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자(백인남성)들에게만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제한적 시도였던 민주주의가 수없이 많은 배제된 사람들의 저항과 투쟁으로 모든 국민에게 1인1표가 적용되는 단계까지 발전했습니다. 근대국가는 배타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영토) 내의 모든 시민(인구)에게 침해와 양도가 불가능한 인권과 다양한 형태의 사유재산과 사적 계약의 이행 

등을 보호(안전)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미셀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 참조). 





따라서 서로 다른 기원과 목적을 가진 민주주의와 근대국가가 만나는 지점에서 '개인의 안전과 그들이 소유한 재산의 안전은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합의(법과 제도 등으로 보장된 정치적 권리)가 이루어진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이중에서 하나라도 무너지면 정치적 권리는 제대로 행사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없는데 구태여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수고를 마다할 이유가 없겠지요. 



결국 민주주의와 근대국가의 조합이 최상의 이상향(유토피아)을 이룩하려면 모든 시민이 정치적 권리를 행사해 지켜야 할 것들(재산, 기회, 행복 등)이 있어야 하며, 상당히 부족하다면 반드시 제공해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모두가 평등하듯이, 법과 제도에 의해 국가와 사회의 일원이 된 모든 시민이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사회적 권리(복지국가 구축)가 제공돼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유럽의 선진복지국가는 이런 성찰과 실천의 결과물입니다(영국의 <베버리지 보고서> 참조).



정치·경제·사회적 평등이 강조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지배엘리트와 상위 1%의 세계화가, 이런 민주주의와 근대국가의 조합을 파괴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학자마다 출발점에 대한 인식은 다르지만, 영국과 미국의 슈퍼리치들이 헤리티지대단, 아담 스미스 연구소, 미국기업연구소 같은 보수연구소에 대규모 자금을 기부해 변방의 통치술이었던 신자유주의가 복지국가(사회민주주의)를 대체하도록 만든 것에는 일치합니다(다니엘 롤링의 《불의는 무엇인가》 참조).  



박근혜의 '줄푸세'에 모조리 담겨있는 이들의 공격은, 모든 시민에게 존엄한 삶을 보장하는 '사회적 권리'를 고비용·저효율의 상징인양 호도하고 왜곡해서 사회적 연대를 개인 간의 무한경쟁으로 대체하는 것에 집중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연대가 경쟁으로 대체되면, 혼자의 힘으로도 권력에 맞서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극소수의 거인들이 비슷한 처지의 시민들과 연대하지 않으면 사회적 권리를 지킬 수 없는 절대다수의 난쟁이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이런 면에서 볼 때 기본소득은 사회적 권리로 봐야 한다).





여기에 과학기술의 혜택과 디지털 파놉티콘의 구축(테러방지법이 대표적)을 독점하는 것까지 더해지면,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넘어 '고용없는 성장'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체제로 복귀하는 것을 전제로 한 '잉여'라는 시민들이 경제예비군으로서의 사회적 권리마저 박탈된 난민이나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가족과 사회와 국가가 제공하던 존엄한 삶과 안전보장이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지는 승자독식의 지옥이 도래한 것입니다(지그문트 바우만의 《모두스 비벤디》와 《쓰레기로 버려지는 삶》, 데이비드 라이언의 《감시사회로의 유혹》 등 참조).   



현대국가의 특징이 '유동하는 공포'가 만연된 '위험사회'로 접어든 것을 넘어, 민주주의와 근대국가의 조합이 작동하는 예전(짧게는 40년! 길게는 250년 전이다!)에는 잉여와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공간마저 사라진 지옥이 된 것도 사회적 권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란 무한경쟁이 초래한 정신질환자의 폭증이고, 곳곳에 자리한 정체불명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안전에 대한 공황적인 집착입니다(바우만의 《액체근대》와 《유동하는 공포》 등 참조).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CCTV와 인공위성이 동원된 블랙박스와 위치정보의 홍수에도 불구하고, 극히 미세한 사각지대의 존재에 불안해하는 것도, 이웃과 낯선 이들의 선의와 호의마저 경계하고 의심하는 것이 일상화된 것도, 그 때문에 작은 자극에도 폭발하기 일쑤인 분노의 과잉도,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적 권리가 뿌리까지 뽑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모두에 대해 타인이며 경계하고 의심하는 자들이며, 정치와 국가를 불신하는 난민입니다(니콜라스 카의 《유리감옥》, 한병철의 《투명사회》 참조)





