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오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야 해. 내가 어떤 말을 하던 간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알았지 오빠?”



수경이 불길한 변화를 증명하기 위한 멍석부터 깔아놓았다. 재우는 정말로 터질 듯이 박동하는 심장의 압박에 뇌의 울렁거림마저도 멈춰버리는 것 같았다. 만일 죽기 직전의 두려움이 이런 것이라면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극도의 두려움에 빠지면 모든 정신과 영혼마저 마비시켜버린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재우는 생각까지도 완벽한 진공 상태에 빠져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진공상태의 양자가 에너지 없이도 요동친다는 것이 바로 지금의 자신과 완벽히 똑같을 터였다.



“오빠 난 지난 3년이 꿈만 같았어.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매 순간이 행복 그 자체였어.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두렵기까지 했으니까. 어쩔 때는 시간이 멈췄으면 했어. 한데 말이야, 오빠?”

‘너도 행복한 만큼 두려웠니? 시간이 멈췄으면, 바랄 정도로?’



재우는 인식지체 때문에 몇 초 뒤에나 수경의 말을 모두 들었고, 그것 때문에 일어난 두려움의 증폭이란 수경의 말처럼 시간마저 멈춰버리게 하는 것 같았다. 그 충격에 여전히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난달부터 난 그 행복이 깨지는 걸 느꼈어. 절대 내 것 같지 않았던 그 주체할 수 없는 행복에 균열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됐어. 그때부터 분에 넘쳤던 행복이 그나마 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내가 누리고 있는 이 가당치 않은 행복도 오빠와 재영씨가 만들어준 것이니까.”



수경은 여기까지 말한 후 잠시 말을 멈췄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녀는 복받치는 감정을 조절한 다음에야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재우는 수경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녀의 말을 듣는 것 외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육체처럼 말이다, 제기랄!



“한데 말이야, 오빠?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가 두 사람이 선물해준 행복을 깨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 오빠와 재영씨가 불러주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내가, 어리석은 내가..”

“그건 아니야! 수경아, 절대 그건 아니야!”



재우는 수경의 말을 중간에 끊을 수밖에 없었다. 지랄 같은 말 섞임이란 아예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수경이 스스로에게 자책하는 일이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수경은 재우의 격한 외침이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말임에도 불구하고 잠시 중단된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결심한 것을 오늘 행하지 않으면 다시는 할 수 없을 것처럼, 그렇게. 재우는 뭔가 단호한 결심을 한 것이 분명한 수경의 말에 일일이 대응하기보다는 그저 생각으로만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오빠가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오빠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 나는 터무니없는 욕심이 생겼어. 오빠를..”

‘나를 좋아한다고? 너도 나를?’



재우의 심장이 더욱 격하게 뛰었다. 당연히 생각한 것보다 몇 초 후에나. 그에 따른 에너지 소모란, 까짓것 그게 무슨 의미 있단 말인가? 수경도 나를 좋아한다는 데야! 뇌에서 엔도르핀과 도파민이 마구마구 쏟아져 나왔다. 온갖 혐오감을 불러오는 콜레시스토키닌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재우는 지금의 상황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오빠를 보내기 싫어진 거야. 오빠와 재영씨의 계획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지만 난 감히 그 계획이 연기되기를 바랐어.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게 모두 다..”

‘왜 안 돼? 그 계획이란 거 미룰 수 있어, 너를 위해서라면.’

“재영씨 때문에 시작된 것인데, 나는 그것을 잊고 있었어. 아니, 일부러 잊으려 나를..”

‘재영이 때문에 시작된 것이라고? 그래, 우리의 만남도 재영이 때문에 시작된 것이지.’

“속이려고 했었던 거야.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오빠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모든 바친 사람이 재영씨인데..”

‘나를 위해서? 그래, 재영은 나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모두 바쳤지.’

“나에게 이런 행복을 안겨준 사람인데, 나는 내 욕심에 오빠가 지난달부터 계획을 더 진행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으면서도, 오빠에게 그러면..”

‘너도 알고 있었구나. 그래 당연히 알았겠지, 나의 아주 작은 변화까지도 놓치지 않는 너이니까.’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했는데, 하지 못했어. 나는 내가 왜 이 자리에 있게 되었고 무엇을 위해 오빠 곁에 머물 수 있게 됐는지 잊었던 거야. 내 욕심에..”

‘그래, 그러면 안 되는 것이지. 내가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도, 세상을 뒤집어 버릴만한 능력을 갖게 된 것도 다 재영이 덕분이지.’

“사로 잡혀 당치도 않게 그만 재영씨를 밀어내려고 했던 거야. 내가 얼마나 사악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는 전혀..”

‘알겠어, 수경아. 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깨닫지 못했어. 그래서 말이야, 오빠?”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던 수경이 다시 한 번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 이상 더 처연할 수 없는 눈빛으로 재우를 바라보았다. 재우는 그녀의 처연한 눈빛에 어려 있는, 날카로운 정으로 긁어도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을 만큼 단단해 보이는 결심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운명이 새겨진 석판을 받아든 여인처럼, 그녀의 결심은 어떤 것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재우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떠나겠다는 거냐?’



재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체념이라고 하기에는 운명에게 창피했고, 그렇다고 수경을 잡기에는 재영의 희생과 그녀의 결심에 더없이 죄스러웠다.



“그래서 오빠, 난 지금부터 하나의 의식을 진행할 거야.”

