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철학이 죽었다"는 비트켄슈타인의 절망적인 선언이 나왔던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철학과 사회학이 죽어버린 시대가, 신자유주의 통치와 거대 미디어의 세상인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생각 자체가 사라진 채 끊임없이 이동하고 접속하며, 단 한 번의 클릭으로 자신의 과거를 삭제하고, 현재의 나를 끝없이 업그레이드하는 모바일기기의 특징으로 인해 지금-당장이라는 소비지상주의가 만연된 시대적 특징을 감안하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비판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의 지식인들이 현실비판에서 멀어지면 화석의 존재처럼 변해버린 존재의 근거마저 사라져버립니다. 포기는 쉽고, 타협은 탈콤하며, 전향은 부를 제공합니다. 지식인이 꼭 가난할 필요는 없지만, 비판정신을 잃을 만큼 많은 부를 쫓아가면 나태한 정신이 비판정신을 부패시키기 일쑤입니다. 타협과 타락의 시작은 늘 비슷한 것에서 비롯되기 마련입니다.  





유대인을 대량학살한 홀로코스트의 행정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그녀도 유대인이다)가, 인류사의 최대 악으로 지탄받고 있는 나치의 핵심인물 중 한 명이었던 아이히만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ㅡ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를 출간한 뒤, 좌우로부터 융단포격을 받고 자신의 주장을 더 이상 펼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면, 동시대의 주류에서 벗어난 사상을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것은 자살행위에 다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좌우의 융단포격을 받은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사상을 끝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지식인의 역할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지식인(모든 개인도 마찬가지이지만)에게 주어진 삶이 사막처럼 척박하고 황량해도 끝끝내 시작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을 철회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며, 휴머니즘을 가득한 정치철학의 부활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국 지식인의 표상이었던 리영희 교수와 최근에 생을 달리한 신영복 교수가 그렇게 살았지만, 그들의 뒤를 이을 행동하는 지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한국의 지성사는 각자도생의 퇴로에서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에 필적하는 지도자가 나오지 않는 것도 결국은 언론과 지식인의 권력과 자본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 종적을 감췄기 때문입니다.  



비록 큰 돈을 벌 수도 없고, 권력과 자본과 결탁한 사이비 지식인들과 다른 관점을 지닌 올바른 지식인들에 의해 많은 공격에 시달리겠지만, 비판이론을 업으로 삼고 있는 지식인이라면 '병 속의 편지' 같은 편법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부르디외가 《세계의 비참》의 추고에서 말한 것을 지식인(특히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는)이라면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사회적 세계를 연구하는 데 인생을 바칠 기회를 얻은 사람은, 세계의 미래가 걸려 있는 투쟁 앞에서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으로 있을 수 없다.         

 


부르디외의 성찰처럼, 이번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슴에 단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를 기리는 벳지를 달고 다니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여지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인간의 고통 앞에서는 중립이란 없다"고 말한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지상에서의 삶을 구원해야 하는 성직자와, 인류에게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인지 알려야 하는 지식인들은 인간에 사랑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헌데 교황이 '죽음의 문화'라고 말한 부정적 세계화가 지구의 곳곳을 가로지르며 전 지구적 시장으로 끌어들여 뼈속까지 빨아먹고 있는 지금/현재, 돈이 되는 것은 모두 다 전문화돼 일반인들은 접근하기 힘들고,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기도 힘듭니다. 전 지구적 지배계급과 거대 자본 및 초국적기업에 봉사하는 지식에는 국경이 없어졌고, 지식인들도 비슷하게 행동합니다. 세계화의 주역들을 위해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며 계급화된 엘리트로 자리매김한 현대의 지식인들은 부정적 세계화를 위해 시민을 소비자로 변질시키는 상징제작자와 상징조작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부정적 세계화의 정도가 심화된 대한민국에서는 족벌신문과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는 방송들을 맴돌며 정치권만 기웃거리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영혼도 철학도 없는 그들은 오로지 돈과 권력만 쫓아 불나방 같은 행태를 서슴지 않습니다. 지식인의 업무가 현실비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과 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이들은 사실과 진실은 물론 진리와 공리마저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 가치와 진실 여부는 전혀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지식의 이름으로 홍수처럼 밀려오는 디지털 세상에서 지식인이 할 일이란 자신의 사상이 경고하는 미래상이 틀리기를 바라면서 부정적 세계화의 현실과 사회비판에 물러섬이 없어야 합니다. 성장과 개발이 불러온 현실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비대칭적 종말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망가져 버렸지만, 모름지기 철학과 사회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지식인이라면 실낱같은 희망을 잉여에서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는 현 시대의 난민과 미래세대에게 제공해야 합니다. 



