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자(백인남성)들에게만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제한적 시도였던 민주주의가 수없이 많은 배제된 사람들의 저항과 투쟁으로 모든 국민에게 1인1표가 적용되는 단계까지 발전했습니다. 근대국가는 배타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영토) 내의 모든 시민(인구)에게 침해와 양도가 불가능한 인권과 다양한 형태의 사유재산과 사적 계약의 이행 

등을 보호(안전)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미셀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 참조). 





따라서 서로 다른 기원과 목적을 가진 민주주의와 근대국가가 만나는 지점에서 '개인의 안전과 그들이 소유한 재산의 안전은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합의(법과 제도 등으로 보장된 정치적 권리)가 이루어진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이중에서 하나라도 무너지면 정치적 권리는 제대로 행사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없는데 구태여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수고를 마다할 이유가 없겠지요. 



결국 민주주의와 근대국가의 조합이 최상의 이상향(유토피아)을 이룩하려면 모든 시민이 정치적 권리를 행사해 지켜야 할 것들(재산, 기회, 행복 등)이 있어야 하며, 상당히 부족하다면 반드시 제공해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모두가 평등하듯이, 법과 제도에 의해 국가와 사회의 일원이 된 모든 시민이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사회적 권리(복지국가 구축)가 제공돼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유럽의 선진복지국가는 이런 성찰과 실천의 결과물입니다(영국의 <베버리지 보고서> 참조).



정치·경제·사회적 평등이 강조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지배엘리트와 상위 1%의 세계화가, 이런 민주주의와 근대국가의 조합을 파괴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학자마다 출발점에 대한 인식은 다르지만, 영국과 미국의 슈퍼리치들이 헤리티지대단, 아담 스미스 연구소, 미국기업연구소 같은 보수연구소에 대규모 자금을 기부해 변방의 통치술이었던 신자유주의가 복지국가(사회민주주의)를 대체하도록 만든 것에는 일치합니다(다니엘 롤링의 《불의는 무엇인가》 참조).  



박근혜의 '줄푸세'에 모조리 담겨있는 이들의 공격은, 모든 시민에게 존엄한 삶을 보장하는 '사회적 권리'를 고비용·저효율의 상징인양 호도하고 왜곡해서 사회적 연대를 개인 간의 무한경쟁으로 대체하는 것에 집중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연대가 경쟁으로 대체되면, 혼자의 힘으로도 권력에 맞서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극소수의 거인들이 비슷한 처지의 시민들과 연대하지 않으면 사회적 권리를 지킬 수 없는 절대다수의 난쟁이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이런 면에서 볼 때 기본소득은 사회적 권리로 봐야 한다).





여기에 과학기술의 혜택과 디지털 파놉티콘의 구축(테러방지법이 대표적)을 독점하는 것까지 더해지면,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넘어 '고용없는 성장'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체제로 복귀하는 것을 전제로 한 '잉여'라는 시민들이 경제예비군으로서의 사회적 권리마저 박탈된 난민이나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가족과 사회와 국가가 제공하던 존엄한 삶과 안전보장이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지는 승자독식의 지옥이 도래한 것입니다(지그문트 바우만의 《모두스 비벤디》와 《쓰레기로 버려지는 삶》, 데이비드 라이언의 《감시사회로의 유혹》 등 참조).   



현대국가의 특징이 '유동하는 공포'가 만연된 '위험사회'로 접어든 것을 넘어, 민주주의와 근대국가의 조합이 작동하는 예전(짧게는 40년! 길게는 250년 전이다!)에는 잉여와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공간마저 사라진 지옥이 된 것도 사회적 권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란 무한경쟁이 초래한 정신질환자의 폭증이고, 곳곳에 자리한 정체불명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안전에 대한 공황적인 집착입니다(바우만의 《액체근대》와 《유동하는 공포》 등 참조).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CCTV와 인공위성이 동원된 블랙박스와 위치정보의 홍수에도 불구하고, 극히 미세한 사각지대의 존재에 불안해하는 것도, 이웃과 낯선 이들의 선의와 호의마저 경계하고 의심하는 것이 일상화된 것도, 그 때문에 작은 자극에도 폭발하기 일쑤인 분노의 과잉도,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적 권리가 뿌리까지 뽑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모두에 대해 타인이며 경계하고 의심하는 자들이며, 정치와 국가를 불신하는 난민입니다(니콜라스 카의 《유리감옥》, 한병철의 《투명사회》 참조)





대표적인 것이 세월호유족의 현실입니다. 필자가 세월호유족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세월호를 하루라도 빨리 인양하고, 본격적인 진상규명에 들어가려면 정치적 힘이 필요하다는 현실의식은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특정 정당을 지지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했습니다. 광복 이후 이 땅을 지배해온 거대양당이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두고 정치적 이득이나 챙기려는 행태에 극도의 불신을 가지게 됐고,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가 됐습니다.



