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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없애버리려는 자만이 비평할 수 있다.
ㅡ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에서 인용
인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질서를 세우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기에, 모든 이들을 굴복시키고 배제시키는 완벽한 독재란 그 자신마저도 독재의 희생양으로 만든다. 자신의 세계를 제외하고는 모든 곳을 인간이 살 수 없는 사막으로 만드는 것은, 사막에 들어온 사람이나 사막을 떠나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오아시스마저도 마르게 하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그렇게도 강조했던 어떤 시작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곳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뿐이다. 카네티도 자신을 노예로 만들었던 칼 크라우스의 실체가 모든 존재를 죽이는 완벽한 독재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의 유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음과 같은 성찰과 함께.

나는 이때부터 개개의 인간에게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시켜주는 언어적 형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또한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또 그들의 말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충돌하여 튀어나가는 일종의 반동체라는 사실과 언어가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견해보다 더 큰 환상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상대방은 우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면 그는 더욱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외치면, 그들도 되받아 외친다. 이렇게 되면 문법 속에서 초라한 삶을 꾸려나가는 감탄사들이 언어를 지배하게 된다. 여기저기서 외침의 소리들이 마치 공처럼 이리저리 튀면서 지면에 떨어진다. 다른 사람들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란 거의 없고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그러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 아름답고, 추하고, 고상하고, 천박하고, 성스럽고, 속된 온갖 종류의 말들이 모두 이 떠들썩한 말들의 저수지로부터 끄집어내어 사용한다. 그리고는 그 말들이 알아들을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리고 완전히 다른 어떤 것, 즉 그것이 전에 의미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 될 때까지, 그 말들을 되풀이해서 사용한다. 언어의 왜곡은 창세기적 혼돈에까지 이른다.
결국 칼 크라우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들으려 했던 그의 자발성과는 달리, 그의 언어 사용은 그에게도, 그의 추종자에게도 어떤 자발성도 허용하지 않았다. 비트켄슈타인과 한나 아렌트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말과 언어는 경험의 산물이며 모든 사유의 출발점인데 칼 크라우스의 강연과 글들은 그 자체로는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어떤 추가적 경험도, 무궁무진한 사유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톱니바퀴처럼 맞아 떨어져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그의 세계는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릴 운명이었다.

칼 크라우스가 살아 있는 동안 이런 치명적 모순을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완벽한 독재를 꿈꾸는 절대 권력은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고자 하는 의지의 일반적인 감퇴현상”을 초래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면 어떤 권위도 누리지 못하고, 지속되는 어떤 질서도 세우지 못한다. 자기 것이 아닌 것으로 타인을 현혹하고 흥분상태로 만들어 자신의 추종자로 만드는 독재자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피지배자들은 자신만의 밀실에서도 독재자가 가하는 공포와 폭력에 압도당해 어떤 사유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에 노예나 가축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설사 독재자가 무엇을 이루었다 해도 남의 것을 차용해 끌어 모은 추종자의 에너지ㅡ자발적인 희생으로 포장지만 실제로는 착취당한 것ㅡ로 이룬 업적이기에, 그것은 단지 신기루일 뿐이다.
카네티의 고백성사는 이렇게 종결되는데, 그가 《말의 양심》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모든 창조의 근원인 사유의 자유가 사라지면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영원한 휴면상태인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노예였다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힘겹게 자유인으로 돌아온 카네티 같은 깨달음이 없으면 ‘모든 창작은 인식의 조급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필자를 현대의 쓰레기로 전락시킨 폭력적인 세계와 혼돈의 시대, 1%의 희망 때문에 99%의 절망을 감내해야하는(조셉 콘래드의 소설에서 인용) 운명을 이해하고자 시작한 모든 지적 여정이 칼 크라우스와 비슷한 필자도 이것이 두려웠다.

한 때 자살만 생각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 처했던 필자는 모든 지적 여정을 홀로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그 방향과 사유가 올바른지, 원하는 목표에 이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보니 수많은 분야의 책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한 마디로 내 지적 여정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잡식성 특징을 띠었다. 어떤 책을 읽다가 인용에 많이 나오는 책들을 구입해 읽었고, 신문에 나오는 신간들 중에서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들을 구입해 읽었다. 그 과정에서 나만의 세계가 구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나, 누구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기에 그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특히 카네티가 칼 크라우스에게 사로잡혔던 것처럼, 필자 역시 위대한 저자들에게 사로잡혀서 한 동안 그들의 세상에서 머물러 있어야 했다. 수많은 석학들의 사유와 성찰은 나에게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도록 만들었고, 지적 여정의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고, 서로 충돌하는 부분에서 극심한 혼란을 주었다. 필자가 몇 번 집필에 도전했다 접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인식의 조급함의 결과였고, 끝내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체 하던 일을 접어야 했다. 나는 석학들의 사유와 성찰을 내것으로 녹여내,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을 내놓기에는 준비가 부족했던 것이다.