대표적인 것이 세월호유족의 현실입니다. 필자가 세월호유족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세월호를 하루라도 빨리 인양하고, 본격적인 진상규명에 들어가려면 정치적 힘이 필요하다는 현실의식은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특정 정당을 지지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했습니다. 광복 이후 이 땅을 지배해온 거대양당이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두고 정치적 이득이나 챙기려는 행태에 극도의 불신을 가지게 됐고,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가 됐습니다.



그들은 단식을 함께 해준 문재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새누리당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던 새정치민주연합(박영선 원내대표가 협상을 이끌었었다)을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주 긴 싸움이 되더라도, 그래서 나머지 생을 분향소의 컨테이너와 거리에서 보내야 한다고 해도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특정 정당의 힘에 의존하는 어리석음은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세월호유족에게는 (또한 세월호참사를 그들의 비극으로만 떠넘길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민주주의와 근대국가의 조합이 약속한 정치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란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정확히는 우토피아)의 약속과 같습니다. '마국텔'이 종영되고, '야당 통합'이 상영되는 와중에 세월호유족과 특위가 간절하게 호소한 세월호특검법은 공론의 장에 올라가지도 못한 채 세월호처럼 수장됐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시민이기에 앞서, 잠재적인 헬조선의 세월호유족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가 '안전해지기 위해서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하위 99%에 속한다면, 이미 안전한' 상위 1%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술부터 퇴출시켜야 합니다. 민주주의와 근대국가의 조합이 모든 시민에게 약속했던 정치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연대를 복원하는 것만이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6.03.07 08:56 신고

    박근혜는 작은 정부를 표방하고 당선됐습니다.
    작은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지칭하는 표인데 공무원 수가 적은 정부라며 국민들을 속였지요. 그의 말대로 해석한다고 해도 국정원직원이 37만명이라는데...그게 작은 정부인지...ㅋ 입만 열면 거짓말입니다.

    • 늙은도령 2016.03.07 09:32 신고

      작고 권위적인 정부를 말하지요.
      통치에 필요한 인원은 늘리고 나머지는 없애 민영화하는 것, 그리고 제왕적 권력의 행사를 위한 권위주의적인 위계질서가 강조되는 정부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헌데 박근헤는 정부 자체를 죽여버렸습니다.

    • 소피스트 지니 2016.03.07 14:59 신고

      참 좋은 말씀이십니다. 작은 정부에 대한 개념을 잘 못 알고 계신분들이 많더라구요.

    • 늙은도령 2016.03.07 17:51 신고

      네, 많은 분들이 정치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지배엘리트가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2. 미시유에스 2016.03.07 10:51

    매일 늙은도령님 글을 읽고 또 많이 퍼가기도 하고 하면서 느끼는 것은
    이제는 박그네독재정권의 하수단체인 걱정원도 무소불위의 검은 힘이 더욱 날 뛸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이엠피터의 티스토리 떠난 이유도 계속된 정치 글 삭제였다고 하군요
    늙은도령님의 모든 콘텐츠도 앞으로는 사이트로 독립해서 옮겨갈 시기가 앞당겨 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듭니다

    • 늙은도령 2016.03.07 17:54 신고

      너머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크게 문제되지 않은 선을 지키며 씁니다.
      만일 저의 글을 건들면 제 인맥을 총동원해 싸울 것입니다.
      저는 기본적인 면에서 국민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당장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지배엘리트가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게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면 그때는 제가 좀 쉴 수 있을 것입니다.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하나의 프로그램.”

“하나의 프로그램?”

“응, 하나의 프로그램. 너무나 완벽해 그 어떤 것도 상대가 되지 않는, 그런 단 하나의 프로그램!”



동생이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나의 반응을 기다리던 동생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달아오른 나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서둘러 호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펴기 쉽게 접은 세 장의 A4용지였다. 동생은 내 눈앞에 그 용지를 펼쳐보였다. 동생은 점점 시력이 떨어지는 내 상태를 고려해 문자 크기를 13 정도로 한 것 같았다.



“형, 먼저 이것을 읽어봐.”