그들은 단식을 함께 해준 문재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새누리당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던 새정치민주연합(박영선 원내대표가 협상을 이끌었었다)을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주 긴 싸움이 되더라도, 그래서 나머지 생을 분향소의 컨테이너와 거리에서 보내야 한다고 해도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특정 정당의 힘에 의존하는 어리석음은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세월호유족에게는 (또한 세월호참사를 그들의 비극으로만 떠넘길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민주주의와 근대국가의 조합이 약속한 정치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란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정확히는 우토피아)의 약속과 같습니다. '마국텔'이 종영되고, '야당 통합'이 상영되는 와중에 세월호유족과 특위가 간절하게 호소한 세월호특검법은 공론의 장에 올라가지도 못한 채 세월호처럼 수장됐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시민이기에 앞서, 잠재적인 헬조선의 세월호유족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가 '안전해지기 위해서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하위 99%에 속한다면, 이미 안전한' 상위 1%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술부터 퇴출시켜야 합니다. 민주주의와 근대국가의 조합이 모든 시민에게 약속했던 정치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연대를 복원하는 것만이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6.03.07 08:56 신고

    박근혜는 작은 정부를 표방하고 당선됐습니다.
    작은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지칭하는 표인데 공무원 수가 적은 정부라며 국민들을 속였지요. 그의 말대로 해석한다고 해도 국정원직원이 37만명이라는데...그게 작은 정부인지...ㅋ 입만 열면 거짓말입니다.

    • 늙은도령 2016.03.07 09:32 신고

      작고 권위적인 정부를 말하지요.
      통치에 필요한 인원은 늘리고 나머지는 없애 민영화하는 것, 그리고 제왕적 권력의 행사를 위한 권위주의적인 위계질서가 강조되는 정부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헌데 박근헤는 정부 자체를 죽여버렸습니다.

    • 소피스트 지니 2016.03.07 14:59 신고

      참 좋은 말씀이십니다. 작은 정부에 대한 개념을 잘 못 알고 계신분들이 많더라구요.

    • 늙은도령 2016.03.07 17:51 신고

      네, 많은 분들이 정치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지배엘리트가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2. 미시유에스 2016.03.07 10:51

    매일 늙은도령님 글을 읽고 또 많이 퍼가기도 하고 하면서 느끼는 것은
    이제는 박그네독재정권의 하수단체인 걱정원도 무소불위의 검은 힘이 더욱 날 뛸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이엠피터의 티스토리 떠난 이유도 계속된 정치 글 삭제였다고 하군요
    늙은도령님의 모든 콘텐츠도 앞으로는 사이트로 독립해서 옮겨갈 시기가 앞당겨 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듭니다

    • 늙은도령 2016.03.07 17:54 신고

      너머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크게 문제되지 않은 선을 지키며 씁니다.
      만일 저의 글을 건들면 제 인맥을 총동원해 싸울 것입니다.
      저는 기본적인 면에서 국민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당장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지배엘리트가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게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면 그때는 제가 좀 쉴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국가의 통계가 말해주듯, 가진 것이 많거나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투표율과 정치적 활동이 앞도적으로 높다. 전체 자산의 80~90%를 독점한 상위 1%(한국을 기준으로 하면 50만 명)가 전체 자산의 10~20%밖에 안 되는 것을 가지고 피터지게 싸우는 하위 99%(한국을 기준으로 하면 4950만 명)를 지배하려면 그들을 위해 일하는 정당과 후보가 정권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상위 50만 명의 자산이 전체 자산의 90%를 넘어섰다고 하니, 하위 4950만명에게 돌아갈 자산은 무려 50%나 줄어들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천만원이라 하면 국민총소득은 1500조원이 된다. 이중 1350조원을 50만명이 나눠가지고, 150조를 4950만명이 나눠가진다. 다시 말해 상위 1%에 속하는 50만명은 27억원씩 가질 수 있고 하위 99%에 속하는 4950만 명은 약 300만원씩 가질 수 있다.



