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테크놀로지를 만들면, 그 다음에는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만든다.

                                                                                                                     ㅡ 닐 포스트만이 《테크노폴리》에서 인용

 

 

테크놀로지는 우리에게 자유를 약속하면서 우리를 구속한다.

                                                                                                              ㅡ 셰리 터클의 《외로워지는 사람들》에서 인용

 

 

문재인 정부의 지지층에서 20대 남성의 이탈이 심화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새로운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베이비붐 세대의 자식 세대이자 밀레니엄 세대로 대표되는 이들의 이탈에는 '급진화된 페미니즘으로 인해 20대 여성에 대한 20대 남성의 구조적 역차별'이라는 (정당성은 떨어지지만 마냥 무시할 수 없는) 공통의 피해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숫자가 가장 많아 경쟁이 제법 심했지만, 산업자본주의 전성시대와 함께 했기 때문에 취직의 어려움을 겪지 않은 베이비붐 세대의 자식들인 이들의 피해의식은, 부모세대 다음으로 숫자가 많음에도 기술 발전의 결과인 일자리 급감과 청년실업의 증가, 제조업에서 지식·첨단산업으로의 전환에 따른 노동 내용의 변화, 신자유주의 득세에 따른 무한경쟁, 세습자본주의의 등장에 따른 불평등과 양극화의 심화 및 사회이동성의 파괴, 성평등을 위한 여성 배려 정책, 군대라는 피할 수 없는 의무(가산점마저 폐지됐다) 등의 피해자로 전락했다는 피해의식과 반발의 정서가 기본으로 깔려있다.  

 

 

 

 

여기에 가부장적이며 남성우월적 사회에서 살아온 기성세대들과 기성언론(특히 진보매체)이 다양한 종류의 페미니즘을 성평등 실현을 위한 여러 가지 수단 중 하나로 생각하지 않고, 이데올로기적 신성함을 부여한 목적론적 접근(목표한 것을 달성할 때까지 타협을 하지 않는)이 더해지면서 이들의 피해의식은 분노와 여성혐오, 성폭력 등으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대학로 집회와 '이수역 사건'으로 대표되는 성대결의 극한대치는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지지율 하락을 넘어 이를 이용해 정치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표퓰리스트의 득세와 증오범죄의 증가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이런 현상은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모든 대륙과 모든 수준의 국가에서 표퓰리즘 정치가 민주주의를 작동불능의 지경까지 내모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당선처럼 대중의 중오와 분노, 혐오, 차별을 먹이감으로 정치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정당, 선동가의 득세를 견인하고 있다. 전통적인 진보와 보수의 양자 대결로 녹여낼 수 없는 이런 정치·사회·문화적 환경의 대격변은 세대간 전쟁으로 확전되는 양상을 보이고, 전 세계를 휩쓸면서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더하여 갈수록 규모가 커지는 '퀴어 축제'에서 보듯이 페미니즘의 울타리 안에 최대한의 여성들과 다양한 형태의 성소수자들(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표현함에 있어 대단히 적극적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약자일지언정 정치적으로는 강자에 속한다)을 끌어들임으로써 인권운동으로써의 페미니즘의 가치를 숫적 대결이라는 정치사회적 권력투쟁으로 치환시켜 버렸다. 이런 행태는 3040세대 남성의 이탈까지 초래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인류의 진화가 여성의 희생을 전제로 했다는 과학적 사실(직립보행을 하면서 임신과 출산의 고통이 심해졌으며 오랜 기간의 육아와 50년 이상 계속되는 월경과 뒤이은 폐경까지)마저 더 이상 호소력을 갖지 못하는 슬픈 역설까지 초래하고 있다.

 

 

(KBS의 '심야토론'에 나와 퀴어 축제와 성소수자를 지지하며, 이성애자와 기독교인의 우려를 표명한 상대 패널을 경멸하는 표정과 과격한 언어, 확정되지 않은 과학적 사실로 공격한 진중권과 금태섭 같은 입진보와 민주당 의원이 남녀의 성대결을 더욱 부추겨 20대 남성의 분노를 자극해 이탈을 가속화시킨다. 금태섭은 동성애 성향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라고 했는데,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생물학자가 특정 지역의 유의미한 숫자의 게이들을 살펴본 결과 그들 대부분에서 특정 유전자가 발견됐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유전자가 동성애 성향을 발현시킨다는 의미에서 '게이 유전자'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후속연구와 임상실험으로 확정되지 않아 과학적 사실로 자리매김한 것은 아니다.)  

 

 

(부시의 브레인으로써 합리적 보수주의자에 속하는) 데이비드 프롬의 《트럼프공화국》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미국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괴롭힘과 수치를 당했다고 느꼈다. 여기에는 나이 든 백인 남성뿐만 아니라 젊은 백인 남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목부터 신랄한 연극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에는 '당신 존재 자체의 문제를 없애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트럼프에 표를 행사한 유권자들 10만 명 중 한 사람도 이런 연극이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인용한 메시지는 크고 분명하게 회자되었으며 미국의 광범위한 문화적 정신세계에서 반복적으로 울려퍼졌다." 

 

 

상당히 과장됐고 편향된 주장에 불과하지만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이란 존재가 유일제국이자 기축통화국으로 성장한 미국의 주류이자 표준이었는데 이제는 낡고 무지하고 고집스러워 시대에 뒤떨어지고 도태되는 사람들의 표상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들은 극우언론인 폭스 뉴스를 시청하지는 않지만, 폭스 뉴스가 전하는 분노, 유리됨, 수치의 메시지를 케이블이 아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라는 새로운 수단을 통해 접함에 따라 트위터에서 미국 백인 국수주의자 계정의 팔로우 숫자가 2012~2016년 사이에 무려 600%나 증가'했다. 집단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이들의 분노가 온라인의 급진화와 폭력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16년 대선 당일 오전, 시얀다 무훗시와는 '온라인의 급진화에 대해 논의할 때 사람들은 늘 무슬림을 언급하지만 온라인에서 백인 남성의 급진화는 천문학적인 수준'이라는 트윗을 올렸다. 그는 이어 "바로 이 때문에 나는 클린턴이 트럼프의 성차별주의를 파고든 전략을 절대 지지할 수 없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문제의 성차별주의 때문이다. 인터넷 집단은 성적 좌절감을 편견으로 급진화시켰다. 온라인 인구 집단은 가장 취약한 상태의 젊은 백인 남성을 찾아내서 진보가 서구 백인의 남성성을 파괴하기 위해 결집하고 있다고 꼬드겼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트럼프의 당선 뒤에는 이성애자 백인 남성의 좌절과 절망, 분노를 정치적 동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사회문화적 변화의 급진화가 숨어있었다.