P.S. 신경숙의 표절논란을 지켜보면서 더욱 참담했던 것은 그녀를 옹호하는 평론가들의 주장이 너무나 형편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작가들이 제대로 된 창작물을 내놓게 하려면 평론가가 제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평론으로 먹고 살기 힘든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론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다면 한국 문학은 발전할 수 없습니다. 작가와 평론가의 선순환적 구조가 구축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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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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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 90%,
희망
1896년에 이르면 국가가 가능하다면 법으로, 필요하다면 무력으로 노동자 파업을 분쇄할 태세가 되어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위협적인 대중운동이 전개되는 경우에는 양당제도가 한쪽 날개를 내밀어 운동을 에워싸고 운동의 생명력을 고갈시킬 준비가 돼 있었다, 아울러 계급적 분노를 국민적 단합이라는 구호의 물결 속에 익사시키는 수단인 애국주의가 늘 존재했다.
ㅡ 하워드 진의 《미국의 민중사 1》에서 인용
요즘처럼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평생을 살아왔다는 것이 부끄럽고 참담한 적이 없었습니다. 미국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식된 민주주의는 친일부역자, 토종 기득권과 산업계의 이익만 대변하고, 국민에게는 희생을 요구하는 애국심과 자유 및 인권을 제한하는 극단적인 반공만 강요하는, 소수를 위한 민주주의로 출발했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무책임하고 비민주적인 통치를 국민의 손으로 끝냈지만,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진행되기도 전에 권력욕의 화신인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아예 권위주의 독재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때부터 IMF 외환위기가 일어날 때까지 군부엘리트와 정경언유착에 의한 서민 착취가 일상화됐습니다.
어떨 때는 반공을 팔면서, 어떨 때는 민족을 팔면서, 어떨 대는 애국심을 팔면서 소수 특권층을 위한 경제성장과 권위주의적 통치를 통해 민주주의와 헌법상의 국민의 천부인권과 기본권마저 제한되기 일쑤였습니다. 부의 재분배를 뒤로 미루는 그런 반민주적 통치는 1997년의 외환위기로 본질적 한계에 직면했습니다.
헌데 외환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IMF 구제금융이었는데ㅡ아르헨티나와 인도네시아, 그리스처럼 국민에게 묻지도 않은 채 결정된 IMF 구제금융과 가혹한 구제금융 때문에 기득권의 부패와 비리를 걷어내기는커녕, 극소수의 특권층과 국제투기자본의 수중에 국가의 부를 넘겨주었습니다.

이후의 한국은 극단적 불평등과 최소한의 복지만 시행되는 최소 민주주의 국가로 전락했습니다. 무조건 ‘빨리 빨리’만 외치던 파시즘적 성장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참여정부조차 국가 차원의 안전망은 강화시켰지만 불평등을 완화하는데 실패했고, 좌파 신자유주의적 경제운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급성장한 시민단체도 외형의 발전만 이루었지, 정치적 영향력과 시민과의 연계 고리를 공고히 하는 내실을 다질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조중동을 필두로 한 특권층과 보수진영의 집요하고 압도적인 공격에 절차적 민주주의 이상의 것을 시도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수치상의 대한민국은 선진국입니다.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하면 대단히 성공한 신흥선진국입니다. 반면에 민주주의적 가치를 기준으로 재평가하면 대한민국은 특권층에 의한, 특권층을 위한, 특권층의 이익만 대변하는 껍데기 선진국에 불과합니다.

그 이상일 수 없는 속도로 사회와 가족이 해체되고 무너지는데 절대다수의 국민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양한 노조나 결사체, 조합형 공동체와 시민단체처럼, 하위 90%의 삶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도 법과 성장의 미명하에 철저하게 유린되고 있습니다.
언론의 또 다른 이름이 기레기이고, 지식인들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묵언수행 중이고, 종교는 반공과 특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국정원과 국정홍보처에 다름 아닙니다. IMF 구조조정 이후로는 하위 90%를 위한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원천차단된 상태입니다.
