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채널을 지향하는 시네프에서 스티븐 호킹과 제인의 만남과 사랑, 결혼생활, 이혼까지 다룬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을 시청했다.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의 입자물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제2의 아인슈타인'이라는 영예를 얻었을 정도로 입자물리학에서는 독보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빛도 통과할 수 없는 블랙홀(별의 생성과 종말 모두에 관여하며, 아인슈타인이 예언했지만 최근에야 입증된 전자파에 대한 이해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에서도, 인류가 발견한 가장 완벽한 이론인 '열역학 제2법칙'이 작동한다는 것을 밝힌 '호킹 복사'는 그의 천재성이 얼마나 높은지 말해준다. 

 

 

 

 

말년의 아인슈타인은 우주에 존재하는 네 가지 힘(물리법칙의 모든 것)을 하나로 합쳐 창조법칙의 모든 것을 풀어내는 '대통일이론'을 세우는데 몰두했지만 끝내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제2의 아인슈타인인 호킹도, 와인버거와 서스킨드, 그린 등처럼 대통일이론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입자물리학으로 접근하면 한계에 봉착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인데, 중력을 양자역학적으로 풀어낸 끈이론(11차원으로 4개의 힘을 합쳤지만 증명할 수 없는 수학적 해의 하나인 M이론 포함)도 대통일이론에 이르지 못한 상태이다. 

 

 

끈이론과 정보이론이 이끌고 있는 최근의 우주론은 이들의 연구에 비하면 공상과학소설에 가깝다. 필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등수학들이 총동원된 이유도 있지만, 그들의 이론들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공상과학소설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필자가 분노하는 것은 세계 최고의 천재들이라는 이들의 이론들이 인간과 지구를 대단히 하찮은 것으로 추락시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라마찬드라 박사가 말했던 것처럼,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이 인간과 지구를 계속해서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지만 최근의 우주론에 이르면 하찮다 못해 사라져도 되는 존재로 격하됐다. 이들은 우주의 종류와 수가 무한대이기 때문에 인간과 지구도 무한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인류와 지구가 사라진다 해도 초미세먼지 하나가 사라진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장한다, 작고한 호킹이 그렇게도 인류의 멸종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물론 리처드 도킨스처럼 인간이 진화의 마지막 단계가 아닌 최고의 지능을 지닌 다음이나 그 다음 단계의 존재를 위한 중단 단계, 또는 바로 직전 단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이들이 말하는 다음, 그 다음의 존재는 무엇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특이점을 돌파한 초인공지능이라는 과학적 합의ㅡ인류의 99.99999%는 제외한 채ㅡ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신과 동등한 수준에 이른 초인공지능을 인간이 창조했다는 것에 만족하라고 인류에게 말한다. 

 

 

인간을, 특히 인간의 몸을 하찮게 여기는 이들이 우리가 존경하고 최고라고 떠받드는 불세출의 천재들이다. 이들의 연구에 우리의 혈세가 바쳐지고 있으며, 정말로 엿 같게도 그 선두에 자리한 존재가 인간이 아닌 구글과 페이스북이라는 IT공룡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모두가 플랫폼으로 이용하면서 지불하고 있는 돈과 시간, 재능 등을 독점하는 구글과 페이스북의 반인류적 탐욕이다. 그들이 만들고 인공지능은 모든 이용자들이 남긴 데이터에 기반하며, 그렇게 축적된 빅데이터를 이용해 세계 최고의 천재들이 마스터 알고리즘을 만들고 있다.

 

 

호킹 부부의 사랑을 다룬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 소중했던 것은 최고 천재들에게 바치는 인간이 만든 최후의 영화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는 앞으로도 만들어지겠지만 20~30년 후에는 인공지능이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공지능이 특이점을 돌파하더라도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지는 않겠지만, 우주적 차원의 빅데이터를 이용할 수준에 이르면 돈이 되지 않는 인간적인 것들을 빼면 과학과 철학까지 인공지능에게 넘겨주어야 하니 영화를 만드는 것은 식은죽 먹기보다 못해진다. 

 

 

필자는 루게릭병에 걸린 호킹보다는 고통이 덜하지만 백일 이후에 소아마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래 평생 동안 그에 못지 않은 육체적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병에 걸려 건강했던 기억이 10년도 되지 않지만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병과 남은 시간을 알게 된 호킹의 충격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그는 의사의 예상보다 50년 이상을 더 살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자식을 셋이나 두었지만 평생을 사랑한 여자를 놓아주는 장면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제인은 2년 정도만 남았다는 호킹을 돌보며 박사 학위와 교수직까지 받도록 도왔다. 3명의 자식을 키우면서도 아이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일들을 훌륭하게 해냈다. 이것은 사랑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인은 모성애를 넘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호킹을 돌보고 세 아이를 키웠던 것이다. 결혼에는 사랑말고도 의무와 책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녀는 호킹의 성공과 자식의 육아 및 교육 등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거나 자기투자라는 것을 모조리 포기해야 했다. 그녀는 너무나 지쳤고 운명처럼 새로운 남자가 나타났다.    

 

 

호킹보다는 제인이 보여준 사랑의 위대함을 그려낸 영화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것이라는 나만의 생각 때문에 결혼은 꿈도 꾸지 않았던 필자에게는 호킹의 선택이 낯설지 않았다. 그는 제인을 놓아주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자신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자 결심을 굳힌다. 이제는 제인에게 끝없는 희생이 아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했다. 호킹은 제인을 영국에 두고 미국으로 떠난다. 

 

 

페미니즘에 관한 책들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성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필자에게는ㅡ우리나라 페미니스트들 중에 주디스 버틀러나 낸시 프레이저, 호미 바바의 저서들을 완전히 이해하는 분들이 있다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ㅡ여성에 대한 이해가 터무니없이 부족했었다. 그러나 호킹의 선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나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었다. 사랑의 위대함이 희생의 위대함과 같아서는 한쪽의 희생만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호킹의 첫 번째 부인인 제인 같은 여성을 만나지 못했다. 아니 만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는지 모른다. 하루 16시간 정도를 공부하는 고시 준비 때문에 건강이 악화된 후, 필자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소아마비보다는 선친처럼 간이 망가진 것과 극심한 수면장애ㅡ지금은 거의 완치한 공장장애로 발전했다ㅡ때문에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런 질곡의 삶으로 끌어들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어떤 여성이든지 유혹할 수 있었지만 깊은 관계로 발전할 것 같으면 나는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제인이 보여준 위대한 사랑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대단히 똑똑하고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즐비한 집안이라 그들 사이에서 버티기도 힘들었다. 땡전 한 푼 없이 시작해 8개월만에 신화에 근접했다는 소리를 들었던 통신사업에 실패한 이유도 건강 때문이었다. 소아마비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지만 형편없는 체력과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수면장애는 사업을 함에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자 한계였다, 모질지 못한 성격도 한몫했지만. 

 

 

 

 

박사 학위 10개 정도는 따고도 남을 만큼 많이 공부했음에도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 이상을 하지 못한 것도 결혼을 포기한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이다. 간경화가 간암으로 넘어갔다는 판정을 받고, 2년 정도의 생존가능성을 의사로부터 들었을 때 추호의 슬픔도 느껴지지 않은 것도 산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깨어있는 모든 시간이 지옥이었다. 오로지 수면장애와 공황장애를 약하게 만들어주는 향정신성 약물을 복용했을 때만 통증과 미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헌데 내가 받은 첫 번째 진단명이 우울증이었다, 할렐루야!).

 

 

이런 상황에서 책을 쓰거나, 팟캐스트를 하거나, 방송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너무 많은 공부량으로 해서 책을 내기도 힘든 상황에 처했다. 어느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성찰을 담아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담고 싶은 것은 넘쳐났지만 한 편에 담을 방법도 없었고, 여러 편으로 나누기에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공부를 하는 중에 뇌가 살아나고 그에 따라 건강이 좋아지는 기적을 접한 후에야 집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방송을 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궁찾사 집회와 문파 집회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면서 호킹의 삶과 선택들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제인 같은 사랑을 만났고 결혼했으며 이혼 후에도 친구로 지내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 제인 같은 여자를 만났다면 인생 전체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떨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호킹이 인공지능에 의한 인류의 멸종에 그렇게도 경고의 말들을 남긴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1년 반 동안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 관련 학문들을 집중적으로 파고든 필자는, 최초의 복제자를 만들어낸, 그래서 단백질에 기반한 인간의 진화가 가능했던 이유를 신체에서 찾는다.

 

 

뇌라는 최고의 작품도 신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과학의 발전이 신체를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것에 호킹은 참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평생을 수많은 병마와 싸워야 했던 필자의 삶은, 육체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 과정이었기에 호킹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같이 자살만 생각했던 시절에 1초의 여유도 주지 않는 육체의 고통 앞에서는 정신적 고통이란 하찮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는 정반대의 과정(게이라는 고달픈 경험도 더해졌을 것이고)으로 육체의 소중함에 눈을 떴지만 나는, 어쩌면 호킹이 그랬을 수도 있었으리라 짐작하는 나는 육체의 고통을 통해 지금에 이르렀다.

 

 

호킹의 《시간의 역사》는 나에게 우주를 보는 눈을 뜨게 해준 책이다. 리처드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3권과 100여 권에 이르는 물리학과 우주론 책들을 읽게 만들어준 최고의 책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그의 물리학 지식이 부러웠는데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을 시청한 이후에는 제인 같은 위대한 여성을 만난 것이 더 부러워졌다. 제인이 없었다면 호킹도 없었다. 인간을 너무 사랑했던 스티븐 호킹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사랑의 열매들이 영원할 것을 기원해 본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나무 2019.01.13 02:49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할께요~

  2. 청운 2019.01.14 04:17

    한 번 만나 이야기 하고 싶네요. 전 서울과 양평을 오갑니다. 제 동선에 계실까요?

  3. 나무 2019.01.15 01:11

    산본... 같은 지역주민이시네요~^^



일정 기간이 쌓이면 조금씩 발전하던 기술이 폭발적(기하급수적)으로 한계점을 돌파한다는 기술 낙관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리처드 스몰리의 발언을 인용하곤 한다. "무엇인가가 가능하다고 어떤 과학자들이 말한다면, 그들은 아마 그것이 실현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과소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뭔가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그들은 아마 틀렸을 것이다." 어떤 기술이던 시간이 문제이지 이르지 못할 단계는 없다는 뜻이다. 





