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와 어둠의 존재를 알리는 것처럼, 진리는 스스로 자신에 대한 그리고 거짓에 대한 기준이다.


                                                                           ㅡ 바뤼흐 스피노자의 《에티가》에서 인용




박정희를 히틀러와 비교한 것은 지나치다. 독재자라는 것에서는 둘의 공통성이 있지만, 박정희와 히틀러는 동등한 위치에 둘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제1야당의 최고의원으로 선출된 자가 극좌 정당에서나 나올 수 있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것은 그 진위가 무엇이든 도를 넘었다. 





정청래의 발언은 이정희가 박근혜와의 토론에서 보여준 발언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데, 감정적 카타르시스는 있을지언정 현실적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말이란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주워담을 수 없어서 뜻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줄 때도 수없이 많다. 이번 발언이 그랬다.  



진보좌파의 말들이란 그것을 현실에서 실천적으로 구현할 힘이 없으면 자기파괴적 결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그 말들의 영향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도덕적 지향은 자기희생적이면서도 자기파괴적인 양면성을 띠는데, 후자의 경우 타인의 피해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특히 조심해야 한다.



정청래의 발언은 내부를 향했다는 점에서, 동시에 발언에 담겨 있는 폭력성이 외부의 힘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이중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선동적 발언의 전형이 이와 같은 특성을 지닌다. 내가 옳다는 것이 네가 틀렸다는 것으로 연결될 수 없음이 삶의 본질이자, 관계에서 발전하는 정치의 생명이다.       





히틀러의 경우 독일국민 중 극우세력(극소수)을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은 인류 최악의 전체주의 독재자였다. 지금도 독일의 노인들은 히틀러 얘기가 나오면 무릎을 꿇고 눈물을 보이며 참회할 정도다. 히틀러를 찬양하거나 모방하는 것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하다. 이는 명백히 박정희의 경우와 다르다.



유대인들이 히틀러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정청래 의원이 말한 정도는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유대인인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ㅡ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다. 유대인들은 단죄를 계속하면서도 히틀러와의 악연을 발전적으로 승화하는 노력을 지속해왔다.





<국제시장>의 흥행성공에서 보듯, 박정희 시대를 좋게 기억하는 분들도 많다. 이것은 진실이나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떠날 수 없는 삶에 대한 얘기다. 정청래의 발언은 <국제시장>의 흥행에 참여한 수많은 국민들을 모욕한 '싸가지 없는 발언'이 될 수 있다. 



어느 누구나 자신의 신념을 말할 자유는 있지만, 그 자유가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면 그때부터 방임이나 방종의 문제로 변질된다. 국민의 4분의 1(이들 모두가 박정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겠지만)을 모독하는 발언을 할 수 있는 자유란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질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문재인 대표가 이승만‧박정희 묘역에 참배한 것에 관해서는 필자도 불만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불만을 글로 옮길 때 이성의 틀로 걸러내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문재인 대표도 두 전직 대통령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그들과 같은 시대를 보냈던 분들의 삶에 대한 헌사 같은 정치적 행위다.



그는 제1야당의 대표로서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진정한 주역들이었지만, 그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 분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고마운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분들의 삶이 박정희라는 독재자의 억압과 착취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일말의 진실은 담았으되 그분들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음도 고려해야 한다.





그분들 모두가 세뇌당해 자신의 삶이 박정희의 망령에 갇혀버린 허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박정희는 권위주의 독재를 자행했지만, 유신독재 시기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히틀러와 비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히틀러는 독일을 파국으로 몰고 갔지만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파국으로 몰고 가지 않았다. 



박정희 시대의 기술관료와 지식인, 학생, 종교인, 노동자, 선생, 교수, 일부 정치인 등은 상당히 다른 행태를 보였다. 기본적인 자유의 말살과 양도할 수 없는 기본권과 인권의 말살 면에서도 히틀러와 박정희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필자도 박정희 시대를 살았고, 유신헌법을 교과서로 배웠던 거의 유일한 세대다.



그러나 정청래가 말한 정도는 아니었다. 박정희를 비판하고 싶다면 제대로 해야 하고, 그래야만이 박정희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선동적인 발언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정의로 가는 분노의 순정함이 정치인의 선동에 넘어가면 폭동의 광기로 변질되는 것은 프랑스혁명의 결과물인 공포정치가 증명한다.





