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연재를 하다 중단한 상태인 '늙은도령의 눈으로 본 근현대사 비판'은 인류 문명의 발전사가 자연과의 공생을 벗어난 순간부터 파시즘적 속도로 발전해왔지만, 그 대가로 잃은 것은 자연의 파괴만이 아니라 인류마저도 그 희생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연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통곡부터 하리라'라는 유럽의 속담만으로는 하늘을 향해 우뚝 쏫은 마천루 속에서 쓰레기로 버려지는 인간의 초라함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나마 인류는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문명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며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공동체와 사회 해체, 자연과 환경의 파괴를 감수하면서까지 문명의 발전을 받아들였습니다. 가족과 공동체, 사회와 국가의 보호를 받던 개인이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이전의 '사회(복지)국가'를 포기하고, 그래서 성공과 실패의 책임이 개인에게 돌려지는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도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평생에 걸쳐 다양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모든 관계가 단절된 1인가구의 출현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후대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함으로써 종의 번성을 거듭해온 인류 진화의 방식을 거부하는 세대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앞세대가 누렸던 것들 중에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3개에서 5개, 7개로 계속해서 늘어남에 따라, 무한대의 포기를 담을 수 있는 'N'을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을 노동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 여겼던 과학기술의 발전은 빛의 속도로 일자리를 줄였고, 그에 따라 '남아 돈다'는 뜻의 잉여를 넘어 '쓸모 없다'는 뜻의 비존재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처지로 내몰린 수많은 사회초년생들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저임금노동의 굴레에 갇혀버렸습니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도 아니고,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올랐던 청춘'은 고통과 좌절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자신의 앞세대인 청춘의 고통과 좌절을 지켜본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변한 꿈과 도전의 자리에 조숙한 현실인식과 타협의 선택들로 채웠습니다. 잘리지 않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돈을 벌 수 있는 편안한 직업을 찾는 것은 희망의 1순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태아 때부터 선행교육을 받아야 했던 이들이 무한히 반복되고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경쟁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미래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텔레비젼과 PC, 스마트폰 등에서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돌이나 운동선수를 동경하는 것도 그 이면에 자리한 수백만 명의 낙오자들이라는 압도적인 실패확률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높은 실패율은 어느 직업에서나 존재하는 세상이기에, 온몸을 성형하던 약물의 도움을 받던, 죽을 만큼 힘든 연습생(지망생)과 후보 생활을 넘길 수만 있다면 단시간 안에 평생을 즐기며 살 수 있는 목돈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박의 꿈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변형되고 뒤틀려진 것이지 아이들과 청소년의 생각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조)부모의 능력이 나머지 삶을 결정하는 현실에서 그나마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육체를 활용하는 것에서 탈출구를 찾는 것은 필연적 결과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삶의 시작에서부터 무한경쟁에 던져진 이들이 급증하는 정신질환(ADHD, 우을증, 공황증세)과 시도때도없이 찾아오는 자신과 타자를 향한 폭력성, 그 극한에 자리한 자살의 유혹에 빠지는 것에 비하면 그들의 선택은 치열한 생존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이들이 보았던 것들이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만 강조된 용산참사, 철저한 방관이 불러온 쌍용자동차해고노동자의 연이은 자살, 퇴임한 대통령에게 휘둘러졌던 광기 어린 폭력, 그들의 형제자매이자 친구와 선후배일 수도 있었던 250명의 단원고 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참사, 어느 곳에서나 자신을 노렸던 메르스대란 등이라면 자신에게 투영된 부모와 어른들의 꿈과 희망을 따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지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들이 보기에 성공한 삶의 또 다른 이름이 불의와 부정, 반칙과 특권이라면 바르고 착하고 정의로운 삶을 주문하는 기성세대란 지독한 모순과 거짓의 화산이자, 이룰 수 없는 허상을 행해 죽을 때까지 노오오오력 하라는 그 유명한 '꼰대'의 전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고 하면서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목록에는 전혀 좋아할 수 없는 것들만 가득하다면 차라리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연습이 우선됐을 수도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살 수 있게 됐지만, 가족과 사회와 국가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질을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나마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육체(적 재능)에 한가닥 희망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전에는 패배자나 사회부적응자로 취급됐던 외톨이라는 것도 사이버세상에서는 무한대의 네트워크를 통해 삶의 조각조각을 풀어내는 방법으로 한 생을 보낼 수 있는 (그들 나름대로는) 괜찮은 선택이 됐습니다. 