이제 경제특권층은 정부의 지원 하에 국경을 넘나들며 이익을 챙기고, 정치특권층과 브로커들은 기레기와 야만공권력, 차별적인 교육과 기독교 우파의 지원 하에 국내에서 이익을 챙기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과거사 청산과 평화통일의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졌습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 박정희의 잔재와 망령이 떠돌고 있고, 그의 딸인 박근혜의 독선과 아집, 무능력과 무책임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할 수 있는 저항이 비민주적 수단으로 전락한 선거밖에 없는 상황에서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대란의 진상규명은커녕 제2, 제3의 참극이 되풀이되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회법 개정안이 폐지되는 일련의 과정이 대한민국의 생얼입니다. 독재의 DNA를 물려받은 박근혜의 군주놀음에 여당은 자중지란에 빠지고, 야당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그리스 국민은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조차 못하는 실정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희망이 남아 있을까요? 저들의 대한민국에서 그 밖의 절대다수는 그저 들러리에 불과할 뿐일까요? 아베와의 정상회담을 위해 위안부 할머니와 강제징용자와 강제노역자들마저 저버린 특권층의 정치놀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정말로 희망을 희망하는 것조차 힘들어졌습니다. 박근혜의 몇 마디에 납작 엎드린 김무성의 여당이야 그렇다 해도, 혁신을 하겠다는 야당에서도 그 빌어먹을 1%의 희망이라도 가져볼 수 있는 얘기들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참혹한 하루의 반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저들의 패권놀음만 지켜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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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공공성은 정부를 통해서 국가로 조직화되므로 국가는 그 공무원의 모습과 같은 모습을 띤다. 그러므로 시민이 공무원을 지속해서 감시하고 비판할 때만 국가는 성실성과 유용성을 유지할 수 있다.
ㅡ 존 듀이의 《공공성과 그 문제들》에서 인용
고 노무현 대통령 부관참시와 공안정국 조성이 전공인 정치검찰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대통령의 푸들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성완종이 자살을 통해 자신의 정경유착 범죄를 고백했음에도 정치검찰은 대통령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수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정치검찰은 참여정부의 특별사면을 조사하라는 박근혜의 가이드라인에 맞춰 성완종 리스트에 올라있는 8명의 인물 중 친박(가장 패권주의적인 계파)이 아닌 홍문종과 이완구만 조사하고, 친박 실세 6명은 서면조사로 대신했습니다. 박근혜의 푸들이 주인의 대선자금을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김한길과 이인제 소환을 들러리로 한 노건평씨 소환은 이 땅의 검찰이 얼마나 정치적이고 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얼마나 적대적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신자유주의 우파정권이 위기에 몰리면 어김없이 노무현 부관참시를 들고 나오듯이 이제는 성완종 부관참시도 추가할 모양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특권을 누리는 집단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정치검찰입니다. 검사동일체라는 일제의 잔재를 그대로 이어받은 한국의 정치검찰(전체 검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은 그들의 존재목적마저 엿 바꿔먹은 최악의 이익집단이자, 정치를 망치고, 국민을 겁박하는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물론 신자유주의 우파정권이 승진과 정계진출을 당근으로 검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성완종 리스트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검찰의 모습은 국민이 아닌 살아있는 정권을 위해 봉사하는 이익집단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검찰과 정치검찰 사이에는 무엇으로도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민주주의의 토대와 근간마저 그 심연 속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이명박 자신이 실소유자임을 밝힌 BBK 수사와 내곡동 대통령사저 수사, 국정원 댓글사건 수가가 대표적인 예들입니다.
‘미스터 국보법’이자 공안 정국의 대가인 황교안이 총리에 오른 전후로 정치검찰의 행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들은 마치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의 최후의 보루인양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416연대를 압수수색하더니 이제는 노건평씨를 소환해 기소할 모양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황교안 같은 골수 공안검사들을 멀리한 이유의 정당성이 정치검찰의 행태에서 입증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검찰 수사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도 탄핵의 요건인데, 그것이 하늘의 명령인양 무조건 충성하는 검찰의 행태도 탄핵의 요건입니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 우파정권과 국가권력기관에 의해 어떻게 타락하고 부패하는지 매일같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또한 권력에 대한 국민의 감시가 소홀해지고 무력해질 때 어떤 정부도 사익을 추구하고 독재의 길로 접어들 수 있음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기레기의 대표주자인 TV조선에서는 정치검찰이 김한길과 노건평을 소환한 것이 성완종 리스트 특검을 주장하는 야당에 대한 일종의 경고 메시지라고 친절하게 해석까지 달아줍니다. 아예 독재를 깨놓고 할 테니 그리 알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정부와 권력기관의 사익 추구가 심해지면 공공성과 공통의 이익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이것이 민주주의국가에서 발생하는 모든 불평등의 근원이라는 것은 너무나 많은 관련 연구들이 말해줍니다. 이명박근혜 정부 7년6개월 동안 모든 분야에서 불평등과 차별이 급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완벽한 독재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정권을 잡은 집단이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을 이용할 때 모습을 드러냅니다. 대통령의 분노에 납작하게 엎드린 새누리당과 정치검찰의 행태가 바로 그러합니다. 여기에 정부의 제4부라 하는 기레기들의 일치된 합창까지 더해지면 그것이 완벽한 독재입니다.

