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연재를 하다 중단한 상태인 '늙은도령의 눈으로 본 근현대사 비판'은 인류 문명의 발전사가 자연과의 공생을 벗어난 순간부터 파시즘적 속도로 발전해왔지만, 그 대가로 잃은 것은 자연의 파괴만이 아니라 인류마저도 그 희생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연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통곡부터 하리라'라는 유럽의 속담만으로는 하늘을 향해 우뚝 쏫은 마천루 속에서 쓰레기로 버려지는 인간의 초라함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나마 인류는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문명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며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공동체와 사회 해체, 자연과 환경의 파괴를 감수하면서까지 문명의 발전을 받아들였습니다. 가족과 공동체, 사회와 국가의 보호를 받던 개인이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이전의 '사회(복지)국가'를 포기하고, 그래서 성공과 실패의 책임이 개인에게 돌려지는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도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평생에 걸쳐 다양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모든 관계가 단절된 1인가구의 출현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후대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함으로써 종의 번성을 거듭해온 인류 진화의 방식을 거부하는 세대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앞세대가 누렸던 것들 중에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3개에서 5개, 7개로 계속해서 늘어남에 따라, 무한대의 포기를 담을 수 있는 'N'을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을 노동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 여겼던 과학기술의 발전은 빛의 속도로 일자리를 줄였고, 그에 따라 '남아 돈다'는 뜻의 잉여를 넘어 '쓸모 없다'는 뜻의 비존재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처지로 내몰린 수많은 사회초년생들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저임금노동의 굴레에 갇혀버렸습니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도 아니고,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올랐던 청춘'은 고통과 좌절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자신의 앞세대인 청춘의 고통과 좌절을 지켜본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변한 꿈과 도전의 자리에 조숙한 현실인식과 타협의 선택들로 채웠습니다. 잘리지 않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돈을 벌 수 있는 편안한 직업을 찾는 것은 희망의 1순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태아 때부터 선행교육을 받아야 했던 이들이 무한히 반복되고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경쟁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미래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텔레비젼과 PC, 스마트폰 등에서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돌이나 운동선수를 동경하는 것도 그 이면에 자리한 수백만 명의 낙오자들이라는 압도적인 실패확률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높은 실패율은 어느 직업에서나 존재하는 세상이기에, 온몸을 성형하던 약물의 도움을 받던, 죽을 만큼 힘든 연습생(지망생)과 후보 생활을 넘길 수만 있다면 단시간 안에 평생을 즐기며 살 수 있는 목돈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박의 꿈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변형되고 뒤틀려진 것이지 아이들과 청소년의 생각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조)부모의 능력이 나머지 삶을 결정하는 현실에서 그나마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육체를 활용하는 것에서 탈출구를 찾는 것은 필연적 결과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삶의 시작에서부터 무한경쟁에 던져진 이들이 급증하는 정신질환(ADHD, 우을증, 공황증세)과 시도때도없이 찾아오는 자신과 타자를 향한 폭력성, 그 극한에 자리한 자살의 유혹에 빠지는 것에 비하면 그들의 선택은 치열한 생존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이들이 보았던 것들이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만 강조된 용산참사, 철저한 방관이 불러온 쌍용자동차해고노동자의 연이은 자살, 퇴임한 대통령에게 휘둘러졌던 광기 어린 폭력, 그들의 형제자매이자 친구와 선후배일 수도 있었던 250명의 단원고 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참사, 어느 곳에서나 자신을 노렸던 메르스대란 등이라면 자신에게 투영된 부모와 어른들의 꿈과 희망을 따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지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들이 보기에 성공한 삶의 또 다른 이름이 불의와 부정, 반칙과 특권이라면 바르고 착하고 정의로운 삶을 주문하는 기성세대란 지독한 모순과 거짓의 화산이자, 이룰 수 없는 허상을 행해 죽을 때까지 노오오오력 하라는 그 유명한 '꼰대'의 전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고 하면서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목록에는 전혀 좋아할 수 없는 것들만 가득하다면 차라리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연습이 우선됐을 수도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살 수 있게 됐지만, 가족과 사회와 국가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질을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나마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육체(적 재능)에 한가닥 희망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전에는 패배자나 사회부적응자로 취급됐던 외톨이라는 것도 사이버세상에서는 무한대의 네트워크를 통해 삶의 조각조각을 풀어내는 방법으로 한 생을 보낼 수 있는 (그들 나름대로는) 괜찮은 선택이 됐습니다. 