박정희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을 위해 꾸준히 공부하고 있는 필자도 정청래처럼 말할 수 없다. 그의 발언은 부분적 사실이고, 부분적 진실이기 때문이다. 사죄를 받기 위해 용서하지 못한다면 영원한 갈등만이 남게 된다. 정치가 갈등의 조저이라면 정치인은 대중을 선동하는 자극적인 발언은 삼가야 한다. 새누리당의 김진태처럼 말해선 안 된다. 



정청래의 발언에서 괴벨스의 유령이 어른거리는 것은 필자만의 예민한 반응은 아니리라. 발언의 수위가 뉴라이트 인사와 동일한 수준이라면 너무나 창피하지 않는가? 제1야당의 최고의원에 뽑힌 정치인으로서의 발언이 지지자의 선동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이라면 어찌 국민을 대의할 수 있단 말인가? 



정치를 말로만 할 거면, 그래도 된다. 새정치민주연합 중에서 가장 좌측에 있거나, 가장 강경한 노선을 걸어도 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선택이다. 다만 그 위치에서의 발언이 상당수 국민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이라면 안으로 삼키고 또 삼키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제되지 않은 말은 휘발성을 지녀서 뜻하지 않은 곳에서 터질 수 있고, 이는 무엇으로도 책임질 수 없다. 



정청래의 거침없는 독설이 정말로 필요한 때가 올 것이라 믿는다. 그때를 위해 최고의 독설들은 축적해두기를 부탁드린다. 반드시 그날은 오리니, 그때 정청래의 가치를 폭발시켜 정치권의 판세를 완전히 뒤집어 달라. 때를 아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고 출발이며, 때를 만들어 폭발시키는 것이 정치의 확장이니.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리야 2015.02.11 07:37

    역시나 종편들의 먹이감이 되었네요..
    늙은도령님 말대로 축적시켰다가 국민들과
    함께 대포를 쏘면 좋겠네요..
    오늘도 평안한 하루 되세요^^

    • 늙은도령 2015.02.11 18:16 신고

      네, 감사합니다.
      님도 편안한 하루 되십시오.
      전 오늘 6시까지 푹 쉬었습니다.

  2. 뉴론♥ 2015.02.11 08:32 신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저 모습들도 후손들기 지켜보겠지여 역사시간에 수업배우듯이염.

  3. 공수래공수거 2015.02.11 08:33 신고

    정청래 의원이 또 관심을 받고 싶어지는 모양입니다
    선거때가 다가오니 강용석을 이렇게 해서라도
    견제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 늙은도령 2015.02.11 18:18 신고

      그러게요.
      하여튼 너무 지나쳐요.
      아고라에서의 글도 너무 선동적이에요.

  4. 참교육 2015.02.11 08:46 신고

    정청래...?
    그나마 제가 참 좋아하는 분인데.... 이런 실수를 하셨군요.
    분노할 줄 모르는 정치인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이정희나 정청래 같은 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 늙은도령 2015.02.11 18:19 신고

      그것이 어디를 향하느냐, 무엇을 목표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런 식의 발언은 극단적 이분법을 불러옵니다.
      그것은 새누리당이 원하는 것입니다.
      정청래의 발언은 득보다 실이 너무 큽니다.
      싸울 때도 노무현처럼 싸워야 사람이 따릅니다.

  5. 꼬장닷컴 2015.02.11 10:10 신고

    정청래 짜증납니다.
    똑바른 말로 지난 2년 새정치연합은 무기력 그 자체였습니다.
    새누리의 지지율이 높은 건 새누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새정치연합의 무기력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러한 까닭에 이제 당 대표가 선출되었으면 그를 구심점으로 일치단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사건건 비판만 해댄다면 과연 누구에게 유용할까요?
    이승만, 박정희 묘역 참배가 존경의 의미도 아니고 통합과 화합의 차원이라면 정청래도 대승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더 이상의 경거망동은 없었으면 하네요.

    • 늙은도령 2015.02.11 18:21 신고

      당 대표가 할 일이 있고 최고의원이 할 일이 있지만, 정청래는 오버했습니다.
      정청래가 좀 정치철학을 배워야 하고, 노무현을 연구해야 합니다.
      언어는 사유의 틀이고 존재의 집입니다.
      이런 식은 언어는 자기파괴적입니다.