 

 

프럼의 《트럼프공화국》은 표퓰리즘 득세의 위험성을 보수주의자 입장에서 서술했지만, 책의 제10장 <분노>를 보면 백인 남성만이 아니라, 자신이 서민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의 여성 유권자들이 '많은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면 서민 여성들의 삶도 개선된다'는 '페미니즘의 낙수효과'를 믿지 않기 때문에 트럼프에게 표를 주었다. 트럼프 지지자는 대졸 이하의 백인 남성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상류층·고학력이 주도하는 페미니즘의 약속를 믿지 않는 중하위층 여성 지지자들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탄핵은커녕 트럼프 지지율이 지속적으로 높아진 이유도 이들(샤이트럼프 유권자)의 적극적인 의사 표현 때문이며, 트럼프가 진보적인 엘리트 여성과 여배우들을 비하하는 발언을 상당히 줄였지만 완전히 멈추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트럼프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데는 셰일가스의 저렴한 공급에 따른 낮은 물가와 전기료,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높아진 산업경쟁력 등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지만 한 차원 깊이 파고들어가면 이런 사회문화적 변화의 급진화와 이런 변화를 강화시킨 디지털 기술의 폭주가 자리하고 있다. 자신의 어머니와 여자형제를 혐오하고 폄하하는 패륜적인 사진을 올리고, 세월호 희생자를 어묵에 비유하는 상식의 차원에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법과 탈법을 저지르는 일베의 등장과 득세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반인륜적이라고 해도 있을 법한 일이었고, 실제 그렇게 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 20대 남성의 일부가 보수화를 넘어 극우화하는 이유도 일베에 이은 메갈과 불꽃 페미의 등장과 득세와 궤를 같이 한다.  

 

 

여성 혐오와 증오, 차별과 폭력의 상징처럼 자리한 일베의 반인륜적인 행태(특히 여성 비하, 혐오, 차별, 폭력 등)에 분노해 그들의 언어와 수법을 미러링하는 방식으로 통쾌한 반격을 가했지만, 그러다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과 상당히 닮아버렸다. 일베처럼 극우화된 그들은 일베와의 전쟁을 모든 남성을 향한 극한 성대결로 확장시켰는데,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선언했고 '불꽃 페미'의 주장과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준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와 정부, 민주당의 대응에 실망하고 분노한 20대 남성의 이탈(양적으로 보면 지지율 하락의 변수가 될 정도는 아니다)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진심어린 반성도, 의미있는 변화와 혁신도 보여주지 못한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박근혜 탄핵 직전의 수준까지 올라온 것도 이런 현상들이 결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어부지리이자 반작용이다. 이명박근혜 9년의 퇴행과 역주행을 부끄뤄워했던 샤이박근혜 지지자와 수구보수들이 소리를 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여성을 유별나게 우대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20대 남성을 위한 피부에 와닿는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조금만 시간을 투자해서 살펴보면 문재인 정부가 20대 남성을 위한 좋은 정책들을 내놓고 있으며, 의미있는 결과들도 있고, 1년 정도만 더 지나면 피부에 와닿는 결과들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 20대들이 문재인 정부를 지지할 이유가 갈수록 줄어드는 것을 막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느낀 실망과 좌절, 불만이 분노를 넘어 문재인 정부에 등을 돌리고, 증오와 혐오의 표출이라는 극단적인 성대결로 치달으면서 분노하고 좌절한 20대 남성들이 여성의 군복무도 의무화하자는 터무니없고 비이성적인, 그러나 그들 나름으로는 너무나 절박하고 현실적인 주장을 내놓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20대와 밀레니엄 세대의 극한 성대결이 폭발 직전의 용암처럼 들끓음에 따라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정당, 선동가들이 기성정치권에 균열을 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황용석 건국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발표 자료에서 인용

 

 

이런 역주행과 퇴행의 성대결은 인터넷과 팟캐스트, 커뮤너티, 소셜미디어, 유튜브의 1인방송 등에서 쏟아져나오는 걸러지지 않는 '바이러스성 콘텐츠'(차별과 혐오, 분열과 폭력을 조장하는 루머, 혐오 발언, 음모론, 가짜뉴스 등)가 20대 남성에게 확증 편향과 동조화 확증 편향을 불러오면서 민주적 토론마저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자신과 비슷한 주장과 견해를 지닌 사람들끼리 모인 곳에서 편향된 글과 정보, 가짜뉴스, 루머 등에 노출되면서 잘못된 인식이 더욱 강해지는 확증 편향의 반향실 효과와 필터 버블(이용자의 성향, 기호, 기대에 부합하는 정보만을 검색해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인식을 강화하는 확증 편향의 현상을 말함)은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낸 온라인을 벗어나 오프라인에서도 기승을 부리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르렀다.  

 

 

필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규제받지 않기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은 채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정당은 물론 극우와 극좌, 인종차별주의자, 자유지상주의자, 백인우월주의자, 기독교 근본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문화적 급진주의자 등처럼 자유민주주의를 이용해 민주주의를 파멸시키는 특정 세력이나 인물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디지털 기술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디지털 기술을 만들고 승자독식의 수익을 취하는 IT기업은 경제대침체를 초래한 금융업체와 구조와 수익, 조직문화, 가치관 등에서 대단히 유사한데 이들이 신자유주의와 디지털 기술의 최대 수혜자라는 사실에 주목하면 필자의 우려가 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들의 전성시대에 태어나 자란 20대와 밀레니엄 세대들은 가치 판단의 기준에 (미셸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처음으로 정식화했고 웬디 브라운이 《민주주의 살해하기》에서 수정·보완했으며, 조지 리치는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로 풀어냈으며, 나오미 클라인이 《슈퍼브랜드의 불편한 진실》과 《쇼크독트린》, 《NO로는 부족하다》를 통해 고발한)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디지털 기술의 특성이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무의식과 같아서 삶의 모든 단계에서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릴 때 본인도 모르는 편향적 현실인식에 휘둘리고, 인지부조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이성적 결과를 양산하고 있지만 이런 병리적 현상에 주목하는 지식인과 학자는 거의 없다. 디지털 기술(게임과 도촬영상, 몰카 등)에 중독된 20대에서 스트레스가 증가하고 우울증과 조증 같은 정신질환이 늘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지만 정치경제적 이유로 통합적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닐 포스트만이 《죽도록 즐기기》에서 텔레비전의 기술적 특성을 파헤친 것에 이어 니콜라스 카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인터넷의 기술적 특성을 다루었던 것처럼 디지털 기술에 내재된 본질적 특성을 파악해야만 극단적인 성대결을 막고 표퓰리즘의 득세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세계경제를 장기대침체에 빠뜨린 서브프라임모기지 광란과 금융붕괴도 신자유주의와 디지털 기술(대부분의 학자와 지식인이 철저하게 외면하는 장기대침체의 원인 중 하나는 〈전망이론〉의 대니얼 카너먼, 《야성적 충동》의 로버트 실러,《인간행동의 경제학적 접근》의 게리 베커, 《괴짜경제학》의 스티븐 레빗과 스티븐 더브너 등으로 대표되는 행동경제학과 그 아류인 법경제학이다. 이전의 경제학을 대체해버린 두 개의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적 선택을 넘어 모든 행동까지 행태심리학적 분석과 법적 해석에 기초해 경제적 동기와 이익 추구 행위로 환원시킬 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은 전혀 하지 않음으로써 신자유주의 합리성의 득세에 일조했다. 행동경제학과 법경제학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로 다룰 생각이다)이 만나 발생시킨 인류사적 사건으로 전 세계적으로 표퓰리즘이 득세하는 근원이었음에도 주목해야 한다.