비판이론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지식인이라면,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동하는 공포》의 마지막에 했던 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회경제적 평등과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진보좌파의 가치가 민주주의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는 지식인이라면 더욱더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깨어 있고 행동하는 시민에서 소비하는 개인으로 파편화된 일반인들이 비판이론을 정립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리와 정의 및 자유와 평등에 대한 부단없는 탐구와 기득권의 탐욕을 고발하고 경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지식인들이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제시할 수 없다면,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폭력적인 현실은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득권의 탐욕에 지식인이 침묵하면 언론도 침묵하고, 교육도 무너지고 권력은 오만방자해집니다. 그럴 경우 바우만의 마지막 희망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호소도 아무런 역할을 못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 아니면 지식인과 민중 사이에 새로운 협약이 이루어지는 시대가 될 것이다. 희망을 갖자. 이 두 개의 미래에 대해, 아직도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가 남아 있으리라고.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뉴론7 2014.08.20 05:51 신고

    잘보고 감니다. 좋은하루되셔염

  2. 태봉 2014.08.20 08:41

    좋은 날이 올거라 희망해 봅니다
    잘 보고 가요 화이팅~~!!^^

  3. 유머조아 2014.08.20 15:58 신고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무척 철학적이십니다..

  4. 새벽을기다리며 2014.08.20 17:38

    좋은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십시오.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한 사회의 대중이 오도된 사고방식이나 정세판단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을 깨우쳐야 하는 것은 언론과 지식인의 최고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ㅡ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인용



최근에 들어 자신들만 옳다는 박근혜와 그의 환관들의 권력에 취해 그들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제대로 된 보도를 내보지 않고, 이에 침묵하는 이 땅의 지식인들을 보며 하나의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것은 사회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이 땅의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어떤 보도와 지식도 그것이 가장 필요로 할 때 이루어지고 제시되지 않으면 죽은 것이며, 비겁한 것이고, 쓸모없는 것입니다. 



쓰레기라는 소리가 가장 정확한 한국의 언론들과 자신의 동굴 속으로 숨어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외치는 것은 자기 변명이자 권력과의 타협이며,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최악의 행태입니다. 저는 이번 글에서 이 땅의 침묵하는 지식인들을 향해 제 생각을 석학들의 성찰에 도움을 받은 풀어보고자 합니다. 저의 생각은 그들의 성찰을 이리저리 조합한 정도에 불과하고 거기에 숟가락 하나만 얻은 것임을 먼저 밝혀둡니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편지를 써서 병 속에 넣은 후 바다에 떠나보내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병 속에 편지를 넣은 주인공은 병이 어디로 갈지, 누구한테 갈지, 도중에 깨지거나 영원히 바다를 떠돌지 알 수 없습니다. 운이 좋다면 병을 주운 사람이 편지를 읽을 수 있는 동시대의 사람일 수도 있지만, 몇 시대가 지난 다음이라면 편지의 내용이 해독 불가능한 것으로 버려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병 속의 편지'를 통해 지식인의 자세와 역할에 대해 다룬 철학자이자 사회과자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현재의 독일을 만들어낸 양대 학파 중 프랑크푸르트 학파(나머지 하나는 푸라이부르크 학파로 신자유주의의 원형인 질서자유주의 또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정립했다)의 1세대인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21세기 최고의 석학으로 꼽히는 영국의 지그문트 바우만입니다. 아도르노는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을 다룬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바우만은 근대이성의 산물인 현대성 대한 고찰로 유명한 《유동하는 공포》에서 '병 속의 편지'라는 비유를 통해 지식인의 비판정신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누가 받을 지도, 도중에 사라질 지도 모르는 병 속의 편지를 가지고 지식인의 비판정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대에 뒤쳐진 어리석은 짓일 수도 있습니다. 정체불명의 인문학 강의가 넘쳐나는 한국에서 별로 읽어주는 사람도 없는 글을 쓰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짓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지식을 검색하고 인용하면서도, 표절이 넘쳐나는 세상이 한국이니 모든 책을 직접 보고, 오랜 성찰을 통해 나온 글을 쓰는 것보다 어리석은 짓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이 넘은 나이에도 열정적인 사회참여와 집필을 보여주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의 도움을 받아 '병 속의 편지'가 지식인에 대해 지니는 알레고리(은유 또는 비유)를 다루어보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고 진정성을 담은 호소에 화답하는 차원에서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의 화두가 불통이 아닌 소통이고, 그것에 기초한 연대와 합의의 도출이라면 더욱더 그러할 것입니다.   



영국이 배출한 최고의 석학 중 한 명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위대한 휴머니스트이자 정직한 철학자이며 불굴의 사회학자였던 마르크스와 아도르노, 브르디외를 인용하며, '병 속의 편지'에 담긴 지식인에 대한 비유에서 두 가지 추정을 제시합니다. '병 속의 편지'를 통해 지식인의 비판정신과 비판이론에 대해 얘기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 추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병 속에 담긴) 그 메시지가 종이에 써서 병에 넣어 띄워 보낼 만큼 가치가 있다는 추정. 그리고 그것이 발견되어 읽혀질 시점(비록 그 시점을 미리 확정할 수는 없지만)에 아직도 가치가 남아 있으리라는(발견자가 그것을 해독하고 연구, 이해, 적용하기만 한다면) 추정.