이런 기술적 낙관론은 레이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그는 특이점을 넘은 인공지능(비생물학적 지능)이 플라톤의 '이데아'를 넘어 영생을 이루고, 우주적 차원의 지능까지도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리처드 도킨스를 떠올리는 기술적 낙관주의자(특이점주의자)들은, 완전시장이 이루어지면 모든 인류가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시장근본주의자들처럼, 현실을 너무 만만하게 보거나 인간에 대한 이해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인공지능의 겨울'에 갇혀 생명을 다할 뻔했던 기계 학습(머신 러닝, 신경망 네트워크와 알고리즘)이 스스로 지능의 패턴을 찾아내는 '딥러닝'으로 넘어간 지금에는 인간보다 뛰어난 초지능의 출현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의 우주에서 가장 뛰어난 지능은 인간의 뇌인데, 광속에 이른 컴퓨터의 연산능력(하드웨어, 연산용량이 10의 19승이면 충분)과 인터넷이란 무한대의 정보(빅데이터를 말하며 포탈, 웹, 블로그, 커뮤너티, SNS 포함), 무작위한 정보에서 일정한 패턴을 찾아내는 인지능력(소프트웨어, 알고리즘 아키텍처) 등이 발전하면서 초지능의 출현은 필연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기술 발전에 따라 현대의 세 가지 고민ㅡ지속적인 임금 하락, 일자리 감소, 불평등 증가ㅡ이 더욱 심해진다는 사실에 있다. 많은 경제학자들과 전문가들은 기술 발전(농업혁명, 산업혁명, 정보혁명 등)에 따라 생산성과 효율성이 높아져 임금이 상승하고, 일자리가 늘어나며, 그 결과 불평등이 줄어들 것이라고 했지만 지난 수백 년의 역사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기술 발전은 인간을 해방시키지 않고 퇴출시키는 것으로 작용했다.



우리는 현실을 호도하는데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경제학자에 속았고, 민주주의와 법을 이용해 특권층을 형성한 정치가에게 속았고, 연구비가 필요한 과학·기술자들의 낙관적인 전망에 속았고, 이들이 추동하는 미래를 장밋빛으로 그린 언론과 방송 종사자에게 속았고, 이들에게 자금을 대주는 극소수의 부자들에게 속았고, 그들에 기생해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각자의 이기주의와 자기기만적 탐욕에 속았다.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기술 발전의 여정이 마지막 특이점에 접어든 지금, 가까운 장래에 인류의 멸종을 걱정할 정도에 이르렀다. 특이점을 넘은 초지능과 자기복제적이고 학습하는 로봇의 등장은 지구온난화와 핵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론적 문제다. 지구온난화와 핵전쟁이 겹치는 '퍼펙트 스톰'까지 발생해 인류가 일거에 멸종하는 것이라면 억울한 것도 없지만, 인공지능과 로봇의 등장은 서서히, 하지만 인간이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이 점점 빨라지고 대규모로 이루어진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부와 권력, 기회 등은 상위 1%를 넘어 초지능과 로봇을 독점하는 0.0…01%에 집중될 것이며(승자독식의 초집중화), 공존과 상생은 꿈도 꾸지 못하는 세상이 펼쳐진다. 초지능과 로봇만 있으면 무한대의 생산성과 효율성이 가능한데, 기업(자본)가가 결점투성이의 인간에게 생산과 서비스를 맡길 이유가 없다. 결코 카메론 감독의 <터미네이터> 같은 세상은 오지 않는다. 인간은 초지능과 로봇에 밀려 초라하게 퇴장을 할 뿐이며, 창조론이건 진화론이건 결론은 동일하다.  



일부에서는 기술 발전에 따라 인류의 의식, 지능, 능력 등도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특이점주의자와 낙관론자들의 주장처럼 언젠가는 신에 근접한 초지능이 출현하면 그들이 인간과 공생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인공지능, 생명공학, 나노공학, 뇌과학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발전들이 하나로 합쳐질 수 있다면ㅡ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고 수천 년이 걸릴 수도 있다ㅡ인류는 멸종하던지, 그들의 노예로 살던지 둘 중 하나만이 가능하다.



특히 세월호참사가 지겹다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을 넘어,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과 진상규명이 무한정 늘어지고, 새롭게 밝혀진 사실(강정해군기지용 400톤의 철근)에도 불구하고 특위는 활동시한이 종료될 위기에 처했으며, 정부와 기업, 자본이 모조리 얽혀있는 옥시참극 수사는 축소되는 것도 모자라 주변부만 맴돌고, 모든 세대를 위협하는 초미세먼지는 국민의 먹거리(고등어와 삼겹살) 탓이 되고, 여성에 대한 혐오범죄와 폭력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기득권의 반칙과 특권에는 침묵하면서 전쟁위협만 고조시키는 쓰레기들이 판을 치고… 이 모든 것들의 정점에는 대통령과 청와대, 국정원, 정치검찰이 자리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면 더더욱 암울하다. 



여기에 경제란 대기업과 자본, 특권층의 이익을 챙겨주는 것으로 변질됐고,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를 권력자와 가진 자들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으로 변형시킨 박근혜의 무지함과 비정상적 인식까지 더해지면, 대한민국은 디스토피아의 전형(헬조선)으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다. 모든 규제를 물에 빠뜨린 후 꼭 살려야 할 것만 꺼내고, 김밥 한 줄에만원을 받는 것만 비판할 뿐, 왜 만원을 받아야 했는지 알려하지 않는 박근혜의 천박한 인식은 자본을 위한 모든 국민을 희생시키겠다는 것과 동일하다.                    





초지능과 로봇의 세상이란 노동자에게 주어질 일자리가 없는 자본의 천국이다. 이것 때문에 인공지능 전문가인 마틴 포드는 《로봇의 부상》에서 인식의 전환을 촉구했다. "위대한 사회는 자신이 태어난 사회의 특정 집단에 대해 개인이 스스로의 문제 해결을 위해 이것저것 요구할 필요가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을 잃어도 일정 선 이하로 생활수준이 떨어지지 않게" 모든 사람에게 일정 수준의 기본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는 하이에크(프리드먼의 경우 '음의 소득' 개념)의 말을 인용한 뒤,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우리 경제의 노동집약도가 떨어지리라는 주장에 찬성한다면 조세제도도 노동 중심에서 자본 중심으로 옮겨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따라서) 조세부담이 노동집약적 산업과 업체에 불균형할 정도로 많이 부과되면 이는 인간의 노동을 가능한 모든 분야에서 자동화로 대체하려는 인센티브로 작용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경제 전체가 지속 불가능한 상태에 빠진다. 그러므로 이렇게 할게 아니라 기술에 크게 의존하면서 인력은 적게 고용하는 업체들이 더 많은 짐을 지도록 제도를 전환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근로자들이 은퇴자를 부양하고 복지사업비를 부담한다는 사고의 틀을 벗어나 경제 전체가 이를 떠맡아야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초지능과 로봇의 시대에도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불평등 해소를 위한 공존과 상생, 정의와 양심, 원칙과 상식이다. 낙관론자건 비관론자건 간에 인공지능과 로봇 전문가들은 이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여준다. 일부의 전문가는 기본소득(사회보장소득)에 들어가는 재원 마련을 위해 세계적 차원의 부유세 도입(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주장)에도 찬성한다, 피케티가 불평등을 초래한 요인 중에 기술 발전을 철저하게 외면했음에도.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6.06.27 08:39 신고

    불평등 해소를 위한 배려
    이게 밀씀하신대로 현대에서 살아가는 중요한 키워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 늙은도령 2016.06.27 14:25 신고

      이제는 공존과 상생이 필수입니다.
      기술 발전에 대응하려면 방법이 없습니다.

  2. 쇠북울음 2016.06.27 19:51

    오늘 처음 '늙은 도령'님의 빼어난 견해를 접하고 퇴근을 미루면서 4건의 포스트를 꼼꼼히 새김질 하듯이 읽었습니다.
    좋은 글에 공감하면서 감사를 표합니다. 부디 오래 오래 건필하소서!!!

    • 늙은도령 2016.06.27 23:50 신고

      감사합니다.
      저도 인공지능과 특이점에 관한 것들을 공부하면서 한 동안 혼돈에 빠졌습니다.
      처음에 읽은 책이 지독할 정도로 기술적 낙관론을 펼치는 바람에 헷갈렸습니다.
      그래서 수십 권의 책을 추가로 구입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깊어진 것 같습니다.

  3. 시골잔차 2016.06.27 22:46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을 보면서
    놀라움을 넘어 무서움을 느꼈습니다.
    하루하루 발전해가는 기술들...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다 생각하니
    오싹합니다.
    훌륭한 통찰에 감사드립니다~~~

    • 늙은도령 2016.06.27 23:53 신고

      미래는 디스토피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류가 집단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멸종을 피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나노공학, 생명공학, 뇌과학 등에 대한 공부가 늘어나면 새로운 길이 보일지... 고민이 많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로 그냥 넘기기에는 지금의 10대부터 그 이후의 세대가 너무 불쌍합니다.
      지금까지는 암울합니다.

  4. 현주씨 2016.06.29 08:45 신고

    잘읽었습니다.

  5. 쌈둥아빠 2016.06.29 10:37

    오늘도 감사히 글을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
    "기술에 크게 의존하면서 인력은 적게 고용하는 업체들이 더 많은 짐을 지도록 제도를 전환... 궁극적으로 우리는 근로자들이 은퇴자를 부양하고 복지사업비를 부담한다는 사고의 틀을 벗어나 경제 전체가 이를 떠맡아야 한다"
    미래는 이런 사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늙은도령 2016.06.29 17:03 신고

      그렇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 KBS에서 러던의 슈퍼리치를 다룬 다큐를 방영했는데 오늘 후편이 방송됩니다.
      영국과 미국에서 변화가 생기면 그 다음은 쉬워집니다.
      기술 발전 때문에 기본소득이 도입되는 것은 시간 문제인데, 그 이전에 변화가 있으면 좋겠지요.
      브렉시트로 부자들이 크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알파고의 인공지능에 관해 세계적인 전문가로부터 자문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글로 옮기려면 저의 공부가 추가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분이 추천해준 책(영문)을 읽지 못했기에 확실하게 답해드릴 수 없음을 이해해주십시오. 알고파의 인공지능에 대해 구글검색을 해보시면 수없이 많은 자료들이 뜨는데 그것만 봐도 충분한 이해가 생길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의 글박스는 제가 받은 자문 내용입니다. 다시 한 번 자문에 응해준 것에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바둑문제는 rule(바둑판위에 돌을 놓는다 등)이 있고 명백한 답(승리 수순)이 있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NP-complete 문제로 대표적인 것이 salesmans travel 문제이며 Graph theory에 의해 해결됩니다. 예를 들어 10개의 점을 종이 위에 찍고 선으로 연결해서 삼각형을 그리는 문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점이 많아지면 경우의 수가 엄청 많아져서 유한한 시간 내에 답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사람이 더 빨랐는데 지금은 컴퓨터가 더 빠른 문제의 하나입니다.이 문제의 확장판은 핸드폰 지구국 설치 문제와 비슷합니다(또는 VLSI 설계). 지난 20-30년 동안 통신네트워크 발전과 함께 이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아 져서 엄청 큰 graph search 문제를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수학 정리(theorem, heuristics)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병렬컴퓨터를 써서 시간 단축이 가능한 기법도 개발되었습니다.