 

 

2008년의 금융위기는 1929년의 경제대공황보다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상위 1%의 탐욕에 날개를 달아준 대신 하위 90%에는 지옥을 선사해주었다. 약 8,000억 달러의 공적자금과 1경 4천조에 달하는 무제한 양적완화를 퍼부어 겨우 이루어낸 금융위기 회복의 혜택도 상위 1%에 집중됐을 뿐, 하위 90%에게는 한 줄기 빛도 비춰주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수천만의 중산층 가정이 무너졌고 수억 명의 하층민이 빈곤층으로 떨어짐에 따라 부와 기회의 불평등과 양극화는 지속가능한 성장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계층이동의 사다리란 사다리를 모조리 부러뜨린 세습자본주의의 고착화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최종 결과라 할 수 있다.     

 

 

구좌파에 가까운 정치학자이자 신자유주의 전문가로써 상당히 날카로운 성찰을 보여주고 있는 토마스 프랭크가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에서 금기처럼 여겨졌던 민주당 출신의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도 모든 책임을 보수우파에 돌릴 수 없음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진보 정치인과 같은 미국의 자유주의 정치인과 대통령들이 금융산업과 IT기업의 폭주와 광기를 막을 수 있는 모든 규제들을 풀어주고, 얼마남지 않은 제조업 기반마저 붕괴시키는 바람에 부시의 '미국과 세계경제 말아먹기'가 가능했다는 진보지식인의 뼈아픈 자기반성은 현재의 묵시론적 상황이 진영과 이념적 접근, 극단적 성대결로는 풀 수 없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20대와 밀레니엄 세대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인터넷처럼 인터랙티브 플랫폼을 제공하는 업체에게 서비스 사용자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명예훼손이나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위로부터 보호'(캐스 선스타인의 《루머》와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를 참조)하는 미국의 '통신품격법 230조'에 의해 우주적 차원의 이익을 독식하지만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구글과 페이스북, 거대 포탈 등처럼 초국적 플랫폼 기업에도 실질적 차원에서 규제가 부과돼야 한다(이들이 조세도피처로 빼돌리고 있는 천문학적인 이익에도 징벌적 과세가 부과돼야 한다).

 

 

골드만삭스와 JP모건, 로스차일드계 금융업체 등처럼 월가와 런던의 금융가에 둥지를 틀고 있는 초국적 금융기업은 물론 애플과 월마트, 나이키 등과 함께 신자유주의를 이끌고 있는 초국적 플랫폼 기업들에게 그들이 거두는 천문학적 차원의 수익에 준하는 정치·경제·사회적 책임을 부과하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는 더욱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우주적 크기로 불어나고 있는 빅데이터(이를 유지하고 늘려가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전기가 필요할 텐데, 구글과 페이스북 등은 그 많은 전기를 어떻게 확보할 생각인가? 폐쇄되고 있는 원전을 새로 지을 것인가?)와 뇌의 신경망을 본뜬 머신 러닝처럼 자기학습 알고리즘에 기반한 인공지능이 특이점을 돌파하기 전에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을 저격하고 폄하하는 가짜뉴스와 악의적인 루머의 온상이 어디인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재명 같은 표퓰리스트 선동가와 자유한국당 의원들처럼 반민주적인 수구꼴통을 감싸고 도는 글과 사진, 영상이 넘쳐나는 곳들이 어디인지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것만이 아니다, 이 땅의 여성들에게 지옥과도 같은 현실을 강요하는 수없이 많은 리벤지 포르노나 도촬 영상들이 난무하는 것도 스마트폰이나 초소형카메라 등처럼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 제품의 발전과 그것이 쏟아내는 악성 콘텐츠를 유통시킴으로써 천문학적인 이익을 누리고 있는 플랫폼 기업들의 무책임한 태도를 언급하지 않아도 되리라.

 

 

여기에 인간보다 더 똑똑한 인공지능이 가세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커즈와일이 주장하는 2,045년에 특이점을 돌파하던 돌파하지 못하던 우주적 차원으로 축적되고 있는 빅데이터에 기반한 인공지능이 특이점 주변에 이르기만 해도 현재의 성대결을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몰고가는 것은 식은죽 먹기에 다름아니다. 2,045년 논란을 무시한다 해도 그런 세상을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하고 모골이 송연한 전율이 일 정도로 공포스럽기만 하다(마이클 테너슨의 《인간 이후》와 닉 보스트롬의 《슈퍼인텔리젼스》를 참조하라)!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로 생명을 다한 것으로 보였던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이런 플랫폼 기업들의 간접적 지원하에 다양한 종류의 표퓰리스트에 의해 부활하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정보통신기술과 나노공학, 유전공학, 뇌과학 등을 포함해 첨단과학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을 인류의 삶에 유익한 것으로 여기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숙되지 못한 남성들의 성범죄 가능성을 폭증시키고, 온갖 종류의 분열과 차별을 조장해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극단화를 심화시키는 디지털 기술에 내포된 본질적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과제이며, 그것도 밀레니엄 세대들이 사회의 주류가 되기 전에 이루어저야 한다.

 

 

더 짧게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가름할 22대 총선이 실시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에서 이탈하고 있는 20대(남성이 주를 이루지만 여성도 늘어나는 추세)를 되돌아오게 하려면 밀레니엄 세대(인류 역사상 섹스의 빈도가 가장 많이 줄어든 최초의 젊은 세대. 그들의 좌절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고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저출산 문제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면 답이 없는 이유의 일부도 이것에서 기인한다)의 좌절에 대한 사회심리학적이고 진화심리학적인 분석과 사회문화적 접근이 병행돼야 한다. 정치경제적 분석과 접근도 중요하지만 20대의 이탈과 극우화의 기저에 자리한 파국의 징후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처해야 한다.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인권운동으로써의 페미니즘을 나쁘고 과격한 어떤 것으로 만들고 있는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은 20대 남성만이 아니라, 다른 세대의 남성 일부와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자신의 주장과 투쟁방식에 고민해야 한다. 자신이 당한 피해를 모든 세대의 여성과 모든 시대의 여성으로 확대해서 투쟁의 동력과 정당성으로 삼는 것은 지독한 난센스이자 월권이며, 백번 양보한다 해도 역사적 사실도 아니다(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로 다루겠다). 