  6. 김영도 2015.02.11 12:06

    역사적 진실을 말하는데 왜 손가락질을 하는가?
    일본 야베정부가 과거의 역사를 왜곡하면서 2차세계대전 전범자들의 사당 야스쿠니를 찾아 참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과거는 과거일 뿐 과거는 뒤로 하고 미래를 바라보자는 시각은 근본없이 발전을 꾀하겠다는 논리와 같지않나?
    상대방에게 물적인적 피해와 신체의 자유까지 억압해놓고 지난 일이야 내가 보상금 줄께 잊어줘 한다고 해서 깊은 상처가 잊혀질까?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다고 청산되지 않는 과거를 덮어둔 채 정치적 논리를 앞세운다면 과연 그 끝에서 무엇을 보게될 것인지 한 번쯤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이정희? 운운하시는 기가 찹니다.
    개누리당이 말하는 이정희씨가 야권 표심 갉아먹었다는 헛소리에 동조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에 말입니다. 불법으로 조작된 관건 선거 그것도 투개표까지 조작하는데 님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늙은도령 2015.02.11 20:33 신고

      전 이정희 식의 토론에 반대합니다.
      그녀와 그 주변의 사람들은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박근혜 같은 자가 대통령이 됩니다.
      일단의 사람들만 속이 편하면 남은 피해를 봐도 됩니까?
      저도 통진당에 찍었던 사람입니다.
      헌데 이따위로 돌려줍니까?
      이석기를 옹호하지는 않지만 그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도 글로 썼습니다.
      세상을 제대로 보십시오.
      자신의 신념을 펼치되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시작하면 그것은 신념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내 주먹의 사정권 안에 타인의 신체가 있으면 자유가 아닌 폭력입니다.
      진보당의 약진을 바라고 바라는 사람으로서 그런 식으로는 답이 없습니다.
      그리스처럼 아예 나라가 망한 다음에야 모를까?
      프랑스혁명과 혁명론, 좌파, 신좌파, 진보들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십시오.
      언어의 중요함, 말의 신중함, 표현의 진중함... 진보좌파는 언어가 실천적 힘을 가지 못할 때 망합니다.
      세상을 바꾸려면 과거를 끊임없이 반성적으로 돌아보며 미래의 추진력을 얻어야 합니다.
      현재의 의지가 과거를 미래에 투사할 정도가 되면 그때는 원하는 대로 말해도 됩니다.
      그럴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면 됩니다.
      하지만 그 이하일 때는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정체돼야 합니다.
      저변을 넓혀야 집권이라도 할 것 아닙니까?
      진보정당들을 살리기 위해 수십 편, 수백 편의 글을 써오고 있는데 정청래나 이정희처럼 말하고 TV토론해서 그 모든 노력들이 한 번에 망가지니까요.

  7. 耽讀 2015.02.11 12:19 신고

    조금 과했지요. 정청래 의원은 무소속이거나, 당원이라면 문재인을 향한 날선 비판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는 새정치 최고위원입니다. 그것도 지난 정당대회 때 2번째 많은 득표율을 얻었습니다. 참배에 동참하지 않는 것 까지는 소신입니다. 하지만 비판을 박정희와 히틀러 같은 반열에 놓고 비판한 것은 조중동과 종편만 아니라 이른바 진보언론도 정청래 발언을 인용하며 문재인 체제 분열을 노리는 빌미를 주었습니다. 새누리와 조중동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문재인체제 이간질을 시도할 것입니다. 거기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 늙은도령 2015.02.11 18:30 신고

      정청래도 최고의원답게 말해야 합니다.
      진보좌파의 언어는 실천적 힘이 없을 때 엄청난 반발에 직면합니다.
      정청래는 그런 것을 너무 몰라요.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 그것이 강준만의 어설픈 책, <싸가지 없는 진보>를 맞는 분석으로 만듭니다.
      정청래는 언어의 사용에 대해 고민하고 자성해야 합니다.

  8. 도서관 2015.02.11 13:29

    제발 지켜봅시다
    지금당장 문재인의원 박통한테 복수을 해야 하는것아니지요
    제발 지켜봅시다

  9. 덕산 2015.02.11 14:42

    저도 정청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행적들을 보면 놀랄 일들도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1 야당 최고위원이라면 당 대표분을 잘 모셔야하는 책임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행동하는 건 자제해야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2.11 18:31 신고

      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선동하면 안 됩니다.
      말이란 양날의 칼이어서 정말 위험합니다.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하물며 최고위원이 됐으면 더욱 그래야 합니다.