미국 갤럽의 조사 결과 지난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웰빙 지수가 내전 상태인 이라크와 남수단보다 못한 전 세계 145개국 중 117위를 기록한 것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물질이 아닌 자유와 존엄이며, 차별받지 않는 평등입니다.
P.S. 새누리당 지도부의 반란이 박근혜의 성난 발언에 형편없이 무너진 것은 박근혜가 자신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향해 투표로 응징하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부동의 30%는 새누리당 고정지지층의 8~90%를 차지하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2015년의 대한민국에 독재의 DNA가 범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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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멀다 하고 갑질이 터져 나온다. 인류의 발전은 온갖 종류의 갑질과의 투쟁을 통해 획득한 인권의 발전이고 정치적 평등에 기초한 사회경제적 자유의 확대로 대변되는 역사다. 그것을 네 글자로 하면 ‘민주주의’다. 인간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우리는 부모, 지역, 사회, 국가 등을 선택해 태어날 수 없다) 때문에 불평등하게 세상에 나오지만, 침해불가능한 인권과 종으로서의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인류로서 발전해왔다.

오직 권위주의와 자본주의(두 개가 합쳐지면 신자유주의가 된다)만이 이런 발전을 거부한다. 둘의 공통점은 국가의 전체화하는 경향을 강화하면서 스스로의 입지를 늘리는데 있다. 독재의 원천인 권위주의는 침해불가능한 인권과 종으로서의 평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인권과 기본권의 제한과 제왕적 권력으로 이어지는 출생의 불평등이 권위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권위주의가 극에 이르면 독재나 전체주의가 된다. 박정희와 전두환처럼 지도자의 신격화가 독재의 전형이라면, 단 하나의 가치만 허용되는 것이 전체주의의 본성이다. 독재와 전체주의는 최고 지도자와의 거리와 사적 친분이 모든 권력의 원천이 되고, 법의 지배가 아닌 야만공권력에 의한 힘의 지배(법치주의란 가면을 쓴다)가 통치의 핵심이 된다.
비공식적 권위와 힘에 의한 통치는 필연적으로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통제와 억압, 감시와 처벌을 통해 인위적 차별과 태생적 특권을 강화시킨다. 우리가 말하는 온갖 종류의 정치사회적 갑질이 여기서 나온다. 정의와 공정 및 공평이라는 도덕적 가치는 힘과 차별의 정치에 억눌려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권위주의는 합당하지 못한 불평등과 반인륜적 차별 및 성공지상주의를 먹고 자란다. 합당한 권위란 세습되지도 않고, ‘주의’라는 경향과 규격화로 고착화되지도 않으며, 성공이 ‘1%의 노력과 99%의 운’으로 이루어진다는 에디슨의 성찰적 겸손도 부정하지 않는다.
최대의 이익과 부의 축적이 유일한 가치인 자본주의는 적자생존을 주장하기 때문에 불평등과 차별을 당연시 한다. 능력주의로 포장된 자본주의적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은 성공지상주의를 부추기며, 권력의 원천을 돈(의 축적)과 그것의 정치적 사용으로 한정해버린다. 자본주의가 정치의 역할(부와 기회의 재분배)을 축소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키우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음은 무한 탐욕과 정경유착의 신자유주의가 입증해주고 있다.
산업혁명 이래 인류의 근대현사는 민주주의의 강화와 확대만이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의 ‘파시즘적 폭주’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정반대의 길로 달려온 압축성장은 ‘파시즘적 속도’로 불평등과 차별을 키운다는 점에서 온갖 형태의 갑질로 현실화된다. 최악의 경우, 대통령의 본질이 독선과 아집, 불통과 반칙에 있다면, 그래서 자신을 무오류의 존재로 여기고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리면 최악의 갑질이 현실화된다.

이것이 극단에 이르면 모든 분야, 모든 직위, 모든 계층에서 갑질이 일상화된다.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약자를 향해 휘둘러진 구조조정, 용산참사와 싸용차해고노동자들의 자살 및 해방 이후 최대 참극로 기록된 세월호참사 같은 사회적 살인, 재벌의 특권의식이 드러난 땅콩 회항, 소비의 절대화가 만든 마트 모녀의 반인륜적 행태, 비정규직을 착취하는 열정페이, 노동유연화의 본질인 갑질해고, 기업만을 위한 장그래 방지법, 권력의 사유화인 비선실세 논란, 노동개악과 백남기씨에 가해진 공권력의 폭력 등등이 바로 이에 속한다.
