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주 라투슈의 《탈성장사회-소비사회로부터의 탈출》를 보면 소비사회에서 학교와 교육이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내용이 나옵니다. ‘탈성장’은 이반 일리치와 카스토리아디스, 장 피에르 뒤피 등이 개념화한 것으로, 경제주의, 경제 성장, 공급주의와 빚의 경제학 등이 만들어낸 지속 불가능한 소비사회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하는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생태주의 시민운동입니다.





많은 분들이 현재의 교육과 학교에 대해 많이 걱정하고 고민하는데, ‘탈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교육과 학교에 대해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합니다. 이들은 각종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정신질환과 만성질환, 자살을 폭발적으로 늘리고, 인류의 공멸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지구온난화, 환경오염, 대지의 사막화, 물 부족 등을 초래하는 소비사회로부터 벗어나려면 교육과 학교가 전복적일 만큼 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려서부터 TV와 스마트폰, PC, 야외광고판 등의 고도로 첨단화된 상업광고에 노출되는 아이들은 학교에 진학해서도 미디어에 노출되고, 경제성장과 소비사회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사고 회로가 단절되고, 유도된 욕구를 즉각적으로 해소해야만 - 욕구는 광고를 통해 끊임없이 만들어지므로 과소비와 소비중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 살아갈 수 있는 소비자(=생산자)로 키워집니다. 학교와 교육이 모두 다 점령당한 것이며, 그래서 세르주 라투슈는 《탈성장사회-소비사회로부터의 탈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주체 형성을 기조로 하는 학교는 일조의 딜레마에 직면한다. 학교는 현재 모습 그대로의 사회, 즉 경제 성장과 치열한 경쟁을 중심 가치로 하는 이 사회에 청소년들을 적응시켜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반드시 나아가야 할 사회 - 탈성장 사회 - 를 준비하도록, 즉 소비주의적인 파괴에 저항하는 능력을 지닌 시민의 형성을 위해 청소년을 교육해야 하는 것인가. 학생은 장차 지적이고 혁명적인 실업자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소외된 생산자=소비자, 즉 ‘문명화된 노예’가 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학생은 현재의 경제적, 사회적 질서를, 적어도 그 가장 유해한 측면을 극복하거나 깨뜨리기 위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이용하고 발달시키는 동시에 사회에 최소한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점에 있어서 학교 제도 - ‘사회 질서에 종속을 조장하는 요소와 해방을 촉구하는 잠재적 요소가 동거하고 있는 제도’ - 의 책임은 어떤 것일까. 교육자에게 요구되는 곡예 같은 훈련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반 일리치의 신랄한 비판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교육은 ‘고용 가능한’ 노동자의 양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경제, 경제 성장, 소비라는 이름의 종교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의례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소수 엘리트가 극히 생산적으로 변해가고 대다수 대중은 규율을 준수하는 소비를 배울 필요가 있는 사회에서 학교는 그 사회의 일부가 된다.” 


시장 민주주의의 퇴폐함은 필연적으로 제도의 타락을 초래한다. 오늘날 학교는 경제 성장이라는 종교를 전파하고 진보에 대한 믿음을 주입시킨다. 유치원부터 대학 그리고 평생 교육에 이르기까지 교육 제도의 공식적인 일부는 상식을 벗어난 초대형 기계를 위해 원활하게 움직이는 톱니바퀴를 만든 것이다(이반 일리치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와 《성장을 멈춰라》, 나오미 클라인의 《슈퍼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을 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의 교육과 학교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고민을 하고, 그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탈출구를 모색하고 실천하며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탈성장’의 모토가 대안의 모색이 아닌 대안의 모태이듯이, 다양한 형태의 대안교육들이 미래를 지금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울리히 벡이 경고한 대로 우리는 ‘초위험사회’에 돌입해 있고, 신자유주의는 그런 위험사회에서 가장 잘 작동하는 탈취의 체제입니다. 지배엘리트를 구축하는 상위 1%가 9% 정도에 이르는 체제의 간수의 도움을 받아 하위 90%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언론의 소유와 함께) 교육과 학교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지속이 불가능한 현 체제를 비폭력적으로 전복하려면, 교육과 학교의 중심인 교사들이 분명한 시대적 이해와 사명, 철학을 가져야 합니다. “소비자 육성 세력과 사고력을 저하시키는 기술에 저항해야 합니다.” 교육과 학교가 차별을 공고히 하는 지배의 수단과 장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더 이상 미루면 기회는 없습니다.