  10. enigma1007 2015.02.11 19:23 신고

    저는 개인적으로 정청래의원이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문재인의원도 잘했다고 생각하구요. 두 사람의 행동을 믹스시켜서 하나의 행동이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바에야... 정청래 의원이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자세로 계속 가선 안되고 .. 바뀌겠지요.. ㅎㅎㅎ

    • 늙은도령 2015.02.11 19:58 신고

      네, 지금은 큰 소리 한 번 쳐야죠.
      그 동안의 설움을 한 방에 날려버리기 위해서라도.
      차차 좋아지겠죠.
      때를 아는 한 방, 기대합니다.

  11. 2015.02.11 21:14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5.02.11 22:19 신고

      아닙니다.
      죄송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님은 일본에서 충분히 잘 하고 계시잖아요.
      저는 님의 블로그에서 휴식을 취하고 힘을 얻곤 합니다.
      그렇게 제게 힘을 주시니 저에게는 힐링입니다.

  12. 하늘이 2015.02.11 23:21

    정청래 의원은 좀더 진중하고 더 깊이 생각해서 말을 했으면 합니다.
    내가 하고싶은 말을 무조건 터트리는 식으로 하는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최고 위원이 되셨으니 더 조심하고 한마디라도 더 깊이 생각해서 일침을 가했으면 합니다.
    이런식으로 반응하면 오히려 무시 당하고 나중에는 조롱거리가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속이 시원하다고 하겠지만 정제되지않은 언어는 결국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수도 있음을~
    이제 어른이 되시길 바랍니다.

    • 늙은도령 2015.02.11 23:30 신고

      네, 말이란 부메랑이 돼 돌아올 때가 많습니다.
      정제되지 않는 말은 더욱 그러합니다.
      최고의원이 됐으면 그만큼 사용하는 언어도 업그레이드 돼야 합니다.
      서민의 언어라고 모두 다 강경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전투가 곧 정치라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입니다.
      자신의 정치생명만 생각하면 최고의원이 되지 말았어야 합니다.
      좀 신중해졌으면 합니다.

  13. 저런 2015.02.12 13:28

    상대방의 생각 신념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니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는순간 다툼이 시작되고 더욱더 갈등의 고리가 깊어지겠지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정청래의원이 자신을 깍아내리고 문재인 의원을 띄워주기위한 일종의 전략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ㅎ.

    • 늙은도령 2015.02.12 16:54 신고

      그랬다면 최상이고요.
      정청래가 큰 역할을 할 때가 올 것이라 믿습니다.
      그는 일관된 것에 관해서는 분명한 노선을 보여줬으니까요.
      다만 조금만 정제됐으면 합니다.
      이제는 최고의원까지 올랐으니....

  14. 산머시매 2015.02.16 01:28

    도령님,참 오랜만에 잠못 이루다가 스리슬쩍 들렀습니다.
    님의 글 어디하나 흠 잡기가 어렵구 명쾌 하십니다. 그런데ㅡ,

    정청래 의원의 정확한 표현은 상기하신 내용과 다르답니다. 즉, " 히틀러,야스꾸니와 비교...운운" 발언은, 정청래에게 강원도 사시는 민주당 고문,김철*께서 직접 전화 하시면서, "문재인 대표의 박통 우남 묘소 참배"를 히틀러,야스꾸니와 빗대면서 강하게 비판 하신 '워딩'내용이고.....그런 항의 전화 내용을 '예시'한 것인데 ㅡ, 각 언론들이 거두 절미하고 그 부분만 정청래의 직언직설인 것처럼'자극적으로' 반복 선동하는 중이랍니다.

    고질적인 사실 왜곡이고 종편을 넘나드는 양아치 논객들의 '마녀사냥식' 개무시 이지만, 일정 부분은... 정제되지 못한 정청래식 발언도 비판 받아야 겠지요. 하지만, 작금의 그에 대한 일방적 매도는 좀 지나치다 하겠습니다. 물론 그가 좀 더 강하게 발언해도 '괜챦을'때가 언젠가 올 거라는 말씀에도 동의 하지만요...... 지나치게 순진하게 엄숙한 건조체로 대응하는 야당의 '점쟎은' 행동양태도 상당히 지탄받아야 할 것이라 생각 합니다. 걍, 전술전략과 정치적 '개성'정도로 넘어가도 괜챦지 싶군요...ㅠㅠ...
    늘 건강 하시옵구 건필 하시옵길...^^...

