타나는 생리통과 그 징후가 너무나도 특이해 이해하기도 어려운 자신감 상실 같은 것들은 불길하게 들리는 병명으로 재정립돼, 긴급하게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질병처럼’ 변경됐다. 또한 ‘사회불안장애’나 필자가 겪고 있는 ‘공황장애’, ‘만성적인 수면장애’와 ‘누구나 걸리는 우울증’ 등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면서, 제약업계는 ‘불안-홍보 캠패인’을 지속적이며 대규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특히 끝이 보이지 않는 장기적인 경제공황을 탈출하기 위해서 전 세계적으로 ‘의료민영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의사와 약사와 갈리기도 하지만 초국적 제약회사와 첨단의료기기 제작업체와 전 세계적 판매상, 의료관광와 관광수입을 매개로 관광업계와 항공업계, 보험업계와 거대 금융자본들이 손을 잡고 각국 정부에 어마어마한 로비를 벌이고 있다. 특히 초고령사회와 초위험사회의 도래는 의료민영화만큼 돈이 되는 사업도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이익집단과 국민 간의 전쟁은 갈수록 이익집단 쪽으로 기울고 있다. 거의 모든 의료대란이 상당 부분 짜고 치는 고스톱 형태로 진행되는 것처럼.



이런 현상은 제약업체만이 아니다. 《불량의학》과 《의사들이 말해주지 않는 것》, 《의학과 문화》, 《의학과 기술의 지배》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문진의 시간은 엄청나게 줄었고, 그 사이에 각종 의료기기를 동원한 수치와 보다 많은 투약, 보다 자주 이루어지는 수술 등이 자리하게 됨으로써 환자의 건강은 의료기술이 발전할수록 각종 신규 질병에 위협받고 있다. 



전 세계에서 국가와 국민이 가장 많은 의료비를 지출하면서도, 그것의 반도 지불하지 않으면서도 건강에 관한 모든 면에서 높은 안정성을 보여주고 있는 일본에 비해 미국의 건강 관련 각종 수치는 선진국이라고 전혀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의 경우 개인파산자의 대부분이 높은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만성질병이 만연되고 있는 현실을 가장 잘 반영해준다. 



전 국민을 상대로 한 건강보험이 실시되지 않으면, 부와 위험의 불평등이 중첩되는 새로운 사회적 계급들의 삶의 질은 19세기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의료에 관련된 여러 가지 연구와 통계를 이용한 닐 포스트만의 《테크노폴리》를 보면, 의료행위와 의학기술에 내포된 경제논리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다른 나라의 미래가 될 수 있는 천박한 미국의 실상을 볼 수 있다.



미국의 의사들은 영국의 의사들보다 1인당 평균 6배나 많은 심장질환과 이식수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의사들이 진찰을 위해서 행하는 검사의 횟수는 프랑스, 독일, 혹은 영국보다 많다. 미국의 여성들은 유럽의 여성보다 2배에서 3배나 많은 자궁적출수술을 받고 있으며, 미국에서 이 수술을 받는 사람의 60퍼센트가 44세 이하이다. 미국의 의사들은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많은 전립선수술을 한다. 미국은 제왕절개수술에서도 업계의 선두에 서 있어, 다른 나라들보다 50에서 200퍼센트 이상 많은 시술이 이루어진다. 미국 의사들은 수술을 피하고 약물치료를 선택하는 경우에도 다른 나라의 의사보다 훨씬 많은 양의 약을 사용한다. 그들은 영국 의사들보다 항생제를 2배 이상 많이 처방한다. 유럽의 의사들은 세균에 의한 감염이 분명하고 상태가 심각한 경우에만 항생제를 사용하는 데 반해, 미국 의사들은 세균감염으로 보이면 별 고민 없이 항생제를 투여한다. 미국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훨씬 많은 양의 엑스레이 사진을 찍도록 한다. 어떤 방사선 학자는 엑스레이의 사용 정도를 조사하는 중, 5장이면 충분했을 환장에게 50장에서 100장까지 엑스레이를 찍은 사례들을 발견하였다. 다른 조사에 따르면, 임상자료를 분석해 본 결과 엑스레이를 전혀 찍을 필요가 없거나 연기해도 좋은 환자가 2/3에 달했다고 한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 2014.08.11 01:55

    도령님의 훌륭한 글 읽다가

    글 마지막 문단 보고서...

    알고 있는 자료가 있어서 댓글로 남겨 봅니다.

    우리나라가 자궁 적체 수술 1위랍니다...

    http://www.yakup.com/news/index.html?mode=view&nid=147891
    http://www.agora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1874

    영국이나 미국 보다도 더 심한 이 나라는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OECD 평균에 2배나 된다는데...