27억원 대 300만원, 평균적으로 따질 때 이 정도 차이(26억9700만원)라면, 그리고 그 차이가 더 벌어지면 벌어졌지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면, 상위 1%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을 잡고 언론을 장악하고 특권의 카르텔을 형성해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려고 혈안이 되지 않겠는가? 4950만 명이 300만원보다 더 가지기 위해 150조를 가지고 피터지게 싸우듯이, 50만명도 27억보다 더 가지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상위 50만명은 하위 4950만명이 150조원을 나눠갖는 것을 넘어 그들의 몫인 1350조원을 넘본다면 숫적으로 절대 열세인 그들은 싸움을 멈춘 채 그들이 확보한 모든 것들을 총동원해 4950만명의 약탈을 막는다. 그것만이 아니다, 4950만명이 또다시 그런 약탈을 시도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에 온갖 보호장치를 구축한다, 공인된 폭력인 공권력을 수중에 넣는 것(정부)부터 사설경호원까지.





최상의 방법은 4950만명 모두를 감시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해 약탈 시도를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모조리 잘라버렸고, 4950만명을 최대한 파편화해 각자도생을 위한 자발적인 노예상태로 만드는데 얼추 성공했다. 이제는 부와 권력, 기회까지 세습할 수 있는 단계만 남았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50만명의 상위 1%가 4950만명의 하위 99%를 지배할 수 있는 최후의 지점에 이른 것이다. 



감시사회의 탄생은 이런 과정으로 이루어졌고, 정보통신과 영상산업 등의 발전으로 4950만명의 일거수일투적(성생활까지)을 감시하고 분류하고 범주화해서 '위험의 요소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디지털 파놉티콘의 구축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어제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새누리당이 '음지에서 양지를 지배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국정원으로 하여금 디지털 파놉티콘을 합법적으로 가동할 수 있도록 테러방지법을 통과시켰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특징은 잊혀질 권리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4950만명이 자발적으로 감시에 협조하는데 있다. 필자를 비롯한 하위 99%는 매일같이 모든 시공간에서 디지털 흔적을 남긴다. 다만 테러방지법이 통과된 어제 이후로 달라진 것은 권력의 필요에 의해서든, 자본의 청탁에 의해서든, 국정원에 의해 우리가 남긴 모든 디지털 흔적에 '테러'라는 혐의가 부여됐을 때 어떤 대처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테러를 벌일 수 있는 위험한 인물'로 분류되고 감시받지 않도록 디지털 흔적을 남길 때마다 '테러 혐의'로 해석될 될 여지가 있는지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것뿐이다. 그런 자기검열의 한계란 권력(과 자본)의 변덕스러움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것인데, 뭐 그쯤이야 총선에서 승리해 테러방지법을 폐지하거나 수정하면 그만이라고 안심하지는 마시라



그 이유는 권력(과 자본)의 변덕스러움 때문만이 아니라, 권력을 잡으면 누구나 통치의 수월성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과 자본)의 변더스러움도 다 그것에서 연원해 나오는 것이니.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耽讀 2016.03.04 08:15 신고

    늙은도령님도 '테러위험인물'일지도 모릅니다.
    '팬옵티곤'시대가 본격 돌입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릅니다. 감시사회는 언제가 무너진다는 것을.
    역대 독재정권 중 무너지지 않는 정권은 없었습니다. 17년가 내달린 설국열차(2013년) 꼬리칸 사람들도 일어났습니다.
    독재정권은 시민혁명에 반드시 무너집니다. 시민혁명만이 희망입니다.

    • 김경아 2016.03.04 12:11

      늙은도령님 비롯한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는 평범한 시민을 건드린다면...정말 가만있으면 안될것 같은데요? 시민혁명이 희망입니다..