갈수록 시장이 좁아지고, 경쟁이 과열돼 '짧은 활동과 그것보다 긴 휴식기'가 되풀이됨에 따라 소녀시대나 동방신기, 빅뱅과 슈주, 2NE1과 엑소 같은 넘사벽의 성공을 거두는 것들이 힘들어지는 것을 알면서도ㅡ홍수를 이루던 오디션 프로그램이 'K-pop스타'를 빼면, 다양해졌지만 고만고만한 것들로 재편된 것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ㅡ끝없이 아이돌그룹이 배출되고 퇴출되는 과정은 (기형적인 인구구조와 시장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김연아와 박지성, 박찬호와 박세리, 박인비 같은 대박을 터트리는 것(손홍민과 손연재, 류현진과 박병호, 강정호와 기성용, 김효주와 김세영과 장하나, 이승우와 백승희 등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제외)도 어려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선택이 불가능해진 청춘에 접어들기 전까지 육체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는 10대의 선택은 쉽게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맞선 부모들의 전통적인 압박도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통계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자신만의 시공간에서 빛의 속도로 끊임없이 배회하는 '떠다니는 섬'으로서의 10대의 등장이란 (다음 글에서 다룰) 무한한 진보가 가능할 것이라는 (1%의 희망 때문에 99%의 절망을 기꺼이 감내하도록 만들었던)낙관론적 세계관의 16세기에 잉태된 필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선진국들이 400년 이상이 걸린 (변증법적) 진보의 과정을 단 70년 만에 파시즘적 속도로 이룩한 압축성장에 내던져진 대한민국의 10대에게는 더더욱.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catlover8 2016.03.01 05:14

    아고라 경제방에 이번 더민주의 필리버스터 중단에 관한 제 생각을 담은 장문의 글을 올렸습니다. 저는 도령님처럼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어짜피 많은 사람들이 읽을 건 아니지만, 그냥 답답해서 한 번 올려봤습니다.

    저는 아고라를 2년전에 처음 알게 됐는데, 정말 너무 난잡해서 처음 들어가 봤을 때 경악했었거든요. 그래서 글을 거의 올리지 않는데, 아무튼 혹시 관심 있으시면 읽어보세요. 닉네임 catlover8으로 찾으시면 되구요. 나중에 도령님 생각도 한 번 듣고 싶군요. 참으로 착찹한 저녁입니다.

    • 늙은도령 2016.03.01 05:12 신고

      알겠습니다.
      오늘 피로해서 10시가 넘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필리버스터를 중단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4일 전에 썼던 그대로입니다.
      님의 글을 읽고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 글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6.03.01 08:25 신고

    꿈을 잃어버린 10대들입니다

    그 잃어버린 꿈을 찾아줄,되살려줄 의무가 기성세대들에게
    있습니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

    • 늙은도령 2016.03.01 09:16 신고

      세상을 바꾸려면 압도적인 정치력이 있어야 합니다.
      세계화라는 것이 정치의 역할을 최소화시켰지만, 국민의 지지가 높으면 얼마든지 체제를 바꿀 수 있습니다.

  3. ON ALL 2016.04.10 16:51

    매번 좋은 글들을 다방면에 걸쳐 올리고 계시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제 생각이 미치는 영역이 턱없이 좁기 때문에 본문을 몇 부분 인용하고 싶습니다. 인용한 후에는 출처를 남기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빠른 이동(시간)을 통해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 현대의 권력이 되면서 특정 지역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 수많은 중하위층 사람들은 개인으로서의 삶이 뿌리 채 흔들리는 위험에 처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짐으로서 돈이 없으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현실에서 직업을 찾아 전국을 전전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런 직업의 이동성은 가족의 해체만이 아니라 결혼의 유무, 주거의 형태, 자녀의 교육 등에서 연쇄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탄생부터 경쟁력을 지니게 된 개인(흔히 1%라 한다)은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어 모든 면에서 자유를 누리며, 상시적인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중하위(전체 인구의 90% 정도)에 위치한 개인들은 직업 선택의 자유도 누릴 수 없을 뿐더러, 언제 단행될지 모르는 구조조정(노동유연화)에 상시적인 해고와 실업의 스트레스에 놓이게 된다. 선진국이라고 해도 경쟁의 정도가 심할수록 사회적 스트레스 지수가 높게 나오고 행복지수는 낮게 나온다.