 

 

자신의 삶에 자부심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여성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양성평등 증진에는 찬성하고 힘을 실어주지만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주장과 투쟁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성의 위대함이 남성들로 하여금 여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하고 존경하게 만드는 원천이며, 태초의 순간부터 그러했듯이 인류의 미래를 결정할 핵심 중의 핵심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여성이 행복하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가 불행해진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며, 현대과학이 아무리 황홀하고 유토피아적인 미래상을 제시한다 해도 인류가 하나의 종으로 지구를 풍료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성의 선택과 행복에 달려 있다.

 

 

'불꽃 페미'로 대표되는 페미니스트들이 이에 반대하고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더욱 공격적으로 나간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어떤 미래를 선택할지는 그들의 권리이지만, 보다 많은 호응과 참여를 이끌어내려면 작금의 20대 남성들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동시에 디지털 기술 폭주에 따른 여성의 사회진출 활성화 이면에 자리한 신자유주의 통치술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돈 되는 것이면 어떤 아이디어도 받아들이며,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신자유주의 이성은 여성 취업을 늘리는 것이 이익 극대화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어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이성에 따라 움직이는 기업들은 싸게 쓰고 쉽게 버릴 수 있는, 그 이상의 이익과 필요성이 사라지면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내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페미니즘 활동가나 지식인들이 내세우는 '페미니즘의 낙수효과'에 대해서도 근본적이고 반성적인 성찰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고학력 페미니스트들은 민간기업과 공기업 등에서 여성이 고위임원이나 경영진까지 올라가지 못하는 '유리천장'을 비판한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제정된 '남녀동수법'은 고위임원이나 경영진의 성비를 '50대 50'으로 만들도록 강제한다.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여성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며 패배감만 강화시킨다.

 

 

헌데 고학력 여성들이 민간기업과 공기업에서 여성이 '유리천장'이란 금녀의 벽을 뚫고 고위임원이나 경영진에 오른다 해서 그런 기업에 취업조차 못하는 저학력·서민 여성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 '페미니즘의 낙수효과'란 고학력 여성들이 그들의 출세를 위해 자신을 이용해 먹는 명분 정도로밖에 다가오지 않는다. 이런 기회와 신분의 차이가 서민 여성들이 급진적 페미니스트에 동의하지 않고, 심지어는 여서 혐오와 차별을 떠벌리는 정치인에게 표를 주기까지 한다. 남녀동수법은 자신과 같은 서민 여성에게는 역차별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활동가나 지식인들은 세대결로 가는 급진화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20대 남성을 넘어 남성 전체와 계속해서 싸울 것인지, 아니면 인구구조상 앞선 세대의 착취에 무방비로 놓일 10여 년 이후의 현실에 대항해 연대를 이룰 것인지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역전된 인구구조를 다룬 수많은 책들과는 달리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게 고령화 문제를 다룬ㅡ책의 주제는 세계에 관심을 끊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유일제국으로써의 미국 전성시대가 다시 온다는 것을 자랑하고 떠벌리는 것이다ㅡ피터 자이만의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을 보면 앞세대의 부양자 역할에 허덕이게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20대의 연대는 필수사항이지 선택사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2025~30년부터 본격화될 20대와 밀레니엄 세대의 노령인구 부양은 저출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혹은 어찌어찌해서  저출산 추세가 역전돼 경제활동인구가 늘어난다고 해도 평균적으로 60년이 지나야 청년세대의 과잉부양이 해소될 수 있기 때문에 오해와 편견, 상호부정에서 촉발된 성대결로 20대의 소중한 시간들을 허비하며 자기파멸로 이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의사와 과학자, 엔지니어 등처럼 남자 선배와 상사로부터 다양한 노하우와 지도를 받아야 하는 분야의 여성들은 극단화된 성대결(펜스룰 같은 것이 은연 중에 일어난다)이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많은 것들이 충돌하는 지점들이 예상외로 많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온오프라인을 뒤덮은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그래서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될 것을 공약하고 실천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까지 하락시키고 있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타협없는 폭주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역풍을 여성들에게 돌려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기만 하다. 메갈과 불꽃 페미 등의 극한적 투쟁이 지속될 경우 급진적 페미니즘이 역풍을 맞을 임계점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후들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필자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 이런 역풍인데, 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잠시 멈춰서 성대결로 비화된 현재의 권력투쟁을 냉정하게 들여다 봐야 한다.

 

 

인류가 손을 자유롭게 하고 소통의 수단으로 말과 언어를 사용하는 뇌의 발달을 핵심으로 하는 진화를 선택했을 때부터(창조론으로 보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부터) 자의던 타의던 남성은 여성에게 수많은 피해를 입혀왔지만, 1부1처의 가부장제를 강요한 산업혁명 이래 부모세대보다 가난한 최초의 자식세대인 작금의 20대와 밀레니엄 세대(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산업혁명 이전에는, 더 짧게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부모세대보다 가난한 자식세대가 수없이 많았다)는 수많은 여성들에 못지않은 시대와 체제,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20대 남성과 밀레니엄 세대도 분노하고 아우성칠 만큼 인류문명사의 명백한 피해자다, 일베까지 치닫는 것은 절대 인정할 수 없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 인류 앞에 놓인 수많은 멸종 시나리오를 최소화하려면 생명의 원천을 보호하는 동시에 양성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인권운동으로써의 페미니즘이 성공해야 한다(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상당 부분 수용한 《젠더 트러블》의 주디스 버틀러로 대표되는 '프랑스 페미니즘'의 득세는 양성평등을 위한 인권운동으로써의 페미니즘을 고학력 엘리트의 전유물로 만들어버렸다. 그 때문에 '페미니즘 낙수효과'를 단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저학력·저임금 여성들로부터 유리되는 역주행에 빠져버렸다. 90년대의 어느 날 프랑스식 포스트모더니즘에 포획된 페미니즘이 남녀의 극한 성대결을 부추기는 나쁜 이데올로기로 집중포화를 받은 것도 지독하게 어려운 단어와 문장 때문에 대중화가 불가능한 '프랑스 페미니즘'의 득세와 무관하지 않다.

 

 

고도화된 문명일수록 엔피로피의 역습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지속적인 생명의 창조와 조화로운 관계만이 이를 늦추거나 극복할 수 있다(맥스 테그마크의 《Life 3.0》을 참조. 이것을 다룬 책들은 수를 세기 힘들 정도로 많다). 지치고 다치며 아프고 병 드는 단백질 위주의 육체를 버리고 디지털장치에 저장된 정신적 존재로 우주로 나가자는 현대 과학자들의 미친 헛소리도 인류의 문명이 고도화될수록 엔트로피의 역습을 피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정당화되기 일쑤다(미치오 카쿠의 《미래의 물리학》과 《마음의 미래》, 브라이어 그린의 《멀티 유니버스》, 레이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와 《마음의 탄생》 등을 보라).