    • 늙은도령 2016.03.04 18:04 신고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할려고 합니다.
      거대양당이 독점하는 구조로의 회귀는 지금까지 싸운 이유를 없애버립니다.
      총선 승리가 절대과제라면 '절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저는 수단에 문제가 있으면 목적은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작금의 과정이 너무 답답합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6.03.04 08:32 신고

    코에 걸면 코걸이,귀에 걸면 귀걸이..
    35%를 제외한 전 국민을 테러 분자로 만들수 있습니다

    유신시대로 회귀했습니다

    • 늙은도령 2016.03.04 15:16 신고

      그래도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소리없는 감사의 위험성을 전혀 모릅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한다 해도 국회선진화법이 있어서 새누리당이 동의하지 않으면 통과될 수 없음에도.
      전, 통합과정이 보도되지 않아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릅니다.
      노동당과 녹색당이 포함돼 있지 않은 모양이던데.....

  3. 바람 언덕 2016.03.04 11:42 신고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멀리서 보고 있자면 더 잘 보입니다.
    가라앉은 것은 세월호 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ㅠㅠ

    • 늙은도령 2016.03.04 15:17 신고

      네, 집단적 광기에 빠졌습니다.
      김종인 지지가 높아지는 것을 보면 전통의 지지자는 아닌 듯합니다.
      문재인도 이렇게 끝나는 것 같습니다.

    • BOW 2016.03.04 16:09

      늙은도령/어찌 김종인 보면 하는 짓이 원세개를 보는 것 같아보입니다.

  4. BOW 2016.03.04 14:57

    설령 멸망하지 않더라도
    운좋아봐야 과거 중화민국시절 중국꼴이겠지요.

    • 늙은도령 2016.03.04 15:18 신고

      네, 야당이 지지자들과 민주적 절차를 따르지 않고 독선적 결정을 했습니다.
      총선에서 승리한다고 통합된 인물이 자리하고 있으면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5. 개국물 2016.03.05 09:08

    어떻게 할까요 어떤방식이던 문제가 생기는 법입니다 제발 이번에 앞도적으로 이겨야 합이다 국회 선진화법은 무시할정도의 의석수가 필요 합니다.

    • 늙은도령 2016.03.05 19:03 신고

      자꾸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에 더 큰 화를 자처하게 됩니다.
      이번 총선에서 과반수만 확보해도 모든 것이 바뀝니다.
      국정원 할아버지가 와도 바뀝니다.
      조급해 하면 안 됩니다.
      테러방지법을 수정하거나 폐지시키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올바른 방법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그 다음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올바른 방법으로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김종인이 너무 서둘렀어요.
      그러면 길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거의 모든 면에서 진보좌파라고 믿었던 나는 합리적(이 단어는 대단히 모호하고 형이상학적이지만 이를 대체할 단어를 아직 찾지 못했다) 자유주의자인 칼 포퍼와는 몇 가지 면(특히 과학철학을 바탕으로 해석해낸 경제와 역사의 재구성)에서 일치하지 않지만, 정치권력의 역사에 대한 그의 인식과 그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래서 역사는 단순한 사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나 자신과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자유는 불멸의 가치다. 이것이 없으면 인류의 존엄성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것이 평등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역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이던 정신적이던 사회적이던 간에 평등이라는 것이 탄생과 함께 불평등하게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 불평등을 구조화한 정치사회적 부조리와 부정의에 저항하고 투쟁해야 한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살아가지 않는 한, 나라는 존재는 타인에게 비쳐진 다양하거나 엇비슷한 나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이유로든 경쟁이 존재하는 한, 타인이 지옥으로 다가올 수는 있어도 내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나와, 그런 다양한 나와 관계를 갖는 타인과의 접촉을 거절할 수 없다. 자살마저도 세상에 대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하나의 선택이라고 주장한, 그래서 말 잘 듣는 노동자가 필요했던 초기 자본주의체제가 철저하게 배격했던 위대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을 잠시 빌려보자.

 

 

“타방이 있어야만 일방이 있으며, 타방이 없으면 다른 일방도 소멸되어 버린다. 양자는 서로 직접 접경하여 객관이 시작되는 데서 주관은 끝난다. 양자의 경계가 공통된 것은 모든 객관의 일반 형식, 즉 시간·공간·인과율이 객관의 인식이 없이도 주관에 의해 안전히 인식”될 수 있다.