성장과 대규모 개발, 과학기술의 고삐 풀린 폭주, 타락한 정치의 직무유기, 진보의 낙관론, 자연의 풍요를 자원의 희소성으로 탈바꿈시킨 경제학(극소수에게 무한대의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해준 경제학)이 창출한 문명의 역설이 '초위험사회'로 귀결된 지금, 인류가 6번째 종말에서 탈출하려면 우리의 인식이 급진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성장을 얘기하는 것은 지독히 무책임한 것이며, 공멸의 순간을 앞당기겠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가진 자들이야 그렇게 해서라도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싶겠지만, 그 과정에서 배제되고 버려지고 죽어갈 사람들을 생각하면 '탈성장'과 '성장 없는 풍요'의 긴급성과 전면성에 대해 얘기하고 떠들어야 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9.14 08:26 신고

    숫자 놀음 하는 성장..
    피부에 와 닿는건 없습니다
    도대체 뭐가 성장인지..

    • 늙은도령 2015.09.14 17:06 신고

      지금은 성장이 아닌 파괴입니다.
      성장보다는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먼저입니다.
      망가진 지구를 살리는 것도 시급하고요.

  2. 앨리스 2015.09.14 09:34

    아이를 키우는 입장으로 너무나 공감되고 걱정되고 걱정되는 시대입니다.
    도령님의 추천으로 읽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 주더군요.
    실제 요즘 아이들은 생각을 귀찮아 하고 많이 하지 않아요 그것이 가장 충격적이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늙은도령 2015.09.14 17:08 신고

      과학기술의 발전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인간은 진화의 산물을 파괴하는 방식으로만 나갑니다.
      교육도 거기에 맞춰 아이들을 망치고 있습니다.
      제발 무엇이 인간의 미래를 바꿀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익에 초월했던 베이컨이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로 과학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사람이라면, 데카르트는 현재의 결과만 놓고 볼 때 문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경험을 통한 과학적 지식을 중시했던 베이컨과는 달리 자연과 종교에 대한 근대이성의 우월성을 《제1철학에 대한 명상》과 《방법서설》을 통해 정립함으로써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자 세상의 지배자로 확고한 위치를 다졌기 때문이다(정신과 육체의 분리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바탕이 됐다). 우리가 말하는 과학철학이란 데카르트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그는 과학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이성이라는 종교에 귀속시켰다. 



모든 생각과 추론, 사상과 개념을 부정할 수 있어도, 신이 준 선물인 생각하는 있는 과정만은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21세기의 명제는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나는 검색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뀌었다)를 정립할 수 있었다. 그의 성찰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의해 반박될 때까지 근대과학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베이컨과 데카르트(와 데이비드 흄)를 근대이성과 근대철학을 논할 때 맨앞에 두는 것도 연역과 귀납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을 정립했기 때문이다. 





근대과학과 근대이성이라는 무한 진보를 견인하는 양축이 인간의 의식과 시대의 문화에 확고하게 자리 잡음으로써 무차별적인 자연 파괴와 자원을 찾아 떠나는 식민지 시대의 팽창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근대국가와 함께 등장한 중농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고전파 경제학과 양축을 이루었다). 두 사람과 함께 ‘돌다리도 두들겨 본 다음에 건너라’는 방법적 회의에 대한 데이비드 흄의 회의적 방법론(특히 《오성에 관하여》를 보라)이 더해져 폭발적인 과학의 발전을 이루어냈다.



여기에 브라헤와 케플러, 뉴턴의 연구결과의 도움을 받은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통해 우주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됨에 따라 과학지식이 목표로 하는 대상은 무한대로 넓어졌고, 한 세기가 더 걸렸지만 종교적 제약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신과 동형인 인간은 과학적 결과가 축적되고 고도화됨에 따라 지구라는 협소한 근거지에서 벗어나 우주 정복에 나설 수 있을 것이고, 뉴턴 역학에 의해 우주의 법칙은 어디서나 동일하기 때문에 시간만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었다. 