나는 동생이 펼친 종이에 적혀 있는 내용을 차례로 읽어나갔다. 「디지털 묵시록」이란 제목 하에 적혀 있는 내용이란 디지털 세계에 대한 암울하기 짝이 없는 그의 생각이었다. 특히 동생은 방송 환경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완전 전환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표명하곤 했었다. 동생은 디지털 기술에 내재된 표피적이고 파편적이어서 필연적으로 제어에 유리한 본질적 성향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동생의 생각이 이 정도까지 부정적인지는 알지 못했다. 고막을 울리는 소리는 이제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함성으로 커졌고 심장박동은 무려 평균적인 사람의 1/3에 해당할 만큼 빨라졌다. 나로서는 치명적인 고혈압 상태로 접어들기 직전의 위험한 상황이었다.



『과학과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만들어낸 총화이자 정수인, 스크린(TV, PC, 노트북, 스마트폰, 테블릿PC)을 보거나 접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린 나이란 없다. 스크린 하나 없이 살아야 할 만큼 열악한 가난과 절대적 빈곤도 없다. 스크린의 누적적이고 지속적인 메시지에 길들여지지 않는 생각이나 인식도 없다. 스크린이 담지 못하는 사실이나 사건, 현상과 환상도 없다. 스크린에 올리지 못할 사소한 일상이란 없고 업데이트 돼 수정되지 않는 지식과 이상도 없다. 스크린에 영향 받지 않는 단절된 시간이나 조각나지 않는 공간이란 없다. 스크린에 의해 변형되어 왜곡되지 않는 역사나 문화도 없다.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평가하며 상상하고 집착한다. 각자의 감정을 저장하고 반응을 공유하며, 개개의 경험을 링크하고 비슷한 생각을 검색하며, 편집된 주장을 전송하거나 수신 받는다. 우리는 세상이 더 과학적이 될수록 생각은 더 편협해지고 반응은 더 기계적으로 변하고 있다. 추상적 사고가 무의식적 반응과 행위에 갇혀 있는 동안 끊임없이 마음을 사로잡는 디지털 유혹만을 유령처럼 찾아다닌다. 거실과 식탁에서도, 길을 걷거나 운전하면서도, 버스와 지하철, 고속전철과 비행기 안에서도, 일을 하거나 대화하면서도, 신에게 죄를 고백하거나 사랑을 나누면서도 우리는 스크린에 앞에서 점점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류 역사의 모든 것을 담겠다는 디지털 스크린은 거대한 쌍방향의 네트워크이자 만능의 검색엔진으로 무장한 광고의 제국이다. 모든 감각과 환상, 접촉이 배제된 디지털 사정과 오르가슴의 경연장이자 소프트 파워에 대한 승자독식의 유토피아다. 스크린이 전달하는 일체의 메시지가 사실이며 실재이고 믿음이니, 이는 곧 21세기의 복음이자 전체주의의 창시자 플라톤의 환생이다. 따라서 스크린 자체가 모든 변화를 부정하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국가이며 사회이고 가족이며 나 자신이다. 우리는 단지 기쁨과 슬픔, 분노와 열정, 사랑과 이별, 탄생과 죽음을 업로드 하거나 다운로드 하기만 하면 된다. 스크린 안에서의 존재란 욕망의 투영이며 상징이고, 실존이란 배설의 터치이며 감각의 클릭이다.



스크린에 종속된 오감은 욕구를 충족할수록 예민해지고, 신경은 정보를 전달할수록 날카로워지며, 근육과 관절은 명령을 실행할수록 경직되어간다. 예민해진 감각은 신경을 건너 띠려 하고, 날카로워진 신경은 근육과 관절에서 자유로워지려 하며, 경직된 근육과 관절은 감각과 신경을 행위의 원천에서 배제하려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수십억 년에 걸친 누적적 자연선택이 이룩한 진화의 정수인 뇌의 기능마저 저하돼 서서히 스크린에 의해 정복돼 개개인의 생각과 감정, 기억과 인격마저 디지털 정보의 누적적 결정체인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이다.