    • 늙은도령 2015.02.16 01:57 신고

      그런 이면이 있었네요.
      저도 방송 화면만 보고 그것까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됐네요.
      정확한 내용을 가지고 더욱 크게 돌려줄 수 있겠네요.
      종편 중 TV조선과 채널A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폐방시켜야 하는데 그러려면 좀 더 많은 증거들이 쌓여야 합니다.
      저도 그들의 왜곡에 속았다면 더더욱 크게 돌려줘야지요.
      정청래 의원에게 미안함을 표해야 하겠네요.
      그가 억울함을 안으로 삼키고 더 큰 걸음을 걷기를 희망해 봅니다.
      정청래 같은 투사가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보궐선거에서 이길 때까지는 전략적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새누리당을 몰아붙일 수 있고, 그런 상황에서만이 진보정당이 살아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되살아나고,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려면 진보정당들이 살아나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문재인과 참여정부 인사들은 믿지만 새정연의 구성원을 믿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너무 보수적인 인사들이 많아요.
      문재인 대표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이유라고 봅니다.
      안철수, 김한길, 조경태 같은 자들이 보수 정당으로 빠져나갈 때까지 정말 잘 싸워야 합니다.
      지금은 정말 중요한 시기입니다.
      정청래의 파이터 기질이 정말로 필요한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도 곧.
      그때까지 최대한 전투력을 충전해두기를!

  15. 유종옥 2015.03.22 06:57

    박정희는 사기꾼이다. 우선 군인들을 사기쳐 쿠테타를 일으켰음에도 혁명이라 우리 모두를 세뇌시켰다.
    이런 원칙과 정의를 무시하고 정당한 방법이 아닌 무력으로 장도영을 사기치며 외국에게 칼을 향하여야 할
    칼을 자기 국민에게 칼로써 위협하여 정권을 찬탈한 쿠테타 군인이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노릇은
    혁명인 것처럼 포장하여 한국민을 바보로 만든 장본인이다. 게다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으로 친구의 총에 맞아 죽어 천벌을 받은 군인으로 역사를 망친 장본인이다.
    어렴풋이 자신의 잘못을 느꼈는지 자신에게 침을 뱉으라 했으니 그걸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살할 정도의
    사람도 못되어 히틀러보다 더 으시시한 사기꾼이다. 그의 사기를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선진 국민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박정희의 사기성과 4.19 민주 혁명을 도둑질한 그의
    잘못을 깨닫고 4.19 민주 혁명을 이룬 선조의 빼앗긴 역사를 억울해하고 우리 스스로 12.19 부정 선거에
    대한 혁명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비로서 4.19 선조가 이룬 선진 국민의 면모를 갖춘 자격을 되찾을 수 있다

  16. 유종옥 2015.03.22 07:25

    독일 국민과 우리 국민의 차이는 그들은 자신들 침묵으로 히틀러에 저항하지 않고
    히틀러에게 정권을 일임한 자신들의 잘못을 받아들인 점이다. 이것이 독일인과 일본인과의
    차이점도 된다.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은 선진 국민이
    아니다. 독일도 히틀러에게 암묵적으로 정권을 인정한 점에서 선진국이 아니다.
    그러면 선진 국민의 자질은 무엇일까? 그것을 불의를 꺠닫고 조직적으로 항거 할 줄 아는 인간조직을 말한다.
    그럼 어는 나라가 선진국일까? 영국의 명예혁명 블란서의 시민 혁명 미국의 영국과의 독립 전쟁을 이뤄내어
    정의를 지켜낸 국민이야 말로 선진 국민이다. 그럼 우리는 어떨까? 우리의 4.19 민주 혁명 주역들의 선조가
    선진 국민이다 이를 쿠테타로 도둑질하고 그런 정권에 항거하지 않은 나는 선진 국민의 자격이 못된다.
    부끄럽다. 4.19 선조에게. 나는 그러나 4.19 민주 혁명의 선진 선조의 피를 물려 받아 박정희 와 박근헤에
    항거하지 않는 내 자신을 증오한다. 지금도 괴롭다 .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

    • 늙은도령 2015.03.22 16:51 신고

      4.19혁명 정신과 6.10항쟁을 했던 우리였는데 지금은 너무 길들여졌습니다.
      신자유주의체제는 인간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에 그 안에 갇히면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게다가 방송과 신문들까지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니 답이 없습니다.
      스스로 깨어 있기란 쉽지 않은 일이어서 그런 분들이 늘어날 때만 세상의 변화도 기대할 수 있고 진실을 밝힐 수 있지요.
      그것을 위해 이렇게 글을 쓰고 저항하는 것입니다.
      힘 내십시오.