비록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더욱 공고해짐과 동시에 깨져버린 고전물리학에 기반한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인공위성 같은 우주공학의 발전과 기념비적인 인간의 달 착륙으로 이어졌다. 우주과학의 눈부신 성공까지 확인한 지식인들은 과학 찬양에 열을 올렸고, 제러미 리프킨은 《유러피언 드림》에서 이런 황홀경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리스는 블랙홀의 권위자다...그런 리스가 과학 탐구의 방법 가운데 일부는 존재에 큰 위협을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실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그의 주장은 과학의 기본 자체를 위협하면서 학계에 암운을 드리웠다. 규제 없는 과학탐구가 현대 과학의 기초이기 때문이었다. 계몽주의 과학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연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 목표였다...과학 탐구에 대한 규제를 받아들이면 현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진보’가 비현실적인 목적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자연의 힘을 통제하고 우리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이성을 활용하는 인간의 능력에 회의를 갖는다면 지구상의 완벽한 삶에 대한 소중한 꿈도 사라지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계몽주의의 시초부터 과학계는 인간의 모든 탐구가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우주 정복과 식민지 건설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미래의 풍요로움에 대한 환상이 컸던 것에 비해서, 근대과학의 기초는 생각보다 빈약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이성이 생각보다 대단치 않아서 이런 환상은 오래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일정 속도에 오른 기차란 멈추기 어려운 법이다. 낙관적 결과에 힘입은 과학의 행진이 무분별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각종 폐기물과 부작용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독소를 지니고 있는 폐기물의 양이 늘어남으로써 장단기적인 위험을 축적하는 부작용(산업적 측면으로 볼 때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부수효과)이 속출했지만, ‘탐욕의 삼위일체’에게는 더 큰 진보를 위한 감내해야 할 ‘부수적 피해’에 불과했다. 





이윤의 논리는 ‘빨리 빨리’의 행태가 필수적으로 초래하는 부작용들이 새로운 시장의 단초로 남도록 만들었다. 이것들이 또 다른 응용과학의 발전에 따라 이윤의 추가요소로 전환될 때까지 철저하게 감춰두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결과의 낙관론과 부수적 피해의 운명론을 되뇌면 충분됐다. 이미 시장논리에 길들여진 시민들은 언제나 자기유지의 타협과 힘의 열세에 따른 체념의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디지털기록의 축적으로 개별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 욕구를 창출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는 소비사회에 대한 체념을 넘은 소비사회를 구축하는 자발적 복종의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뜻한다(뒤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뉴턴 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대표되는 무한한 진보에 대한 과학적 맹신은 인류로 하여금 반성하는 성찰과 비판하는 능력을 망각의 창고로 보내버리도록 만들었다. 과학의 신성화는 갈수록 시민에게서 멀어지는 전문가들의 언어에 현혹되기 마련이어서 과학의 부작용을 보편적인 것으로, 언젠가는 해결될 일시적인 문제로, 그래서 그때까지는 개인이 알아서 대처해야 할 문제로 만들었다. 철저히 지배 세력에게 유리한 체념과 순응의 사회심리학은 이런 방식으로 과학의 부작용이 개인에게 분배되는 악마의 방식에 면죄부를 발행한다. 