과거 인공지능 개발은 rule을 입력하는 expert system 위주였는데 학습을 추가한 neural network이 적용된 후에도 발전이 느리다가 최근 10~20년에는 graph search 문제와 결합해서 알파고와 같은 프로그램 개발이 가능하게 되었지요. 현재는 '대상 문제의 rule을 정해 주면 빠른 시간 내에 아주 복잡한 NP-complete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추었다'라고 보면됩니다.


아직은 문제의 rule이 무엇인지 컴푸터가 알아 듣게 하는 것은 사람의 역할 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다른 인공지능을 개발할 능력(문제의 rule을 도출)을 가지는 상태를 (technological) singularity (또는 (기술) 특이점)라고 부르며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지요. wikipedia에서 singularity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위의 자문 내용을 저는 충분히 이해했는데, 그 과정에서 위키백과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먼저 사용된 전문용어에 대해 이해해야 하니, 제가 검색한 내용을 글박스로 옮겼습니다. 최종적인 설명은 그 다음에 하겠습니다. 





다항 시간(多項時間)은 어떠한 문제를 계산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 m(n)이 문제의 크기 n 다항식 함수보다 크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대문자 O 표기법을 사용하면 m(n) = O(nk)이 된다. 여기서 k는 문제에 따라 다른 상수 값이다. 일반적으로 입력 길이의 다항 시간이 걸리는 경우를 '빠른', 혹은 '다루기 쉬운'(tractable) 경우라고 표

한다. 반대로 다항 시간보다 오래 걸리는 경우를 초다항 시간(超多項時間)으로 부르며, 이 경우는 '다루기 

든'(intractable) 경우로 표현한다. 초다항 시간에 속하는 예로는 지수 시간이 있다. 결정론적 튜링 기계로 다

항 시간에 풀 수 있는 판정 문제 복잡도 종류 P이다. 다항 시간에 답이 맞는지 틀린지를 검사할 수 있는 판

정 문제의 복잡도 종류는 NP다. 다시 말하면, NP는 비결정론적 튜링 기계로 다항 시간에 풀 수 있는 판정 문

의 복잡도 종류이다.


다항 시간은 바둑처럼 경우의 수가 많은 문제를 계산할 때 걸리는 시간을 말합니다. 알파고의 인공지능은 이런 다항 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이는 과정에 있으며, 학습(갈수록 고수와 바둑을 두는 것)을 통해 다항 시간은 줄어듭니다. 음성인식의 첫 번째 단계인 TTS는 텍스트를 음성으로 바꾸는 것으로 해당 텍스트를 여러 번 읽으면 아나운서 수준에 이릅니다. 



가장 초보적인 음성인식이 이렇게 이루어지는데 알파고의 인공지능도 18급에서 시작해 비슷한 방식으로 최고수의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지금까지 수천만, 수억 번의 가상대국을 통해 알파고의 인공지능도 지금의 수준에 이르렀고, 다항 시간이 점점 빨라져 이세돌을 3판이나 내리 이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 알파고의 인공지능이 이세돌을 넘지 못한 것은 학습능력이 부족함을 말해줍니다. 



물론 이세돌과의 대국을 통해 알파고의 인공지능은 한 단계 더 발전합니다. 구글의 연구자들이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들도 얻었을 터이고요.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에 어떤 부분을 더해야 무적의 바둑고수가 될지, 경우의 수를 어디까지 넓힐지, 그런 것들에 대해 많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엄청난 비용(모든 방송이 실시간 중계하고 뉴스마다 떠들어댄 것은 구글이 천문학적인 광고비를 풀었음을 뜻한다)을 들였지만 그만큼 회수할 것이 풍부해진 것입니다. 당장 딥마인드의 주가가 폭등했다고 합니다.   


 

                                                  Gragh searching 과정  




NP 비결정론적 튜링 기계(NTM)로 다항 시간 안에 풀 수 있는 판정 문제 집합으로, NP는 비결정론적 다항시간(非決定論的 多項時間, Non-deterministic Polynomial time)의 약자이다. NP에 속하는 문제는 결정론적 튜링 기계로 다항 시간에 검증이 가능하고, 그 역도 성립한다. 또한 결정론적 튜링 기계로 다항 시간 안에 풀 수 있는 문제는 비결정론적 튜링 기계로도 다항 시간 안에 풀 수 있으므로, P 집합은 NP 집합의 부분집합이다. 이때 P가 NP의 진부분집합인지, 혹은 P와 NP가 같은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이 문제는 P-NP 문제로 불린다.

NP-complete(NP-완전, NP-C, NPC)은 NP 집합에 속하는 결정문제 중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의 부분집합으로, 모든 NP 문제를 다항 시간 내에 NP-완전 문제로 환산할 수 있다. NP-완전 문제 중 하나라도 P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모든 NP 문제가 P에 속하기 때문에 P-NP 문제가 P=NP의 형태로 풀리게 된다. NP-완전 문제 중의 하나가 P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P=NP에 대한 반례가 되어 P-NP 문제는 P≠NP의 형태로 풀리게 된다.

Gragh theory(래프 이론)에서 말하는 그래프는 기하학적으로 정확한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절점(結節點:또는 점·꼭지점)과 1쌍의 결절점을 연결하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향(有向) 그래프에서 모든 선은 방향을 가지며, 도로망, 전기회로망, 탄화수소분자구조, 다면체의 꼭지점과 모서리·명령계통·가계도(家系圖) 등은 그래프나 유향 그래프로 나타낼 수 있다. 행정지도와 관계있는 2가지 그래프 가운데 하나는 경계선을 나타내는 그래프이고, 다른 하나는 각 지역에 결절점을 찍고 경계선으로 나눈 각각 1쌍의 결절점을 연결한 그래프이다. 

1735년 스위스의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옛날부터 전해오던 쾨니히스베르크 다리에 대한 수수께끼를 분석·발표했다. 이 수수께끼는 섬을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갈라져 흐르는 강에 놓인 7개의 다리를 1번씩만 건너서 모든 다리를 건너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는 이 수수께끼의 답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했고, 이 문제를 가능한 모든 회로망에 일반화시켜 오늘날의 그래프 이론과 위상기하학(位相機何學)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프 채색이란 연결된 결절점들을 서로 다른 색으로 칠하는 방법으로서, 이 방법을 이용하여 시간표를 짤 수 있다. 예를 들어 학생과 교사들이 수업시간표를 짤 때 수업시간을 결절점으로 표시하고, 똑같은 교사나 학생이 그 시간에 있을 경우 두 결절점을 연결하여 색칠하면 시간표를 겹치지 않게 짤 수 있다. 이 경우 색깔은 시간표를 나타낸다.




다항 시간을 줄이는 일은 학습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둑의 경우 경우의 수 10의 170승에 이르기 때문에 경우의 수를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바닥판에 놓은 돌이 많아질수록 경우의 수가 주는 것처럼, 무한대가 나오는 맨 첫 수부터 경우의 수를 살펴볼 수 없습니다. 이때 사용되는 것이 NP입니다. 상대의 수준에 맞춰, 수순이 이루어질 때마다 경우의 수를 최소화하면서도 최적화된 수를 찾아낼 수 있도록 다음 수의 범위를 한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업사원이 특정 제품이나 서비스를 팔려 할 때 모든 기업과 사람이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익을 남기려면 영업대상을 한정해야 합니다. 최소비용을 통해 최대이익을 거둘 수 있는 영업 플랜을 짜서 그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도 수없이 많은 실수를 하게 되며, 그렇게 영업노하우가 쌓입니다. 영업의 고수가 되는 것이지요. 'salesmans travel'이 이를 말하면 그것을 인공지능에 적용한 것이 Gragh theory(그래프 이론)입니다.  



                                               VLSI가 적용된 마이크로칩



VLSI[뷔엘에스아이]는 컴퓨터 마이크로칩의 소형화 수준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하나의 마이크로칩에 수십 만개, 즉 104개 이상의 트랜지스터가 들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LSI (large-scale integration)는 수천 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있는 마이크로칩을 의미한다. 이전의, MSI (medium scale integration)는 수백 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있는 마이크로칩을, 그리고 SSI (small-scale integration)는 수십 개의 트랜지스터가 집적되어 있는 마이크로칩을 각각 의미하였다.



양자컴퓨터나 슈퍼컴퓨터 정도가 되면 NP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이럴 경우 인간이 인공지능과 바둑을 둬 이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알파고의 인공지능은 병렬컴퓨터(흔히들 말하는 크라우딩 기법으로 수천 대의 컴퓨터를 하나로 묶어 슈퍼컴퓨터에 해당하는 CPU를 확보하는 것)의 역할을 대행하는 VLSI가 장착돼 있을 것이고, 그것마저도 병렬로 돼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알파고의 인공지능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계산을 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다만 다항 시간 내에 풀 수 있는 경우의 수, 즉 집합의 크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오늘은 이세돌에 패했던 것입니다. 음모론적으로 보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는 거대한 후폭풍 때문에 구굴이 어제까지의 인공지능보다 낮은 것을 돌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아무튼 알파고의 인공지능이 NP-완전, 즉 최적의 수를 찾는 것이 이전의 어떤 인공지능보다 빨라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는 알파고의 인공지능을 다른 분야에 넓혀도 최고의 수준에 이른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풍요롭게 하던 시절은 이미 지났음을 말해주는 것이 알파고의 인공지능입니다. 이제 인공지능은 인간을 대체할 거의 마지막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



                                                   Deep neural networking                                                  


모든 인류가 걱정하는 마지막 단계는 Gragh theory(그래프 이론)를 넘어서는 것을 말하는데, 그 전에 통신사의 기지국 시스템을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통신사의 기지국은 스마트폰과 기지국까지만 무선입니다. 기지국들은 유선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최근에는 인공위성과 wipi 같은 무선랜을 이용하기 때문에 무선의 영역이 넓어졌지만 통화를 하려면 기지국(가상 기지국 포함)을 거치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보통 기지국은 동시접속자수가 한정돼 있습니다. 제가 통신사업을 할 때는 동시접속자수가 274명이었습니다. 그 이상이 동시에 접속하면 기지국이 다운돼 통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의 폰은 주변에 있는 3개의 기지국과 15초 간격으로 신호를 주고 받습니다. 동시접속이 몰렸을 때 다른 기지국으로 돌려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동시접속을 분산해서 통화불통, 착신지연, 통화품질 등을 최상으로 제공하고자 합니다.