 

                                         <불평등의 대가>의 예고편에서 캡처

 


미셀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특징이 개인으로 하여금 '위험을 등지고 사는 삶'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소득을 예상할 수 없는 개인들은 늘 움직일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가볍게 만들어 두어야 한다. 저축이나 보험 등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보편화되고 있다.

 

 

특히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는 것은 가장 위험한 것으로 불확실한 아주 짧은 미래의 습격으로부터 무방비상태에 놓이게 된다. 모든 개인은 '다음 번 통고가 있을 때까지만 유효한' 상태에서 직업을 유지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태에 만족할 경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문자메시지나 메일의 형태로 도착해 있는 해고통보에 어떠한 대처도 할 수 없다. 개인은 아무리 소비에 매달려도 불안하고, 만족을 하려고 해도 불안한 마음에 만족은 소비를 할수록 멀어져 간다. 

 

 

직업이 안정된 시대의 개인은 내일을 위해서 오늘의 만족을 늦출 수 있었지만, 소비 중독과 소비지상주의 사회에서는 아예 만족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오늘의 사치품을 내일의 필수품으로 만드는 일만 중요하다. 이는 무거운 경제의 시대에서도 있었던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재의 상황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성 때문에 과거와는 명백히 다르다. 바우만은 새로운 현대성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인 《액체근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밟는 길에 끝이 있다는 믿음, 역사적 변화에 획득 가능한 목적인이 있고 미래의 어느 날, 내년이든 다음에 올 지복천년에서든 완벽한 상태, 살기 좋은 어떤 사회, 이루어질 것이라고 가정되던 면면의 전부 혹은 일부가 실현된,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가 올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는 환상)이 오늘날 점차 붕괴되고 급속히 기울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19세기에서 20세기 중후반까지 좌와 우 모두는 그들이 주장하는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파는 애덤 스미스가 말한 수요와 공급이 확고한 균형을 이루는 완전한 자유방임의 시장경제가 모든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 것이라 믿었다. 좌파는 칼 마르크스가 말한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져 모든 우연과 분쟁, 불명확함이 사라진 자유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 믿었다.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은 좌우가 동일하게 희망했다. 

 


                                            디스토피아ㅡ설국열차에서 인용


 

하지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좌우의 믿음과 희망도 진보와 보수의 전망과 주장도 모두 다 틀렸다. 마르크스가 예언한 것처럼 견고한 것은 녹아내렸지만, 그것이 기화돼 허공 중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용암처럼 녹아 있는 액체 상태로 접어들었다. 어떤 것도 녹여버릴 수 있고 어디에나 스며들 수 있기에 더 위험해졌고 더 불확실해졌고 더 막강해졌다. 고체의 견고함은 무너뜨릴 수 있지만 액체는 어떤 힘에도 전체를 유지한 채 자유자재로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좌우의 꿈을 완전히 뭉개버린 이런 체제의 액체화는 산업사회가 탄생한 시기부터, 신자유주의가 영국과 미국,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후부터는 되돌릴 수 없는 필연의 과정이었다. 과학기술과 첨단 정보통신기기의 발전으로 공간을 압축하는 시간의 우위가 확고해지면서 자본의 입장에서 견고한 체제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사라졌다. 무거운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세워졌던 게임의 룰이 더 이상 유효하지도 않았고, 불편하기만 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변화는 근대화의 과제와 책임의 규칙이 폐지되고 사적인 것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전체 인간 종의 집단적인 자질이자 자산인 인간의 이성으로 수행해야 할 일로 여겨졌던 것들이 개인 차원의 과감성과 정력에 맡겨져 분해(개별화)되고 개인적 관리와 개인적 재능과 수완의 집행 영역으로 남겨졌다.  

 

 

 

공동체의 행복과 풍요를 지탱하던 사회의 역할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개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개인의 자기 권리 주장은 강해졌지만, 이는 자유의 과잉과 함께 책임의 개인화를 공고히 했다. 이제는 모든 개인이 액체화된 세상의 불확실성에 맞서 홀로 싸워야 하고, 실패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직업의 이동성 확대는 공동체와 사회의 근간인 가족의 해체를 불러왔기 때문에 사회에 진입한 개인은 모든 결정과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경영의 신으로 칭송받던 피터 드리커는 "더 이상의 사회적 구제는 없다"고 선언했고, 마거릿 대처는 한술 더 떠 "사회 같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세계 최고의 부자들이 "공짜 점심은 없다"며 기반이 해체된 개인들에게 무한경쟁이 초래하는 불확실성의 책임을 떠넘겼다. "사회적으로 위험과 모순은 끊임없이 생겨나는데 그것들을 해결할 의무와 필요는 계속 개인 차원의 문제가 되어 갔다."  