스크린 세계의 첫 세대에서 그 다음 세대로 전해진 이기적 유전자가 스크린 안에서 일어나는 타인의 경험과 생각에 연결된 각자의 경험과 생각이 실제 환경과 혼동을 일으키면, 이는 기억의 혼돈으로 이어져 뇌의 퇴행을 초래한다. 이런 기억 작업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뇌의 가소성에 의해서 기억이 장기적 기억으로 강화될 때마다 이 강화돼 해부학적 변화에 이르게 되면 이는 곧 관련 유전자에 기록된다. 이렇게 변형된 유전자가 복사돼 후대에 전달되고 각 세대의 스크린 경험이 축적되면 인간의 뇌는 지금까지의 진화의 과정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신경회로를 형성해 다양한 사고와 개인적 경험에 의한 기억을 저장하는 유전자마저 즉각적이고 표피적인 작업 기억만 강화시키게 되면 마침내 인간은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는 그 지겨운 사고의 수고에서 해방되리라. 인간 진화의 정수이며 미래의 개척자인 뇌도 신경세포인 뉴런과 시냅스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기ㆍ화학적 반응의 복잡한 과정에 드는 수많은 에너지와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통합적 인지과정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는 말초적 자극에만 반응하리라.



따라서 스크린에 연결되지 않는 자, 최후의 타인으로 남아 소외되고 잊혀 저 스스로 소멸되리라.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니, 스크린을 통해 맛과 냄새와 은밀한 촉감까지 전달되는 날에 인류는 디지털 세계에서 완전한 통일을 이루리라. 그 질긴 인류의 염원이 실현되는 그날을 위해 우리는 리모트컨트롤이 만들어내는 분열되고 단절된 환상의 감옥에서 한껏 자유로우며, 정보의 바다를 마음껏 유영하고, 빛의 속도로 이어지는 디지털 네트워크의 이곳저곳에 분산된 나의 일부를 배설물처럼 남기면 된다. 타인과의 깊은 접촉은 그 자체로 범죄이니 공기처럼 자유롭고 물처럼 흘러서는 전자처럼 쾌속 질주할 일이니, 우리는 자아를 분열하고 해체하면서 전체의 조각으로써 통합된 하나의 그림으로 합쳐질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이 메시지와 이미지의 홍수와 휩쓸려 파편화되고 종교와 정치, 사회적 가치마저 상징화되면 삶과 메시지와 이미지는 삼위일체의 성역으로 들어선다.



이런 신화 창조를 앞당기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온라인을 유지하고 각종 알림 기능과 노출과 관음적 본능, 폭력적 성향에 충실할 일이다. 서로 교감하는 자에겐 무한의 쾌락이 주어질 것이니, 모든 메시지와 이미지에 부착된 링크를 따라 이동하고 가상의 버튼과 아이콘을 누르고 광고를 클릭하라.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전해주리니, 광고의 노출과 팝업의 습격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일이다. 약간의 피로와 산만함에 따르는 에너지 손실은 최소의 생각으로 최대의 쾌락을 얻는 기회비용이니, 이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상업적 정신의 정화이자 영원불멸의 진리이다. 무료로 주어지는 것에 복종과 권력이 교차하니, 최첨단 디지털 영상과 무한대의 하이퍼텍스트와 멀티태스킹의 영광은 지속 가능한 유일한 영역에 들리라.



이제 단순하여 즐겁지 아니한 것은 생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깊은 사유와 차가운 성찰이 떠난 자리에 표피적 재미와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오락이 들어서리니, 인류의 모든 유산이 한낱 재밋거리로 전락하거나 퇴행된 신화로 부활하리라. 상식과 이성이란 먼지 가득한 박물관 창고나 공동묘지에 묻힐 것이며, 파편적 재미가 만물의 척도에 오르리니, 오직 개념 있고 쿨 한 것들만 번성하리라. 그리하여 세상 자체가 오락이 되는 날, 스크린 앞에 새로운 것도 영원한 것도 존재하지 못하리라. 오직 스크린만이 비선형적 진화의 끝에 이를 것이며, 디지털 통로와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을 천사와 악마처럼 좌우에 거느린 채, 불멸의 권좌에 오를 것이다. 그렇게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들을 지배하여 영속하리라.



생각하는 자, 지워질 것이다.

의심하는 자, 삭제될 것이다.

판단하는 자, 차단될 것이다.

분노하는 자, 퇴출될 것이다.