지금은 이런 분산을 최적화하기 위한 기하학적 수학 정리(쉽게 말하면 salesmans travel이 극대로 발전한 것, 뇌의 뉴런과 시냅스가 촘촘한 회로망을 구축해 지식과 학습, 판단의 체제를 형성하는 심층신경회로망(deep neural network)을 모방한 알고리즘이 Gragh theory(그래프 이론)을 활용할 수 있게 만든 프로그램, 구글의 딥마인드는 자신의 인공지능에 몬테칼로식 트리서치를 이용했다고 한다)가 사용되고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알파고의 인공지능이 이세돌에게 패한 것에서 보듯, 현존하는 모든 인공지능은 기술 특이점에 이르지 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기술 특이점이란 학습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이 인간의 뇌처럼 작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궁극의 수학 정리를 말합니다. 즉, 인간이 rule를 주는 대로 작동하는 인공지능이 스스로 rule을 정해 자기 맘대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걱정하는 세상,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물론, 저를 자문해준 최고의 인공지능 전문가도 기술 특이점이 출현하는 것에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벌어질 일들이란 인간이 추론할 수 있는 능력밖이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도 인공지능이 활용하는 one of them에 불과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이란, 리처드 토킨스가 《눈먼시계공》에서 주장했듯이, 인류가 지구의 마지막 지배자로 남아야 할 어떤 근거와 정당성도 없다는 것(도킨스가 신을 부정하는 근거)이 옳았다고 말하는 것이 인류가 할 수 있는 전부인 디스토피아일 수도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미국이 일본의 두 개 도시에 핵폭탄을 투하한 순간 과학기술에 적용될 수 있는 윤리학의 마지노선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인류가 '진보의 낙관론'을 앞세워 스스로의 종말를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극소수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과학기술의 폭주를 막기 위한 어떤 윤리적 기준도 제시할 수 없고, 그 끝에는 인류의 종말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만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것으로 긴 글을 끝낼까 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ω^ 2016.03.13 22:59

    좋은 글 감사히 보았습니다.

    일반인들에게는 어려운 글인 것 같네요.

    눈이 빙글빙글 돕니다. @ㅁ@

    전문용어도 있고 그래서, 몇 번 다시 정독해보겠습니다.



    글 요청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최신 이슈를 이렇게 '깊이 있게' 해설 해주시는 분은 처음 보았어요.

    • 늙은도령 2016.03.14 00:21 신고

      저도 님 덕분에 공부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지식을 넓히는 일이 즐거움이어서 님의 부탁이 저로 하여금 새로운 활기를 준 것입니다.
      전문 용어와 글박스의 것들을 모조리 빼고 읽으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6.03.14 09:17 신고

    그 알고리즘을 만드는것도 인간입니다
    결국 기계는 인간을 이길수는 없습니다
    "창의성"은 따라 갈수가 없습니다

    • 늙은도령 2016.03.14 15:03 신고

      기술 특이점에 이르면 그때는 인간을 능가합니다.
      인간이 인공지능의 상대가 안 됩니다.
      그래서 이쯤에서 인공지능 개발을 막아야 합니다.

    • 전자공학 재학중 2016.03.14 22:14

      이쯤에서 막는 것이 가능할지 궁금합니다.
      러다이어트 운동의 재현으로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막는 것이 가능한지 여쭤봅니다.

    • 늙은도령 2016.03.15 00:53 신고

      이것은 러다이트와 다릅니다.
      러다이트는 일자리 문제였지만 기술 특이점이 적용된 인공지능이 나오면 인간이 필요없어집니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질투하고 정복하려 할 것입니다.
      인간이 필요없는 인공지능이 볼 때 인간은 원자와 분자로 구성된 물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없이도 세상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씨를 아예 말려버릴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만든 창조자가 제일 무서운 적이기 때문입니다.

  3. 요원009 2016.03.14 16:30 신고

    이렇게 알고리즘이 중요한데, 정작 우리나라 대학에선 수학과 알고리즘을 등한시 해왔고, 지금도 해오고 있죠.

    많이 안타깝네요.

    • 늙은도령 2016.03.14 17:53 신고

      우리는 기본적인 것에 투자하지 않기로 유명하잖아요.
      현실과 이상을 적절히 결합해 장기적인 플랜을 세워야 하는데 이것도 형편없습니다.
      이명박이 기초과학을 박살내더니 박근혜는 '아무것도 몰라요'로 일관하니..

  4. 전자공학 재학중 2016.03.14 22:11

    오.. 전문가님께 여쭤봅니다. 교수님보다 더 시원한 강의 들었습니다.
    1. 현재 대한민국의 인공지능의 발전도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미국, 중극, 일본, 유럽에 비교해서 어떻습니까?
    2. 특이점이 아직 오지 않는 기술적 난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3. 알고리즘 내용을 보고 여쭤봅니다. 트리 구조와 뉴런 네트워크가 어떤 식으로 융합이 합니까?

    • 늙은도령 2016.03.15 00:49 신고

      1번은 제가 아는 한 많이 떨어집니다.
      우리나라는 기초과학에 투자하지 않기 때문에 인공지능은 많이 떨어집니다.
      제가 자문을 구하는 분은 인공지능의 세계적인 대가인데 그분도 한국에서 프로그래머가 천대받는 직업을 전락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합니다.
      응용과학이 최고를 유지하려면 기초과학에 충실해야 하는데 이명박 정부 이래 엉망진창이 됐습니다.

      2번은 'Our Accelerating Feature' 라는 Michael M. Anissimov 의 책을 공부해야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초신경회로망은 뇌과학이 발전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뇌과학은 초신경회로망이 구축되는 기본원리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파악하면 기술 특이점에 이를 것입니다.
      수학의 문제이기 전에 뉴런과 시냅스의 작동원리(알고리즘)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인류는 뇌 이해의 초입에 있습니다.
      이것이 선행돼야 수학적 정리도 나올 수 있습니다.

      3번은 트리구조라 함은 예스와 노에 따라 계속해서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3개의 조건을 동시에 풀지 못합니다. 그래픽 이론은 3개 이상의 조건을 가지기 때문에 트리구조에 비해 다차원적입니다.
      이를 테면 복소수(허수)까지 평면화하려면 그래픽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 차이로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뇌의 추론 능력은 예스와 노에 따라 넓혀지지 않는 것처럼요.
      동시다발적 연산이 가능해집니다.

      이 두 개를 하나로 묶을 수 있으면 뇌의 초신경회로망 구현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추론되고 있습니다.
      입력계층, 출력계층, 은닉계층 중에서 은닉계층의 알고리즘을 제대로 파악하면 인간보다 뛰어난 인공지능이 나오리라 봅니다.

  5. ^ω^ 2016.03.16 00:54

    네이버 뉴스 읽다가 '구글 AI `알파고` 바람 금융권도 덮친다'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금융권에 인공지능 도입은 너무 무섭네요...

    수천 수만 건의 데이터를 취합해서, 나노 초 단위로 계산해내면

    진짜 인간은 당해 낼 수 없아요...

    먼 미래에는 인공지능이 경제 대공황 일으킬 수도 있을까봐 걱정입니다...

    • 늙은도령 2016.03.16 01:06 신고

      그것까지는 필연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기술 특이점을 돌파하면 그때는 어떤 것으로도 인공지능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제가 구글 광고를 이용하지만 인공지능의 최종목표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6. 봉잡스 2017.03.31 01:17 신고

    검색하다 들렸는데 굉장히 유익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7. 봉잡스 2018.06.02 08:04 신고

    유익한 글입니다. 꼼꼼이 여러번 읽어보고 갑니다.

 

 

아래의 글상자에 요약해 놓은 것처럼,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보면 '밈'이라는 문화적 유전자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복잡한 유기체를 만드는 기계적인 유전자와는 달리, 문화적 유전자인 '밈'은 '유전자를 선택의 단위로 하는 낡은 유형의 진화가 뇌를 만들어 내면서 최초로 등장하게 됐습니다. 이 때부터 인간은 밈 유전자를 통해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누적적인 변이가 아닌 빠른 진화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밈 유전자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진화의 예로서는, 성장과 규모 위주의 개발 때문에 미세먼지가 급증하자 아이들의 속눈썹이 길어진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돌연변이와 개선을 거쳐 자연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누적적인 변이가 아닌, 한두 세대 만에 이루어진 이런 변이는 "유전적인 변이를 수반한 계획적인 번식은, 축적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유전자 단위의 진화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진화가 만들어낸 최고의 결과물인 뇌가 문화적 진화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인간은 '유전자가 만들어낸 기계'에서 벗어나 보다 독자적이고 빠른 진화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진화의 최종단계(최상의 단계가 맞는 표현일 수도 있다)인 자연선택에서 벗어나 인간의 의지에 의한 선택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문화적 진화란 이기적인 유전자 단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전복적 혁명이자 '연속적인 돌연변이' 이상의 반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필자가 진화의 핵심이 적자생존이라는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이유도 밈 유전자의 존재에 있습니다. 승자 ㅡ 승자이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과 살아남았기에 승자라는 것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ㅡ 만이 후손을 남길 수 있다는 적자생존으로는 인간의 이타적인 행태를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생존의 조건이 좋아짐에도 불구하고 진화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태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업화(세습되는 천민자본주의)와 민주화(생존선 이하의 삶만 보장하는)를 동시에 이룬 대한민국이 '헬조선'으로 다가오는 삼포(오포, 칠포)세대들이 연예와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행태가 바로 그러합니다. 우파 전체주의를 숭상하는 박근혜와 새누리당 및 뉴라이트 무리들은 압축성장을 이루어낸 대한민국이 위대하겠지만, 그 때문에 온갖 불평등과 차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청춘들에게는 진화의 법칙을 거스르는 선택을 강요하는 나라에 불과합니다. 