최근 한반도를 강타하고 있는 초미세먼저의 공습(반 이상이 국내에서 배출된다)과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일본 제1원전의 폭발에 따른 방사능 유출의 위험성을 예보의 정확성과 그에 따른 개인적인 대처의 문제로 뒤집어버렸다. 자신의 대보다 다음 세대에서 주로 나타날 피해와 부작용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근대과학이 견인한 무차별적이고 무분별한 개발의 후유증으로 나타날 미래의 피해를 지금 확인해 그에 대한 보상을 ‘탐욕의 삼위일체’의 실질적 지배자들에게 청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볼 때, 과학의 역사를 위험 확산의 역사라고 입증한 울리히 벡의 성찰은 20세기 물론 21세기에도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바우만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과학의 부작용이 축적이자 확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위험은 근대성이 출발할 때부터 이미 ‘아는 것과 모르는 것들을 확률이라는 의미론적 지평 안에서 합치시켜’ 버렸다”고 말했다. 예측 불가능한 것을 확률을 통해 ‘오만하게 지배할 수 있다는 가정’을 담고 있는 미적분학의 발전이 과학계 전반에 퍼지면서, 인류를 비대칭적 종말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의 폭발적인 확산이 지구온난화와 토지의 사막화, 대양의 오염과 극도의 불평등으로 축적됐다. 이제는 과학의 부작용이 초래한 폭발 직전의 위험에 대해 체계적으로 분석한 울리히 벡의 성찰을 따라가는 바우만의 사유는 다음과 같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이 세계의 우연성과 무작위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의식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처럼 벡이 ‘오만’이라고 부르길 좋아하는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식의 자만심이 바로 근대적 의식을 지탱해주던 두 기둥이며, 결국 위험이라는 범주가 이 두 기둥을 화해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 ‘위험’이라는 범주는 두 번째 기둥인 ‘자만심’을 구해내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비록 원망스럽고 무서운 동반자일지라도 고집스럽게도 도처에서 계속 따라다니는 첫 번째 기둥이라는 동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동안은 과학자의 전유물이었던 위험이 비과학자들의 눈에 보일 정도로 증폭되자, 다급해진 정부와 더 이상 비밀을 숨길 수 없었던 과학자들은 ‘위험을 계산해내려는 기획’을 통해 다시 세상을 이끌어나가는 주도권을 움켜쥐었다. 과학적 지식이 부족하고, 전문적인 통계를 해독하기 어려우며, 주어진 정보의 타당성도 확인할 방법이 없는 개인들로서는 범죄자에게 범죄의 피해를 해결하도록 맡기는 것 이외에는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다. 





이에 고무된 과학자들은 위험을 통제하기에는 완벽하지 않지만, 과학의 발전과 지식의 축적을 통해 위험을 제어하는 확률의 오차를 최대한도로 줄여나가다 보면 ‘통제할 수 있는’ 상태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며, 과학적 의미의 ‘낙수효과’를 약속했다. 이를 위해서는 변함없이 정부의 예산지원이 필요하고, 그 결과물들을 이용해 폭발 직전의 위험을 통제하는 일은 여전히 정부의 위탁을 받은 기업들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약속한 것은 완전한 위험 통제와 전혀 실패가 없는 확률의 계산이 아니었다.



바우만에 따르면 그들이 약속한 통제의 범주는 “단지 위험할 수 있는 확률과 예상되는 위험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는 능력만을 약속했을 뿐”이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는 원래 목표로 삼았던 일을 최대한 가장 효율적이고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해 자원들을 가장 최적의 상태로 분포시키는 방법을 계산하고 이를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약속”했을 뿐이었다. 만약에 인류를 공멸의 위기로 몰고 가는 사건들이, 과학자들의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발생하고 만다면, 그 사건들이 일어날 확률들에 대해서는 이미 계산해두었기에 대처가 가능하다는 약속 말이다. 



물론 엄밀하게 계산된 확률과 오차 범위 안에서의 실패일 뿐인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최소한의 피해ㅡ그것이 수천만에서 수억 명의 죽음일지라도ㅡ는 개인이 감당해내야 할 문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민주적 절차인 선거에 의해 공인된 정당성을 획득한 ‘단기적인 군주’로서 통치하는 정부의 행태가 정책 실패의 책임에서 갈수록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탐욕의 삼위일체’의 실질적 지배자인 세계적 특권그룹이 일방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현재의 구조 하에서 개인에게 돌아갈 피해를 보상해주거나 막아줄 방법이란 결단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원자탄의 발명은 위험의 보편성과 공멸의 동시성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과학이 견인하는 진보의 영원성에 대한 믿음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지만, 미국이 끝내 원자탄 두 개를 일본에 떨어뜨림으로써 인류가 공멸할 수도 있다는 위험은 오히려 탈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선례가 생겼으므로 핵무기 확산은 불가피할 것이며, 실제로 여러 나라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고, 상호견제의 버팀목으로 변질된 핵무기를 보유하는 국가는 갈수록 늘어났다.