이렇게 근대이성은 뉴턴역학에 의해 지독히도 단순화된 우주의 법칙을 지구의 법칙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거대한 체제의 견고함을 구축할 수 있었다. 동시에 문명의 지속성을 확신시키고, 시간의 발견과 궤를 같이하는 역사를 등장시킬 수 있었다. 근대이성이 탄생시킨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평등한 노동에 대한 소유와 자유(방임)의 상대적 우위, 끝없는 팽창의 대항개념으로 발생한 민족성과 영원한 투쟁을 유발하는 계급의식의 출현, 신을 끌어들인 로크의 소유개념(구획 짓기)과 스미스의 교환시장의 발견 등이 근대이성이 탄생시킨 중요한 목록들이다.



근대이성의 폭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유개념과 교환시장의 정립으로 독점적인 부의 축적과 과시적 소비를 통한 ‘구별 짓기’의 저급한 욕망, 일체의 것들을 해체한 포스트모더니즘, 모든 종교와 정치가 지닌 영향력을 다 합친 것과 거대해진 매스미디어의 발전, 이에 편승해 거의 모든 영역을 상업화하는데 성공한 소비지상주의의 확립까지 현대성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 근대이성은 인류의 문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베이컨과 데카르트



베이컨과 데카르트에 의해 그 모양을 드러낸 근대이성은 폭력적인 현대성으로 옷을 갈아입었을 뿐, 탄생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 21세기의 14년을 관통하며 인류 문명의 불확실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다. 플라톤과 헤겔, 고전물리학과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마르크스의 격문은 분업과 거대관료제의 등장으로 사유하는 인간에서 착취 받는 동물(고도의 숙련도 필요 없는 단순작업)로 전락한 노동을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했지만, 이는 산업사회의 발전단계에서 불확실성이 최대화되는 단계로 접어드는 시작에 불과했다. 



노동과 적대적 공생을 유지했던 자본은 과학의 발전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노동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끊고 국경을 넘나들며 홀로 독주할 수 있게 됐지만, 노동은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노동의 경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더욱 열악한 조건으로 빠져들었다. 자본은 정규직 위주의 노동을 분해해서 비정규직과 임시직의 노동으로 격하시킴과 동시에 전업주부라는 것을 상류층의 전유물로 만들었다. 



게다가 생산의 주체였던 노동이라는 것이,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자본의 일방적 우위로 하여 퇴근 이후에도 계속되는 무한대의 재생산을 강요받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와 가족간의 경계선이 무너졌고, 생산의 주체로서의 노동의 형태도 물질적인 것에서 비물질적인 것까지 확대됐다. 노동자에게는 사적인 공간이 사라져버린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가족 구성원이 자본의 이익을 위해 간접적인 노동의 역할까지 담당하게 됐다. 



결국 모든 노동의 가치가 평등하다는 ‘노동가치설’은 노동자 뿐만 아니라, 노동에서 배제된 사람들까지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만드는데 이용되었다. 제대로 된 노동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잉여노동자들이 국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널려 있으니, 노동가치설은 무노동 무임금으로 대체되기에 이르렀다. 최근에 들어서는 유노동 무임금의 처지까지 내몰리는 가족 구성원들도 급속도로 늘어나는 추세며, 이는 정규직이라 해서 다를 것이 없다.  



자본주의의 태생적 모순과 한계 때문에, 자본주의적 노동생산성이 최후에 이르는 지점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 ‘자유의 왕국’이 이루어진다고 예언한 마르크스의 과학적 추상화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무지와 정치와 문화, 매스미디어의 발전으로 전 지구적 지배 세력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낭만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으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전복을 꿈꾸는 노동자의 연대는 개별 사업장 내에서도 사라져 버린지 오래됐다.  