 

 

진화라는 과정은 양자슈퍼컴퓨터가 나와도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의 행운들이 쌓여서 시작됐고, 최초의 유기체가 수십억 년에 걸친 복제와 변이, 선택을 통해 인간으로 진화하려면 그만큼의 확률이 더해져야 가능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존엄성과 생명의 고귀함이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임도 이런 진화의 과정에서 나옵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에는 이처럼 어마어마한 행운과 수십억 년에 걸친 거대한 역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청춘들은 '이기적인 유전자'가 주재하는 진화의 법칙을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문화적 유전자인 밈이 자신의 창조자인 진화의 법칙에 저항하라고 합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문화와 문명에 저항하라고 합니다. <국제시장>의 세대들이 온갖 고생을 자식세대에게 물려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하지만, 그들과는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 청춘들은 앞세대들이 포기하지 않아도 됐던 것들마저 포기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행운들이 수없이 쌓이고 겹쳐 인간으로 태어난 그들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것들마저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으로서의 인간의 진화는 계속될지언정, 문화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진화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헬조선을 외치는 삼포(오포, 칠포)세대들의 선택이, 그 전복적이고 반역적인 선택이 슬프고 처절하게 다가오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며,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해 새누리당의 장기집권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앞선세대의 노력과 희생이 불통과 아집으로 변하지 않을 때, 많이 가졌음에도 더 가지려는 탐욕과 무한경쟁이 나눔과 공존의 지혜로 바뀔 때, 대한민국의 청춘들은 세습과 천민자본주의의 천국,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문화에도 흥망성쇄가 있듯이 진화에도 흥망성쇄가 있습니다. 고대와 근대, 현대의 제국들이 무너진 것도 앞선세대가 이루어놓은 것이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진보와 성장의 낙관론'처럼 하나의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진화의 과정이란 없습니다. 정치가 아닌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음도 수많은 독재자와 어리석은 지도자들, 특히 히틀러와 스탈린이 충분히 입증했습니다.                       

 

 

청춘불패가 청춘필패로 바뀐 세상이 헬조선의 핵심이고, 죽창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이 탈조선의 열망이라면 앞선세대와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금수저까지는 아니더라도 흙수저는 없게 만드는 것, 흙수저가 금수저가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 진화의 법칙마저 거스르는 청춘들의 슬픈 선택이 사라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문화, 문화적 돌연변이

 

문화적 전달은 유전적 전달과 유사하다. 기본적으로는 유전적 전달이 더 보수적이지만 일종의 진화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말이다...언어는 유전자가 아니 수단에 의해 진화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게다가 그 속도는 유전적 진화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유전적 진화에서와 같이 그 변화는 진보적이다.

 

문화적 진화와 유전적 진화의 유사성은 종종 논의 되는 사항이다. 때로는 쓸데없이 신비로운 함축이 있다는 식으로 논의가 진행된다. 과학적 진보와 자연 선택에 의한 유전적 진화의 유사성에 관해서는 칼 포퍼 경이 밝혀 주었다.

 

인간은 과거 수백만 년을 소규모 혈연 집단 단위로 생활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본적인 심리적인 특성이나 경향을 대개 혈연 선택과 호혜적 이타주의를 촉진하는 선택이 우리의 유전자에 작용한 결과로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화와 문화적 차이를 설명하기에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고 생각한다...다윈주의는 유전자라는 좁은 문맥에서 국한되기에는 너무나 큰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자기 복제자

가령 탄소 대신에 규소를, 물 대신에 암모니아를 이용하는 화학적 구조를 가진 생명체가 존재하거나, -100도가 되어서야 죽는 생물이 발견되거나, 화학 반응에 의존하지 않고 전자 회로를 기초한 생물이 발견되었다고 할 때, 이들 모든 생물체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 원리는 없는 것인가? 물론 나는 그 답을 모지만 내기를 한다면 모든 생명체가 자기 복제를 하는 실체의 생존률 차이에 의해 진화한다는 법칙이다.

 

과 그 진화

 

새로이 등장한 수프는 인간의 문화라는 수프다. 새로이 등장한 자기 복제자는 문화의 전달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라는 개념의 그리스어 어근으로부터 미멤mimeme이라는 말을 만들 수 있는데 이를 단음절로 줄여 밈meme이라 했다.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 정자나 난자를 운반자로 하여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뛰어다니는 것과 같이, 밈도 밈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 다닌다.  

 

밈은 비유로서가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구조로 간주해야 한다. 당신이 내 머리에 번식력 있는 밈을 심어 놓는다는 것은 말 그래도 뇌에 기생하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에 기생하면서 그 유전 기구를 이용하는 것과 같이 나의 뇌는 그 밈의 번식을 위한 운반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신이라는 밈

밈 풀 속에서 신이라는 밈의 생존 가치는 그것이 갖는 심리적 매력의 결과다. 실존을 둘러싼 심원하고 마음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해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해답을 준다. 그것은 현세의 불공정이 내세에서는 고쳐진다고 말한다. 우리의 불완전함은 영원한 신의 팔이 구원해 준다고 한다...이것이 신의 관념이 세대를 거쳐 사람의 뇌에 그렇게 쉽게 복사되는 이유 중 하나다. 인간의 문화가 만들어 내는 환경 속에서, 신은 높은 생존 가치 또는 감염력을 가진 밈의 형태로만 실재한다.

 

새로운 자기 복제자 밈

30억 년 전부터 이 지상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기 복제자는 DNA였다. 그러나 DNA가 그 독점권을 영원히 가지리란 법은 없다. 새롭게 시작된 진화가 이미 낡은 유형이 된 진화를 답보할 이유는 없다. 유전자를 선택의 단위로 하는 낡은 유형의 진화는 뇌를 만들어 냄으로써 최초의 밈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낡은 유형의 진화보다 훨씬 빠른 독자적 진화를 시작했다. 우리 생물학자는 유전자에 의한 진화의 사고방식에 완전히 빠져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여러 종류의 진화 중 일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칫하면 잊어버린다.

 

밈의 특성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밈에서도 특정한 사본의 수명보다 다산성이 훨씬 중요하다. 문제의 밈이 과학적인 아이디어일 경우 그 아이디어가 과학자들에게 얼마나 받아들여지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 경우에는 과학 학술지에 그 아이디어가 인용되는 수를 셈하여 대략적인 생존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

 

이 논의는 자기 복제자가 성공하기 위한 세 번째 일반적인 성질인 복제의 정확도와 연관되어 있다. 과학자가 어떤 아이디어를 듣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할 때 그는 그것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기 마련이다...이를 테면 강조하는 점을 바꾸거나 나 자신 또는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혼합해서 그의 아이디어를 나의 목적에 맞게 바꾸어 놓았다...밈의 전달은 연속적인 돌연변이를 거치며 다른 것과 혼합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밈의 단위

아이디어 밈은 뇌와 뇌 사이에 전달될 수 있는 실체로서 정의될 수 있을지 모른다. , 다윈 이론의 밈이란 그 이론을 이해하는 모든 뇌가 공유하는 그 이론의 본질적인 바탕이다. 사람들이 그 이론을 표현할 때 방법상의 차이점은 정의상 다윈 이론의 밈의 일부가 아닌 셈이다. 만약 다윈 이론이 A B 두 분분으로 나뉘어, 어떤 사람은 A를 믿는데 B는 안 믿고, 다른 사람은 B를 믿는데 A를 불신하는 상황이라면, AB는 서로 다른 밈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A를 믿는 사람은 대개 B도 믿는다면, 즉 유전학 용어로 이 둘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이 경우에는 양쪽을 합하여 하나의 밈으로 보는 것이 편리하다.

 

경쟁하는 밈

대규모의 컴퓨터 센터에서는 연산 시간과 기억 용량을 돈으로 환산하거나, 사용자에게 초 단위의 사용 시간과 문자 단위의 기억 용량을 일정량씩 배분한다. 인간의 뇌는 밈이 살고 있는 컴퓨터다. 뇌에서는 아마도 저장 용량보다 시간이 중요한 제한 요인이며, 심한 경쟁의 대상일 것이다. 인간의 뇌와 그 제어를 받는 몸이 동시에 하나 또는 몇 종류 이상의 일을 해치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밈이 어떤 사람의 뇌의 집중력을 독점하고 있다면 경쟁자의 밈이 희생되는 것은 틀림없다. 밈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방송 시간, 광고 게시판의 공간, 신문 기사의 길이, 그리고 도서관의 서가 공간 등과 같은 상품에서도 경쟁하고 있다.

 

밈 복합체의 예-종교, 맹신, 독신주의

사람들에게 종교 의식을 가용하는 데에 매우 효과적이었던 교의의 하나는 지옥불의 협박이다...이것은 매우 간악한 설득 기술로서, 중세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고통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술은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나는 성직자들이 그렇게까지 똑똑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을 갖지 않은 밈들이, 성공한 유전자가 나타내는 준잔인성이라는 성질을 가진 덕분에 스스로의 생존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가설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지옥불이라는 이이디어는 단순히 그 자체가 갖는 강렬한 심리적 충격 때문에 불멸의 존재가 된다. 그것이 신의 밈과 연관되어 버린 것은, 이 둘이 밈 풀 속에서 서로의 생존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맹신이라는 밈은 이성적인 물음을 꺾어 버리는 단순한 무의식적 수단을 행사하여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맹신은 아무것도 정당화할 수 없다...맹신의 밈은 특유의 잔인한 방법을 통해 스스로 번식해 간다. 애국적 맹신이든 정치적 맹신이든 종교적 맹신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밈과 유전자는 종종 서로를 보강하지만 때로는 서로 대립하기도 한다. 예컨대 독신주의 같은 것은 유전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성 곤충과 같이 매우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독신주의를 발현시키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서 실패하게 돼 있다. 그러나 여전히 독신주의의 밈은 밈 풀 속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독신주의는 상호 협력하는 종교적 밈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복합체에서 작은 일부분인 셈이다.

 

나는 공적응된 유전자 복합체가 진화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밈의 복합체가 진화한다고 추측한다. 선택의 자기의 이익을 위해 문화적 환경을 이용하는 밈에게 유리하게 적용한다. 이 문화적 환경은 함께 선택되는 밈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밈 풀은 진화적으로 안정한 세트로서의 속성을 지니며, 새로운 밈은 쉽게 침입할 수 없다.

 

밈의 긍정적인 면

우리가 사후에 남길 수 있는 것은 유전자와 밈 두 가지다...유전자 자체는 불멸일지 몰라도 우리 각자의 유전자의 집합은 사라질 운명에 있다...번식이라는 과정에서 불멸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세계 문화에 무언가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우리의 유전자가 공통의 유전자 풀 속에 용해되어 버린 후에도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유전자 중에서 오늘날 살아 남아 있는 것에 대해 관심이나 있는가.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밈 복합체는 아직도 건재하지 않은가.

 

문화적 특성의 진화와 그 생존 가치를 문제 삼을 때에는 누구의 생존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어떤 문화적 특성이 단지 그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진화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종교, 음악, 제식 춤 등에 생물학적인 생존 가치가 있는지 몰라도 이들에게서 전통적인 생물학적 생존 가치를 찾을 필요는 없다. 일단 유전자가 재빠른 모방 능력을 가진 뇌를 그 생존 기계에게 만들어 주면, 밈은 자동적으로 세력을 얻을 것이다. 모방이 유전자에게 이득을 준다고 가정할 필요조차 없다. 만약 그렇다면 확실히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뇌가 모방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뿐이다. 그러기만 하면 밈은 그 능력을 십분 이용하면서 진화해 나갈 것이다.  