광복 이후 70년이 흐른 지금 온갖 종류의 갑질이 난무하는 것은 빈곤 탈출을 앞세워 민주주의의 유예를 정당화한 압축성장의 폐해가 극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그 시절의 빈곤과 현재의 빈곤이 본질적으로 다름에도 박근혜 정부는 그 시절의 통치와 서민증세, 노동개악으로 이를 틀어막으려 하니 답이 없는 것이고, 콩가루 청와대가 국정난맥상의 근원지가 될 수밖에 없다. 사상 유례없는 슈퍼울트라 어메이징한 갑질이 이렇게 탄생한다.
물론 박근혜 정부의 책임을 묻기에는 이명박 정부의 책임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독재 유전자를 무한복제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의 통치 행태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압축성장과 갑질공화국은 동전의 양면이자, 성장과 분배의 불균형이자, 반칙과 특권의 근원인데 박근혜는 이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명박의 슈퍼울트라 갑질보다 몇 수나 위에 자리한다.

따라서 압축성장의 결과인 부동산 거품과 IMF 환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벤처와 카드 거품이라는 3중고 속에서도 성장과 분배를 이루고, 반칙과 부패와 맞선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끝내 달성하지 못한 4대개혁입법 등에 갑질공화국을 풀어갈 수 있는 답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재명과 박원순의 복지실험이 성공해야 하는 이유도 이것에서 연유한다.
반칙과 특권, 부패와 비리가 없는 세상이란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다. 저녁이 있는 삶도 반칙과 특권이 없어야 가능하다. 위대한 정치경제학자인 슘페터가 처음 언급한 혁신적 파괴도 이럴 때만이 가능하며, 박근혜가 말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진정한 창조도 반성적 성찰을 미래에 투영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현재의 실천이 있어야 가능하다. 박근혜와 청와대, 새누리당에서는 이 세 가지 중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984,
긴급조치 1~9호,
대통령 모독죄,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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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
유신시대,
인터넷 명예훼손,
정치,
조지 오웰,
칼 슈미트,
파시즘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가 상례임을 가르쳐준다.
ㅡ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인용
박근혜 대통령의 작심발언이 있고 난 뒤에 유신시대를 방불케 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무려 40년 만에 대통령 모독죄가 부활하질 않나, 검찰은 빅 브라더를 자처해 공개된 장소라면 상시 감시를 하겠다고 하질 않나, 캐나다 교민의 시위를 거대한 차량으로 가로막지 않나, 민주주의를 뿌리 채 부정하는 일들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벌어지고 있습니다.

'독재란 국법이 정지된 곳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나치의 공법학자로 악명 높은 칼 슈미트가 《정치신학》이나 《독재론》 등을 통해 정립했고, 한국에서는 박정희의 유신헌법을 통해 구현됐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모독이 도를 넘었다는 발언이 나오자마자, 검찰이 놀라운 민첩성으로 인터넷 명예훼손 전담팀을 구성해 상시적 감시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헌데 검찰은 대통령에 대한 모독이 도를 넘는 기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치의 파시즘과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연구를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합법과 불법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독재는 압도적인 권위(공권력)에 의해 정치적 정당성을 얻기 때문에,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결정하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이고 명분화된 기준이 없으면, 통치자의 기분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될 수 있습니다. 통치자가 그건 코걸이야 하면 귀걸이도 코걸이가 됩니다. 통치자가 얼굴을 찡그리면 범죄가 되고, 얼굴을 붉힐 정도면 중죄가 됩니다. 박정희의 유신시절에 쏟아져 나온 긴급조치 1~9호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때는 시민이 세 명만 모여도 집시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박근혜가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을 때, 필자가 걱정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제가 박근혜 대 문재인의 대결이 박정희 대 노무현의 대결이라는 글을 썼을 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았지만, 사람은 아이로 태어나서 환경에 의해 길러진다는 것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님은 너무나 많은 사례들로 새삼스럽게 언급한다는 것이 창피할 정도입니다.

헌데 20세기도 아닌 21세기가 14년이나 흐른 지금에서 창피를 무릅써야 할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UN에서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한 날, 국내에서는 인권의 핵심 가치인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국가공권력에 의해 자행되고 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나오는 빅 브라더가 따로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김기춘 비서실장에서 황교안 법무부장관을 거쳐 김진태 검찰총장으로 이어지는 사정라인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나치의 살해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탄식이 생각납니다. 두 사람이 《계몽의 변증법》을 쓴 것도 그 탄식에서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예로부터 금지가 오히려 마약 같은 독극물로의 접근을 부추겼듯이 이론적 상상력의 차단은 정치적 광기에 길을 활짝 열어준다.