거부하는 자, 폐쇄될 것이다.

도전하는 자, 해체될 것이다.

투쟁하는 자, 폐기될 것이다.



비약하라, 생각의 연쇄와 사고의 비선형적 통합에서 나오는 성찰을.

벗어나라, 삶의 다양한 기억과 경험의 차이가 주는 번뇌와 소외에서.

생략하라, 이성과 경험을 통해 싹을 틔워 성찰과 창의에 의해 꽃을 피우는 과정의 수고를.

만끽하라, 우연이나 기회의 차별이 가져다 준 달콤한 결실과 비교 우위의 카타르시스를.

반복하라, 위의 4가지 정언 명령이 요구하는 것들이 나와 세상을 대체하는 그날까지.』



나는 수려한 문장으로 디지털 세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일방적일 만큼 암울하고 부정적이게 그려낸 동생의 글을 읽고 나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뇌와 육체에 제공되는 에너지의 불균형 때문에 일반적 삶을 거의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나는, 인간과 세상과 우주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디지털 스크린을 통해서만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디지털 세계만이 삶의 전부라 해도 과하지 않았고 동생은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 않는가? 헌데 그런 동생이, 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목숨도 내놓을 동생이 디지털 세계에 대한 비관으로 가득한 글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을 위해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어달라니, 어찌 이를 조금이라도 상상이나 했겠는가? 게다가 동생의 정확한 의도를 알지 못하는데 뭐라고 답할 수 있겠는가? 



동생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고막을 찢을 듯 맹렬한 기세로 울려대던 소리는 크게 줄어들었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동생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디지털 묵시록」의 내용을 몇 번이고 떠올렸다. 어차피 한 번 읽었으니 다 기억 속에 저장됐고, 그것을 검색하는 시간이 순식간에 이뤄지니, 이를 잘 알고 있는 동생이 뭔가 말을 꺼낼 것이었다. 난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동생의 의도를 굳이 파악하려고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심장은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빨리 뛰었다. 물론 거의 20년 동안 속도가 느려졌기 때문에 터질 듯이 뛰는 지금의 심장박동이 평균적인 속도인지, 그것보다 빠른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지만.



“형, 니콜라스 카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걱정한 것처럼 나도 디지털 세계의 미래를 결코 밝게 보지는 않아. 언젠가 형이 말했잖아, 컴퓨터와 인터넷이 너무 허접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온갖 바이러스와 악성프로그램이 범람하고 해킹이 누워서 떡먹기 식으로 쉬운 거라고. 따라서 빅데이터와 데이터 마이닝, 인식 알고리즘 등을 통해 구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디지털 세계의 절대 강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 말하며 그 알고리즘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설명해줬잖아.”



그랬다. 15세 이후로 디지털 세상에서만 시간을 보내던 나는 시도 없이 찾아오는 컴퓨터 바이러스와 악성코드, 해킹 등에 극도로 성질이 나 아예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는 한 마디로 ‘헐!’ 두 마디로 하면 ‘헐, 어이없음!’이었다. 컴퓨터는 정보물리학적 개념은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내장된 펌웨어와 반도체를 포함해 전기전자와 기계공학적 측면만 강조한 디지털 장난감이었다. MS의 브라우저를 포함해 각종 소프트웨어들도 오류가 많았고 작동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다른 프로그램들과 충돌도 심했으며, 쉽게 해킹에 노출되는 병폐를 갖고 있는 코드들의 범벅이었다. 쉽게 얘기하면 컴퓨터라고 하는 것이 제조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대량생산에 적합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고장이 잘 나도록 만들어진 지독히 상업적인 제품에 불과했다. 



인터넷은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그것은 처음부터 통제의 편리성을 위해 미국의 국방부에서 뚝딱뚝딱 만든 것이었기에 실로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느낀 그때의 실망감이란 어떤 말로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 허망함에 컴퓨터과 인터넷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던 어린 동생을 붙들고 얼마나 많은 분노와 실망을 표하고 온갖 설레발을 떨었던가. 어쩌면 디지털 세상에 대한 동생의 부정적 생각이 그때 시작됐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형이 형 컴퓨터는 물론 내 노트북까지 슈퍼컴으로 만들어주었잖아. 그것도 공부를 시작한지 6개월 만에.”