푸코가 촘스키와의 대화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폭력적 혁명을 통해 집권을 하면, 오랜 기간 동안 탐욕의 질주를 거듭한 자본가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폭력의 악순환이 한 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걱정도 한낱 기우에 불과한 것으로 입증됐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과 《다중》, 《전복적 스피노자》 등을 통해, 네트워크처럼 집합했다 유령처럼 사라지는 다중ㅡ각자의 특이성을 인정하면서도 공통의 목적을 위해 연대하는ㅡ의 등장을 예견했지만 이 또한 마르크스에서 스피노자로 갈아탄 것 이상의 결과들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세계 노동자들의 연합은 부정적 세계화에 대한 반대시위로 되살아나는 듯했으나, 2001년 이후로는 분노한 사람들의 행진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전 세계적으로 점령운동의 붐을 일으켰던 2008년의 금융 대붕괴의 결말도 슈퍼리치의 배만 불려준 채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더 이상 게릴라전은 유효하지 않은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희망의 이름으로 절망만 쌓여가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마르크스의 위대한 분투는 한여름 밤의 꿈이었을 뿐, 영원히 도래할 수 없는 환상의 나라로 판명됐다. 그의 예언대로 자본주의적 진화의 본질적 모순 때문에 내부로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했지만, 그 속도가 너무 느렸고 분열된 틈새를 용접하고 부식된 부품을 가라치우며 보수하는 속도가 더욱 빨라 그의 예언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압축된, 또는 유동하는 액체 상태의 현대란 어디로 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 극도의 혼란과 공포만 양산하고 있다. 



근대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헤친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스미스와 마르크스가 정반대에 위치한 경제학자가 아닌, 진행경로가 다를 뿐 목적지는 동일한 고전경제학자라는 사실을 밝혀냈고,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노동이 자본의 암묵적 동조자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학문적 업적에 그쳤을 뿐이었다.이것 때문에 언제나 중도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었고, ‘제3의 길’이라는 엉망진창의 이데올로기도 등장할 수 있었다. 



개인과 단위별 노동생산성이 최고에 이르면,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접어든다는 생각이 한 동안 만연했고, 이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대체로 사실인 것은 지금도 변함없다. 스미스(와 리카도)의 최종 목적지는 시장에 들어오는 모든 제품과 서비스의 비교우위가 사라지기 때문에 완전시장을 통해 각각의 공급은 최적의 수여에 할당되는 평등사회로 접어든다는 것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르크스의 ‘자유의 왕국’도 같은 지점에 이르기 때문에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무계급사회’가 도래한다고 주장했으니, 이를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놓고 보면, 둘의 차이란 최종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자기 조절능력이 있는 자유 시장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모든 노동을 동등하게 평가하는 노동가치설을 폭력적으로 실현시켜 자본주의의 종말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느냐의 차이밖에 없다. 스미스(와 리카도와 맬서스)의 경우에는 노동착취와 잉여생산을 피할 수 없는 이기적인 인간의 합리적인 행위가 불러오는 부수적인 피해로 봤을 뿐이고, 노동의 가치를 시간의 절대화로 환원한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그런 부수적인 피해를 본질적인 절대악으로 봤기 때문에 혁명이 필요하다는 차이만 존재할 뿐이었다.



결국 어느 주장을 따르더라도 현대성에 자리 잡고 있는 근대이성의 잔재들은 영원한 진보의 과정에서 사라질 수 없는 침전물임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근대이성이 완벽하지도 않았고, 합리적이기보다는 비합리적이었다. 인간의 행동을 강제하는 이성의 정언명령은, 그것이 동시에 따라야만 하는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자본과 정치권력에 의해 얼마든지 왜곡되고 탈선될 수 있는 것이어서 칸트적 개념과 사유의 차원에서만 찬란하게 빛날 뿐이다.  







이에 따라 세상은 현대성이 내포한 폭력에 의해 온갖 피해와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시장경제에 포함되는 순간부터 반이성적인 것들의 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쩌면 인류 문명의 대부분을 무효로 돌릴 만큼! 이제는 평범해진 바우만의 성찰처럼,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질됐다. 무한한 진보와 결과의 낙관론이 추동해낸 경제성장이란 불평등을 양산하는 이데올로기였으며, 그의 부작용으로 생긴 참혹한 결과들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며 온갖 종말적 문제들을 끝없이 축적하고 있다.