    멀쩡한 여자들 생식기로 돈 벌어먹을 의사들 ... ㅠㅠ


    항생제 처방율도 1위라는 것은 예전에 나왔고요...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040611001

    신자유주의가 만연한 국가보다도 더 악랄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이해가 안갑니다.

    왜 그런지... 부디 현명하신 도령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 늙은도령 2014.08.11 02:57 신고

      님이 질문하신 것에 대해서는 몇 편의 글로 올릴 수 있도록 구상을 마친 상태입니다.
      제가 올해 안으로 끝내서 출판해야 할 책에 들어가야 할 내용이기 때문에 구상하고, 자료를 구하고, 책들을 읽느라 많이 늦어졌습니다.

      대한민국이 이 지경이 된 핵심은 일제시대의 단죄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입니다.
      현재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통치엘리트들은 일제시대에 부를 축적한 자들과 족벌언론들입니다.
      그들이 일제시대에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북한을 최고의 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고,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해야 했던 미국의 제국적 이익이 이승만을 거쳐 박정희로 이어지면서 천민자본주의가 뿌리깊게 자리했기 때문입니다.

      6.25전쟁은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됐지만, 미국과 소련 및 이승만 정권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6.25전쟁 때 북한의 침략으로 무너져내린 것은 알려진 것보다 적고, 미국의 폭격 때문에 망가진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는데,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로 이어지는 이땅의 통치엘리트들이 6.25이후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됐고 이를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국민의 뇌리 속에 박아 놓았습니다.

      헌데 저들이 주장하는 압축성장이라는 것도 당시의 유럽도 똑같이 이룩한 것이었고, 그들은 부의 재분배를 통해 민주주의를 확고히 했지만 우리는 일제시대부터 이어져온 지배세력이 부를 독점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고, 극도의 불평등이 만연하게 됐고 돈이 되는 것은 무슨 짓이라도 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4대개혁입법이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국민들이 깨달아야 하는데, 조중동을 필두로 한 언론과 문창극 같은 식민지근대화론를 주장하는 자들 때문에 이것도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정말 엿 같은 나라가 된 것이지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도 특별법 하나 만들지 못하고, 국정원의 불법이 밝혀졌는데도 재선거가 치러지지 않는 것도 다 저들 때문입니다.

      여기에 기업의 힘이 너무 커져버렸고요, 신자유주의 20년 동안.
      이것이 대강의 과정입니다.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2. 달빛천사7 2014.08.11 05:19 신고

    한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이네염 좋은하루되세염


이번에 박근혜 정부의 2기 경제팀이 내놓은 경제활성화 방안은 동원할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끌어왔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문에 내수경제가 죽었다며 이를 살리기 위해 뭐든지 하겠다는 투입니다. 이것의 진실 여부는 따질 생각이 없습니다. 이미 국민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고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지구라는 행성이 5~6개 정도 있어야 유지가 가능한 과소비를 했고, 그것이 2008년의 금융위기로 이어진 것은 이미 상식의 수준입니다.



최경환 경제팀이 내놓은 경제활성화 대책은 7월 재보선 용이어서 표를 사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것을 박근혜 정부의 성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말도 안 되는 대책들도 수두룩합니다. 이번에 발표된 것이 전부 시행되면 시중의 유동성이 늘어 지표상의 GDP는 늘어납니다. 서민과 상관이 없다 해도 돈이 풀리면 인플레가 생겨 경제성장율은 높아집니다. 겉은 화려해서 박근혜 대통령의 치적이 되고, 속은 썩어들어가 서민의 생활고로 이어집니다.





미국에서 9.11사태가 일어났을 때 부시 정부가 공식적으로 한 첫 번째 대국민담화는 "평상시처럼 소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을 치르려면 재정이 바닥난 연방정부의 곳간이 채워져야 하고, 이는 국민들의 과소비가 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부시 정부 내내 연방정부이 곳간을 민간으로 넘기는 일을 하다 끝났는데, 국민의 과소비를 유도해서 천문학적인 전쟁비용을 마련하겠다는 것이 9.11사태가 일어났을 때의 첫 번째 대국민담화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2기 경제팀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부동산 시장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거품 형성을 각오한 채 LTV(집값이 높을수록 더 많이 대출받을 수 있다)와 DTI(소득이 높을수록 더 많이 대출받을 수 있다)를 확대했습니다. 즉, 부자일 가능성이 높으며,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상위층들에게는 이번 확대가 부동산 광풍을 재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LTV와 DTI를 확대하라는 정부의 압박에 은행들이 대출에 나서면 무조건 부실이 늘어납니다. 집값은 더욱 떨어질 것이 분명한 게 세계 경제 상황이 말해주고 있으며, 기업들의 어려움이 양질의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 2기팀이 내놓은 경제활성화 대책은 대규모 자살로 가는 길입니다. 경제 대붕괴라는 미국의 전철을 밟는 것이지요. 