그것도 그랬다. 나는 그저 실망만 하고 있을 수 없어 내 컴퓨터와 동생의 노트북을 압도적인 능력을 보유한 슈퍼 디지털기기로 바꿔버렸다. 내 PC와 동생의 노트북을 슈퍼컴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정보물리학 이론들을 이용해 모든 연산이 동시 다발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연산기능을 병렬화시킨 블랙박스 펌웨어를 만들어 기존의 것을 대체했다. 아울러 프로그램 코드의 형태도 개방형(어떤 혈액형에도 개방된 O형처럼)으로 만들어 새로운 보조 프로그램을 다운받을 때도 구성코드 간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인공지능형 방식을 차용했다. 그 때문에 하드 디스크 용량에 상관없이 수많은 프로그램을 다운받을 수 있었으며, 온갖 연산을 위한 데이터의 입력과 출력에서 최소한의 에너지만 사용되도록 만들었다. 내 컴퓨터는 조립품이었고 동생의 노트북은 최소 용량의 제품이었지만 연산능력과 속도 면에서 빛의 속도를 방불케 했다. 어떤 동영상도, 멀티태스킹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쯤 되면 디지털 세상에 대한 동생의 부정적 생각이 더욱 강화됐을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잖아? 형이 모든 바이러스와 악성코드를 치료할 수 있는 슈퍼 바이러스 백신도 만들었잖아. 요건 조금 시간이 덜 걸려 5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잖아?”



아, 그래! 그것도 또 그랬다. 본질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와 악성코드는 기본적인 코드의 변형임으로 모든 변종 코드를 양자 에뮬레이터 블랙박스로 자동 연결시켜 내가 만든 펌웨어와 코드 배열이 다른 것들을 자동 삭제하는 기능만 첨가하면 만사 OK였다. 심지어 바이러스와 악성코드의 성지인 포르노 영상이나 스팸메일이라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물론 컴퓨터에 가해지는 물리적 한계까지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까지야 어찌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아무튼 컴퓨터 내의 프로그램들이 모두 하나의 코드 방식만 취하게 하고 변종은 양자 에뮬레이터 블랙박스로 보내면 어떤 바이러스나 악성코드가 덤벼들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디지털 세상에 대한 동생의 비관적인 전망은 나 때문인 게 분명했다.



“그때부터 나는 한 가지 생각을 키워나갔어. 그것은 어쩌면 실현 불가능할 지도 모르는 생각이었지만 나는 생각의 형태가 구체화될 수 있도록 일단 나부터 변화시켜 나갔어. 어떤 물리적 한계에 부딪쳐도 버텨낼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을 만드는 것이 그 처음이었어. 다음은 지적 능력을 형의 발꿈치 정도라도 따라가기 위해 전력을 다해 공부하는 것이었어. 내가 부모님이 남겨 주신 책들을 형에게 읽어주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



동생은 잠시 말을 끊고 나를 살폈다. 내가 「디지털 묵시록」이란 자신의 글과 실로 충격적인 말(당시 나는 동생의 말에 심한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못하는 상태였다)에 어떤 의견을 표하리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충격 속에서도 동생의 생각을 더 들어야만 했다. 디지털 세상에 대한 동생의 전망이 너무나 절망적이고 암울한 것이 나 때문이라고 해도 나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한 것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다니 나는 섣불리 답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동생이 나를 자극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로서는 쉽게 떨쳐낼 수 있는 미증유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먼저 형한테 너무 많이 미안하고 형이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울 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지만 나는 말이야 형, 사람들이 갈수록 단편적이고 이기적이며 천박해지는 것을 볼 때마다, 사람 간의 관계가 갈수록 가벼워지고 계산적이며 물질적 이해관계로 좁아질 때마다, 나 같은 젊은이들이 갈수록 무력해지고 당장의 편의와 이익에만 매달리도록 세상이 그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갈 때마다, 그에 굴복한 대학생들이 자신만 살자고 죽도록 스펙 경쟁에 매달리거나, 스스로 부딪쳐 인생의 답을 찾거나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그들의 마음을 보듬고 불만을 들어줄 몇몇 멘토에 열광하는 것을 볼 때마다, 심지어 그들의 강의를 따라다니며 자신의 힘겨운 처지를 들어달라고, 조금이라도 좋으니 공감해달라고 애원하고 울부짖어도 그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기득권들의 행태를 볼 때마다, 분명 시스템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 굴복하거나 길들여지는 나약함과 패배의식 외에는 살아갈 방법이 없는, 그래서 불의함과 불평등이 만연해가는 이 땅에서 수많은 약자들이 벼랑 끝까지 밀려나는 것을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갈수록 가벼워지는 존재의 허망함을 느끼곤 해. 지배 시스템이 이런데,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청춘이니까 아픈 것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아픈 것인데, 그들이 하루하루의 삶에 휘둘려 세상의 잘못을 직시하지 못하게, 연대해 싸워보지도 못하게 만든 지배 시스템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나는 수없이 공부하고 생각했어. 그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찾아보고 전문가와 재야 지식인까지 모두 만나서 얘기를 들어봤어. 근데 말이야 형, 사실 나는 그에 대한 답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형과 내가 함께 읽은 책 속에도, 내가 세상에 나가 부딪치는 사건들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하소연 속에서도, 무엇보다도 형의 삶 속에도 그에 대한 답은 들어 있었어. 난 단지..”