“마음에 드는 것은 허용된다”라는 말이 진리라면, 그 반대인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도 진리입니다. 근대의 민주주의가 탄생하던 순간부터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면 민주주의는 독재나 전체주의로 넘어간다고 했습니다. 어떠한 기준도 제시하지 않은 대통령의 발언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독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검찰은 ‘문제가 될 수 있는 글은 쓰지 않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찰의 이런 발언은 독재국가에서나 나올 법한 것입니다. 검찰의 발언대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글’이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된다면, 법치주의의 원리에 따라 검찰은 ‘문제가 될 수 있는 글’의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해야 합니다.

만일 검찰이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검찰의 발언이 문제가 되는 것’이어서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할 대상은 문제의 발언을 한 검찰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상위법인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주권재민과 제21조, 표현의 자유에 따라 검찰에게 요구합니다. 민주주의의 근간이자 헌법에 나와 있는 기본권을 제한하려면, 그 기준부터 제시해야 합니다.
검찰이 제시하는 기준이 민주주의와 헌법에 합당하면 그에 따라 글을 쓰면 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 법적 처벌을 받으면 됩니다. 또한 검찰이 기준이 헌법에 위배되면 헌재에 위헌여부를 묻는 소송을 제기하면 됩니다. 국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처벌하려면, 피의자의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문제가 있는 글의 기준’을 제시해야 합니다.
쓴다는 것, 쓸 것이 생겨 쓴다는 것이 내 모든 것이기에 아고라에 올리는 글을 쓰며 자체 검열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에도 반하고 제 양심에도 반합니다. 따라서 검찰에게 다시 한 번 요구합니다. ‘문제가 되는 글의 기준’을 제시하고, 최소한 민주적이고 헌법정신에 어긋나지 않은 선에서 기준의 실효성을 따질 수 있도록 법적용의 구체적 예들을 제시해주십시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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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성의 탄생7
이렇게 근대이성은 뉴턴역학에 의해 지독히도 단순화된 우주의 법칙을 지구의 법칙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거대한 체제의 견고함을 구축할 수 있었다. 동시에 문명의 지속성을 확신시키고, 시간의 발견과 궤를 같이하는 역사를 등장시킬 수 있었다. 근대이성이 탄생시킨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평등한 노동에 대한 소유와 자유(방임)의 상대적 우위, 끝없는 팽창의 대항개념으로 발생한 민족성과 영원한 투쟁을 유발하는 계급의식의 출현, 신을 끌어들인 로크의 소유개념(구획 짓기)과 스미스의 교환시장의 발견 등이 근대이성이 탄생시킨 중요한 목록들이다.
근대이성의 폭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유개념과 교환시장의 정립으로 독점적인 부의 축적과 과시적 소비를 통한 ‘구별 짓기’의 저급한 욕망, 일체의 것들을 해체한 포스트모더니즘, 모든 종교와 정치가 지닌 영향력을 다 합친 것과 거대해진 매스미디어의 발전, 이에 편승해 거의 모든 영역을 상업화하는데 성공한 소비지상주의의 확립까지 현대성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 근대이성은 인류의 문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베이컨과 데카르트
베이컨과 데카르트에 의해 그 모양을 드러낸 근대이성은 폭력적인 현대성으로 옷을 갈아입었을 뿐, 탄생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 21세기의 14년을 관통하며 인류 문명의 불확실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다. 플라톤과 헤겔, 고전물리학과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마르크스의 격문은 분업과 거대관료제의 등장으로 사유하는 인간에서 착취 받는 동물(고도의 숙련도 필요 없는 단순작업)로 전락한 노동을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했지만, 이는 산업사회의 발전단계에서 불확실성이 최대화되는 단계로 접어드는 시작에 불과했다.
노동과 적대적 공생을 유지했던 자본은 과학의 발전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노동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끊고 국경을 넘나들며 홀로 독주할 수 있게 됐지만, 노동은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노동의 경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더욱 열악한 조건으로 빠져들었다. 자본은 정규직 위주의 노동을 분해해서 비정규직과 임시직의 노동으로 격하시킴과 동시에 전업주부라는 것을 상류층의 전유물로 만들었다.
게다가 생산의 주체였던 노동이라는 것이,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자본의 일방적 우위로 하여 퇴근 이후에도 계속되는 무한대의 재생산을 강요받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와 가족간의 경계선이 무너졌고, 생산의 주체로서의 노동의 형태도 물질적인 것에서 비물질적인 것까지 확대됐다. 노동자에게는 사적인 공간이 사라져버린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가족 구성원이 자본의 이익을 위해 간접적인 노동의 역할까지 담당하게 됐다.