 

 

(인공지능이 특이점을 돌파할 것이며, 그에 따라 4차 산업혁명이 전혀 다른 세상을 창조할 것이라고 믿는) 유발 하라리가 《호모데우스》에서 능숙하게 다루었듯이, 신의 되지 못한 99.99%의 인류는 도태를 피할 수 없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생명 창조의 도덕적·종교적·진화적 수단이자 결과인 성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데이비드 레비의 《로봇과의 사랑과 섹스》에 이르면 성별은 더 이상 인간을 나누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극단적인 성대결은 인류의 멸종을 앞당길 뿐이며, 인류에게 주어진 시급한 문제들을 하나도 풀지 못한 채 성대결만 극대화하는 자기파멸의 지름길이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디지털 기술에 내포된 자유주의적이지만 방임주의적이며, 반민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문재인 정부의 미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은 물론 인류의 미래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너무나 높다(오늘은 여기까지, 조금 피곤하네요).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좋은글 2018.12.01 07:39

    오늘도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급히 쓰시느라 오자몇개 보입니다

  2. 뉴페이스 2018.12.01 17:57

    좋은 글이네요.
    왜 20대 남성이 분노하는지 잘 적어주신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개봉한 국가부도의 날을 봤습니다. 가관도 아니더라고요...
    누가 우리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었는지, 기재부 관리들은 어떻게 국민을 버리고 대기업을 살린건지 보고 나서도 억울함과 답답함이 가득하더라고요.
    헌데 페미니즘에 있어서도 지금 정부는 영화 속 관료들의 태도를 답습하는 것이 아닌지...심히 의심스럽습니다.

    • 늙은도령 2018.12.01 18:15 신고

      많은 부분을 줄이고 생략했습니다.
      책으로 출간했을 때는 20대 남성들이 극렬하게 반발하는 이유를 상세히 다룰 것이며, 다양한 분석기법을 동원해 남성의 좌절과 분노,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20대 여성들의 성대결 추구의 위험성을 지적할 것입니다.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쇼크독트린>을 보면 당시의 상황 일부가 나옵니다.
      사실 한국은 IMF에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됐습니다.
      김영삼 정부가 국민에게 솔직하게 고백하고 도움을 청했으면 별다른 피해없이 외화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났을 것입니다.
      IMF 덕분에 삼성그룹이 현대그룹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설 수 있었고요.

  3. 겜맨 2018.12.02 14:44 신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너무 문제네요

    • 늙은도령 2018.12.03 05:31 신고

      경제는 좋아질 것인데, 문제는 그 결과가 20대 남성에게도 돌아갈 것이냐 그것이지요.

  4. 2018.12.18 18:04

    안녕하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다만 90년대 프랑스의 페미니즘이 엘리트적이었다면 2018년 현재 한국 페미니스트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준 주요 전파 경로는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들입니다. 페미니스트들의 주요 안건 중 하나가 성폭력과 불법 촬영 및 영상 유포 이고, 여아 낙태가 횡행하던 시절 태어난 여자들이 지금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입니다. 유리천장과 채용 차별만을 들어 저임금, 저학력 여성들이 낙수효과에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는 부분은 의문이 드네요. 제 주변을 보면 몰카가 무서워 화장실을 걱정하고 모텔에 가는 걸 두려워 하는 건 학력과 직종을 가리지 않더군요. 엘리트주의로 치닫는 것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일베의 존재처럼 워마드로 대표되는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의 극우화입니다. 성소수자 혐오, 난민 혐오에서 이제는 박근혜 복권, 문재인 탄핵 등을 외치며 극우들의 행동에 점점 동참하고 있고 KT화재 때는 전쟁설 유포에도 적극 가담했죠. 이 극단적이고 비합리적인 대결구도를 가장 활용하기 좋은 사람들이 바로 한국의 극우파들이죠. 그들은 경제가 좋지 않다, 북한에 퍼주기 한다 등등을 들어 공통적으로 현 정부를 적대시하고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도움이 안 되는 정부라고 각종 가짜뉴스를 커뮤니티에 퍼뜨려 현 정부를 매도할 수 있으니까요. 오바마 이후에 트럼프가 나왔죠. 문재인 이후에 누가 이 땅에 등장할 지 궁금하고, 또 두렵네요.

    • 늙은도령 2018.12.21 04:28 신고

      대부분의 여성이 두려워하도록 만드는 것이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공포의 만연과 아슬아슬한 균형입니다.
      그것은 별도의 글로 다루거나 집필에 담을 것인데, 정확히 이해해야 할 것은 그런 여성의 공포가 디지털 기술이 주범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일부의 남성들은, 다수라도 마찬가지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성적 판타지를 충족하려는 것이고, 관음증만이 아니라 관종의 기질을 가진 디지털 세대의 특성이 뿌리깊게 자리했기 때문에 이런 야만의 시대에 들어선 것입니다.
      남성을 비판하기 전에 몰카와 리벤지 포르노가 범람할 수 있게 된 근본 원인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일베와 워마드, 불꽃 페미는 극우화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점점 늘어날 것인데, 미국과 한국의 다른 점은 이명박근혜 9년이 현재의 트럼프의 미국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런 위기의 시대를 지나왔지만 소셜미디어와 디지털 기술의 폭주에 대해서는 무방비 상태입니다.
      핵심이 거기에 있습니다.
      여성분들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남성은 지금의 20대와는 다릅니다.
      여성에 못지않게 작금의 20대도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기술 발전의 폭주에 따른 피해자입니다.
      싸우기 전에 왜 이렇게 됐는지 근본원인부터 파악하기를 바랍니다.
      걱정스럽고 안타깝습니다.
      20대가 삶의 절정이 아닌 이 시대의 자화상이....
      탈문명화의 비이성적 과열이....

  5. 혐오? 2018.12.20 10:07

    영감님 혐오 뜻을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자한당의 수구꼴통들과 그들만큼 뇌가 부식된 전·현직 정치인들, 전통의 기레기 조중동과 그들을 따라하기 일쑤인 진보매체마저도 문재인 정부 들어 소득불평등이 늘어났다며 입에 거품을 물고 있다. 자본주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뉴딜정책과 케인즈주의 덕분에 자유민주주의가 자신의 구성원들에게 약속한 온갖 장밋빛 혜택들을 단 하나도 누려보지 못한 밀레니엄 세대와 중년파산으로 내몰린 40대들의 문재인 정부 비판도 이들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도 소득불평등이 늘어났다는 통계청의 발표는 너무나 당연해서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J노믹스의 첫 번째 단추인 소득주도성장이 실패해서 이런 통계가 나온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의 경우) 지난 20년 동안 상위 10%%에게 하위 90%의 부와 기회를 이전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인상만으로, 그것도 2020년의 통계 때부터 조금이라도 반영될 최저임금 인상만으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불평등을 늘려온 지난 20년의 추세를 멈추게 만든다는 것은 경제의 신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18년 동안 필자가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주제가 신자유주의 합리성으로 작금의 소득불평등과 양극화를 만들어낸 절대적 원인이다. 많은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의식구조와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를 시장화시키는 궁극의 통치술이다(미셀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던진 화두로 필자가 아는 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탁월한 성찰을 담은 책이고, 이를 확대·재정립한 해낸 웬디 브라운의 《민주주의 살해하기》가 뒤를 잇는다. 푸코의 관심이 일련의 강의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것으로 관련 연구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너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울 따름이지만 브라운에 의해 그 일부는 채워질 수 있었다). 