또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국가들은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이면서, 더 이상 핵무기의 확산은 없어야 하며, 이에 대한 국제적 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본말이 전도된 이런 현상이 ‘위험사회’의 본질이며, 그래서 인류는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어떤 방법도 강구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에너지 안보를 확고히 하고 지구온난화에 대처하기 위해 핵발전의 확산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었다.





이렇게 절대 행해지면 안 되는 악마의 선례가 이루어졌음으로 과학의 광기를 이용해 이익을 독점하는 ‘탐욕의 삼위일체’의 행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사라져버렸다. 꾸준히 늘어나는 핵보유국 숫자가 이를 말해주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를 바로잡을 제대로 된 기회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세계적인 장기공황이 불러온 지난 7년 간 핵 관련 프로젝트들이 어느 때보다 활발히 이루어졌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늘 그래왔듯이 이제는 위험이란 불확실성의 미래와 함께 사는 것이 일상이 됐고, 개인이 사회적으로 발생한 위험을 감당할 수 있도록 스스로 무장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공멸의 순간에 이르지 않으려면 전 지구적 차원의 공동노력이 필수인데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이 신자유주의적 선동은 미래세대의 선택지를 갈수록 줄인다는 점에서 무책임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모두가 전멸할 위험을 항시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핵우산’이란 정치논리의 미친 허구성은 말할 것도 없고, 지구온난화에 따른 온갖 피해마저 개인이 감당해야 할 것으로 떠넘겨지고 있다. 과학이 철학을 귀찮게 여기면 인본주의적 가치는 사라지고, 오직 자본의 탐욕을 추구할 뿐이다. 



                                                                                                         사진출처 : 구글이미지 


                                   


  1. smm 2015.04.21 06:12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도 엄밀히 따지면 존재가 우선이죠. 지가 존재하니까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죠. 아뭏튼 어느 영역이든 철학이 없는 진보는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듯합니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의 그림자가 철학을 할 수 없는 환경으로 개인들을 내몰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하지만 도령님처럼 이렇게 지속적으로 외쳐주며 지식인의 소임을 다하는 강단있는 소수가 적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 늙은도령 2015.04.21 06:28 신고

      어디선가 좋은 글을 쓰고 준비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이것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 현실정치적인 것들도 다루다 보니 자꾸 늦어지네요.
      하긴 공부할 것도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당분간은 과학사 관련 책들을 집중적으로 봐야 합니다.
      지금 보고 있는 자발적 복종이 시대에 대한 책들을 다 읽으면 읽으려고 이미 10여권을 구입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나저나 책값이 많이 나와 죽일 지경입니다.

  2. 최홍대 2015.04.21 15:16 신고

    철학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삶의 철학따위는 없이 무조건 누구보다 잘살겠다는 생각만 넘쳐나면 결국에는 칼날이 자신을 향할듯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4.21 15:20 신고

      네, 그렇습니다.
      인간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너무 생각을 쉽게 버립니다.
      인간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기술은 편리함을 주지만 그것이 꼭 올은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3. 2018.04.02 09:20

    비밀댓글입니다



세부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영화의 짜임새를 별도로 한다면, 저출산‧고령화의 필수적인 결과인 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다룬 세 개의 영화가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와 웨인 크래머의 <크로싱 오버>,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 형제의 <로나의 침묵>이 그것입니다.





해리슨 포드가 주연인 <크로싱 오버>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어 풀어내는 관계로, 영화의 짜임새가 허술하고 어지러운 블랙버스터에 가깝습니다. 한 편의 영화에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고 했던 것이 패인이지만, 이민의 나라인 미국에서도 불법이민과 다문화가 그리 녹녹치 않은 문제로 부각했음을 보여줍니다.