 

 

인간의 선견지명

우리가 비록 어두운 쪽을 보고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우리의 의식적인 선견지명, 즉 상상력을 통해 장래의 일을 모의 실험하는 능력이 맹목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이기성으로 인한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를 구해 줄 것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당장의 눈앞의 이기적 이익보다 장기적인 이익을 따질 정도의 지적 능력은 있다. 우리는 비둘기파의 공동 행위에 가담하는 것이 장기적 이익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할 능력이 있으며, 이 공동 행위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논의할 능력이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는 안주할 여지도 없고 전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가르칠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1. 청공(靑空) 2015.11.30 06:02 신고

    저는 자기복제자(유전자와 밈)의 한계를 뛰어넘는 열쇠가 인간의 이성 혹은 상상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라는 바이러스 혹은 그림자를 걷어내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자,
    혹은 자아에 오염된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끊임없이 생각과 말이란 매개체를 통해 영속하는 바이러스로서의 자아가...
    인간의 생각과 존재를 왜곡시키는 본질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인간을 발전시키는 힘은 욕심이 아니라, 반복된 행위에 의한 차원의 이행에 있다고 봅니다.
    항상 정진하는 것, 이를 가능하게 하는 의지, 올바른 방향성을 부여하는 지혜가 그 기제라고 생각하고요.
    물론 자아가 만들어내는 욕심으로도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높은 수준으로 이행하려 하면 할수록...
    오염된 체계보다는 순수한 체계일수록 유리할 것입니다.

    작은 차이가 누적이 되면 결국에는 엄청난 차이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의 특성이 개인적인 성공의 요소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철저한 이기주의와 목적지향성은 타인에게 해를 입히고, 개인간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현상적으로는 개인의 성공이라 보일지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는 사회적자본에 해를 입힘으로써 사회발전의 실패를 초래합니다.
    개인을 둘러싼 환경을 위협에서 보호하고,
    예측가능하게 만듦으로써 특정 행위에 집중하여 더 복잡하고 높은 수준의 생산물을 창출하는 것이 사회발전의 매커니즘인데...
    사이코패스와 같은 이기주의자는 자신들에게 해가 입게 되는 규칙만을 준수하지...
    그것이 어떤 형태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머지는 무시를 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준법자일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사회적자본에 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사이코패스와 같은 이기주의자는 극단적인 요소이지만,
    인간의 자아가 만들어낸 욕심과 잘못된 전제들은 똑같이 노이즈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이 생각을 길게 정리할 역량도 안되고, 상황도 아닌지라 대략이나마 풀어봅니다.
    지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꼭 완전한 자아의 극복이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에게 맞춰진 포커스를 사회로, 역사로 확장시키지 않는다면...
    변화를 일궈낼 수 있는 여지는 젊은 세대와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는 점점 작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5.11.30 08:48 신고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수 있다 라는 말이
    크게 와 닿습니다

    건강은 좀 괜찮으신지요?

  3. 2015.11.30 11:37

    비밀댓글입니다

  4. besso 2015.12.12 04:44

    늙은 도령님 이야기가 옳다는것은 귀납적으로 증명됩니다.
    보세요 세상을... 인간이 만든...

    • 늙은도령 2015.12.12 14:43 신고

      그래서 답답한 것이지요.
      인간은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족속인가 봅니다.



불길한 망령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그머니 찾아오며 상상만 하던 비극은 너무나도 쉽게 적나라한 현실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ㅡ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서 인용




어제 JTBC의 오락프로그램인 비정상회담에서는 스티븐 호킹과 같은 세계적인 과학자들과 테슬라‧스페이스X의 최고경영자 엘론 머스크, 애플의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같은 넘는 정보기술 기업가와 로봇공학 연구가들이 ‘국제 인공지능 컨퍼런스(IJCAI)’에서 공개한 서신의 경고를 주제로 열띤 토론을 펼쳤습니다.





‘삶의 미래 연구소’ 명의로 공개된 이 서한에는 인공지능이 ‘킬러 로봇’처럼 군사기술에 적용되는 것을 막지 않으면 인류의 멸종도 가능하다는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니콜라스 카의 《유리감옥》을 참조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삐 풀린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를 종말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경고는 비정상회담 출연진들도 숙고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인공지능에 관한 한 최고의 선두에 있는 구글의 레이 커즈와일은 2045년 이전에 기계 지능이 인간 지능을 능가하는 '특이점(singularity)'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현재의 우주와 지구, 인류가 특이점의 빅뱅에서 나왔다면, 커즈와일의 주장은 급진적인 것을 넘어 섬뜩하기 그지없습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세계적인 프로그래머는 아직까지 인공지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이론이 발명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언젠가는 인간보다 우수한 능력을 지닌 전반인공지능(GAI)의 출현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럴 경우 리처드 도킨스가 《눈먼 시계공》에서 인류를 대체할 지구의 지배자가 인공지능 컴퓨터가 될 수도 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립니다.





인공지능의 특이점은 이전의 경고들과 판이하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류에게 풍요를 안겨준 DDT(유대인을 학살한 화학가스와 미군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대량으로 살포한 고엽제와 네이팜탄도 DDT의 일종)가 실제로는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과, 그 이후에 이루어진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5번째 종말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등은 총체적 종말을 경고합니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의 위험성은 총체적 종말이 아니라 인류의 종말, 즉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의 주인공이 인간에서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으로 대체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창조의 목표였던 진화의 과정이었던, 지구의 지배자가 인간에서 인공지능 로봇으로 바뀌는 것이 멀지 않은 미래의 모습이란 뜻입니다.



인류가 발전시킨 과학기술의 총아인 인공지능 로봇이 자신의 창조자인 인류를 친구이자 동반자가 아닌 적으로 인식하는 순간, 커즈와일이 말한 ‘특이점’이 도래합니다.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리처드 도킨스 류의 세계관이라면 지구의 다음번 주인이 인공지능 로봇이 된다 한들 이상할 것도 없겠지만, 인간이란 종의 입장에서 보면 최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와 기독교의 종말론도 신을 닮은 유일한 창조물인 인간이란 존재가 유한하다는 것에서만 유효한데, 스스로 업그레이드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인공지능의 세상에선 부활이란 의미도 자살한 국정원 직원이 국익을 보호하고 유명인사의 죽음을 막기 위해 딜리트한 자료를 복구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거장 그리스토퍼 놀란이 메가폰을 잡은 <인터스텔라>의 낙관적 전망보다 스탠리 큐브릭이 메가폰을 잡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비관적 전망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인공지능의 특이점입니다. 인류와 환경을 종말로 몰아붙이는 시장경제가 세상을 지배하는 현실에서 비정상회담의 토론이 현실이 되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우린 답을 찾을 거야, 늘 그랬듯이’라는 진보의 낙관론에 기반해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는 법’이라는 머피의 법칙을 이론물리학적(만유인력,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초끈이론, 인류원리, 초대칭성, 블랙홀, 웜홀, 시공간 왜곡 등이 총망라된)으로 풀어간 <인터스텔라>보다는 ‘삶의 미래 연구소’ 명의로 공개된 경고가 더욱 현실적인 이유는 하랄트 발처가 《기후전쟁》에서 말한 것에서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식수 고갈, 대홍수에 의한 파괴, 정화되지 않은 오폐수에 의한 오염, 거대한 쓰레기더미, 팽창하는 유전개발에 의한 환경파괴 등은 말할 필요조차 없고, 분쟁상황 자체가 가히 파국적이다. 여기에는 기후변화와 전쟁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 현재의 수단을 보면 인류의 미래가 보인다.







P.S. 필자가 연재 중이지만 출판하려면 상당히 많은 부분을 퇴고해야 하는 '근현대사 비판'의 핵심주제가 과학기술과 시장경제 비판입니다. 인공지능은 핵폭탄을 넘어 이 두 가지가 완벽히 결합한 정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자컴퓨터가 보편화되면 인공지능의 특이점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인데, 이런 속도라면 지구온난화의 급진화보다 인공지능 로봇이 인류를 대체하는 것이 더 빠르게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8.11 08:39 신고

    인공지능이 군사기술에 실제로 적용되면 안된다는 협약이
    잇어야됩니다. 핵처럼..

    그렇지 않으면 영화에서처럼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할날이
    '멀지 않을겁니다

    • 늙은도령 2015.08.11 19:06 신고

      인공지능 로봇은 전쟁만이 아니라 인간의 일자리를 말살시킬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인공지능 로봇은 더욱 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지금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2. 참교육 2015.08.11 10:49 신고

    저는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과연 과학이 인류의 미래를 결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감출 수 없습니다. 참으로 걱정입니다.

    • 늙은도령 2015.08.11 19:08 신고

      네,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결과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일부만이 큰 돈을 벌겠지요.

  3. 耽讀 2015.08.11 13:26 신고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비행기를 만들면서 추락도 함께 생겼다"고 했습니다. 최첨단 과학이 발전하면 할 수록 인류문명은 패망은 빨리질 것입니다.

    • 늙은도령 2015.08.11 19:09 신고

      아마 프로이트인지 모르겠습니다.
      프로이트가 비슷한 내용이 들어있는 책을 썼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은 인간의 적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탐욕이 곁들면 무조건 적이 됩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하고, 평균 수준의 활동력도 지니지 못한 병든 몸이지만, 필자가 공부하고 사유한 거친 결과들을 올리는 ‘늙은도령의 세상보기’는 하나의 목표로 귀결된다. 강자와 승자 위주로 쓰인 역사와 세계사를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것을 통해,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깔려 죽은 이름 모를 수많은 약자들의 희생을 되살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과 건강, 나이에 비해 도무지 이루기 힘든 지난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인류의 위대한 석학인 중 두 사람의 글을 통해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어쩌면 끝에 이르지도 못할 길에 나서려 한다. 그 처음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2》의 저자 칼 포퍼의 성찰이다.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라고 말할 때 그들이 생각하며 그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은 정치권력의 역사이다...정치권력의 역사는 국제적 범죄와 집단학살의 역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도대체 인류의 구체적 역사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의 역사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희망과 투쟁 그리고 수난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주의 신봉자이자 애창자였던 칼 포퍼는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역사주의 학자들의 결정론(진리는 하나며 명백해서 보기만 하면 누구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사회의 진화는 그렇게 안배돼 있어서 결국은 불평등이 사라진 자유의 왕국, 유토피아를 향한다는 주장)이 비과학적일뿐더러 현실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결과들을 지적(반증주의를 적용한 결과)하며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물론 칼 포퍼도 마르크스가 무엇을 말하려 했고,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 것을 성찰해냈다는 점에서 위대함은 인정했다. 또한 포퍼의 마르크스 비판이 항상 참인 것도 아니다. 그의 비판은 반증주의라는 그의 과학철학에 기원하는데, 그의 반증주의에도 오류가 존재한다. 필자는 정체된 진보세력이 세상을 바꾸려면 칼 포퍼와 토마스 쿤 사이에서 벌어진 과학혁명에 관한 치열한 철학논쟁을 곱씹고 곱씹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생각이며,실제 장하석 교수가 하고 있다).