 

 

김연아의 경제적 효과가 얼마니, 정치사회적 갈등이 초래하는 비용이 얼마니, BTS가 창출하는 경제적 이익이 얼마니, 노조들이 일으키는 파업의 손실 비용이 얼마니, 교황의 북한 방문의 경제적 파급 효과가 얼마니 하면서 국민적 관심을 끄는 모든 것들을 경제 지표(시장 지표)로 환산해 자본화하는 것도 신자유주의 합리성이 세상을 점령해가는 방식이다. 나라마다 10~20년 정도의 편차가 있지만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은 모든 노동을 개인의 책임하에 진행되는 투자의 형태로 치환함으로써 불평등과 양극화를 경제성장의 촉진제로 만들어버렸다.  

 

 

모든 노동(개인의 돈으로 쌓아올린 각종 스펙들 포함)이 인적자본화 되면 노동자는 더 이상 노동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라 자신의 자본적 가치를 팔아 이익을 얻어야 하는 경제적 인간으로 전환된다. 노동은 자본과 기업이 일정 금액을 지불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하에 자본과 기업에 파는 것으로 변질된다. 이럴 경우 투자의 원칙이 노동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투자 가치가 떨어지는 노동(학력이 낮을수록, 스펙이 적을수록, 기술숙련도가 낮을수록 불리하다)은 저임금으로 내몰리며, 가치가 사라진 노동은 버려지거나 대체되거나 폐기된다(노동유연화의 핵심). 

 

 

신자유주의 통치술은 또한 정부의 역할을 모든 경제 주체들의 경쟁을 활성화하기 위해 경쟁을 증진시키는 규제를 늘리고, 경쟁을 제한하는 규제를 폐지해야 하는 것으로 한정한다(세월호 참사의 간접적 요인). 투자는 개인의 책임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각종 복지를 줄이고 사회안전망과 공교육 지원을 최소화해야 하고, 그래서 긴축재정과 균형재정을 지향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합리성에 반하는 부실기업은 시장에서 퇴출시키거나 더 큰 기업에 흡수합병시켜야 하며, 그에 따른 대규모 해고는 경쟁력 저하에 일조한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야 한다(IMF가 김대중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한 것).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는 노조는 자유로운 경쟁을 방해하고, 자본과 기업의 투자수익률을 낮추기 때문에 없애야 한다(대처와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정부의 국정철학). 모든 교육의 목표가 민주적 이상과 정치사회적 지식, 자치 능력, 자아실현 능력 등을 지닌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비용 대비 투자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경제 주체를 배출하는 것으로 치환된다. 투자 대비 이익이 떨어지는 리버럴아츠(기초 교양)는 모든 수준의 교육에서 퇴출돼야 마땅한 학문이 된다. 다시 말해 자본과 기업에 이익이 되지 않는 학문들은 생존할 수가 없다.

 

 

이런 것들이 누적되고 축적돼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접어들었고 무한경쟁에 따른 극소수의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사회가 국가를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에서도 지난 30년 동안 지속된 이런 신자유주의의 폭격(노무현의 참여정부도 이런 추세를 거스를 수 없었지만 경제성장과 복지, 사회안전망, 국가안전시스템 구축 등을 늘려 신자유주의 폭주의 피해를 줄이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은 자본과 기업의 천국을 구축하기에 이르렀고,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청년과 여성과 노인을 절망과 빈곤의 질곡으로 몰아붙였다.

 

 

청춘들이 중시하는 가성비가 가치 판단의 최고 기준이 된 것도 신자유주의 통치술의 결과인 소득불평등이 극대화됐기 때문이다. 소득이 줄어들고 미래가 불확실해졌기 때문에 최소 투자로 최대 수익을 거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일반화된 현상이다. 소확행의 유행도 똑같은 관점에서 보면 가성비 중시와 동일한 지점에서 만나는 현상으로 밀레니엄 세대의 좌절과 절망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야망과 희망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소소한 행복으로의 후퇴뿐이다. 

 

 

민주주의와 인류의 종말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세상을 망가뜨린 신자유주의 통치술은 자유민주주의를 시장민주주의로 대체해버렸고, 필요하다면 사회주의적 요소를 가져다 쓰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돈만 되다면, 그리고 그 이익이 상위 1%에 집중된다면 어떤 아이디어라도 가져다 썼다(나오미 클라인의 《No로는 부족하다》를 참조). 골목상권이 대형프렌차이즈에게 잠식당한 것을 넘어 대리점 간의 출혈경쟁으로 내몰리는 것도 신자유주의 합리성 때문이다. 갈수록 커지는 소득불평등과 양극화는 20~40년에 걸친 (보수 정부가 주도한) 신자유주의의 작품이어서 특정 정부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소득주도성장의 일환으로 실시된 최저임금 인상 같은 것들이 이런 추세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는데, 그것도 정책의 효과가 나오려면 최소 2년은 걸린다. 대한민국처럼 중소상공인이 전체 국민의 20% 가까이에 이르고, 이중에서도 최저임금 인상의 파고를 견디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의 중소상공인이 150만 명에 이르는 상황에서는 그들의 피해를 만회해줄 (자한당이 악착같이 반대해온) 임대차보호법 같은 법률 제·개정과 (카드수수로 인하와 임금 지원, 노동시간 단축을 전제로 한 탄력근로제 등의) 정부 차원의 지원책이 제공돼야 한다. 

 

 

필자의 경우, 중소상공인에 대한 지원책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내년에도 최저임금 인상폭이 두 자리수에 이르러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내년 1사분기까지는 경제 상황이 나빠질 것이지만, 그 이후로는 약간의 성장세(낮은 유가가 핵심)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두 자리 수의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반신자유주의적 조치를 감행해도 될 것 같다. 내수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재정정책들도 과감하게 실시해야 하며, 하나의 방법으로 임대주택 건설을 늘리는 것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일정 수준의 가계부채와 대학등록금대출액의 탕감도 이루어졌으면 한다(모든 책임을 개인화하는 신자유주의 합리성에 익숙해진 국민들이 격렬하게 반대하겠지만).     