이번 대책 중에서 세수 부족 때문에 대기업에 대한 여러 가지 비과세 감면을 단행하는 것은 환영하는 바입니다. 오직 이것만. 박근혜 정부 2기 경제팀이 내놓은 경제 활성화 방안을 하나하나씩 따지고 들면 끝이 없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방안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그것은 100조원이 넘은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의 내용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그것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사내유보금을 배당으로 돌리기 위해 고배당 기업에 한해 대주주들이 받는 주식 배당소득을 최고 38%의 소득세율이 적용되는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에 넣지 않고 분리과세(세율 14%)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주주들의 소득세가 현재보다 500억원가량 줄어들 전망이다. 소액주주의 배당소득에 매기는 분리과세 세율은 5~10%수준으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박스 안의 내용을 보면 기업의 사내유보금을 고배당을 통해 주주의 수중으로 넘겨줘, 상당한 수준의 보너스를 챙기게 된 주주들이 이를 소비에 사용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2기 경제팀의 생각은 한마디로 해서 난센스입니다. 사내유보금이 너무 많아 문제가 될 기업의 대주주라면 상당한 재력가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지금도 충분히 소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보너스가 생긴다 해서 그것을 소비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또한  대기업 대주주의 30~40%(삼성전자의 경우 60%)는 외국인입니다. 최경환 경제팀의 경기활성화 대책에 따르면 외국인 주주에게 대규모의 배당이 돌아감에도 세율은 낮춰주겠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게가다 그들은 한국에서 소비하지 않기 때문에 내수경제 활성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기업의 내부유보금의 성격에는 외국인 주주에게 배당하지 않고 새로운 투자를 하기 위함도 있는데 최 경제팀의 주장은 어불성설입니다.   



이는 수많은 경제학자들의 연구에서 밝혀진 내용입니다. 소득과 자산이 적을수록 보너스를 받았을 경우 소비에 쓰는 비율이 90~100%에 이르지만, 상위 3~5% 안에 드는 부자들은 소비하는 비율이 30% 수준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또한 이런 부자들은 소비의 상당 부분을 외국에 나가 사용합니다. 명품 구입도 이들은 국내에서 하지 않습니다. 또 한 사람이 소비할 수 있는 여력도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경제학의 상식 중에 상식이 소득 대비 소비 비율이 높은 사람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19~20세기 초반의 위대한 경제학자였던 베블런의 《유한계급론》과 좀바르트의 《사치와 자본주의》, 우리 시대의 위대한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등을 보면 최경환 경제팀의 경제활성화 대책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이들의 저서들이 먹힐 때의 부자들이란 과시적 소비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지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등의 일련의 저작들을 보면 21세기 부자들은 과시적 소비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특히 2008년 금융 대붕괴 이후로는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기업의 천문학적이 사내유보금(마땅한 먹거리가 없어 투자되지 않은 돈도 많다)에 직접 과세하지 않고 대주주들에게 고배당을 유도하는 것은 부자의 금고만 불려줄 뿐 소비로 이어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박근혜 정부의 2기 경제팀이 정말로 내수경제를 살리려면 사내유보금에 직접 과세해 그것을 공적 부조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형편없는 최저임금을 한꺼번에 올리지 못하겠다면, 중하위층에 속하는 가계와 노동자에게 기본소득 같은 공적 부조를 제공함으로써 소비전환율을 최대한 높이는 방법을 취해야 합니다. 특히 중하층을 대상으로 기본소득이 진행되면 경제는 무조건 살아나고, 중하위층의 삶의 질도 높아지고, 소비가 늘어났기 때문에 세금은 더 걷힙니다.



또한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행정력도 줄어듭니다. 거기서 나온 금액으로도 기본소득에 필요한 자금이 상당 부분이 만들어집니다. 기본소득을 받아서 면세점 이하였던 사람들이 과세대상이 됩니다. 국가의 세수가 넓어지기 때문에 복지 재정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기본소득은 초반 1년의 자금(아, 4대강공사만 안 했으면)만 마련되면 무조건 경제활성화로 이어집니다. 만일 경제활성화가 목표라면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쥐어주는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 2기 경제팀이 내놓은 경제활성화 방안 중에서 LTV와 DTI를 건드린 것과 사내유보금을 대주주에게 고배당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세율을 낮추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부자의 금고를 채워주고 금융권의 부실을 만들어 최종적으로 공적자금 투자를 통해 국가 재정이 악화되고, 이는 국민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미래세대는 사는 것이 지옥이 됩니다. 이 정도면 정말 막가자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선물 던져주고 정작 더 큰 위험만 떠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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