신이 보통 <역사>라고 일컫는 국제적 범죄와 대량학살의 역사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신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잔인하며 치졸하기도 한 짓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인간의 삶의 영역 안에서 참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제대로 말해줄 수 있겠는가. 잊혀진 사람들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슬픔과 기쁨, 그들의 수난과 죽음, 이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인간경험의 참된 내용이다.

 

 

인류의 역사가 모든 시대를 증거하며 온갖 피해와 희생을 감내했던 인류 모두의 역사가 아니면 무엇이랴. 승자나 강자의 역사는 극소수의 영웅적인 신념에 의해 절대다수의 약자들을 동원하고, 소비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집단 최면의 거짓된 역사였다. 성공하거나 승리한 사람의 행적과 불확실한 기억만이 유효하다면 인류는 동물 중에 가장 천박한 동물에 다름 아니다.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과거를 비판적으로 돌아봄으로서 새로운 성찰을 얻는 유일한 영장류라는데 있지 않은가. 인간만이 자유의지에 의해 새로운 길을 찾고, 때로는 자연의 흐름에 맞서기도 하기 때문에 존엄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열린사회를 위하여, 이성의 지배를 위하여, 정의와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그리고 국제적 범죄의 통제를 위하여 우리가 벌이는 투쟁의 관점에서 권력정치의 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 역사가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이러한 목적들을 역사에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가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진정한 자유주의(통치술이란 권력욕으로 변형된 자유주의와 구별해야 한다. 미셀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참조하라)의 보편적 가치(인권의 기본을 이루는)를 드러내는 다음과 같은 그의 주장들도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휴머니즘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철학자로 내가 꿈꾸는 역사의 재구성에 모범적인 예를 제공한다. 그의 주장처럼 역사의 주인은 소수의 강자나 극소수의 승자가 아니라 대부분이 상대적 약자인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의 필요성을 제시한 루소의 《인류 불평등기원론》과 자연주의 교육, 즉 인간을 선하고 자유로운 존재로 안내하는 《에밀》의 핵심 주제도 이와 비슷하다.



그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인간의 이성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을 자연과 함께 하는 삶과 공존하게 만드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다만 루소의 일반의지는 플라톤의 상기설(모든 인간은 태어나기 전의 완벽한 세상인 이데아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 인간이 이것을 떠올리기만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으로 마르크스까지 연결돼 있다)에 대한 주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전체주의적 사고의 기초가 될 수 있다. 그의 사상을 공부할 때는 반드시 민주주의적 사유체계로 필터링을 해야 한다.


 

자연과 역사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평등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 평등권을 위한 투쟁을 벌일 것을 결정할 수 있다. 국가와 같은 인간의 제도들은 그 자체로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보다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을 벌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프랑스의 자유주의자였고 《분노하라》는 소책자로 널리 알려진 고 스테판 에셀을 떠올리는 칼 포퍼는 칼 폴라니와 한나 아렌트처럼 ‘신은 승자와 언제나 함께 한다’는 통념을 철저하게 배격한다. 동시에 그는 모든 것을 한 번에 이루려는 무력적인 혁명도 반대한다. 열린사회라는 것이 꾸준한 변화와 혁신들이 쌓여 이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열린사회를 위한 투쟁과 그 적들(궁지에 몰리면 이들은 파레토의 충고에 따라 인도주의적 정감을 앞세운다)과의 항쟁을 벌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우리는 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무엇이 삶의 목적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달렸다. 사실과 결정의 이러한 이원론은 아주 근본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실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은 우리의 결정을 통해서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이는 물질이 나의 삶과 관계될 때만 의미가 있다고 말한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비판과도 상통한다. 하긴 칼 포퍼는 마르크스의 역사결정론(역사주의의 빈곤)을 비판한 것이지 그의 휴머니즘적인 신념과 과학적인 분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극소수의 현자를 내세워 전체주의적 지배를 꿈꿨던 플라톤을 맹렬히 비판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도 초기 기독교의 이론을 제공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월가의 현인으로 등장한 탈레브의 《블랙스완》을 관통하는 주장도 플라톤의 주름지대(권위가 만들어낸 단순성, 다름과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성향)를 극복하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았던가. 변화 자체가 부패라면 열린사회는 애당초 불가능하고 인류의 진보도 불가능하다. 플라톤은 이것을 막으려 했기 때문에 열린사회의 적이 된 것이다.  

 

 

우리는 예언자로서 나서는 대신 우리의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우리의 오류를 항상 눈여겨보도록 우리 자신을 길들여야 한다. 권력의 역사가 우리의 심판자라는 생각을 우리가 내던져 버릴 때, 역사가 우리를 정당화해 줄 것인가에 대해 염려하는 버릇을 끊어 버렸을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아마도 우리는 권력을 길들이는 데 성공하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역사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정당화를 너무나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주인인 역사를 위해2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5.04 09:15 신고

    우리가 역사의 주인공이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 늙은도령 2015.05.04 13:38 신고

      이런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정립한 사람이 칼 포퍼입니다.
      자유주의자이지만 진보와도 많이 겹치는 과학철학자이고요.
      전체주의에 대한 암울한 경험 때문에 특히 열린 사회를 추구했지요.

      토마스 쿤과의 과학혁명을 놓고 설전을 나눈 것은 과학사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2. 『방쌤』 2015.05.04 11:14 신고

    바로 우리가 주인인데 말이죠
    다들 주인의식을 조금 더 강하게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3. 제이 2017.01.13 15:23

    우리가 배워온 역사가 정치권력의 집단학살과 국제적 범죄의 역사라고 말하는 칼 포퍼의 주장을 보고 충격이었습니다.
    그의 견해에 모두 동의하는것은 아닙니다만
    한번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네요..
    아 그리고 플라톤이 극소수의 현자를 내세워 전체주의적 지배를 꿈꾸었다는 것이 그의 철인정치 사상을 말하는것인가요?

    • 늙은도령 2017.01.13 16:24 신고

      네, 그러합니다.
      히틀러가 플라톤을 그렇게도 존경했던 이유였지요.
      플라톤의 철인정치는 철학자 입장에서 정치를 봤기 때문에 전체주의로 변질되기 일쑤입니다.
      플라톤은 <국가> <정치가>, <법률>을 쓰지 않았다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남았을 텐데, 이 세 편의 책 때문에 전체주의의 시조가 됐습니다.

      칼 포퍼를 볼 때 한 가지만 조심하십시오.
      그는 철저한 자유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근대이성이 창출해낸 현대성이란 즉각적인 만족을 위한 소비지상주의와 무한투쟁을 장려하기 때문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왜곡돼 전달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인간이란 이기적인 유전자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우리는 그저 복잡한 생존기계가 아닌 스스로 운명을 창조할 수 있는 위대한 종이자,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지적 존재이다. 신이라는 존재와 무한이라는 개념을 추상할 수 있는 인간이란 종은 그래서 한 명 한 명이 작은 우주이며, 곧 신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언자로서 나서는 대신 우리의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우리의 오류를 항상 눈여겨보도록 우리 자신을 길들여야 한다. 권력의 역사가 우리의 심판자라는 생각을 우리가 내던져 버릴 때, 역사가 우리를 정당화해 줄 것인가에 대해 염려하는 버릇을 끊어 버렸을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아마도 우리는 권력을 길들이는 데 성공하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역사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정당화를 너무나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다.”

 

 

거의 모든 면에서 진보좌파인 나는 합리적 자유주의자인 칼 포퍼와는 몇 가지 면(특히 경제적 관점과 변증법적 유물사관)에서 일치하지 않지만, 정치권력의 역사에 대한 그의 인식과 그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래서 역사는 단순한 사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나와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혼자만의 역사와 이미 결정된 역사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승자와 강자의 역사란 폭력의 만연으로 짐승으로 되돌아간 인간이란 종의 비극을 보여줄 뿐이다. 민주주의란 그런 세상에선 무용지물이 될 뿐이다.



만일 위정자가 국민의 뜻에 반하는 통치를 하면, 그를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며, 열린사회가 지향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라고 했다. 위정자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도 국민이고, 그의 탈선을 막기 위해 그를 끌어내리는 것도 국민이 권력을 회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전 세계의 위정자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며, 이럴 때만이 열린사회는 점진적인 발전을 할 수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발전이 가능하다.

 




알렉시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인간은 권력의 행사나 복종의 습관으로 타락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 부정하다고 믿는 권력을 행사하거나, 부정하게 탈취되고 억압적이라고 스스로 여기는 통치에 복종하게 되면 타락하고 만다”고 한 것도 매우 중요한 성찰을 제공한다. 이는 승자와 강자의 공적독점을 대체한 사적독점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더구나 사적독점이 공적영역마저 사유화하는 이 시대에는 더욱더 유효하다.



‘억압과 착취 속에서도 세상은 돌아간다’고 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진정한 자유는 불멸의 가치로서 영원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자유가 없다면 인류의 존엄성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경제적 평등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역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이던 정신적이던 사회적이던 간에 평등이라는 것이 탄생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불평등한 부조리에 저항하고 투쟁해야 한다(생명의 침해불가능한 존엄성과 탄생의 불평등은 다른 얘기다. 이 둘을 혼동하면 안 된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자로써 살아가지 않는 한 나는 타인에게 비쳐진 나일 수밖에 없다. 타인이 지옥일 수는 있어도 존재 자체와 관계를 거절할 수는 없다. 죽음마저도 자신의 삶의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 선택하는 가장 극단적인 저항이라고 말한, 자본주의 사회가 철저하게 배격한 위대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우리나라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과소평가된 철학자로 스피노자와 함께 진정한 의미의 자유주의자이자 진보주의자였다)의 말을 잠시 빌려보자.

 

 

“타방이 있어야만 일방이 있으며, 타방이 없으면 다른 일방도 소멸되어 버린다. 양자는 서로 직접 접경하여 객관이 시작되는 데서 주관은 끝난다. 양자의 경계가 공통된 것은 모든 객관의 일반 형식, 즉 시간·공간·인과율이 객관의 인식이 없이도 주관에 의해 안전히 인식”될 수 있다.