갈수록 시장이 좁아지고, 경쟁이 과열돼 '짧은 활동과 그것보다 긴 휴식기'가 되풀이됨에 따라 소녀시대나 동방신기, 빅뱅과 슈주, 2NE1과 엑소 같은 넘사벽의 성공을 거두는 것들이 힘들어지는 것을 알면서도ㅡ홍수를 이루던 오디션 프로그램이 'K-pop스타'를 빼면, 다양해졌지만 고만고만한 것들로 재편된 것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ㅡ끝없이 아이돌그룹이 배출되고 퇴출되는 과정은 (기형적인 인구구조와 시장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김연아와 박지성, 박찬호와 박세리, 박인비 같은 대박을 터트리는 것(손홍민과 손연재, 류현진과 박병호, 강정호와 기성용, 김효주와 김세영과 장하나, 이승우와 백승희 등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제외)도 어려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선택이 불가능해진 청춘에 접어들기 전까지 육체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는 10대의 선택은 쉽게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맞선 부모들의 전통적인 압박도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통계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자신만의 시공간에서 빛의 속도로 끊임없이 배회하는 '떠다니는 섬'으로서의 10대의 등장이란 (다음 글에서 다룰) 무한한 진보가 가능할 것이라는 (1%의 희망 때문에 99%의 절망을 기꺼이 감내하도록 만들었던)낙관론적 세계관의 16세기에 잉태된 필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선진국들이 400년 이상이 걸린 (변증법적) 진보의 과정을 단 70년 만에 파시즘적 속도로 이룩한 압축성장에 내던져진 대한민국의 10대에게는 더더욱.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catlover8 2016.03.01 05:14

    아고라 경제방에 이번 더민주의 필리버스터 중단에 관한 제 생각을 담은 장문의 글을 올렸습니다. 저는 도령님처럼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어짜피 많은 사람들이 읽을 건 아니지만, 그냥 답답해서 한 번 올려봤습니다.

    저는 아고라를 2년전에 처음 알게 됐는데, 정말 너무 난잡해서 처음 들어가 봤을 때 경악했었거든요. 그래서 글을 거의 올리지 않는데, 아무튼 혹시 관심 있으시면 읽어보세요. 닉네임 catlover8으로 찾으시면 되구요. 나중에 도령님 생각도 한 번 듣고 싶군요. 참으로 착찹한 저녁입니다.

    • 늙은도령 2016.03.01 05:12 신고

      알겠습니다.
      오늘 피로해서 10시가 넘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필리버스터를 중단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4일 전에 썼던 그대로입니다.
      님의 글을 읽고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 글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6.03.01 08:25 신고

    꿈을 잃어버린 10대들입니다

    그 잃어버린 꿈을 찾아줄,되살려줄 의무가 기성세대들에게
    있습니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

    • 늙은도령 2016.03.01 09:16 신고

      세상을 바꾸려면 압도적인 정치력이 있어야 합니다.
      세계화라는 것이 정치의 역할을 최소화시켰지만, 국민의 지지가 높으면 얼마든지 체제를 바꿀 수 있습니다.

  3. ON ALL 2016.04.10 16:51

    매번 좋은 글들을 다방면에 걸쳐 올리고 계시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제 생각이 미치는 영역이 턱없이 좁기 때문에 본문을 몇 부분 인용하고 싶습니다. 인용한 후에는 출처를 남기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매일같이 자살만 생각하는 나날이 흘러갔습니다. 처음에는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L전자에 대한 원망이 강했으나, 갈수록 그것에 대비하지 못한 저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정신적 고통이 더욱 컸습니다. 직원들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과 끝까지 저를 밀어주었던 친구들의 도움에 아무런 화답도 못한 것들이 저를 끝없는 회한의 고통 속으로 밀어넣었습니다.  