거침없이 열정을 토해내던 동생이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그것은 쉽게 꺼낼 수 없는 얘기라는 뜻이었고 따라서 나의 호응이 필요하다고 것이었다. 나는 그런 동생의 요청을 거부할 이유와 어떤 당위도 갖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아니 오히려 나는 이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단지 뭐?”



난 거대한 운명의 끈을 움켜쥐었다,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난 단지 용감하지 못했던 거야. 그들을 비판하면서도 나 또한 진정으로 용기내지 못했던 거야.”

“네가 용감하지 못했다고?”

“응, 난 용감하지 못했어.”



동생이 내 눈을 뚫어져라 직시하며 말했다. 동생은 절대 내 눈을 똑바로 바로보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나의 동생이라는 입장에서 단 한 발도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그것에 아무런 의견도 제시할 수 없는 나의 두려움과 안타까움이었고, 서로 간에 누구도 먼저 넘지 못할 태생의 원죄 같은 우리 형제의 슬픔이자 한계였다. 헌데, 그런 동생이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는 동생의 눈빛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 용감하지 못했니?”

“모든 면에서. 특히 형에 대해 가장 많이.”



동생이 나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말을 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었다. 무엇이던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던 영혼의 수면 위로 거대한 바람 한 점이 스쳐갔다. 그에 따라 한 점에서 출발해 밖으로 점점 멀어지는 잔물결의 진동처럼 나는 격렬하게 떨리는 마음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말해봐!”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동생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 전에 왔어야 할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순간을 늦춰준 것에 대해 동생에 감사해야 할 뿐, 어찌 한 마디라도 토를 달 수 있겠는가? 헌데, 뭔가 이상했다. 맑고 깊은 동생의 눈빛이 다른 가능성을, 의외의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분명 그것은 나만의 바람만이 아니었다. 나는 조금 더 살고 싶었고,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조금 더 살아야 할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다.



‘허면, 앞서 말한 하나의 프로그램?’

“형도 이제는 알겠지만, 구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보다, 아니 이 세상의 어떤 프로그램도 따라올 수 없는 그런 단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줘. 형이라면 가능하니까. 지금의 형이라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렸던가. 동생이 나에게 홀로 지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삶의 짐을 조금이라도 나눠지자고 부탁하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던가. 동생이 나에게 용감하지 못했던 것은 나를 하루라도 더 살 수 있게 해주느라 나에게 부탁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었던 바로 그것에 있었다. 결국 그 부탁은 나를 죽음에 보다 빠르게 인도할 것이고, 그것은 나의 생존을 삶의 목적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한 동생으로써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 전부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부탁이 아니었다. 그래서 동생에게는 필생의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고 나는 이 순간을 애타게 기다렸던 것이다. 동생은 그렇게 나에게 좀 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밖에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버러지 같은 내 삶에 그 이상일 수 없는 최상의 보상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끝내야 할 일과 일맥상통했다. 물론 둘의 생각이 얼마나 일맥상통하는지를 알려면 동생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볼 필요가 있었지만, 어찌 고맙고 기꺼운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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