 

 

결국 사실이라는 객관적 팩트(시간과 공간, 인과율에 의해서 시계의 흐름에 따라 진열되는 역사의 단편들로 특정 가치체제를 거치지 않는 날것에 가까운 사실)는 의미라는 주관적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만, 내가 소중한 것만큼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과 믿음이 역사에 적시될 팩트(사건, 사실, 사람)를 결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는 모든 사람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인류의 위대한 현인이며 공화국의 부활을 꿈꾸었던 정치학자의 입을 빌려보자. 그녀는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히이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전체주의의 기원》, 《혁명론》 등을 쓴 한나 아렌트다. 좌파와 우파를 떠나 오직 인간에만 집중했던 그녀의 사상(전체주의에 지나칠 정도로 속박된 정치철학 혹은 비판정신)은, 그것에 대한 네그리의 비판이 아무리 신랄해도(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인류의 자산임에 틀림없다. 하물며 다음과 같은 통찰은 어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확신은 역사를 상투적인 틀로 해석하는 길로 이어질 수 있다. 이해란 잔악무도함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례에서 전례 없는 일을 추론하거나 현실의 영향과 경험의 충격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도록 만드는 유추와 일반화를 통해 현상들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이해는 오히려 우리의 세기가 우리 어깨에 지운 짐을 검토하고 의식적으로 떠맡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짐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그 무게에 패기 없이 굴복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이해란 현실에, 그것이 무엇이든, 미리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주의 깊게 맞서는 것이며 현실을 견뎌내는 것이다...현실을 아무런 편견 없이 감연히 맞서 이겨내는 것이다.

 

 

내가 나의 능력에도 너무나 부치는 일인 인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에 대한 이해가 유치하고 깊이가 턱없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나는 가능한 한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최대한 알려고 노력할 것이다. 동시에 하나의 사건을 다양한 관점과 지식을 통해 바라보고 분석하고 비판할 것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이지만, 그보다 크거나 다를 것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전체가 부분보다 커야 할 이유는 명백하지만, 그렇다고 부분이 전체에 예속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만이 강자와 승자 위주의 현실에 대해 아무런 편견 없이 맞설 수 있을 것이며, 나와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어나 연대를 이룰 때 그들에 맞서 싸워 이길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과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있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신자유의적 권력의 결정체인 새로운 제국과의 싸움이 어찌 간단할 수 있겠는가? 제국의 체제 논리 때문에 전 세계가 상시적 전쟁 상태와 유동적인 감시체제에 빠져든 상황까지 고려하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어찌 그에 대적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노력하고 연대한다 해도 무적의 제국과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을 무너뜨리는 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나는 제국과 신자유주의 통치술과의 일전에 임해, 그 투쟁의 지평선을 넓히고자 한다. 더하여 이런 투쟁이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그 투쟁들이 인터넷을 통해 네트워크 방식으로 연결되고, 그것이 삶의 현장에서 행동과 실천으로 구현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며, 나는 그 거대한 전환의 현장에서 가능한 많은 변화들을 직접 체험하고 기록하고 전하고 싶다. 그것만이 디지털 파놉티콘이라는 감시사회(각자도생사회 또는 삶정치로 포장되기 일쑤인 민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마도 거대한 전환의 실체를 예상할 수 없을 것이다.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가능성은 무한히 열려 있다. 바로 그것들, 그 무한한 가능성을 내가 다시 쓰고자 하는 역사이며, 세계사의 진정한 모습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할 권리란 없다. 부디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강자와 승자의 역사에서 사라진 그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안식처이자 재발견이며, 지상에서 보고 싶은 수없이 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성지이기를 바란다.





P.S. 필자는 이 글을 쓴 이후 푸코와 벤야민, 벡과 바우만 등의 책들을 추가로 읽었다. 포퍼의 책도 더 읽었고, 그의 숙적이었던 토마스 쿤의 책들도 더 접했다. 최근에는 장하석의 책들을 읽었다. 그래서 생각이 조금은 변했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른 글들을 통해 조금씩 풀어가고 있고, 지적공동체를 이루는데 성공하면 그곳에서 집중적으로 풀어낼 생각이다.



지식은 이성을 지혜의 영역으로 이끄는 거름이다. 철학은 지혜를 모아 실천적 삶을 형성한다. 출발점은 지식의 축적이다. 현대사회는 지식과 정보가 섞여있어 제대로 된 지혜로 이어지지 못하고, 이는 철학의 부재를 불러온다. 필자는 운이 좋게 지식 축적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고, 고삐 풀린 이성을 통해 무수한 사유를 할 수 있어서 나름의 지혜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철학이 가능해진 것이다.