그렇게 나약해진 정신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사업 실패에 대한 자책은 일상의 모든 것들에 스며선 견고하게 자리 잡아 끈질기게 저를 괴롭혔습니다. 가족과의 눈 맞춤도 힘이 들었습니다. 형과 동생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살 곳은 마련했지만, 유별나게 성공한 사람이 많은 제 주변의 상황이 저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장애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자격지심이 집요할 정도로 저를 괴롭혔습니다. 



사업 실패에 따른 온갖 병으로 제 자신조차 감당하기 힘들었는데도, 저는 병을 극복하고 재기에 성공해야 하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가족과 친구들의 따뜻한 위로의 말조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정신이 병들면 어떤 위로의 말도 차갑거나 비릿하게 들리는 모양입니다. 보고 듣는 모든 것에 삐딱한 경사가 생기고, 자책은 내적인 분노와 의심으로 영혼을 병들게 했습니다.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삶의 거의 모든 것에 긍정적이었던 제가 하루하루 폐쇄적이고 음울하며 적개심 강한 병든 괴물로 변해갔습니다. 제 안의 수많은 제가 수시로 생각의 주인이 돼 온갖 광기의 검들을 휘둘렀고, 육신의 고통과 감정의 너울에 따라 냉기를 퍼붇다가 용암처럼 튀어올라 저를 갉아먹었고, 극단으로 몰아쳤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피해를 준 너는 살 가치도 없어.. 이 정도의 호사가 너에게 가당키나 하단 말이냐.. 지금이라도 결단을 내려라.. 행동으로 너의 죄값을 치러라.. 가만히 있어도 떠올라 무섭게 저를 몰아치는 생각, 생각들.. 저는 생각한다는 그 자체가 너무나 힘겹고 괴로웠습니다. 차라리 생각이 멈추기나 하면 육체의 고통하고만 싸우면 될 것 같았습니다.   

 

 

용광로처럼 들끓는 자책의 생각들 속으로는 회한이 참회로, 울분이 분노로, 저항이 광기로, 자괴가 자학으로 넘나들며 제가 제에게 묻고 제가 대답하고 회피하는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제게 허락된 몇 평의 공간마저 저를 숨막힐 정도로 조여왔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닌, 하루하루 죽어가는 날들이 쌓여가기를 몇 달을 넘어 몇 년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정신의 고통이 커갈수록 영혼은 어둠의 핵심으로 빨려 들어갔으며, 그것을 인지할 때마다ㅡ언제나 인지했지만ㅡ한 가닥 가느다란 존재의 끈마저 놓고 싶었습니다. 그때쯤부터, 숨을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워진 날카롭고 끈질긴 육체의 고통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정신적 갈등과 영혼의 도피를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육체적 고통의 크기가 커가는 만큼 정신적 방황은 줄어들었지만, 제가 거처할 공간이 갈수록 좁아드는 느낌에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육체와 정신에 가해지는 압박이 커짐에 따라 수시로 발생하는 공황증세가 극도로 활성화된 죽음의 공포를 세포 하나하나, 신경 하나하나마다 독약처럼 스며들게 만들었습니다. 숨 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건강이 나빠질수록, 체력이 고갈될수록 제가 제어하지도 방어하지도 못할 상황에 대한 공포가, 저를 짓누르는 죽음에 대한 극한의 공포ㅡ매일같이 자살을 생각했음에도ㅡ로 이어졌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공황증세가 저를 극도로 무력화시켰고, 매일같이 갱신되는 자괴감에 빠져들게 됐습니다. 그것은 건강이 나빠질수록 나이가 들수록 더욱 악화될 뿐, 회복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도 없음을 의미했습니다. 육체와 정신이 주는 극도의 고통과 공포에 저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삶의 모든 것으로부터 무장해제된 제가, 살아서 머물 수 있는 참회와 안식의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다는 증거만 쌓여갔습니다. 