로마시대 이후로 사라졌던 노예제도를 부활시킨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며, 경제가 나빠지자 노예해방의 이름으로 그들을 더 싸게 부려먹었던(노동유연화의 기원) 나라가 미국임을 고려하면, 불법이민과 다문화가 ‘아메리칸 드림’에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하자 또다시 그들을 내치고 있는 미국 특유의 DNA가 <크로싱 오버>에는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으로만 평가하는 미국 백인의 시각에서 제작된 <크로싱 오버>를 압축하면, “중산층 이상에게는 ‘아메리칸 드림’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저임금 노동자로 써먹던 노동자들이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고, 치러야 할 비용과 대가도 그만큼 커졌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로싱 오버>가 미국 특유의 위선이 스크린 뒤에서 작동하고 있다면, <그랜토리노>는 한 발 더 나아가 미국 백인 노동자가 이민과 다문화의 피해자가 됐다고 선언합니다. 그의 시각에서 보면 돈을 향해서만 달려가는 가벼워진 미국의 변화가 마뜩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미국적 가치의 핵심인 가족도 불편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보수와 수구 사이에 위치한 미국 백인의 시각으로 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풀어갑니다. 곳곳에 폭력을 배치해놓고, 그 폭력에 맞서야 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랜토리노>를 통해 자신의 본질이 <용서받지 못한 자>보다는 <더티 해리>에 가깝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영화에는 이민과 다문화가 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됐는지 전혀 다루지 않은 채, 은퇴한 미국 백인 노동자의 시각에서만 영화를 이끌어갑니다. 어린 베트남 이민자 남매와 나이와 인종을 뛰어넘는 우정은 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극대화하기 위한 드라마적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처럼.





파시즘적 속도로 달려가는 미국의 변화는 은퇴한 백인 노동자에게 야만적 폭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탐욕에 눈이 먼 파시즘적 속도에 맞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정의와 노동의 가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희생적이어서 영웅적으로 그려지는 자신만의 구원의식이자 현실도피적 결단입니다.   



하지만 한 쪽의 시각만 반영된 정의와 가치는 부분적인 정의에 불과할 뿐임에도, 반폭력적 메시지를 언제나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서만 그려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강박관념은 은퇴한 백인 노동자가 미래의 화해와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비극적 희생밖에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제조업을 포기하고 아이디어와 금융산업 위주로 돌아선 시대의 피해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이민자 폭력조직을 두려워해야 하는 사회적 약자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극적 결말이 전달할 수 있는 미학적 위대함에 크게 감명받을 터이지만, 바로 그 마지막 장면이 그 이상의 폭력을 담아낼 수 없다는 반동적인 메시지 때문에 가장 폭력적입니다. 



죽음을 미화하는 것이 폭력을 유발하는 극단적 선택이라면 거기에는 진실된 의미의 정의도, 진정한 화해도, 반성적 구원도 없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려낸 반폭력적 저항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폭력에 맞서는 비폭력적 저항은 일체의 폭력을 부정하는 것에서 양화가 악화를 해체하는 것입니다.  





‘그랜토리노’는 미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1972년형 포드사 중형차로, 미국 백인 노동자의 자존심이자, 갈수록 퇴색하고 있는 미국 특유의 ‘빌어먹을’ 애국심을 상징합니다. 은퇴한 미국 백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랜토리노>는 잘 만든 영화이며, 이민과 다문화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고든 수작입니다.



하지만 은퇴한 백인 노동자를 들어내면 <그랜토리노>는 반유대주의를 조장하는데 앞장 선 나치의 선동적인 영화를 떠올립니다. 세계를 지배하거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최상위 0.1%를 다룬 《슈퍼클래스》에서도 미국의 슈퍼엘리트(특히 부시 부자의 행정부에서 일했던 고위관료들)와 어울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는 보수적인 미국 백인의 이데올로기를 가감없이 드러낸 폭력적 영화입니다. 동시에 미국적 보수화가 일반화된 이명박근혜 정부의 7년 동안, 우리 사회가 이민과 다문화를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시각이 얼마나 보수화됐는지 간접적으로 말해줍니다. 백인과의 결혼은 국제결혼이고 중국 동포나 동남아인과 결혼하면 다문화 결혼이 되는 것부터 보수적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는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모든 것이 나쁠 때는 어떤 것도 문제가 된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크로싱 오버>와 <그랜토리노>에 비하면, <로나의 침묵>은 유럽에서도 심각한 국가적 사안으로 떠오른 이민(불법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절대적 약자인 이민자의 입장에서 그려낸 명작입니다.