다음은 동굴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플라톤의 방식을 따라갈 생각은 없다. 나는 그와 다른 방식으로 나눌 생각이다. 최대한 쉽게 풀어내 나눌 생각이다.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처럼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방식은 푸코를 지향하되 촘스키에 가까울 것이며, 최근에 내가 주시하고 있는 장하석의 방식에 근접할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다할 수 없기에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생각이다.



부디 건강이 허락돼 작은 지적공동체라도 형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정도의 능력을 갖출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삶의 스승들이 필요하고, 공동체의 성원들이 그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는다. 나는 줄 것이 많지만, 동시에 받아야 할 것도 많다. 내 안의 공간은 일종의 혼돈이다. 충만하면서도 배고프고, 만족하면서도 욕망한다.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면 가진 것을 다 줄 수도 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耽讀 2015.05.09 20:47 신고

    1966년, 경남에서 태어나 국민교육헌장을 외웠습니다. 박정희를 거의 신처럼 숭배했습니다. 그가 김재규에서 피살 당하자 통곡했습니다. 5.18광주를 '빨갱이' 천국으로 생각했습니다. 전라도와 김대중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의심하고, 생각하고, 비판하는 힘을 배우지고, 알려고도 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이상하게도 군대가서 전라도 목포 선배를 만나 생각하는 힘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더는 것을 22년만에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셋인데. 딱 하나 물려줄 것입니다. 생각하는 힘을 길러라고. 그래야 너 자신이 주인이고, 주체의식을 가져야 다른 이들도 존중할 줄 안다고.

    • 일루와봐 2015.05.09 21:29 신고

      도령님 포스팅을 둘러보다, 아이 셋에게 물려줄 유산이 생각하는 힘이라는데 격렬히 동의하며, 님의 답글에 감동 받아 글 남깁니다.
      (한자를 잘 몰라 님이라 칭한 점 이해바랍니다 ;))

    • 늙은도령 2015.05.09 22:39 신고

      그렇게 사실을 넘어 진실을 접했을 때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무수히 많은 철학자들도 진실, 혹인 진리를 접하고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사람만이 진실과 접했을 때 변합니다.
      다만 그 변화가 오래가도록 끝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자식에게 생각하는 힘을 전해주는 것이 곧 지혜의 방식입니다.
      좋은 조건을 물려주면 편하게 살 수는 있겠지만, 최악의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와 지혜를 발휘하는 인간 본연의 가치는 절대 경험하지 못한 채 삶을 마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결혼하지 않아 아이가 없지만, 좋은 환경보다는 좋은 정신을 물려줄 것입니다, 님처럼요.

  2. base 2015.05.09 23:35

    고집도 대단하십니다. 건강생각해서 몇일 쉬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는데...

    • 늙은도령 2015.05.10 00:37 신고

      오늘 올린 글은 예전에 써둔 것을 조금 수정한 것이니 별로 시간이 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식의 글은 별 어려움없이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머리에서 자판을 두들기기까지 단순 작업의 에너지면 충분하니까요.
      오늘 하루 푹 쉬고 있습니다.
      다만 저번에 넘어져 다친 어깨와 며칠 전에 미끄러져 다친 무릎 주변의 근육을 원상회복시키는데 집중했습니다.
      그것이 너무 힘들지만 어쨌든 극복해야 하는 것이니까...

  3. 이후 2015.05.10 00:22

    전 물리학과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잡지식과 사회경험을 비교분석하길 좋아했었습니다. 비록 전공자에겐 명함도 못내밀겠지만 나름 교양수준에서는 어느정도 자리잡았다라고 생각하는데 물리학과 사회 돌아가는걸 비교하면서 잼있는게 둘이 분명히 다른것이라고 일반인들이 생각하는것과는 달리 전 둘이 매우 유사함을 발견합니다.
    양자역학의 신비로운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이 인간의 이중성과 닮아 있음을 느끼고, 사회현상 또한 엔트로피와 닮았다고 느끼기까요. 이런얘기를 타 사이트에서 하니. 그 사이트에서 꽤 유명하고 학식있는 분이 이러더군요. "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서로 다르다. 그걸 연결시켜서 안좋은 결과가 나온것을 역사적으로 경험하지 않았냐. 나치가 우생학을 받아들여 유대인학살을 저질렀다. 위험한 생각이다 " 이런식이었는데. 그래도 제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확고히 굳어지고 있죠.