1시간을 버티면 그 다음의 1시간을 버텨낼 수 있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시간도 극한의 고통을 동반하면 얼마든지 쌓일 수 있는 존재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정신적 고통이란 언어의 장난이자 건강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사치에 불과했습니다. 육체가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면 정신이란 한낱 장신구에 불과했습니다. 





살아 숨쉬는 모든 순간이 괴로웠습니다. 당연히 생각의 지평은 좁아졌고, 의지의 영역이란 갈수록 줄어드는 공간의 압박과 시간의 축적에 최후의 수단이란 탈출구를 강요했습니다. 이제 저에게 남아 있는 선택이란 단 하나뿐임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저를 설득했고, 이 질긴 육체적 고통에서, 모진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삶이 주는 고통의 굴레가 커질수록, 가상의 죽음이 전해주는 그 악마적 쾌락만 무성하게 피어올랐습니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육체적 고통에 잠들기조차도 힘이 들었습니다. 최후의 선택까지 버티려면 항우울제와 향정신성 약물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단 1분도 잠들 수 없었습니다. 다량의 항우울제와 신경성 수면제가 저에게는 유일한 탈출구이자 안식처였습니다. 그렇게 매일같이 약물에 의존해 잠이들었습니다.



헌데 말입니다, 다량의 항우울제와 신경성 수면제를 먹고 난 다음 긴긴 잠에서 깨어나면, 아직 고통에 대한 육체적 메커니즘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1분여 정도의 시간 동안만ㅡ신경이 온갖 병들이 만들어내는 통증을 뇌에 전달하기 전까지 1분여의 시간만 저는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달콤함이란 내게 주어진 유일한 안식의 시간이자, 어떻게든 벌레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의 전부였습니다. 저는 일종의 마약중독자처럼 항우울제와 신경성 수면제의 노예로 전락해갔습니다.

 

 

저는 악마에게 기도했습니다. 부디 가족도 저를 포기해주기를.. 기억의 단편에서라도 저를 지워가기를.. 그렇게 또 몇 년이 흐르자 거의 매시간마다 울려대던 핸드폰도 잠잠했졌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저의 안부를 묻는 전화도 점차 줄어들어갔고, 마침내 저는 핸드폰을 해지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세상을 연결해주던 유일한 매체인 인터넷과 신문도 끊었습니다. 저는 세상과 연결된 모든 것들을 하나씩 잘라나갔습니다.



부디 저를 기억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저의 존재를 잊어주기를.. 저라는 인간이 이땅에 태어나지도 않은 존재였다는 것처럼 잊혀지기를.. 저는 기도하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나씩 지옥으로의 떠남을 준비했습니다. 억지로라도 세상을 부정해야 했습니다. 저에게 세상이 언제 자비로웠던 적이 있었던가? 인간의 멍에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존재했던 자리마저 허용되지 않는 냉정한 현실과 갈수록 늘어나는 약물 뿐이라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저에게 남은 것이란 이런 죽음보다 못한 삶의 비루함 뿐이었습니다. 저는 꿈꿨습니다. 처음에는 가장 극적인 죽음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것조차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만 더욱더 강해졌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남긴 것이 실패와 좌절에 대한 것들뿐인데.. 가장 극적인 죽음이라니! 가당치도 않을 일이었습니다. 초라하게 떠나자, 누구의 기억 속에서도 남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할 수 있다면 제가 이 세상에 살았다는 몇 조각의 흔적마저 지우고 싶었습니다.


 