 

 

동시에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거나, 외국기업과의 경쟁에서 승리해 세금을 많이 낼 수 있는 기업의 경쟁력 제고에도 도움을 주어야 한다. 대표적인 J노믹스의 한 축인 혁신성장(조지프 슘페터가 개념화한 '창조적 파괴'가 원조라 할 수 있다)이 이에 해당한다. 노동자와 기업을 동시에 포용해 국민의 소득과 삶의 질을 높이는 공정경제는 이런 포용적 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구축될 수 있다. J노믹스가 신자유주의의 폭주를 막고 민주적 분배를 실현시킬 수 있는 최적의 정책 집합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기적으로는 뚜렷한 결과를 내놓을 수 없지만 문프의 J노믹스는 대한민국 경제를 신자유주의적 폭주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국민들이 (통계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마사지함으로써 J노믹스가 실패하도록 만들기 위한) 사이비 지식인과 교수, 보수 정치인의 무논리와 거짓 선동에 휘둘리지 않는다면 불평등과 양극화를 늘리기만 해온 신자유주의 통치술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갈수록 늘어난다. 소득분위 최하위와 차상위의 소득만 줄었다는 통계는 아픈 현실이고 J노믹스에 불리하지만, 본질적인 차원의 분석없이 단기적 현상만 놓고 소득주도성장을 실패로 단정하고 후퇴할 이유란 없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이 글도 초고입니다. 기술 발전에 따른 온갖 부작용을 포함해 대단히 많은 부분을 첨가해야 하지만 핵심 논리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에 들어서는 하나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충돌되는 현상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세분해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커졌습니다.) 

  1. 카사바 2018.11.26 23:38

    선생님, 오늘도 글 잘 봤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단락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갈수록 줄어든다"부분을 다시 살펴 봐 주세요! 혹시 "~늘어난다"가 아닐런지요?

  2. 뉴페이스 2018.11.27 00:31

    좋은 글인데, 흠...크게 3가지 정도 내용이 빠진 것 같아요.
    첫째는 부동산이고,
    둘째는 물가,
    셋째는 금리인상이 있겠네요...

    J노믹스의 정책은 훌륭하나 문제는 국민이 이를 기다려주냐 겠죠.

    • 늙은도령 2018.11.27 01:08 신고

      부동산은 별도의 글로 다룰 것입니다.
      부동산에는 다양한 역설이 자리해서 단순하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긴 글로 따로 다뤄야 합니다.

      물가는 핵심이 아니라고 봅니다.
      소득이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과민반응으로 이어진 면도 있고요.
      1인가구가 늘어난 것도 하나의 요인입니다.
      사람들은 문재인 정부의 정책으로 다른 부분에서 줄어든 생활비는 생각하지 않은 채 일부 분야에서 오른 물가만 생각하는 경향도 있고요.
      유가가 떨어졌기 때문에 올라간 물가의 대부분이 내려갈 것이고요.

      금리인상은 필연이지만 최대한 늦추고 있습니다.
      인상이 단행되면 가계부채를 감당할 수 없으니 정부나 한국은행도 최대한 자제하는 것입니다.
      금리인상에는 너무나 많은 외적 변수가 자리하고 있어서 답이 없는 부분입니다.
      미국도 금리인상을 못하는 이유가 연준과 트럼프의 의견이 갈리기 때문이고요.
      최근에 들어 경기가 하강하는 조짐이 강해지는 것도 한몫했고요.

      님이 말한 세 가지는 하나하나를 별도로 다루어도 대단히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글에서 다루지 않았고요.

      국민이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올바른 정책을 포기할 순 없지요.
      국민의 수준이 그렇다면 그 대가 역시 국민이 치루게 됩니다.
      제가 달라진 부분은 국민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것에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영위하려면 국민의 수준이 올라가야 합니다.
      체제를 탓하고 정당과 정치인, 언론을 탓해도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인 것이고 지금까지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것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국민이라면 저라고 어쩔 도리는 없지요.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겠다면 정부라고 해도 별 수 없고요.
      국민이 떠나가면 정권을 뺏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국민의 판단에 도움을 드릴 수 있지만 딱 거기까지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고 바랄 수도 없습니다.

      진보좌파는 너무 이상론만 애기해요.
      그것도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론을 애기해요.
      그렇게 갈등만 부풀려 놓고서는 자신들의 이익만 챙깁니다.
      보수우파만 비판했던 제가 진보좌파 비판에도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는 이유이지요.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보수우파의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현실을 이해한 다음에야 무엇부터 고쳐야 할지, 아니면 뒤집어버려야 할지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현대 미국 사회의 많은 부분은 예측 가능한 경력 향상, 임금의 꾸준한 증가로 그 특징이 규정되는 안정된 고용 관계 위에 토대를 두고 세워졌다. 내 집을 갖고, 자녀를 대학에 보내며, 공동체와의 유대 관계를 통해서 안정감을 찾는 등, 직장 밖에서의 삶의 질은 고용에 대한 위협과 불확실성을 제거함으로써 향상되어왔던 것이다.


                                                             ㅡ 카펠리, 로버트 퍼트남의 《나 홀로 볼링》에서 재인용




지난 일요일에 방송된 '김제동의 톡투유'에서,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는 지인이의 부모와 방청객으로 참여한 한 어머님의 얘기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안타까움과 절망, 희망과 힐링의 연속이었다. 필자는 지인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얘기들을 (상당히 재미없지만) 사회적 자본이란 관점에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지인이의 현재를 응원하는 마음과 미래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회적 자본이 탄탄할수록 잘 돌아가는 민주주의가 탐욕의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제어할 수 있었을 때 평생고용(이 글에서 말하는 평생고용이란 한 직장에서의 근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과 국민복지, 사회안전망이라는 공생의 제도가 자리를 잡았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였지만, 직원들은 물론 가족과 사회 전체의 이익도 고려하며 공생의 삶이 가능했다. 이 때문에 국민이 존엄하고 탈락자를 방치하지 않고, 시민이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합의하고 조정해 실제적 결과를 이끌어내는 정치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평생고용(과 평생교육)에 기반했기 때문에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는 다양한 공동체 활동 참여와 자원봉사나 헌혈처럼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개인은 안정된 직장과 수입으로 인해 평생에 걸친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었고, 그런 안정감에서 나오는 사회적 신뢰는 다양한 협력과 평화로운 공존을 이룰 수 있었다.



노동(감정노동과 가사노동 같은 비물질노동 포함)의 가치와 연륜이 인정되는 이런 사회는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경제적 분배가 이루어져 민주주의를 확장시키는 정치적 자유가 더욱 공고해졌고, 법 앞의 평등이나 정의실현이라는 열린사회의 실현이 가능했다. 국가 차원의 복지가 미흡해도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지역 공동체와 사회가 작동할 수 있었다.