    일종의 믿음이라고 보여질수도 있는데. 자연은 물리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인간도 그것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고로 인간의 활동역시 마찬가지 둘이 똑같지는 않지만 유사한 행태를 보일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중력과 권력같은이죠.
    인간. 아니 생명은 자체로 권력을 지향합니다. 권력을 더 많이 가진다는 것은 생존확률의 증가와 자손의 번영을 의미하죠. 그러기위해서 덩치를 키우죠. 그렇게 씨족사회.부족사회. 더나아가 국가가 만들어지고, 그안에서 다시 권력층이 생겨나고, 이게 우주에서 별들이 태어나고, 은하가 생기고, 태양계가 생기고 이런거랑 유사하다고 보거든요.

    물리학과 사회학의 연관성. 혹은 물리학적 미래의 예측으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점쳐볼수는 없을까. 생각하는데 이건 좀 위험하기도 해요. 왜냐면 미래가 정해지면 그것이 좋던 나쁘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테니까요. 그래서 사회물리학에서 사회학으로 명칭이 변경된건가. 생각이 들기도 해요.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아직 준비가 안된걸까요?

    • 늙은도령 2015.05.10 01:08 신고

      물리학은 크게 고전물리학, 아인슈타인을 기점으로 상대성이론의 시대,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처음 밝혔지만 그가 부인한 양자역학의 시대로 나뉩니다.
      이 세계의 물리학은 근원에 관한 학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론물리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고, 특히 철학과 비슷합니다.
      이론물리학은 형이상학적 추론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고대의 물리학은 그리스신화에 접목됐고, 소크라테스학파에게 전수돼 근대까지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특히 뉴턴으로 대표되는 고전물리학은 근대철학을 낳았고, 그것이 근대이성이 됐으며, 현대성으로 발전했습니다.
      물론 근대이성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깨졌는데, 그렇다고 모든 것이 부정된 것은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식 3차원(절대적 시공간)을 넘어 4차원(시간이라는 개념의 등장, 시간도 광속 이하에서 변할 수 있다)으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때부터 미래란 예측할 수 있는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양자론이 양자역학의 문을 열면서 미래는 더더욱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됐습니다.

      물론 아인슈타인이 하고자 했던 것처럼, 그리고 와인버그를 거쳐 최근의 초끈이론까지 질서정연한 통일이론을 꿈꾸는 것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래를 예측하기보다는 우주의 생성원리를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심지어 미래는 무한대의 모습을 지닌다는 역사총합이론도 양자역학의 발전 덕분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파인만의 <물리학강의>를 보면 미래는 예측할 수 없음을 양자역학적으로 설명했는데, 이것이 역사총합이론으로 가는 길을 열었지요.

      최근에는 양자역학은 원자단위의 공간에 적용되고, 이것에 상대성이론이 적용돼 우주 차원의 공간에 적용되고, 태양계 차원에서는 뉴턴 역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GPS인데 이 기술에는 세 가지 물리학법칙이 모두 적용됩니다.

      아무튼 물리학이 사회학의 기원이 된 것은 뉴턴 역학의 영향을 받은, 그러나 분자생물학은 꿈도 꾸지 못했던 다윈의 진화론이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것을 잘못 이해한 스펜서가 사회진화론을 들고 나온 것이지요.
      이때부터 물리학과 철학, 사회학이 혼재하게 됐고, 역사라는 것이 등장했지만 상대성이론이 나오기 전까지 정치경제학에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또한 패러다임의 개념을 과학혁명에 적용한 토마스 쿤의 과학철학이 사회학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것 말고도 많은 것들을 고려하고 논해야 하지만, 물리학이 사회학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인문학자나 진보좌파가 현대의 과학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지요.
      저도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핵심은 아주 짧은 미래는 예측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유토피아도 없고.. 뭐 그런 식으로 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직 완벽한 이론은 없습니다.
      저는 인간이 절대 거기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뉴턴역학부터 상대성이론, 양자역학까지 모든 것이 공존할 것입니다.
      초끈이론이 이 모든 것을 연결하고 싶어하지만, 그것이 이론물리학(과학철학)의 세계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래서 정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정치는 미래를 선택하는 일이고, 그것이 최대한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니까요.
      학문은 분열하고 전문화됐지만 최근에 들어 융합이나 통섭이 유행하는 것도 일종의 패러다임인데, 다원주의적 접근을 하는 장하석까지 아직은 열린 상태라고 봅니다.