‘모든 것에 값이 매겨져 있는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과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영화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로나의 침묵>은 불법이민과 다문화 문제가 부정적 세계화의 결과이자, 일단 거기에 발을 들여놓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는 한 탈출할 방법이 없음을 영상미학으로 보여줍니다. 소비사회는 돈이 없고, 소속이 없지만 삶의 매 순간이 폭력에 노출되는 것과 같습니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멸시킬 때까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을 ‘자기조정 시장’의 폭력적 허구성을 해부했다면, 다르덴 형제는 <로나의 침묵>을 통해 ‘자기조정 시장’의 필연적 결과인 소비사회의 파국적 종말을 그려냈습니다.





허리우드 키드였던 필자는 허리우드 영화의 포로였고, 지금도 비슷한 상태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민과 다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에 관한 한 <그랜토리노>와 <크로싱 오버>를 <로나의 침묵>과 비교해보면 문화적으로도 미국에 종속된 대한민국의 현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샤를리 에브도가 당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갈수록 늘어나는) 테러도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가다 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이슬람 원리주의가 아닌, 프랑스의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불법이민과 다문화 문제가 탐욕의 소비사회와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고 있는 정치경제적 혼란과 인간성 파괴의 냉혹한 현실, 표현의 자유를 악용한 자본주의적 탐욕입니다.



앞의 두 영화를 본 분이라면 다르덴 형제의 철학이 녹아있는 <로나의 침묵>도 보기를 바랍니다. 그 후에 시간적 여유가 되면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대인에게 말을 건네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의 ‘39번째 편지 : 로나, 침묵의 소리’를 꼭 읽어보면 현대의 소비사회와 부정적 세계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저녁노을* 2015.01.27 06:48 신고

    하나도 보질않은 영화네요.
    함께 살아가는 우리이길 바라는 맘입니다.

    잘 보고가요

    • 늙은도령 2015.01.27 17:10 신고

      저도 우연히 보게 된 영화들입니다.
      사회적 문제를 다룬 영화를 원래부터 좋아해서...

      물론 다른 영화들도 좋아합니다.
      시간이 없을 뿐이지요.

  2. 공수래공수거 2015.01.27 08:31 신고

    저도 영화에 관심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아
    생소한 영화들입니다

    다운 로드가 가능한지 한번 찾아 보겟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0 신고

      로드가 다 가능한 영화입니다.
      저는 영화팬으로서의 세월이 40년이라....

  3. 꼬장닷컴 2015.01.27 08:40 신고

    본문과 관계없는 댓글 죄송합니다만..
    크린트 이스트우드 정말 오랜만인데 세월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아무튼 오늘 권하신 영화/책 기억해 두었다가 기회가 되면 봐야 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2 신고

      네, 합리적 보수로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정말 멋있었는데, 최근에 들어와서 합리적을 떼려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너무 보수적 관점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4. 耽讀 2015.01.27 10:02 신고

    다문화 시대에 들어선 우리들이 새겨야 할 영화 같습니다. 우리 역시 백인만 외국인으로 생각하고 동남아와 흑인은 외국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 판단입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3 신고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종적 차별은 같은 피부일 때 더 강한데, 세계화시대에서 가난한 나라의 이민자면 그것이 더욱 심해집니다.

  5. 개그콘서트★ 2015.01.27 10:39 신고

    아직 보지는 않았는데 이번주에 보죵 좋은하루되세염.

  6. 덕산 2015.01.27 12:31

    그랜토리노라는 영화를 봤던 기억으로는 감동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뭔지모를 불편함이 있었던것이 기억이 나네요.
    우선 내 주위에 있는 외국인과 외국인 노동자의 위치를 한번 둘러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4 신고

      네, 인간을 인간으로 볼 때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집니다.
      자본주의는 계급을 없앴지만 너무나 많은 계층을 만들어 차별을 세분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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