진보의 결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정치의 타락이나 몰락, 정부의 친시장적 경향이나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지목한다. 또한 자본의 노예로서 경제적 안락함에 함몰된 시민정신의 타락이나, 소비지상주의에 빠진 젊은이들의 물신화된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심지어 국가와 사회에 만연한 범죄와 비리와 부패에 분노하며 차라리 독재시절이 낫다고 주장하는 정신 나간 자들도 세계 곳곳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부자들은 늘어나는 재산을 감당하지 못해 온갖 첨단장비로 무장한 채 공권력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 자신의 성을 쌓았고, 별로 가진 것도 없는 사람들은 사회에 만연된 폭력과 공포(확인해 보면 자본과 언론이 과장한 것이지만)에 질려 앞선 세대들이 힘겹게 얻어낸 소중한 자유를 포기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초인 사회경제적 평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고리타분하고 폭력적인 좌파라며 가난한 자들까지 성을 내며 집단 린치를 가한다. 



원본에 대한 탐독도 없고, 지적 성찰에 대한 부단한 노력도 없이, 검색과 인용으로 이루어진 부분적 진리를 가지고 보편적 허위를 진리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지식인들의 타락은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접게 만든다. 이들은 멘토와 힐링과 인문학 열풍에 편승해 혼란을 가중시키며 ‘탐욕의 삼위일체’를 강화하는 첨병역할로 빠져들고 있다. 또한 세계적 특권그룹과 그들에 기생해 있는 지역의 지배엘리트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에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실정이다. 



이런 퇴행의 현상들은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OECD 회원국들에서 공히 일어나고 있다. 영원한 진보에 대한 믿음과 맹신이 불러온 이런 참혹한 결과는 낙수효과라는 지상 최대의 거짓말을 불변의 진리로 끌어올렸고, 특히 성장과 개발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최근에 들어 성장의 진정한 동력이라고 회자되고 있는 분수효과ㅡ중하위층의 지갑이 든든해야 상위층의 지갑이 더욱 채워지며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는 경제이론ㅡ마저 거의 작동한 적이 없었다. 



만일 현대판 분서갱유가 인류의 미래를 위해 허락될 수 있다면, 대부분의 경제학과 실험실 위주의 결과를 현실에 적용하느라 지배의 도구로 변질되기 일쑤인 심리학과, 욕망의 무분별한 추구와 생각하는 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형편없는 자기계발서들은 모두 태워버려야 한다. 이제 현대성이 값을 매기는 지식은 땀을 흘려 획득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는 부단한 사고를 통해 성찰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지금-당장 소비할 수 없는 것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될 수 없으므로 아낌없이 버려야 하는 것들이 됐다.  



이런 즉각적인 만족만을 최고의 가치로 탄생시킨 폭력적인 현대성의 유일한 지배자에서 이제는 수많은 피해자의 하나로 전락한 예외국가, 미국의 좌파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유럽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는 《미국 만들기》의 저자 리처드 로티가 다음과 같이 호소할 지경에 이르렀다. 비록 미국의 지식인 사이에서 좀처럼 나오기 힘든 그의 호소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고 들었어도 행동하지 않아 공허한 메아리로 사라져가고 있지만.



우리는 반드시 우리 아이들이 정말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게 키워야만 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우리가 더럽힌 화장실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사람들보다 무려 열 배나 많은 임금을 받고 있으며, 정작 우리가 두드려대는 그 키보드를 만드는 제3세계 사람들보다 무려 백배나 많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 아이들이 바로 먼저 산업화된 나라들이 아직 산업화되지 않은 나라의 사람들보다 백배나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걱정하게끔 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반드시 일찍부터 자신들이 누리는 그 행운과 다른 아이들이 누리는 행운 사이에는 많은 불평등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 배우게 해야만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바로 그러한 불평등들이 신의 의지도 아니고 경제적인 효율성을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하는 대가가 아니라 오히려 분명 피할 수 있는 비극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가능한 빨리 다음과 같은 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게끔 해야만 합니다. 그 어떤 누구라도 한편에서 다른 사람들이 과식하는 동안 굶주리게 되는 일은 결코 없게 하기 위해서는 과연 이 세계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1. 유머조아 2014.08.21 12:28 신고

    깊은 철학이 배인 글 잘 읽고 갑니다~~

  2. 참교육 2014.08.21 12:58 신고

    복사해 뒀다가 두고두고 읽어야겠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 태봉 2014.08.22 09:07

    좋은 말씀 백배 공감하고 느끼고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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