 

 

인간은 뉴런거울신경을 지니고 있어 사전 접촉이 없었던 상대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인식할 수 있다. 나와 타인의 경계가 공통된 것은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것이 오히려 인위적이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나는 상대가 있어야 존재하며, 상대 또한 내가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주관이 타인의 주관을 억압해서는 안 되고, 나에 대한 타인의 주관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사실이라는 객관적 팩트(시간과 공간, 인과율에 의해서 시계열 상으로 진열되는 역사의 단편들)는 의미라는 주관적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만, 내가 소중한 것만큼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과 믿음이, 역사에 적시될 팩트를 결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는 모든 사람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곡이 없는 절대 다수의 삶의 이야기들. 최초의 모든 이들과 그 후손들 모두가 주인공인 보편적 역사의 탄생. 

 

 

이번에는 인류의 위대한 현인이며 공화국의 부활을 꿈꾸었던 정치학자의 입을 빌려보자. 그녀는 인간은 늘 출발할 수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인간의 조건』, 누구나 상황에 따라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예루살렘의 아히이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와 인류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던 히틀러의 나치를 파헤친 『전체주의의 기원』 등을 쓴 한나 아렌트다. 좌파와 우파를 떠나 오직 인간에만 집중했던 그녀의 사상은 네그리의 비판을 떠나서도 인류의 자산임에 틀림없다. 하물며 다음과 같은 통찰은 어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확신은 역사를 상투적인 틀로 해석하는 길로 이어질 수 있다. 이해란 잔악무도함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례에서 전례 없는 일을 추론하거나 현실의 영향과 경험의 충격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도록 만드는 유추와 일반화를 통해 현상들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이해는 오히려 우리의 세기가 우리 어깨에 지운 짐을 검토하고 의식적으로 떠맡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짐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그 무게에 패기 없이 굴복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이해란 현실에, 그것이 무엇이든, 미리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주의 깊게 맞서는 것이며 현실을 견뎌내는 것이다...현실을 아무런 편견 없이 감연히 맞서 이겨내는 것이다. 

 


내가 나의 능력에 비해 너무나 과분한 일인 인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에 대한 이해가 유치하고 깊이가 턱없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나는 가능한 한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최대한 알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강자와 승자 위주의 현실에 대해 아무런 편견 없이 맞설 수 있을 것이며, 나와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어나 연대를 이룰 때 그들에 맞서 싸워 이길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과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있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나는 더욱 분명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권력의 결정체인 새로운 제국과의 싸움이 어찌 간단할 수 있겠는가? 제국의 체제 논리 때문에 전 세계가 상시적 전쟁 상태에 빠져든 상황까지 고려하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어찌 그에 대적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노력하고 연대한다 해도 무적의 제국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나는 모든 제국과의 싸움에 임해, 그 투쟁의 지평선을 최대한 넓히고자 한다. 더하여 이런 투쟁이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그 투쟁들이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고, 삶의 현장에서 네트워크 식으로 연결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서로의 특이성을 인정하며 공통의 가치를 창출해가기를 희망한다. 

 

 

만일 내 터무니없는 희망이 현실이 된다면 그 파급력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내가 다시 쓰고자 하는 약자들의 역사이며,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세계사의 진정한 모습이다. 부디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강자와 승자의 역사에서 사라진 수많은 약자들과 평범한 사람들의 안식처이자 재발견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지상에서 보고 싶은 수없이 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성지의 일단이라도 보여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T.E.로렌스의 《지혜의 일곱기둥》에 나오는 인용문으로 글을 마칠까 한다. 새로운 출발점에 선 내 마음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며, 세월호 유족들의 입장에서 역사를 쓰면 똑같은 마음에 이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ㅡ특히 지식인들은 반드시 세월호 유족의 입장에서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슬프고도 참혹하며, 좌절하지 않는 위대한 역사를 써야 한다, 그들의 성지로 가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나는 문득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바로 순례자들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대에 걸쳐 북쪽의 민족들은 성스러운 유물에 대한 신앙심을 가슴속에 품은 채, 성지를 방문하기 위해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아랍 혁명은 순례자들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이상을 대신하여 또 하나의 이상을, 계시에 대한 과거의 믿음을 대신하여 자유에 대한 믿음을 품고, 북쪽으로, 시리아로 돌아가는 것이다.” 



교양과학서로서 가장 많이 팔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이오니아의 자연과학에서 현대물리학까지 인류의 과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발전해왔는지 보여주는 최고의 고전 중 하나이다. 멋진 문장으로 인류의 과학사를 풀어낸 《코스모스》는 그리 어렵지 않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 누구라도 도전할 수 있는 최고의 교양과학서다. 이 책을 정독하게 되면 과학 얘기가 나왔을 때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척을 할 수 있다. 

 

 

                                        

 

 

 

패러다임 이론을 정립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와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조금 지루하지만 제임스 베니거의 《통제혁명》 등을 추가로 읽으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많이 꿀리지 않고 과학사에 대해서 토론을 이어갈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면 리처드 파인만의 《물리학강의》 시리즈 3권에 도전해 보라. 

 

 

이 책들을 다 읽으면 과학사에 대해 강의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이보다 더 큰 이득은 인문학과 사회학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는 데 있다. 우리는 과학이 인문학과 사회학과 별개의 것인양 생각하기 일쑤지만 모든 학문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 물리학과 화학, 생물학이기 때문에 인문학과 사회학에도 이 세 개의 학문적 지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번 글에서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나오는 진화의 예를 옮겨놓을까 한다. 이 내용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면 《코스모스》를 구입해서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면 교양과학사도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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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5년 왜국의 천황은 안토쿠(安德)라는 이름의 일곱 살 소년이었다. 그는 헤이케(平家) 사무라이 일파의 명목상 지도자였다. 당시 헤이케 파는 숙적 겐지(原氏) 파와 오랫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러 오던 중이었다. 이 두 파의 사무라이들은 서로 자신들의 조상이 더 위대하므로 천황의 자리는 자기네가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싸웠다. 둘의 자웅을 겨룰 운명의 해전이 1185년 4월 24일 일본의 내해 단노우라에서 벌어졌다. 이때 안토쿠 천황도 전함에 타고 있었다.

 

 

헤이케 파는 수적으로 열세였고 전략 면에서도 겐지 파에 비해 처지는 편이었다. 이 해전에서 헤이케 파 병사들이 수없이 전사했다.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병사들도 나중에 바다에 몸을 던져 집단 자살했다. 천황의 할머니 니이(二位尼)는 천황과 자신이 적에게 포로로 잡혀 갈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

 

 

그 해 황제는 일곱 살이었는데 나이에 비해 무척 조숙했다. 그는 매우 예쁘게 생겨서 얼굴에서부터 밝은 광채가 발하는 듯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등 뒤로 길게 늘어뜨린 어린 천황은 겁에 질려 한껏 불안한 표정으로 할머니 니이에게 물었다. “저를 어디로 데리고 가시나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어린 천황을 그의 긴 머리카락으로 묶어 줬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어린 천황은 작고 예쁘장한 두 손을 한데 모았다. 먼저 동쪽에 있는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작별을 고하고 서쪽으로 돌아서서 나무아미타불을 반복해서 읊었다. 니이는 “우리의 황도는 바다 저 깊은 곳에 있습니다”라고 말한 뒤 두 팔로 어린 천황을 꼭 껴안은 채 출렁이는 파도 밑으로 가라앉았다.

 

 

헤이케 함대는 전멸 당했다. 살아남은 사람이라곤 여자 42명뿐이었다. 이들은 원래 궁중의 시녀였는데, 그 후 전쟁터 근처에 살던 어부들에게 몸을 팔면서 살아야 했다. 그러는 동안 헤이케 파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시녀와 어촌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은 단노우라 해전을 기념하는 축제를 열기 시작했다. 이 축제는 오늘날에도 매년 4월 24일에 거행된다.

 

 

축제일이 되면 자신을 헤이케 사무라이의 후손이라 생각하는 어민들은 대마로 만든 옷을 입고, 검은 머리덮개를 쓰고 물에 빠져 죽은 천황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아카마(赤間) 신궁으로 행진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단노우라 해전 이후에 일어났던 일들을 재연하는 연극을 관람하기도 한다. 몇 세기가 지난 후에도 사람들은 사무라이 유령들이 바닷물을 퍼내느라 헛수고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그들은 지금도 바다에서 피와 패배와 굴욕을 씻어 내려고 그런다는 것이다.

 

 

어부들 사이에 구전되는 전설에 따르면 헤이케의 사무라이들은 게가 되어 지금도 왜국 내해 단노우라의 바닥을 헤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발견되는 게의 등딱지에는 기이한 무늬가 잡혀 있는데 그 무늬는 섬뜩하리만큼 사무라이의 얼굴을 빼어 닮았다. 어부들은 이런 게가 잡히면 단노우라 해전의 비극을 기리는 뜻에서 먹지 않고 다시 바다로 놓아 준다고 한다.

 

 

이 전설은 우리에게 재미있는 문제를 하나 제공한다. 어떻게 무사의 얼굴이 게의 등딱지에 새겨질 수 있었을까? 답은 아마도 “인간이 게의 등딱지에 그 얼굴을 새겨 놓았다”일 것이다. 게의 등딱지 형태는 유전된다. 그러나 인간처럼 게들에게도 여러 유전 계통이 있게 마련이다. 우연하게 이 게의 먼 조상 가운데 아주 희미하지만 인간의 얼굴과 유사한 형태의 등딱지를 가진 것이 나타났다고 가정해 보자.

 

 

어부들은 단노우라 해전 이후에도, 그렇게 생긴 게를 먹는다는 생각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 게들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냄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화의 바퀴를 특정 방향으로 돌렸던 것이다. 평범한 모양의 등딱지를 가진 게는 사람들에게 속속 잡혀 먹혀서 후손을 남기기 어려웠다. 그러나 등딱지가 조금이라도 사람의 얼굴을 닮은 게는 사람들이 다시 바다로 던져 넣은 덕분에 많은 후손을 남길 수 있었다. 게 등딱지의 모양이 그들의 운명을 갈라놓은 셈이다. 생존 확률이 점점 높아졌다.

 

 

마침내 보통 사람이나 보통 왜국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무섭게 찌푸린 사무라이의 용모가 게의 등딱지에 새겨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결코 게들이 원해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며, 게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도태 혹은 선택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사무라이와 더 많이 닮을수록 생존의 확률은 그만큼 더 높아졌다. 마침내 단노우라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무라이 게들이 살게 됐다.

 

 

이 과정을 우리는 인위 도태 혹은 인위 선택이라 부른다. 헤에케게의 경우 게들이 진지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그 길을 택해서 그런 등딱지 모양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부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 선택에 간섭한 결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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