이런 두 가지 추정은 어떤 지식인이 자신의 사상에 대해 '들을 준비도 뜻도 없는 동시대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을 때, 그래서 '정해지지 않는 미래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맡기는 일'이 낫다고 여겼을 때 가능합니다. 이는 어떤 지식인이, 특정할 수 없는 미래의 시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을 들어줄 것이며, 이해할 수 있으며, 연구하고 발전시켜 후대에 전해줄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리영희 교수가 생전에 누누이 말했던 것처럼,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도 동시대의 사람들에게서 아무런 호응도 받지 못하고, 토론을 거쳐 인정받거나, 검증 절차를 거쳐 진리의 영역으로 들어서거나, 심지어는 맹렬한 반박이라도 받지 못하면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시대에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받은 위대한 마르크스가 《자본론》과 수많은 저작들을 통해 시대를 통렬히 비판한 후에 "아무튼 나는 말했고, 나의 영혼은 구원받았다"고 말한 것처럼, 일종의 체념에 빠져드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병 속의 편지'는 영원한 가치를 믿는 사람, 보편적인 진리를 믿는 사람, 지금 진리를 찾고 가치를 지키려 애쓰게 만드는 우려가 계속되리라 의심하는 사람이 쓸 수 있는 편법이다. 그 병 속의 메시지는 좌절이란 일시적일 뿐임을, 그리고 희망은 계속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 가능성의 패배하지 않음과 그런 가능성을 가로막는 적들의 허약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식인의 역할이 치열한 비판정신을 잃지 않는 것에 있다는 아도르노의 성찰을 따라가며, 바우만은 위의 인용문을 재언급했습니다. 물론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살해 위협에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던 아도르노가 너무나 흥청망청이고 더없이 풍요롭고 자유롭지만, 자유민주주의에 집착하며 다른 이념적 지향에 대해 집단적인 폭력도 서슴지 않는 미국의 이중적 행태에 크게 실망한 영원한 이방인으로서의 정신적 부적응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다 해도 머나먼 이국에서 완벽하게 고립된 지식인이 이런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뻔뻔하고 파렴치할 정도로 표절이 넘처나고, 권력과 자본의 돈에 빌붙어 살면서도, 이런저런 사적 인연을 동원해 거대한 파벌을 만들어 그들만의 왕국을 구축하기에 바쁜 이 땅의 지식인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거짓이 더욱 그럴싸한 진실 같은 시대에서 초라해 보이는 진실을 외치는 일은 사막에서의 예언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겠지요. 


 


P.S. 지그문트 바우만의 명복을 빕니다. 그의 저작들에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저로서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현대를 관통하는 성찰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누구보다도 탁월했던 바우만의 신작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정말로 아쉽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의 저작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행복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90세가 넘어서도 치열하게 성찰했던 바우만에게 경의를 표하며, 영면에 들어 편안하기를 기원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Croaton 2014.08.02 16:36 신고

    인류는 결국 진보합니다. 먼 고대에서부터 보자면 정말 막장 같은 시대도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것을 딛고서 진보했고, 현재는 비록 이름 뿐이지만 민주주의까지 왔습니다.

    인류가 이렇게도 느려터지게 진보하는 이유는 의식의 변(전)환이 없어서입니다.(물론 제 생각) 그러나 개미가 기어가도 세월은 오래 걸릴지언정 결국은 42.195 미터를 돌파합니다. 당대에서 안되면 그 다음대에서라도 돌파하고야 맙니다.

    다만 서글픈 것은 모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음에도 그것을 꽃피우지 못하는 우리 이웃들이죠. 지금 당장 행복하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딴나라 이야기라고 말하는 깨어나지 못하고 잠 자고 있는 동포들입니다.

    어려서 만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만화의 내용 중에서 아스트랄이라는 세계가 나오는데 그 아스트랄이라는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꿈꾸고 소원하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가난한 이와 소외 받은 이가 있고 또한 권력을 행사하는 이와 거기에 빌붙어서 민중을 탄압하는 나쁜 넘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세계에 사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능력에 대한 가능성을 이야기하면 화를 낸다는 것입니다.

    그 만화를 본지가 40년은 된 거 같은데.. 지금 돌이켜보면 인간 사회가 원래 그러했나보다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러나 이 전체적인 것을 보기 위해서는 그 곳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 아스트랄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처지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이 없겠지만 거기에서 빠져 나와서 완전히 제 3자로써 볼 때에라야 문제가 뭔지.. 해결책이 뭔지.. 이런 게 보일거라고 생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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