‘하나의 의식?”

“그게 뭔데?”



나는 수경이 말한 하나의 의식이란 말에 너무 놀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뇌 속의 생각들도 이미 광란의 질주에 빠져들었다.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뭉툭뭉툭 사라지고 있었다. 내 비루한 영혼을 잡아가기 위해 호시탐탐 내 주위를 맴돌던 성마른 성격의 저승사자가 에너지 소모에 발맞춰 덩실덩실 춤추는 모습이 두 눈에 아른거렸다. 하나의 의식이라니, 이건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스스로를 자책하는 수경의 낙담이 너무 커 잠깐 이성이 외출한 것도 아닐 터, 재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황당 시추에이션에 거의 주먹만 한 크기의 침을 삼키며 수경의 다음 말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오빠를 원래의 디지털 전사로 되돌려 놓는 단 하나의 의식!”

“뭐, 디지털 전사라고?”



재우는 수경의 입에서 나온 예상치 못했던 단어에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주기 상으로 볼 때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마법의 날도 아닌 것이 분명한데 수경은 수구언론들이 즐겨 쓰는 방법인, 앞뒤가 뭉툭 잘려버린 얘기를 거침없이 뱉었다. 수경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재우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 수경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볼 뿐, 어떤 대응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재우 자신도 잊고 있었던 ‘디지털 전사’라는 말에 있었다.



“너, 혹시 읽은 거니?”

“응, 읽었어. 오빠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재영씨가 점자로 옮겨놓은 글을 읽었어. 내가 이 집에 들어온 것도 그 글을 읽었기 때문이야.”



수경은 그날의 상황을 좀 더 얘기했지만 그 이상의 것들은 사족이었다. 디지털 전사라는 말이 수경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재우는 최후의 생각마저 사라져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오빠의 글을 읽으면서 난 처음으로 운명이란 게 정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받았던 당시의 충격이란.. 뭐랄까?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지만 전생부터 이어진 인연의 고리 같은 게 영혼을 낚아 채가는 느낌이 들었어. 글의 처음인 ‘어차피 삶이란 죽음을 향한 여정이다. 그 여정 중에 죽음에 대한 성찰이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으며 그에 따라 어떤 것들을 이루었느냐가 개개인의 가치이자 역사’라는 문장부터 날 충격과 전율로 몰고 갔어.”



수경은 마치 궁극의 진리를 엿본 위대한 철학자처럼 열띠고 활기찬 표정으로 당시의 환희를 얘기했다. 그런 수경을 보는 재우의 시선에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자리했다.



‘그래, 사람에게는 운명 전체를 뒤흔드는 벼락같은 순간이 있기 마련이야. 영혼을 뒤흔드는 그 압도적인 둔중함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없지. 너처럼 세속에 물들지 않은 영혼의 소유자라면 말할 필요도 없고. 허허, 이것도 다 자업자득인가?’

“특히 난 ‘깨어 있는 모든 순간마다, 심지어 어둠과 빛을 나누는 날카로운 칼날 위에서라도 삶의 주인이고 싶은 것이 보편적 욕망이라면, 기억이 이르는 그 시작부터 에너지 사용과 분배의 불균형에 시달린 나는 디지털 세상에서만 그것이 가능했고 따라서 내 삶의 가치와 역사는 모두 디지털 세상에만 있다. 헌데 내 삶의 모든 것이었던 디지털 세상은 인간의 삶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에서 철저히 멀어져 갔다. 위대해 보이는 외면에는 반드시 허상이 숨어 있기 마련이고, 선형적 변화와 빛의 속도를 중시하는 곳에는 획일적 기준과 속도의 파시즘이라는 악마적 성향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지식과 정보의 평등과 세상의 민주화를 모토로 하는 디지털 세상이 그 본질적 역할에서 벗어나 소수의 탐욕이 다수의 이익을 착취하는 공간으로 변해가는 것을 나는 지켜볼 수만 없다. 그것은 현실세계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내 삶의 의미까지 말살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나는 이를 바로잡으려 한다’라는 부분에서 이르러서는 오빠와의 만남이 숙명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어.”



수경은 얼핏 본 궁극의 진리에 고무돼 자신만의 언어와 체계로 그 깨달음을 풀어내는 철학자처럼 몽환적 표정까지 지었다. 재우는 그런 수경을 지켜보는 것이 죽을 만큼 아프고 힘들었다.



‘조금만 더 너와 함께 하려는 내 욕심이 과한 것이었니? 수경아, 사랑이라는 거, 그런 거 아니니? 넌 나하고 조금이라도 더 보내고 싶지 않니? 디지털 전사? 나 그딴 거.. 그딴 거..’



재우는 죽음에 대한 성찰에서 자꾸만 멀어지려는 자신을 그날의 결연한 디지털 전사로 되돌리려는 수경의 의도가 야속하기만 했다. 뇌의 활동을 줄이지 않는 한 10년 치 정도의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아,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았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죽어서도 갚지 못할 동생의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 디지털 전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는데 그것이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뜻밖의 행복과 상충된다는 사실이 재우는 못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괴로웠다. 하지만 수경은 재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특유의 단아한 음성으로 글 전체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재우는 그것으로 상황을 되돌릴 수 있는 수단이 단 하나도 남지 않았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누구나 하는 사랑과 평균적인 행복이란 애당초 자신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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