결국 모든 노동의 가치가 평등하다는 ‘노동가치설’은 노동자 뿐만 아니라, 노동에서 배제된 사람들까지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만드는데 이용되었다. 제대로 된 노동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잉여노동자들이 국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널려 있으니, 노동가치설은 무노동 무임금으로 대체되기에 이르렀다. 최근에 들어서는 유노동 무임금의 처지까지 내몰리는 가족 구성원들도 급속도로 늘어나는 추세며, 이는 정규직이라 해서 다를 것이 없다.
자본주의의 태생적 모순과 한계 때문에, 자본주의적 노동생산성이 최후에 이르는 지점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 ‘자유의 왕국’이 이루어진다고 예언한 마르크스의 과학적 추상화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무지와 정치와 문화, 매스미디어의 발전으로 전 지구적 지배 세력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낭만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으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전복을 꿈꾸는 노동자의 연대는 개별 사업장 내에서도 사라져 버린지 오래됐다.

푸코가 촘스키와의 대화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폭력적 혁명을 통해 집권을 하면, 오랜 기간 동안 탐욕의 질주를 거듭한 자본가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폭력의 악순환이 한 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걱정도 한낱 기우에 불과한 것으로 입증됐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과 《다중》, 《전복적 스피노자》 등을 통해, 네트워크처럼 집합했다 유령처럼 사라지는 다중ㅡ각자의 특이성을 인정하면서도 공통의 목적을 위해 연대하는ㅡ의 등장을 예견했지만 이 또한 마르크스에서 스피노자로 갈아탄 것 이상의 결과들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세계 노동자들의 연합은 부정적 세계화에 대한 반대시위로 되살아나는 듯했으나, 2001년 이후로는 분노한 사람들의 행진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전 세계적으로 점령운동의 붐을 일으켰던 2008년의 금융 대붕괴의 결말도 슈퍼리치의 배만 불려준 채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더 이상 게릴라전은 유효하지 않은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희망의 이름으로 절망만 쌓여가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마르크스의 위대한 분투는 한여름 밤의 꿈이었을 뿐, 영원히 도래할 수 없는 환상의 나라로 판명됐다. 그의 예언대로 자본주의적 진화의 본질적 모순 때문에 내부로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했지만, 그 속도가 너무 느렸고 분열된 틈새를 용접하고 부식된 부품을 가라치우며 보수하는 속도가 더욱 빨라 그의 예언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압축된, 또는 유동하는 액체 상태의 현대란 어디로 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 극도의 혼란과 공포만 양산하고 있다.
근대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헤친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스미스와 마르크스가 정반대에 위치한 경제학자가 아닌, 진행경로가 다를 뿐 목적지는 동일한 고전경제학자라는 사실을 밝혀냈고,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노동이 자본의 암묵적 동조자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학문적 업적에 그쳤을 뿐이었다.이것 때문에 언제나 중도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었고, ‘제3의 길’이라는 엉망진창의 이데올로기도 등장할 수 있었다.
개인과 단위별 노동생산성이 최고에 이르면,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접어든다는 생각이 한 동안 만연했고, 이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대체로 사실인 것은 지금도 변함없다. 스미스(와 리카도)의 최종 목적지는 시장에 들어오는 모든 제품과 서비스의 비교우위가 사라지기 때문에 완전시장을 통해 각각의 공급은 최적의 수여에 할당되는 평등사회로 접어든다는 것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르크스의 ‘자유의 왕국’도 같은 지점에 이르기 때문에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무계급사회’가 도래한다고 주장했으니, 이를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놓고 보면, 둘의 차이란 최종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자기 조절능력이 있는 자유 시장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모든 노동을 동등하게 평가하는 노동가치설을 폭력적으로 실현시켜 자본주의의 종말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느냐의 차이밖에 없다. 스미스(와 리카도와 맬서스)의 경우에는 노동착취와 잉여생산을 피할 수 없는 이기적인 인간의 합리적인 행위가 불러오는 부수적인 피해로 봤을 뿐이고, 노동의 가치를 시간의 절대화로 환원한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그런 부수적인 피해를 본질적인 절대악으로 봤기 때문에 혁명이 필요하다는 차이만 존재할 뿐이었다.
결국 어느 주장을 따르더라도 현대성에 자리 잡고 있는 근대이성의 잔재들은 영원한 진보의 과정에서 사라질 수 없는 침전물임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근대이성이 완벽하지도 않았고, 합리적이기보다는 비합리적이었다. 인간의 행동을 강제하는 이성의 정언명령은, 그것이 동시에 따라야만 하는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자본과 정치권력에 의해 얼마든지 왜곡되고 탈선될 수 있는 것이어서 칸트적 개념과 사유의 차원에서만 찬란하게 빛날 뿐이다.