  


                                                   일본 제1원전 폭발


 

이런 위험과 책임의 개인화는 공동체의 해체와 사회의 몰락을 부추겼고, 사회적 연대의 기초가 되는 유사한 고충을 토로하고 개선하거나 구제받을 방법이 사라졌다. 개인들이 느끼는 고충는 "전부 더하여 공동이 대의명분의 합으로 이끌어가지도 못한다." 산재하는 고충은 다른 개인들도 똑같은 고충에 시달리면서도 홀로 맞서고 있다는 잔혹한 동화만 들려줄 뿐이다. 이로써 력과 자본에 대항하는 시민으로서의 연대는 불가능해졌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공공의 힘이 가져다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희망할 수 있는 유용한 것은 두 가지 뿐인데, 그 하나는 개개인이 자기 방식대로 살 수 있도록 인권을 지켜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것이 평화 속에서ㅡ실제 범죄자이거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강도나 성도착자, 거지, 그 밖의 다른 불쾌하고 유해한 이방인들이 거리를 활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통해 개인의 신체와 재산의 안녕을 수호해줌으로써ㅡ추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적의 힘이 사라지자 사적인 것들이 공적 공간을 점령하게 되었고, 공적 이익은 사적 이익으로 대체됨에 따라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세월호참사도 이런 과정이 심화되면서 일어난 비극이다. 인간의 생명이나 존엄성은 사적 이익에 도움이 되는 선에서만 가치를 지닌다. 수많은 인재와 산업재해가 발생해도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취해지지 않고 해당 사고를 빨리 수습하기 위해 보상문제로 넘어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근대의 모든 진보가 정치와 경제 권력을 독점한 중심부가 주변부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이었듯이, 근대이성이 탄생시킨 '액체근대'라는 현대성은 무한한 진보는커녕 부정적 세계화를 추동하는 세력과 집단에게 무한대의 승자독식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세월호도 일본에서 폐기 처분될 운명이었으나 청해진해운으로 대표되는 이익집단에 의해 수입됐고, 정경유착을 동원한 규제 완화를 통해 위험천만한 증축을 감행할 수 있었다.



                                                   다음이미지에서 인용



(사고 나는 시점만 남아 있었던 세월호처럼) '무거운 자본주의' 호에 올라탔던 승객들은 선장의 갑판 위에 오를 수 있는 선택받은 일부 선원들이 목적지로 배를 몰고 갈 것이라 믿었다(이것이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승객들은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진, 통로마다 큼지막한 글자로 내걸린 규칙들을 익히고 준수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써도 되었다...반면 '가벼운 자본주의' 항공기에 탄 승객들은, 조종실이 텅 비어 있는 상황에서, 비행기가 어디로 날아가고 어디에 착륙하며 누가 공황을 선택하는지, 또한 도착할 때까지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규정이라는 것이 있기도 한 것인지 등등의 정보를 '자동운항'이라고 적힌 정체 모를 블랙박스로부터 얻을 방도가 전혀 없다는 공포를 경험할 것이다.  



이런 불확실성이 초래한 공포에 짓눌려 시민의 연대의식은 초라하게 찌그러들었고, 사회의 점진적인 해체를 불러온 위험의 개인화는 자본과 노동이 적대적 공생을 유지할 수 있었던 중후장대한 무거운 경제에서 빛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자본을 풀어주었다. 이렇게 노동에서 자유로워진 자본은 국가라는 경계 안에 노동을 남겨둔 채 값싼 노동력을 찾아 국경을 넘나들며 경박단소한 가벼운 경제로 넘어갈 수 있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유동하는 공포'가 바로 이것이다.


 

세월호참사는 《액체근대》의 도래로 인류의 모든 삶과 관계에 스며든 불확실성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이란 《유동하는 공포》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됨에 따라 공적 영역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된다. 거대한 심연에 갇힌 개개인은 과잉 소비를 통해 이런 공포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게 된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도 이웃이란 직업과 자녀 교육을 위해 잠시 머물다 가는 이방인들로 보일 뿐이어서 더 이상 스위트홈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타인이 유동하는 공포로서 다가온다. 



이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소비 중독과 소비지상주의를 보편적인 현상으로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공적 영역의 사적인 것에 의한 식민지화와, 공적 이익을 다루었던 정치의 실종 및 힘겨운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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