제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죽음 중 가장 초라한 죽음, 컴퓨터 자판의 딜리트 키만 누르면 이땅에 존재했다는 모든 흔적들이 한 순간에 모두 사라져버리는 그런 삭제되는 죽음을 떠올려 봤습니다. 그렇게 매일같이 죽음을 떠올리고 떠올려 봤는데.. 끝내 한 사람의 얼굴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어머님, 제 삶에서 손을 뻗으면 언제나 그만큼의 거리에 있었던 어머님의 얼굴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한 발짝도 앞으로도 나갈 수 없었고, 뒤로도 물러날 수 없었습니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 갇힌 채, 살아 있으나 주검만도 못한 육체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고, 죽지 못했기에 단 한 순간도 휴식할 수 없었던 생각의 고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완전히 갇힌 채 벌레 같은 몇 개월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싸움을 나 홀로 하고 있을 때, 어떤 매개물도 근거도 없이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대체 내가 뭘, 얼마나 잘못했는가? 난 정말 열심히 살았지 않았는가? 가능하면 죄짓지 않으려 했고, 나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멍에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지도 투정부리지도 않았는데, 왜 나는 이렇게 고통의 질곡 속에서 죽어가야 하는가? 나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봤고, 게다가 같은 장애인이지만 나처럼 살지 못하는 이들과 상대적인 약자들을 위해 사업에 뛰어든 것이 아닌가?

 

 

저는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그 최초의 순간이 생각나지 않지만, 저는 알고 싶었습니다. 대체 어디서부터 제 삶이 꼬였고 도저히 풀 수 없을 정도로 얽혀버렸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경쟁에서도 뒤쳐지지 않았던 제가 왜 이런 막다른 골목까지 밀려왔을까? 제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고, 그 잘못이 철저한 실패로 이어지는데 세상은 또 어떻게 작용했을까? 단지 장애인이라는 것만으로, 평균적 인간보다 체력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사회가 저 같은 인간에게는 상당히 닫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처참한 실패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저는 정말로 알고 싶었습니다. 제가 저에게 가장 초라한 죽음밖에는 허락하지 않았던 것에서, 그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과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자리한 지랄 같은 세상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저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저 알고 싶었습니다, 가장 초라한 죽음을 택하기 전에. 끝끝내 어머니의 얼굴을 지울 수 없다고 해도, 저는 알고나 죽고 싶었습니다. 



단지 그것뿐이었습니다,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단초가 된 것은(내가 다시 살게 된 이유ㅡ2)

  1. 진흙속의연꽃 2014.08.09 08:15

    참으로 눈물 나는 이야기 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겠지요. 단맛을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단맛을 느끼기 전에는 알 수 없듯이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보지만 당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글로서도 충분히 다가 옵니다.

    글의 말미에 극적인 반전이 보입니다. 그것은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마치 세월호 유가족들이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알고 싶다’고 목숨을 건 단식을 하는지에 대한 심정과 같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디 왜 이 사회가 잘 못 되었는지 모두 알려 주십시요.

    • 늙은도령 2014.08.09 19:44 신고

      네, 최대한 노력할 것입니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최대한 밝히기 위해 노력해야죠.
      권력에서 사람들이 자유로워지는 그날까지....

  2. 덕산 2014.08.12 13:25

    정말 눈물이 나옵니다.
    왜 늙은 도령님의 글에 진심과 애환이 스며들어 있는지 이 글을 통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 늙은도령 2014.08.12 16:44 신고

      글을 쓰는 자세의 문제입니다.
      정말로 글을 통해 자신을 담아내려면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도 용감해야 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제가 글을 쓰는 자세입니다.

  3. 태봉 2014.08.16 21:55

    님의 글을 보니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 직접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고통이 느껴집니다 그런다고 제가 얼마나 님의 고통을 알수나 있을까요? 그나저나 현재 님이 그 기간을 이겨내시고 제가 이렇게 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 늙은도령 2014.08.18 17:22 신고

      네, 그렇게 다시 살아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됐고, 님과도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4. hwang sy 2016.01.26 03:44

    살아야 하는 건 그 자체가 이유가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거니까요 ^^

    • 늙은도령 2016.01.26 04:58 신고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살아라, 살아라, 어떻게든 살아라.... 그러다 보면 살아내는 것이지요.

  5. 남순희 2016.01.27 08:02

    현재님이 장애인 이셨다니 ~
    그리고 병마의 고통에 시달리는 글을 읽으니 정말 마음 아프네요.
    어떻게든 극복 하셔야죠.

  6. 2018.06.11 04:39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8.06.11 19:47 신고

      저도 그런 길을 거쳐 여기까지 왔습니다.
      님이 능력을 발휘할 곳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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