이에 따라 세상은 현대성이 내포한 폭력에 의해 온갖 피해와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시장경제에 포함되는 순간부터 반이성적인 것들의 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쩌면 인류 문명의 대부분을 무효로 돌릴 만큼! 이제는 평범해진 바우만의 성찰처럼,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질됐다. 무한한 진보와 결과의 낙관론이 추동해낸 경제성장이란 불평등을 양산하는 이데올로기였으며, 그의 부작용으로 생긴 참혹한 결과들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며 온갖 종말적 문제들을 끝없이 축적하고 있다.
진보의 결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정치의 타락이나 몰락, 정부의 친시장적 경향이나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지목한다. 또한 자본의 노예로서 경제적 안락함에 함몰된 시민정신의 타락이나, 소비지상주의에 빠진 젊은이들의 물신화된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심지어 국가와 사회에 만연한 범죄와 비리와 부패에 분노하며 차라리 독재시절이 낫다고 주장하는 정신 나간 자들도 세계 곳곳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부자들은 늘어나는 재산을 감당하지 못해 온갖 첨단장비로 무장한 채 공권력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 자신의 성을 쌓았고, 별로 가진 것도 없는 사람들은 사회에 만연된 폭력과 공포(확인해 보면 자본과 언론이 과장한 것이지만)에 질려 앞선 세대들이 힘겹게 얻어낸 소중한 자유를 포기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초인 사회경제적 평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고리타분하고 폭력적인 좌파라며 가난한 자들까지 성을 내며 집단 린치를 가한다.
원본에 대한 탐독도 없고, 지적 성찰에 대한 부단한 노력도 없이, 검색과 인용으로 이루어진 부분적 진리를 가지고 보편적 허위를 진리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지식인들의 타락은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접게 만든다. 이들은 멘토와 힐링과 인문학 열풍에 편승해 혼란을 가중시키며 ‘탐욕의 삼위일체’를 강화하는 첨병역할로 빠져들고 있다. 또한 세계적 특권그룹과 그들에 기생해 있는 지역의 지배엘리트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에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실정이다.
이런 퇴행의 현상들은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OECD 회원국들에서 공히 일어나고 있다. 영원한 진보에 대한 믿음과 맹신이 불러온 이런 참혹한 결과는 낙수효과라는 지상 최대의 거짓말을 불변의 진리로 끌어올렸고, 특히 성장과 개발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최근에 들어 성장의 진정한 동력이라고 회자되고 있는 분수효과ㅡ중하위층의 지갑이 든든해야 상위층의 지갑이 더욱 채워지며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는 경제이론ㅡ마저 거의 작동한 적이 없었다.
만일 현대판 분서갱유가 인류의 미래를 위해 허락될 수 있다면, 대부분의 경제학과 실험실 위주의 결과를 현실에 적용하느라 지배의 도구로 변질되기 일쑤인 심리학과, 욕망의 무분별한 추구와 생각하는 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형편없는 자기계발서들은 모두 태워버려야 한다. 이제 현대성이 값을 매기는 지식은 땀을 흘려 획득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는 부단한 사고를 통해 성찰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지금-당장 소비할 수 없는 것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될 수 없으므로 아낌없이 버려야 하는 것들이 됐다.
이런 즉각적인 만족만을 최고의 가치로 탄생시킨 폭력적인 현대성의 유일한 지배자에서 이제는 수많은 피해자의 하나로 전락한 예외국가, 미국의 좌파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유럽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는 《미국 만들기》의 저자 리처드 로티가 다음과 같이 호소할 지경에 이르렀다. 비록 미국의 지식인 사이에서 좀처럼 나오기 힘든 그의 호소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고 들었어도 행동하지 않아 공허한 메아리로 사라져가고 있지만.
우리는 반드시 우리 아이들이 정말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게 키워야만 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우리가 더럽힌 화장실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사람들보다 무려 열 배나 많은 임금을 받고 있으며, 정작 우리가 두드려대는 그 키보드를 만드는 제3세계 사람들보다 무려 백배나 많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 아이들이 바로 먼저 산업화된 나라들이 아직 산업화되지 않은 나라의 사람들보다 백배나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걱정하게끔 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반드시 일찍부터 자신들이 누리는 그 행운과 다른 아이들이 누리는 행운 사이에는 많은 불평등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 배우게 해야만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바로 그러한 불평등들이 신의 의지도 아니고 경제적인 효율성을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하는 대가가 아니라 오히려 분명 피할 수 있는 비극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가능한 빨리 다음과 같은 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게끔 해야만 합니다. 그 어떤 누구라도 한편에서 다른 사람들이 과식하는 동안 굶주리게 되는 일은 결코 없게 하기 위해서는 과연 이 세계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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