이런 세상을 전복해버린 것이 모든 영역에서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 작동하도록 체제를 완전히 바꿔버린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완전히 압도하던 시절인 19세기로 돌아가자는 것이 신자유주의이니 평생고용을 기반으로 구축된 세계를 파괴하는데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단 40년 만에 평생고용에 기반한 안정적인 세상은, 생산 증대와 이익 독점만 신경 썼을 뿐, 평생고용이나 누진적 조세제도처럼 부의 재분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됐던 무한경쟁의 19세기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부와 권력의 불평등이 심해졌고, 사회적 자본은 적은 위험도 막아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



‘경제가 곧 대기업의 이익’을 말하는 시대가 도래했고, 민주주의는 독점 자본과 권력이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위에서 찍어 누를 수 있는 국가공권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변질됐다. 벤야민의 말처럼 ‘야만적이지 않은 문명은 없다’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억압과 착취의 시대가 고착화됐다. 지인이 같은 장애인들은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고 형편없는 감호시설로 보내졌다(미셀 푸코의 《광기의 시대》에 자세히 나와있다).  





시장자유주의 우파라는 공통점으로 이어진 이명박근혜 정부가 평생고용에 기반한 사회체제를 집중공략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 결과 고용의 불안정과 부의 불평등, 위험의 사회화가 일상화됐고, 용산참사와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자살, 세월호 참사, 경주리조트 붕괴, 메르스 대란처럼 막을 수 있었던 비극들이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쟁이 클수록 효율성과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승자독식을 이룩한 개별기업 차원에서만 진실인 신자유주의 신화를 무너뜨리지 않는 한 제2, 제3의 용산참사와 세월호 참사, 메르스 대란 등은 더욱 빈번하게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배제되고 격리되고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높은 지인이와 부모에게는 하루하루가 두려움과 절망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소비만 하고 살 수 있도록 진화하지 않았고, 오늘만 사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사회는 불안정해지고 위험해지며, 효율성과 생산성도 하락하고, 상호신뢰와 이타심, 호혜성 등의 사회적 자본도 구축될 수 없다. ‘김제동의 톡투유’에서 지적장애아(지인)의 부모가 세상이 공격적이고 배타적이 됐다고 말한 것도 사회적 자본을 파괴시킨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축적된 결과다.



우리 모두가 지인이의 부모가 될 수 있고, 지인이가 걸어가야 할 길을 밝힐 수 있고, 지인이와 함께 걸어갈 수 있으려면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를 거둬내야 한다. 권력과 자본이 사회적 자본을 파괴하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 영원한 타인이자 물리쳐야 할 적으로 인식시킬 때 인간은 일베처럼 짐승 이하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부의 재분배가 뒤따르지 않는 경제성장이란 말에 속지 말라. 1%의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나눠주는 것을 민생이라고 포장하는 말에 속지 말라. 경쟁과 불평등을 강조하기 위해 공짜점심이 없다는 말에 속지 말라. 타인의 것을 빼앗는 성공을 미화하기 위해 실패는 개인 책임이라는 말에 속지 말라. 극소수의 무임승차를 부각시키는 복지담론에 속지 말라. 상위 1%에 부와 권력과 기회가 독점되고, 그 폐해는 하위 99%에게 전가되는 세상은 그런 새빨간 거짓말들이 보편적 진리인양 호도되면서 이루어진 결과다.



하물며 생존선 근처의 삶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지옥으로 만드는 이런 세상이 지인이의 미래를 어떻게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신뢰와 협력, 호혜성의 문화를 높이는 평생고용이 인류의 자산 중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다시 깨닫게 됐을 때, 인류는 비로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벗어나 공존과 상생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누진적 증세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임금피크제와 일자리 나누기를 얘기하기 전에, 비정규직의 확대 적용과 노동유연화를 통한 경영효율성을 주장하기 전에,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신뢰, 이타적 협력과 평등한 자유를 구축할 수 있는 소득 보장과 복지 제공이 가능하도록 만들 때 우리 모두는 지인이의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고 동료가 된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탄생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때, 불평등하게 주어진 조건과 공정하지 못한 경쟁이 현재를 넘어 미래의 삶까지 결정하지 않을 때, 개인으로서나 조직의 일원으로서나 노동의 대가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삶의 질이 보장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지인이의 동료나 친구로서 삶이라 길을 동행할 수 있다.   




P.S. 로버트 퍼트남과 수많은 석학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필자 역시 마찬가지로, 태어났을 때부터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체험한 밀레니엄 세대들이 사회의 주류가 됐을 때 사회적 자본이 다시 회복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래로부터 더 많은 정의와 평등, 협력이 이루어질 때 생존선 이하의 각자도생에서 벗어나 존엄한 존재로서의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7.21 08:27 신고

    불편한 시선을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얼굴에서 묻어 나올수 있는 따뜻한 배려가 진정으로
    필요할때입니다

    • 늙은도령 2015.07.21 15:16 신고

      세상이 갈수록 험악해지는 것이 자본주의의 끝물에 나오는 현상이라 이를 어떻게 극복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백순주 2015.09.06 08:01 신고

    세종에 중증 장애학생들을 위한 '세종누리학교'가 조용히 첫 개교를 했습니다. 개발이 한참인 중심에서 벗어나 산 아래턱에 일찌감치 터를 잡았습니다. 일선 학교에서는 장애아들이 예체능 과목만 통합운영 되고 있습니다. 나머지 주요과목은 '개별학습실'에서 공부합니다.

    특수교육학개론 수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엔 두 부류의 엄마가 있다고 합니다. 장애아 엄마와 비 장애아 엄마.
    왜 이들이 무서워지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우린 그 이면보다 보여지는 현상에 집중해서 얼굴을 찌푸립니다.
    무엇이 화나게 하는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 들여다 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존엄한 존재로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날은 함께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 늙은도령 2015.09.06 09:12 신고

      네, 대단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소비지상주의가 극에 이르면 외모에 대한 호불호가 너무나 강해집니다.
      보기에 좋은 것만 쫓게 되고, 그것이 성형이나 지나치고 너무 어린나이부터의 화장 등에 매달리게 만듭니다.
      남성도 이제는 화장과 성형을 주저하지 않으니 외모에 대한 강박이 더욱 커졌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외국인들과 얘기하면 한국여성은 너무 날씬하다고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얘기인데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소비지상주의는 외모를 가꾸는 것을 부추기고 젊음에 집착하게 해서 멋있게 늙은 것을 회피합니다.
      이것이 쌓이면 세대간 갈등의 원인도 되고, 노인을 경시하는 것, 늙지 않기 위해 더욱 소비하고 성형하고 화장하게 만듭니다.
      결국 노후자금을 만들 수도 없고, 상위 1%만 좋은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까지 소비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애아들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통합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자본주의의 무서움이 이것입니다.
      예쁘고 아름답고 보기 좋으면 좋은 상품으로 인정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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