      이에 대해 성찰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복잡하고 전문적인 문제라 짧게 설명하기는 힘이 듭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포퍼와 쿤의 책을 보십시오.
      노이랏과 장하석까지 넓히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별로 대접받지 못하는 베르그송도 읽어보면 좋고, 특히 푸코도 보십시오.
      인문학의 한계를 깨달을 때, 칸트에서 헤겔을 거쳐 마르크스를 논할 수 있을 때, 보다 넓고 깊은 대화가 가능할 것입니다.

      공부할 것은 널려 있습니다.
      저도 통합적 접근의 초기 단계입니다.
      많이 헷갈리고 어려운 작업이라 많은 전문가와 소통할 필요를 느낍니다.
      현재진행형인 것이지요.
      두서없이 막 썼습니다.

  4. 이후 2015.05.10 00:39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과 친족의 끈끈한 유대감이 가장 강하듯. 원자속의 핵력이 가장 강하고 범위는 작죠. 가족에서 회사가 되면 구성원에 충성을 요구하죠. 반대급부를 주고 충성을 받는데 이건 원자들이 상호 공유결합을 통해 하나의분자나 보다 큰 분자집단을 형성하는것과 유사하고요. 유대감은 가족보단 작지만 힘의 범위는 넓어지죠. 일정한 에너지로 이 결합을 끊는게 가능하고요. 마치 더 높은 연봉으로 회사에서 회사로 이직하는것과 같이. 이런식으로 하나하나 자연의 기본단위부터 들어가면 끼워맞추기로 보여질지 몰라도 매우 유사하더라고요. 한 개인을 사회적 원자로 보기도 하잖아요. 그냥 비유일수도 있지만 사실 관계를 따지다 보면 역할이 비슷하더군요.ㅎㅎ

    • 늙은도령 2015.05.10 01:16 신고

      비유와 은유는 이론물리학에서 필수입니다.
      님처럼 생각하는 방식은 입자물리학에 근거할 때 가능한 얘기입니다.
      하지만 불확정성의 원리와 베타원리를 적용하면 조금 달라집니다.
      장이론과 제3의 과학도 있고요.
      파동이론을 적용하면 조금 더 달라집니다.
      강한 핵력, 전자기력, 약한 핵력, 중력까지 힘의 종류도 4가지나 되고요.

      절대 물리학만 보면 안 됩니다.
      그건 기초이지 전체가 아닙니다.

      철학에도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근원을 성찰하는 철학과 문제를 성찰하는 철학이 있습니다.
      전자가 사회철학적인 것이고, 후자가 과학절학적인 것입니다.

  5. 트라이어 2015.05.11 08:36 신고

    뭔가 엄청 심오하네요. 세상을 단순하게 살아가는 저에게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ㅠㅠ

  6. 공수래공수거 2015.05.11 08:55 신고

    무엇보다도 이양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기억에 오래 남는군요 ㅠㅠ

    • 늙은도령 2015.05.11 17:24 신고

      정말 답답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답답함을 참고 사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7. 참교육 2015.05.11 11:40

    관념이 아니라 깨어 있는 지성인의 실천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남보다 먹물 좀 더 들어가면 권력에 빌붙어 이익이나 쫓는 사이비 지식인들로 인해 수탈의 역사를 계속되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5.05.11 17:27 신고

      저는 국민들을 비판할 생각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이렇게까지 개판이 되는 세상을 받아들인단 말입니까?
      전 요즘 대한민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습니다.
      정말 어디까지 타락할지 모르겠네요.

  8. 공유의 플랫폼 2015.05.11 21:51 신고

    지식인을 비롯한 지성인의 역할이 가장 중요할때인것 같습니다. 모든사람이 평생직장..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다보면 더욱더 왜곡되겠지요.

    • 늙은도령 2015.05.12 00:43 신고

      개인주의가 이기주의와 구별되기 힘든 지점까지 이르른 것 같습니다.
      그것이 구별되지 않으면 최악의 결과를 각오해야 합니다.

  9. 나비오 2015.05.11 22:05 신고

    지지와 응원을 보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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